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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근현대사기념관,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 ‘다시 오는 늦봄’ 개최

2024년 1월 29일 111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 ‘다시 오는 늦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늦봄 문익환 목사의 30주기를 맞아 문목사의 일생을 재조명하는 특별전 ‘다시 오는 늦봄’ 개막식을 1월 18일(목) 개최하였다. 전시는 서울시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과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가 주관하였다. 개막식은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강북구 이순희 구청장, 강북구 국회의원 천준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송경용 이사장, 통일의 집 문영금 관장, 문익환의 아들 문의근·문성근, 심산 김창숙 손녀 김주, 우사 김규식 손녀 김수옥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가 소장한 많은 유물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관련 기관들이 제공한 다양한 유물과 자료들을 공개하였다. 전시 구성은 문익환 목사의 일생을 시기별로 4부로 나누었다. 1부 ‘북간도의 아들(1918~1945)’은 일제강점기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내고 결혼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주요 유물로는 북간도 명동촌의 수막새 기와와 친구인 민족시인 윤동주와 찍었던 사진, 연애편지 등이 있다. 2부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신학자(1945~1976)’는 해방 이후 독실한 신앙인으로서의 문익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신학자로서 구약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썼던 구약 성서 원 고지 초고, 인쇄 교정본 등을 볼 수 있다. 3부 ‘시대의 어둠을 밝힌 민중의 지도자(1976~1989)’는 다시 ‘3·1민주구국선언(1976~1979)’, ‘빼앗긴 서울의 봄 (1980~1986)’, ‘이한열 열사여! (1987~1989)’ 세 시기로 나누어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문익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감 당시 입었던 수의와 국가지정기록물 제15호로 지정된 옥중편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 7’

2024년 1월 29일 108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 7 – 여성 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 강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은 1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에 걸쳐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교원연수를 진행했다. 벌써 일곱 번째를 맞는 이번 교원연수 〈여성 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부터 현재 노동운동까지 망라하여, 소외되고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6강에 걸쳐 다루었다. 첫 강의는 이지원 대림대 교수가 <여성이 남긴 기록으로 밝힌 여성 독립운동 이야기>를 주제로 진행했으며, 강의 시간이 부족하다고 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수강생들이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가 아닌 여성 스스로 선택한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더불어 독립운동 공동체라는 관점이 새로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2강 <여성 피해자의 목소리로 밝힌 강제동원 이야기>는 이상의 인천대 교수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술 영상을 바탕으로 강의했다. 영상을 통해 박제된 ‘역사’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는 평을 주었다. 3강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연대한 1세대 한일 활동가들 이야기>는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맡았다. 직접 현장에 있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이라는 감정이 이어져 흐름이 되고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4강은 심아정 피스모모평화페미니즘연구소 연구팀장이 <베트남전쟁과 학살의 국가책임, 그리고 국가 ‘바깥’의 존재들>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가해자’라는 용어 규정, 피해자와 가해자의 교차성 등 어렵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베트남전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평이었다. 5강 <한국전쟁 전후

일제강점기 ‘학병’ 강제동원 80주년 기억 행사

2024년 1월 29일 108

[초점] 일제강점기 ‘학병’ 강제동원 80주년 기억 행사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일제는 1938년 이후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청년들을 군에 입대시켜 1941년까지 1만여 명을 전선으로 내몰았다. 이어서 1943년 10월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하여 전문학교와 대학교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을 ‘학도지원병’으로 강제동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와 유력 친일인사들의 갖은 회유와 종용이 있었지만 학생들은 지원 거부, 적성검사 기피, 도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대표적으로 평양에서는 1944년 8월 “일본군에게 끌려가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을 이기자”는 결의로 집단적으로 학병 거부 투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결국 1945년 1월 20일, 4,385명의 학생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내몰렸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을 탈출하거나 머나먼 길을 걸어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대일항전을 펼치다 해방을 맞았다. 이들은 해방 후 ‘1·20 동지회’를 조직하고 학도병 입대 전 잠시 훈련을 받았던 동성중·고등학교 정문 옆에 ‘대한조국 주권수호 일념비(一念碑)’(1998년 8월)를 세우기도 했지만 현재는 자연 해산된 상태이다. 이러한 가운데 황명하(전 광복회 호주지회장), 최희용(광복회 용인지회장) 등 일부 유족들이 중심이 되어 1월 20일 ‘대한조국 주권수호 일념비’ 앞에서 <일제강점기 ‘학병’ 강제동원 80주년 기억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우리 연구소를 비롯해 한국광복군유족회, 시민모임 독립, 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이 후원했으며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추모사를 했고 학병 출신 독립운동가인 황갑수 선생의 글인 ‘일본인들에게 고함’을 외손녀인 김소영 님이 낭독했으며 원로 음악인 류장렬 선생이 ‘1·20 동지(학병)의 노래’에 곡을 붙여 현장에서 직접

『전지사진첩 : 압록강전투』(1)

2024년 1월 29일 192

[소장자료 톺아보기 54] 러일전쟁 초기 대규모 육상전투인 압록강전투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1) 러일전쟁은 1904~1905년 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러시아의 만주 장악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일본이 벌인 전쟁이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대리전이라고도 평가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러일 간의 전투가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전개되어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러일전쟁 초기인 2월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의 무력 시위 속에 한일 양국 간에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되어 한국 식민지화의 첫발을 떼 게 되었다. 러일전쟁의 개전은 1904년 2월 8일 밤 여순(旅順)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아울러 일본군은 2월 9일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2척의 러시아군함을 전격적으로 격침시켰다. 그리고는 이튿날인 2월 10일에야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 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였고, 육군 제1부대는 4월 말 인천에 상륙해 평양과 의주를 거쳐 압록강에서 격전을 치른 끝에 도하하여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만주로 진입하였다. 6월 일본군은 15개 사단으로 편성된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그해 9월에 요양(遼陽)을 점령하였다. 노기(乃木希典)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은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3월에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상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이번 달에 소개하는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는 개전 초기인 2월 우지나항(宇品港)에서의 군대 승선부터 5월 초 구련성(九連城) 함락에 이르기까지 근위사단(近衛師団)과 제2·12사단의 진군과 전투 장면을 찍은 사진 화보집이다. 이 사진첩은 1904년 7월 10일

민족사랑 2024년 1월호

2024년 1월 25일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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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 잊지 말자 그들의 죄(罪)를

2024년 1월 2일 159

[후원회원마당] ‘서울의 봄’ : 잊지 말자 그들의 죄(罪)를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다 1979년 10월 27일, 평소처럼 자취방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라디오를 틀었다.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신나는 아침방송이 나와야 할 라디오에서 장송곡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침통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민 여러분 슬퍼하십시오. 어제저녁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순간 다리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장(國葬)이 거행되었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장래를 걱정하며 국장을 지켜봤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임명되었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이삼일쯤 지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의 얼굴이 자주 TV 화면에 잡혔다. 빨갱이의 대명사였던 김대중과 민주투사로 각인된 김영삼, 만년 국무총리만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나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김종필도 TV에 등장했다. 또 며칠이 지나자 18년 독재, 민주회복과 같은 단어가 횡행했다. 좀 더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론과 대중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일부 지식인들은 유신독재 청산과 민주주의의 봄을 논의했다. 시민사회 원로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적 선거에 따른 정권교체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깨어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 민주화의 봄을 얼어붙게 해 박정희 대통령 국장이 끝나자 여론은 급격히 바뀌었다. 대통령은 박정희뿐이라고 생각했던 국민이 ‘대통령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비판은 당연한 권리’라고

토막 난 몰골로 전해지는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1933년)’

2024년 1월 2일 240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3] 토막 난 몰골로 전해지는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1933년)’ 함께 세워졌다는 ‘정지용 인천부사 기념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순우 특임연구원 근대 개항기 이래 우리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일본(1876년),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들 국가가 개설한 자국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이 —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는 미개설 — 속속 이 땅에 들어섰고, 이것들을 통칭하여 ‘각국공사관(各國公使館)’이라고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그 선두에 선 나라는 의당 일본(日本)이었는데, 조선주차 일본공사관(朝鮮駐箚 日本公使館)이 한성(漢城)에 처음 개설된 것은 1880년 12월의 일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일찍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가 맺어진 때가 1876년 2월 26일(음력 2월 2일)이었으니, 대략 따져도 그로부터 4년하고도 10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만한 편차가 생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다음의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1]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제2관(第二款);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이르러 친히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접해 교제사무를 상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류(駐留)하는 기간의 길고 짧음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맡긴다. 조선국 정부도 역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이르러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사무를 상의할 수 있으며, 해사신이 주류하는 기간의 길고 짧음은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맡긴다. [2] 『고종실록』 1877년 10월 12일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호남(湖南) 개항지방의 수심(水深)을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2024년 1월 2일 207

[자료소개]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일부를 폭파한 류탸오후(柳条湖)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은 관동군이 만주 침략의 빌미를 삼기 위해 벌인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이를 기화로 관동군은 동북 삼성 일대를 침략하고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집정으로 삼아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1932년 3월 중화민국이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일본이 동의하여 국제연맹이 류타오후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3개월간 만주를 조사하고 9월에 리튼 보고서를 제출했다. 리튼 보고서는 1932년 3월 1일 일본의 조종에 따라 건국을 선언한 ‘만주국’이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 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리튼 보고서는 10월 2일 공표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의 채택과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삼천리』 제4권 제12호(1932.12.1.)에 실린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보고서 중 조선인문제」이다. 리튼 보고서 중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류탸오후(柳条湖)사건에 대한 일본측 설명과 중국측 설명 그리고 조사단의 의견을 번역해 실었고 아울러 ‘만주 신국가 출현에 대한 제민족의 태도’ 항목 중에서 만주인과 조선인의 입장과 태도를 발췌하였다. – 편집자주 [9월 19일 사건] 9월 19일 토요일 아침 봉천시민이 잠에서 깼을 때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2024년 1월 2일 188

[연구소 글방 9]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심철기 연구실장 1. 일제의 침략과 경상도 의병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내치(內治)에 대해서도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만주(滿洲)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던 러시아로부터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고종은 이 회의를 통해 일본의 불법침략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는 계기로 삼고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일본이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차관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 등 최소한의 주권마저도 강탈하였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강제해산에 반발하여 서울 주둔 시위대(侍衛隊)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지만 탄약이 떨어지면서 결국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원주 주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가 봉기하였다.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해산군인과 의병세력의 연합의병이 출범하는 시작이 되었다. 경상북도에서도 의병전쟁이 크게 일어났는데,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이강년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은 신돌석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남부지역은 산남의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이들 의병부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으면서 활동하였다. 상주 출신 의병들도 이들 의병부대와 연계되거나 이들 의병부대에 가담해서 활동하였다. 2. 상주 출신 의병장과 의병전쟁 상주는 충북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과 접하고 있으며, 강원도와 전라도로 진출하기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1592년(선조 26년)까지 경상감영이 설치되었으며, 일찍부터

참군인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을 20년간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회원

2024년 1월 2일 136

[인터뷰] 참군인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을 20년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회원 방학진 기획실장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의 흥행이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2030세대들의 관심 때문이다. 그동안 10·26이나 5·18과 관련한 수준 높은 영화들이 많았지만 12·12에 대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10·26 이후 신군부의 등장과 5·18 학살 직전의 상황을 설명해줄 영화라는 점에서도 <서울의 봄>은 영화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 영화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인물은 장태완 장군과 김오랑 중령이다. 특히 영화배우 정해인이 특별출연하여 짧지만 강렬하게 연기한 김오랑의 모습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항상 좋은 역사영화 뒤에는 축적된 연구성과와 의식 있는 분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김오랑의 명예회복과 기념사업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후원회원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준철 회원은 김오랑 중령의 유일한 평전인 『김오랑 – 역사의 하늘에 뜬 별』(2012, 책보세)의 저자이다. 김준철 회원과 김오랑은 어떤 관계일까. “저는 ROTC 28기로 임관 후 맹호부대와 특전사에서 근무했으며, 스키와 암벽등반 훈련시 무릎 부상(상이군인)으로 7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96년에 전역했습니다. 전역 후 H증권에서 15년, 현재는 M화재에서 13년째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군 자살자, 의문사유가족 단체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차에, 광주의 시민단체에서 김오랑 중령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자 ‘김오랑중령추모회’를 만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 계시는 김오랑추모회 분들이 김오랑 중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