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긴급 전시 행동을 하는 이유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전’ 기증자 인터뷰④] 긴급 전시 행동을 하는 이유 박이랑 전략홍보팀 오늘 전할 내용은 광장의 이야기를 보러 박물관을 방문해 준 관람객들의 목소리다. 기증자뿐 아니라 매일 수많은 시민들이 전시를 보러 온다. 그들이 남긴 눈물과 발자국들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자 한 자 적어보려 한다. 균열에서 피어난 희망 전시의 마지막에는 ‘당신이 피운 민주주의 꽃으로 이곳을 가득 채워주세요’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 아래에는 동대구역 광장에 전시된 피켓 내용이 적혀 있다. 콘크리트에는 이미 금이 갔고 우리는 그 균열을 비집고 돋아난 싹이다. 굳어진 콘크리트는 스스로를 메울 수 없지만 싹은 자라 나무가 되고 큰 숲이 되어 마침내 차가운 회색 땅을 깨뜨릴 것이다. 균열이 간 콘크리트 위로 관람객들은 직접 제작한 깃발 스티커를 붙이기도 하고, 깃발의 문구를 적기도 했다.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아주 견고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들에 금이 가고, 그 사이에서 희망이 솟아났다. 관람객들은 서로가 남긴 희망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했다. 대구에서 오신 분은 입구에서부 터 눈가가 촉촉한 상태로 입장했다. 그는 ‘TK(대구·경북 지역을 일컫는 영어 약자)의 딸’이 제작한 ‘우리는 보수의 텃밭이 아니다’ 피켓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었고, 누군가와 눈 맞추고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 때 그는 대구에서 개최된 윤석열 탄핵
<쿠바로 간 화성인> 취재 후기: 산티아고의 바다에서 대한민국의 민낯을 마주하다
[기고] <쿠바로 간 화성인> 취재 후기: 산티아고의 바다에서 대한민국의 민낯을 마주하다 임상범 SBS 기자 광복 8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쿠바로 간 화성인>을 제작하며 접한 독립유공자 안순필 선생 가족의 역사는 저에게 국가의 존재 이유와 그 사회적 책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쿠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거대한 청새치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이야기,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가 바로 그곳, 쿠바에서 쓰였다는 사실이 제게는 결코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고전의 무대에서, 또 다른 산티아고를 만났습니다. 독립유공자 안순필 선생의 증손자인 알베르토였습니다. 그의 삶은 흡사 거대한 청새치와 홀로 싸우는 노인의 고뇌와 같았으며, 그의 일상은 백년을 이어온 망국의 설움이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던지는 끝나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안순필 가족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독립의 진정한 의미를 외면해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우리는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0년 전, 그토록 많은 조선인이 왜 낯선 쿠바 땅까지 흘러가야 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명합니다.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국가적 폭력과 그로 인한 민중의 극한적 빈곤이 바로 그들을 등 떠밀었습니다. 안순필 선생의 가족도 멕시코를 거쳐 쿠바에 당도한 수백 명의 조선인 무리에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의 굴곡진 이민사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국가가 제 기능을 상실했을 때 국민의 삶이 얼마나 파괴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집단적 비극의 증거입니다. 쿠바에서의
2025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수련회 – 파주 (9.13~14)
[초점] 2025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수련회 – 파주 (9.13~14) 매년 전국 단위로 열리던 회원수련회가 작년에는 권역별로 네 번을 진행하였다. 보다 지역 친화적인 수련회였다는 반응에 올해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지난 8월 경남 산청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회원수련회가 자연재해로 불가피하게 취소되면서, 9월 13일~14일 경기도 파주에서 첫번째 회원수련회가 열렸다. 이번 수련회에는 이틀간 상근자를 포함해 70여 명이 참석했다. 첫째 날, 참가자들은 숙소인 홍원연수원에 집결하여 두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파주 일대 답사를 하며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안쪽의 통일촌에서 점심을 먹고, 도라산역, 덕진산성, 그리고 허준 묘소 등을 둘러봤다. 오전에는 폭우가 쏟아져 걱정했지만, 일정이 시작되자 야외 답사에 최적화된 날씨 덕분에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특히 마지막으로 방문한 북한군 묘지에서는 이름도 없이 누워있는 이들을 보며 전쟁의 덧없음과 분단의 아픔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답사를 마친 후, 숙소인 홍원연수원으로 돌아온 회원들은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미국 워싱턴D.C.에서 온 염영환 지부장을 비롯해, 진주, 울산, 부산 등 멀리서 온 회원들의 열정에 반가움이 더했다. 처음 참석하거나 오랜만에 참여한 회원들도 거리낌 없이 어울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 날 아침을 먹고 카풀을 이용해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근처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를 방문하며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접경 지역인 파주에서 진행된 이번 회원수련회는 단순한 만남을 넘어, 우리 민족에게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임시정부의 파수꾼 동암 차리석 선생 80주기 추모식 거행
[초점] 임시정부의 파수꾼 동암 차리석 선생 80주기 추모식 거행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으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동암 차리석 선생의 80주기 추모식이 지난 9월 9일 서울 용산구 효창원 임정요인묘역에서 거행되었다. 매년 가족과 연구소 관계자들만 참석해 조촐하게 진행되던 추모식에 올해는 특별한 손님들이 함께했다. 선생의 모교인 평양 숭실학교의 후신, 숭실고등학교 재학생 20명이 참석해 그 의미를 더했다. 차리석 선생이 평양 숭실학교 1회 졸업생(1904년)인 만큼, 80년 만에 처음으로 후배들이 참배를 오자 아들인 차영조 선생은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특별한 헌정식도 이어졌다. 그래피티 작가 레오다브(LEODAV)가 차리석 선생과 아들 차영조 선생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을 기증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제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진 아들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숭실고 학생들의 첫 추모식 참석을 주선한 이미경 은평구의원은 “차리석 선생의 검소한 삶과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며, 그 숭고한 정신을 은평구에도 심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추모식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전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 추모식을 계기로 숭실고는 차리석 선생과의 인연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10월 2일 열리는 숭실기념관 개관식에 차영조 선생 등을 공식 초청했다. 차리석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한 이래 줄곧 독립운동에 진력해왔는데 광복 전후 임시정부 마지막 비서장으로 중국 충칭에서 환국 준비를 하던 중 과로로 1945년 9월 9일 순국했다. • 김무성 기획실 회원사업부팀장
태극기 또는 태극 문양이 새겨진 우리나라 우표
[소장자료 톺아보기 74] 태극기 또는 태극 문양이 새겨진 우리나라 우표 우리나라 근대적 우편제도의 시작은 1884년 갑신정변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개화파의 일원인 홍영식이 일본과 미국의 근대 우편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고종의 명을 받아 1884년 3월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창설했다. 이후 인천분국을 설치하고 우정국사무장정, 우정국직제장정 등을 제정해 체계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위탁해 그해 8월 최초 한국 우표 원판 5종을 완성했고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우정 업무를 개시하여 2만여 장의 우표를 제작, 유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2월 4일 우정총국 낙성식 축하연에 즈음해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의 개화파가 일본의 지원하에 정변을 일으켰으나 결국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우정총국 총판을 맡은 홍영식이 피살되어 우정총국은 개설 20일 만에 폐쇄되었다(1884.12.8).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5월 우체사(郵遞司)가 개설되면서 우편업무가 재개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부산, 원산 등 주요 항구에 우체사가 설치되었으며,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하며 국제적인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에 태극(太極)보통우표, 전위첨쇄(錢位添刷) 보통우표, 이화(李花)보통우표, 독수리보통우표 등 다양한 일반우표가 제작되었다. 대한제국의 우편업무가 정비되어갈 무렵 일제는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기에 앞서 한국의 통신권을 먼저 빼앗았다. 즉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韓日通信機關協定)을 강제 조인하여 대한제국의 통신권을 박탈한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우편 기구가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고 대한제국의 우표와 엽서도 6월까지만 이용하고 이후에는 일본 우표와 엽서만을 사용토록 강제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은 미군정청 통신부를 설립하여 우편 행정을 관리하였고
민족사랑 2025년 9월호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항일로드2000km〉 출간 후기
[후원회원마당] 항일로드 50여 곳 중 딱 한 곳만 꼽으라면 바로 여기 <항일로드2000km> 출간 후기 김종훈 오마이뉴스 기자 지난 22일, <항일로드 2000km> 이름의 새 책이 나왔습니다. 소회를 묻는 질문에 ‘더 잘 쓰지 못했기에 아쉬움은 남지만 더 잘 쓸 수 없기에 후회는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마음 다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다섯 번째 책인데, 처음으로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북펀딩이란 것도 해봤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선전했고, 덕분에 출간과 동시에 알라딘에서 종합베스트셀러 3위(역사·여행 분야 1위)라는, 다소 믿기 어려운 결과도 마주했습니다. (중략) 50여 곳의 현장 중 딱 한 곳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이곳을 고를 겁니다. 위도 36° 31′ 30.11″, 경도 136° 40′ 17.9″의 땅,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곳입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광복 80주년을 맞은 2025년 현재도 술 한 잔 올릴 수 없는 금단의 땅입니다. 윤 의사가 순국했을 당시에는 일본군 제9사단이, 2025년 현재는 일본 육군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위대가 해당 지역을 사격장으로 활용하고 있어 허가받은 인원을 제외하고는 한국인, 일본인 가릴 것 없이 접근이 제한됩니다(단, 부대 앞 개활지를 주말에 한해 민간에 개방).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의 의미 1932년 12월 19일 일제는 십자가 목재 형틀에 윤 의사의 양쪽 팔을 네 번에 걸쳐 묶고 눈을 헝겊으로 가렸습니다. 현장에 있던 간수가 무릎 꿇려진 윤
서울시의회에 울려 퍼진 외침, “친일파를 청산하라”
[후원회원마당] 서울시의회에 울려 퍼진 외침, “친일파를 청산하라” 광복 직전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기념식 열려 이정윤 독립운동가 백기환 선생 후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광화문에 위치한 서울특별시의회 앞을 무심히 지나친다. 마치 친일 청산의 숙제를 잊은 듯. 하지만 80년 전 이곳에서 총독부와 친일파를 겨냥해 다이너마이트를 던졌던 청년들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무심해선 안 된다.” 바로 이곳, 서울시의회 건물 안에서 개최된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기념식에서 이와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친일파를 청산하라! 대한민국 만세!” 7월 24일 오후,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에서 열린 이 기념식은 민족문제연구소와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의 공동 주최, 광복회 화성시지회의 후원으로 진행되었으며, 시민 100여 명이 함께했다. 조선 청년 3인, 친일파에 맞서다 부민관 의거를 주도한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 가와사키 군수업체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 훈련공으로 자원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혹독한 차별과 강제 동원 실태를 직접 겪고, 함께 파업을 주도한 뒤 일본 경찰에 지명수배되면서 귀국하게 된다. 1945년 초 귀국한 이들은 조직적인 무장 항일 투쟁을 준비하며 비밀결사인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했다. 이들의 목표는 총독부와 친일 인사들을 응징하고, 전쟁 말기 조선 청년들을 전장으로 몰아넣는 친일 선전활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애초에는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거두 암살과 총독부 폭파 등의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 가능성과 피해 최소화를 고려해
『후광학, 김대중의 정치철학-후광학 창시를 제안한다』 (행동하는 양심, 2025.7) 출간의 변
[후원회원마당] 『후광학, 김대중의 정치철학-후광학 창시를 제안한다』 (행동하는 양심, 2025.7) 출간의 변 황보윤식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1. 후광(後廣) 김대중(金大中, 1924~2009)은 대한민국 정치환경에서 너무나 어려운 정치 역경을 감내해 왔다. 그는 대한민국의 민중정치 토착화 운동(이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의 선구자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희생이 강요되기도 하였다. 김대중의 이러한 민중정치 토착화 운동은 개인의 역사이면서 이 나라의 상징적인 정치자산이 된다. 김대중은 일제강점기에 ‘민중지도자’의 산실인 목포에서 태어나(1924.1.6.) 분단 해방기, 6·25전쟁으로 조국 분단이 고착화되는 시대 속에서 내내 ‘도덕적 지도자/주류’로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왜 정치를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을 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함”(사회변혁)이었다고. 2. 이제까지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은 신라가 사국을 통합한 이후 주로 경상도 출신 정치인들이 장악해 왔다. 이들을 부도덕한 정치권력이라고 한다. 이들을 부도덕한 정치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로 친일파 정치세력과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 걸쳐 독점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맞서 김대중이 등장한다. 이 책은 김대중이라는 큰 정치 인물을 놓고 그의 정치철학이 형성되어 가는 정치적 배경과 그의 정치철학은 어떤 것인지를 기술한 정치사상서다. 따라서 이 책은 크게 두 분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1부에서는 콘텐츠 제공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환경역사학’과 주권자 민중의 시각에서 재해석하였다. 이렇게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김대중의 정치철학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김대중의 정치 여정과 연결시켜 보았다. 제2부에서는 김대중이 이승만,
더 중요한 것은 제가 강제동원 활동가의 놀라운 헌신과 열정에 깊은 영감을 받은 것
[인턴 체험기] 더 중요한 것은 제가 강제동원 활동가의 놀라운 헌신과 열정에 깊은 영감을 받은 것 서가온 안녕하세요, Williams College에서 비교문학과 미국학을 공부하는 서가온입니다. 지난 여름 동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인턴으로 일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역사, 특히 일제 식민지시기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한국인이지만 저는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일본 식민지배는 한글학교에서 한국 속담, 한국어 문법을 배울 때 단편적으로 들은 것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제게는 부당한 폭력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한국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특히 미군 점령 시기와 한반도 분단에 대한 역사를 관심 깊게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그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그 역사에 대한 깊은 상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역 사는 한글학교에서든 정규 교육에서든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두 점령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시기의 역사가 한국 근대 역사 전체와 미래를 정의하는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일제 식민시기의 역사가 한민족이 겪은 비극적 서사로만 이야기되고 가르쳐질 때, 미국의 한반도 남부 점령과 그 이후 한국 독재정권의 어두운 역사를 가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일본 식민지배에 대해 배운 것들을 통해 한국역사와 현재 한국사회에 대한 저의 이해가 깊어졌음을 느낍니다. 지난해 여름 내내 상설 전시 설명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