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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연계프로그램 〈어제와 다른 날들, 어제와 다른 나를〉

2025년 7월 30일 228

[초점]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연계프로그램 〈어제와 다른 날들, 어제와 다른 나를〉 식민지역사박물관 7월 12일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과 연계하여 〈어제와 다른 날들, 어제와 다른 나를〉이라는 주제로 특별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차명숙 5·18민주화운동 거리 방송 참여자와 이현주 박종철센터 센터장을 초청하여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사진으로 보는 그날의 이야기, 참가자들의 질의응답과 소감을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차명숙 선생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확성기를 들고 시위에 참여했던 당시의 상황과, 계엄령 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출소한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현장에 있었던 여성이고, 형을 살다 나온 여성이며, 고문도 많이 받고 내 인생이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고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라는 차 선생의 각오와 다짐을 청중들이 공감을 갖고 경청해주었다. 이현주 박종철센터장은 박종철 열사의 1년 후배로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추억과 박종철 열사가 대공분실에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또한 “기억을 전달하는 내가 대학생 ‘박종철’과 6‧10민주항쟁을 복원하고 지켜나가야겠다”라며 자신의 사명을 밝혔다. 6‧10 민주항쟁 당시 거리로 나왔던 시민들의 용기가 역사로 기록되었고, 민주주의의 위기마다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다며 기록하는 일을 부탁했다. 두 번째 연계프로그램 〈우리의 연대는 넓고 진하다〉는 7월 26일 진행되며, 식민지역사박물관 유튜브에서도 중계될 예정이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 김혜영 학예부팀장

김창숙, 오세창의 휘호와 김구 사진, 그리고 신익희의 서신

2025년 7월 30일 371

[소장자료 톺아보기 72] 김창숙, 오세창의 휘호와 김구 사진, 그리고 신익희의 서신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모두 심정섭 지도위원이 기증해준 소장품이다. 위 자료와 관련된 네 분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은 혁신유림으로 일제와 이승만 독재정권에 강력히 항거한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호는 심산(心山), 벽옹(躄翁)이며 자는 문좌(文佐)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 130여 명을 규합해 이들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한중호조회 결성에 힘썼고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천고(天鼓)』,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했다. 1927년 상해 조계에서 일본 영사관원에 체포되어 압송된 후 14년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두 다리가 마비 되어 출옥했다. 광복 후 일제강점기 일제에 협력한 유림계를 개혁하는데 진력하여 1946년 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했다.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김구와 함께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저항한 투쟁을 한평생 지속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했고, 1956년 이승만 정권이 효창공원의 삼의사묘역 이전을 추진하자 이를 적극 막았으며 1959년 보안법 반대운동을 펼치며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사랑 2025년 7월호

2025년 7월 29일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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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기념 축구대회’… 운동장에 깃든 독립정신

2025년 7월 11일 360

[후원회원마당] ‘독립전쟁 기념 축구대회’… 운동장에 깃든 독립정신 이정윤 백기환 선생 증손녀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지켜낸 시민들의 자축의 시간 2025년 6월 22일, 운동장 한복판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날은 단순한 경기의 날이 아니었다. 114년 전의 바로 이날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고, 105년 전 봉오동 전투에서 첫 승전고가 울렸다. 그리고 오늘, 후손들은 그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축구공을 들었다. 기념식도, 학술 세미나도 아닌 ‘독립전쟁 기념 축구대회’가 열린 것이다. 축구와 독립운동이 무슨 상관이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도 ‘메르데카(Merdeka) 컵’이라는 유서 깊은 축구대회가 있다. ‘메르데카’는 말레이어로 ‘독립’을 뜻한다. 독립은 군복 입은 사람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 경기장에서처럼 독립정신을 기억하려는 시민의 몸짓 또한 독립운동이다. 한동건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윤석열 정권은 육사 내 독립전쟁 영웅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하려 했지만, 시민들이 지켜냈습니다. 이번 대회는 그 승리의 축제입니다.”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이회영. 그분들은 총을 들었고, 우리는 오늘 공을 들었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시민은 다른 방식으로 독립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졌던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하며 봉오동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6월, 바로 그 상징성을 담아 6월을 ‘경기의 달’로 택했다. 독립정신의 상징적 장소들, 그러나 연이어 거절되다 처음 독립전쟁 기념 축구 경기를 열고자 했던 곳은 국회 운동장이었다. 2024년 12월, 계엄군 헬기가 착륙했던 바로 그 자리, 그 공간에서 “독립정신으로 내란세력과 역사부정세력을 이겨내자”고

김원봉과 함께 대구 의열투쟁답사를 다녀와서

2025년 7월 7일 275

[후원회원마당] 김원봉과 함께 대구 의열투쟁답사를 다녀와서 박영희 마을산책 2025년 6월 6일~7일 김원봉과 함께가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가 후원한 답사단은 전통적인 보수의 심장인 대구로 향했다. 12·3 계엄령과 내란죄로 탄핵당한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의 원조인 대구로… 처음 대구에 내려갈 때는 대구에 어떤 독립운동가와 의열활동을 하신 분들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답사를 통해 대구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사랑하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새삼 매우 놀라웠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 진 빚을 국민들이 대신 갚기 위해 벌인 범국민적인 모금운동이다. 이 운동은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 내어 큰 성황을 이루었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끝났다. 국채보상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의 국권회복에 있었다. 2·28 민주운동은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정권이 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선거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리자,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전개한 시위 사건입니다. 4월혁명 기간에 발생한 최초의 민주화운동을 소개한 2·28 민주운동기념관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무여서 보지 못했으나 민주운동의 시작인 곳에서 김영범 교수님의 설명을 통해 그 당시 대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대구의 자랑 이육사 시인의 집터와 기념관을 돌아보고 그가 근무했다고 하는 중외일보 지국을 찾아갔다. 아직도 여전히 건물이 남아있어 얼마나 다행이던지 ….. 사라져 버려 흔적도 없는 독립운동 역사의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2025년 7월 7일 215

[후원회원마당]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연구소에서의 4개월을 마무리하며 김윤아 제천간디학교 고등 3학년 안녕하세요!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인턴으로 활동한 제천간디학교 고등학교 3학년 김윤아입니다. 활동기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연구소에서 보낸 넉 달을 돌아보니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나 싶어 시원섭섭합니다. 저는 충북 제천시 덕산면 산골에 있는 중고등 통합 대안학교인 제천간디학교에 재학 중입니다. ‘간디학교’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일반학교와는 다소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입시를 위한 교육보다는 인문학과 사회체험, 공동체 교육을 중요히 여기며, 중·고등을 모두 합쳐도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학교입니다. ‘더불어 행복한 사람’을 교육목표로 삼아 선후배와 동기, 교사와 수평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졸업을 앞둔 고등 3학년이 되면 약 3개월 동안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교육과정을 ‘사회체험학습’이라 하는데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무급 인턴십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꿈꾸는 삶과 유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어른들을 만나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실천하는 단체에서 일하며 ‘나’의 세계를 넓힙니다. 저는 ‘왜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을까?’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해 국가폭력과 과거사 청산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걸 계기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를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고, 동아리와 소모임을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공부해왔습니다. 활동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레 진로도 비슷한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사회체험학습을 통해 이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나보고

전북대 후면으로 쫓겨난 ‘덕진공원지비(덕진운동장건설비)’의 건립 내력

2025년 7월 2일 344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7] 전북대 후면으로 쫓겨난 ‘덕진공원지비(덕진운동장건설비)’의 건립 내력 전주 덕진공원의 최초 구상은 이른바 ‘일본황태자 결혼기념사업’이 발단 이순우 특임연구원 『자유신문』 1951년 12월 25일자에는 「3도(道)에 종합대학(綜合大學), 기존 대학을 개편설치, 실업교육(實業敎育)에 치중」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문교부에서는 대학 설치에 지역적 균형을 얻기 위하여 명년 4월 새학기부터 경북(慶北), 전남(全南), 전북(全北)의 3도에 국립종합대학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번 국회에 제출된 신년도 예산안에 3대학교의 운영경상비로 경북 9억 원, 전남 8억 8천만 원, 전북 2억 4천만 원의 신규예산을 요구하였다. 이 세 국립종합대학은 대구와 광주 또는 전주에 기설된 각 도립 단과대학, 예를 들면 각 의과대학, 사범대학, 농과대학 등을 토대로 하여 사립대학 등을 종합하여 종합대학교로 개편 설치하려는 것으로 경북의 과수(果樹), 전남의 방적(紡績), 전북의 제지공예(製紙工藝) 등 지방특색을 살려 실업교육에 치중케 할 계획이라 한다. 각 종합대학은 다음과 같다. ▲ 경북종합대학교 =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정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 ▲ 전남종합대학교 = 문리과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 전북종합대학교 =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이 가운데 전북대학교는 이리농과대학(공립), 전주명륜대학(사립), 군산대학관(사립)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국립종합대학교(1951년 10월 6일 설립인가)가 만들어졌으며, 초기에는 대학본부와 소속대학 등이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으나 1953년 10월에 처음으로 전주 덕진못에 인접한 국유지 21,185평을 학교 땅으로 편입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 이후 1962년 9월에 건설부 소관 잡종지 7,733평을

식민주의 청산,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2025년 7월 2일 183

[돌려보기] 식민주의 청산,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지난 3년 동안 나라 전체를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윤석열 정권은 결국 스스로 일으킨 내란으로 파국을 맞았다.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특히 새 정부가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사회대개혁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역사정의를 바로 잡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역사쿠데타’ , ‘대일 굴욕외교’ , ‘역사 퇴행’ 윤석열 정권이 거꾸로 되돌린 역사의 시곗바늘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올 지경이다. 윤석열 정권은 주요 역사기관장의 자리에 뉴라이트 인사를 잇달아 임명하여 역사부정 세력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육사의 홍범도 장군 동상 철거 시도를 비롯하여 독립운동 폄훼와 독립운동가 모욕을 일삼았다. 이승만, 박정희 등 독재자와 친일파를 우상화하는 기념사업에 정권이 앞장섰으며, 규정을 위반한 뉴라이트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야 할 진실화해위원회의 뉴라이트 세력들은 오히려 진실규명을 방해하고 피해자들을 모욕하기까지 했다. 또한, 윤석열 정권은 시종일관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로 많은 시민을 분노하게 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윤석열 정권의 역사퇴행을 『윤석열 정권 3년, 역사쿠데타 기록보고서』로 정리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윤석열 정권은 2018년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에 대한 해결책이라며 ‘제3자 변제안’을 내놓으며 대일 굴욕외교로 파국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역사적인 승소

『윤석열 정권 3년, 역사쿠데타 기록보고서』 발간

2025년 7월 1일 241

[초점] 『윤석열 정권 3년, 역사쿠데타 기록보고서』 발간 연구소는 윤석열 정권 3년여 동안 극에 달했던 역사퇴행을 기록해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윤석열 정권 3년, 역사쿠데타 기록보고서』(이하 『역사쿠데타 기록보고서』)를 발간했다. 『역사쿠데타 기록보고서』에서는 윤석열 정권의 굴욕적인 대일외교가 한미일 ‘군사동맹’의 구체적 실행 속에서 ‘전쟁가능국’으로 발돋움하는 일본 정부 용인으로 나아갔으며, 이 과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과 식민지기 피해사실을 묵살하는 ‘제3자 변제안’이라는 굴욕 해법으로 도출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국내에서는 3년 내내 ‘이념전쟁’과 ‘역사전쟁’에 몰두해 독립운동가 모욕, 독재자·친일파 기념사업들이 버젓이 진행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역사부정의 뿌리가 이명박 정권부터 발흥했던 ‘뉴라이트’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박근혜 정권에서는 박정희를 비롯한 독재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국정교과서’의 망령을 불러냈고, 문재인 정권에서는 숨고르기를 한 후 윤석열 정권에 이르러 각종 역사기관장과 주요 국가기관 수장에 기용되었다. 현재 윤석열의 탄핵에도 불구하고 사퇴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 남은 임기를 다 채울 가능성이 높다. 이제 새 정부에서 내란청산은 물론 역사부정 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한 다방면의 대안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그러자면 윤석열 3년의 역사퇴행에 대한 치밀한 복기가 필요하다. 『역사쿠데타 기록보고서』 〈발간사〉에서 임헌영 소장이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 즉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뒷날에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면서 “이 책이 윤 정권의 친일 매국 외교와 역사변조를 기록으로 남겨 두고두고 기억하게 하는 현대판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1987)

2025년 6월 30일 331

[소장자료 톺아보기 71]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1987)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심정섭 연구소 지도위원의 기증자료의 하나로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 8점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이다. 최근 무사히 끝난 6·3 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소개할 가치가 있는, 시의적절한 기증자료라 생각된다. 1971년은 대선과 총선이 한 달 남짓 간격으로 치러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다. 1969년 3선개헌 이후 장기 집권을 꾀하는 박정희 정권·민주공화당과 이를 견제하려는 신민당이 대선과 총선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 94만 표 차이로 근소하게 승리했지만 야당과 시민사회의 민주화 열기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총선에서도 그 여세를 몰아 신민당이 89명(지역구 65명, 전국구 24명)을 당선시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113명(지역구 86명, 전국구 27명)에 비해 24명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좁혔다. 또한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뚜렷해 도시와 농촌 간의 정치 성향 괴리가 극명했으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야당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면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열었고 민주화 세력의 역량이 한층 강화되어 갔다. 전북 제5지역 선거구(진안군)와 전남 제7지역 선거구(담양·장성군)에서도 여촌야도 현상이 반영되어 두 선거구 모두 민주공화당 후보인 전휴상, 고재필이 당선되었다. 두 선거구의 득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농촌지역이었던 진안과 담양·장성에서 여당이 각각 60%, 53%로 과반을 넘겼다. 하지만 담양·장성 선거구에서 나타나듯이 전라도에서 양당 대결로 가면 53% 대 47%로 차이가 좁혀짐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담양·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