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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2026년 8월 3일 381

[식민지 자료관 7]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생전에 거처로 삼았던 주요 공간 몇 군데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우선은 운현궁(雲峴宮)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여기에 더하여 창의문 밖 석파산장(石坡山莊)과 마포 아소당(麻浦 我笑堂), 시흥산장(始興山莊, 시흥동 별장)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양주(楊州) 쪽 의정부에도 직곡산장(直谷山莊, 직동산장)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곳은 1873년에 권좌에서 밀려난 대원군이 첫 번째 은거지로 선택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직곡산장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라치면 이렇다 할 자료를 찾아내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다가 옛 신문 파일을 뒤지던 와중에 『경성일보』 1935년 11월 18일자에서 이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 하나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수록된 카토 칸카쿠(加藤灌覺)의 기고문인 「감악산(紺岳山)」이라는 글[고노 특파원(河野 特派員) 촬영]에는 매우 드물게 보는 직곡산장의 모습에 곁들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직동(直洞, 곧은골)에 유거(幽居)했던 대원군(大院君)] 이태왕 전하(李太王殿下)의 즉위 10년, 우리 명치 6년(1873년)에 민비 전하(閔妃殿下)와의 정쟁(政爭)에서 깨졌던 대원군(大院君)은, 원로(元老)라고 하는 허명(虛名)을 지니고 마침내 경성(京城)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퇴은(退隱)의 땅이 이 직동(直洞)의 한거(閑居)였다. 직동은 의정부(議政府)의 정거장(停車場)에서 거리가 겨우 10수 정(十數町, 1킬로미터 남짓), 도봉산(道峰山)의 율림(栗林, 밤숲) 속에 있으며, 도봉산 북측의 계류(溪流)가 서로 모여들어 그 가운데를 흐르는 청렬(淸冽)한 용천각소(涌泉各所)에 옥(玉)을 부풀어 올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조망이 어느 것이든 그 빼어남을 즐겼던 승지(勝地)인데, 지금도 여전히 그 구시(舊時)의 모습을 남아 있어서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2026년 7월 31일 279

[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3.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과 <이팔청춘가> 근대를 실감케 했던 새로운 문물들 가운데 실로 경이로웠던 것이 비행기다. 사람이 하늘에서 자유로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행기의 우렁찬 굉음은, 종래의 통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1903년 이래 신문기사로만 접하며 많은 이들이 그 실체를 궁금해했던 비행기는, 1913년 4월 3일 드디어 그 모습을 조선 하늘에 처음 드러냈다. 4월 3일 오전 11시 반쯤, 6만 관중이 운집한 경성 용산 연병장에서 조선 초유의 비행은 시작되었다. 일본 항공의 선구자로 꼽히는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제작한 비행기를 조종한 이는 일본인 비행사 시라토 에이노스케(白戶榮之助)였다. 오늘날 화려한 에어쇼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간단한 비행이었지만, 기계를 움직여 사람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실제로 접한 이들은 그만으로도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감동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이틀 뒤 4월 5일자 『매일신보』에는 ‘서봉산인(瑞峰山人)’이라는 이가 쓴 <비행기> 노랫말이 다음과 같이 실리기도 했다. 가사 형식으로 보아 시조창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라 보이는데, 시조를 노래로 부를 때에는 대개 종장(終章) 마지막 음보 세 글자를 생략한다. 님 계신 곳 가 볼 마음 주야로 간절하나 / 산 높고 물 깊어서 하릴없이 단념터니 지금에 비행기 온다니 그것을 타고 조선 하늘에 비행기가 처음 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던 많은 관중 속에는 어쩌면 열두 살

“식민지 지배의 차별 끊겠다”… 손자 세대가 이끄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 3차변론 열려

2026년 7월 30일 208

[초점] “식민지 지배의 차별 끊겠다”… 손자 세대가 이끄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 3차변론 열려 7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송 사무국을 맡고 있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의 세 번째 변론기일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렸다. 이 소송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군인·군속으로 강제동원되어 전사한 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희생자와 유족들이 2001년 제소한 군인·군속 소송을 이어 2007년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제기한 야스쿠니 무단 합사 철폐 소송의 3차소송이다. 이번 3차소송은 지난 2025년 9월 희생자의 손주 세대 유족 6명이 원고로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17일에 열린 변론에서는 희생자 유족 길형민 씨가 법정에서 의견을 진술했다. 길씨의 할아버지는 1942년 23세의 나이에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된 뒤 1944년 10월 파푸아뉴기니에서 전사했다. 강제동원 당시 할머니는 길씨의 어머니를 임신중이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전사 통지도 받지 못했다. 길씨는 법정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부는 80여 년 전 일본 제국주의가 강요한 일본식 이름으로 할아버지를 묶어둔 채 여전히 식민 지배의 차별을 계속하고 있다”라며 “할머니와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싸워온 이 투쟁을 손자 세대가 이어 반드시 결말을 짓겠다”며 결의를 밝혔다. 재판 이후 100여 명의 소송지원단 시민들과 많은 미디어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보고 집회에서는 희생자 유족 김옥순 씨(63) 남매 4명이 추가로 원고단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씨 역시 2차소송 원고인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손주 세대로 소송에 참여했다. 또한, 외삼촌

100년 전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보고 <제4회 민연포럼> ‘학살과 차별의 현장을 가다 – 혐오는 일본을 어떻게 망가뜨렸나

2026년 7월 30일 225

[초점] 100년 전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보고 <제4회 민연포럼> ‘학살과 차별의 현장을 가다 – 혐오는 일본을 어떻게 망가뜨렸나 7월 10일 서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제4회 민연포럼이 열렸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일본 논픽션 작가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는 최근 한국어판이 출간된 『지진과 학살 1923-2024』 저자다. 그는 현재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는 배외주의와 헤이트 스피치의 실태를 소개하며, 그 뿌리를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일본 각지에서는 차별과 혐오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마바리 타올’로 유명한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에서는 지역 산업을 지탱하는 베트남·중국·네팔 노동자들을 향해 “외국인 추방”을 외치는 모순된 극우 집회가 열리고,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에서는 쿠르드계 이주민들을 향해 “해로운 외국인을 몰아내자”는 막말과 살해 협박, 온라인 가짜뉴스가 난무한다. 야스다 작가는 “지난 20년간 일본 내 외국인은 3배 늘어 400만 명을 돌파했지만 전체 범죄 건수는 오히려 3분의 1로 줄었다”는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차별 선동의 허구성을 짚었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 선동이 방치될 경우 실질적인 범죄와 폭력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야스다 작가는 혐오 발언이 개별적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조직적 폭력의 도화선이 되어 왔다며 그 기원을 100여 년 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서 찾았다. 1923년 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방화를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정부와 언론의 조직적인 가짜뉴스에 선동되어 약 6,0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그 전해인 1922년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독립운동가 26분을 발굴하여 포상 신청하다

2026년 7월 24일 275

[초점] 독립운동가 26분을 발굴하여 포상 신청하다 연구소는 6월 30일 국가보훈부에 독립운동가 26명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작년에 이어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 실린 인물들을 추적, 조사해 새로 발굴한 독립운동가들이다.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는 1945년 3월에 제작된 일제의 ‘블랙리스트’로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 등 항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들의 자세한 신상정보와 함께 당시 주소와 직업, 항일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일제 말 전시체제기에 항일비밀결사에 참여했던 분들이 주목된다. 안용갑(安鏞甲)과 신규식(申奎植)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41년 도쿄 주오(中央)대학에 재학 중이던 안용갑은 지하학생조직을 결성했다. 안용갑과 동지들은 장기화된 전쟁으로 일본이 결국 패전할 것을 전망하며, 조국 독립 후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신규식은 유학 중 학비를 벌기 위해 요코하마의 목장에서 일하며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민중의 민족의식을 계몽할 방안을 논의했다. 일제는 이들을 ‘요코하마그룹’이라고 불렀다. 안용갑은 194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신규식은 같은 해 12월 요코하마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장기룡(張基龍)과 황병수(黃炳洙)는 전북의 공립국민학교에서 촉탁교원으로 근무하며 조선 독립을 의논하고 학생들에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쳤다. 이들은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몰래 만나 ‘일본과 소련의 전쟁이 곧 개시할 것이다. 중일전쟁으로 상당히 약해진 일본은 패전할 것이니, 그때가 조선 독립의 호기다’ 등 대화를 나눴다. 또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지만 말장난에 불과하며 우리는 조선인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훌륭한 조선인이 될

202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모꼬지 – 산청, 진주 (6.27~28)

2026년 7월 24일 227

[초점] 202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모꼬지 – 산청, 진주 (6.27~28) 6월 27일부터 28일까지 경남 산청과 진주에서 “2026년 회원 모꼬지”가 열렸다. 올해 첫 모꼬지에는 상근자를 포함해 총 70명의 회원과 가족이 참여했다. 첫날, 참가자들은 산청군 문화예술회관에서 극단 큰들의 마당극 <남명>을 관람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애민·실천 정신을 유쾌하고 의미 있게 풀어낸 공연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어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을 기리는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참배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은 친일을 청산하지 못했던 연장선상에 있기에, 우리 연구소는 지금도 유해 발굴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후 숙소인 한국선비문화연구원으로 이동해 뒤풀이를 하며 친목을 다졌다. 이번 모꼬지에는 경남, 부산, 대구, 광주, 전남, 전북은 물론 구미, 아산, 청주, 수도권 등 전국에서 회원이 모였다. 특히 캐나다에서 온 박인애 회원과 아들 조인의 참석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인 조박을 포함한 세 형제와 함께 5년 넘는 노력 끝에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윤리연보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731부대 인체실험 만행 기록을 등재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들의 노력에 모든 회원이 큰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둘째 날은 진주로 이동해 형평운동의 선구자 강상호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잘 알려진 김장하 선생의 ‘옛 남성당 한약방(현 남성당교육관)’을 방문했다. 이어 진주성과 의암, 촉석루를 둘러보며 역사 답사를 이어갔다. 특히 진주성 전투와 논개에 대한 해설 중,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내의

근현대사기념관, 2026년 상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6·10만세운동을 다시 본다〉

2026년 7월 24일 201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2026년 상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6·10만세운동을 다시 본다〉 근현대사기념관은 6월 20일(토)부터 총 4회에 걸쳐 2026년 상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6·10만세운동을 다시 본다> 강좌를 근현대사기념관 강의실에서 진행했다. 독립민주시민학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성인 대상 교육프로그램이다. 올해는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6·10만세운동의 주도층과 역사적 의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기획했다. 6월 20일 오후 2시에 열린 제1강은 윤상원 전북대학교 교수가 맡아 ‘우리는 6·10만세운동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를 주제로 진행하였다. 윤교수는 6·10만세운동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을 정리하고,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했다. 7월 4일에는 제2강과 제3강이 연이어 진행되었다. 제2강은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맡아 ‘6·10만세운동은 누가 주도하였는가?’를 주제로 진행하였다. 6·10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했던 지도부와 그 핵심 인물인 권오설, 박민영, 이지탁 3인의 트로이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어진 제3강은 박종린 한남대학교 교수가 맡아 ‘1926년 6월 10일, 만세 시위를 이끈 학생들’을 주제로 진행하였다. 박 교수는 1926년 6월 10일 당일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역할을 집중 조명하고, 구체적인 시위 전개 과정을 설명했다. 7월 18일에 열린 제4강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가 맡아 ‘6·10만세운동은 민족통일전선운동이다’를 주제로 진행하였다. 순종의 장례일에 맞춰 진행한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 구파와 조선공산당이 연대했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성격과 의미를 깊이 있게 소개했다. 이번 독립민주시민학교는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만세운동의 주도층을 새롭게 밝히고, 역사적 의의를 대중과 깊이 있게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 근현대사기념관

민족사랑 2026년 7월호

2026년 7월 23일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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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烈士)의 후예(後裔)들

2026년 7월 1일 696

[자료소개] 열사(烈士)의 후예(後裔)들 지난[1959년] 11월 12일 “순국선열유족회”가 그들 유족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232선열의 유족들이 뭉쳐 서로 도와 나가자는 모임인 것이다. 경향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유족들 가운데는 세상에 알려져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대로 파묻혀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조국 광복을 얻기 위하여 피로써 싸워온 조상의 영광을 간직한 그들에게는 있을 법도 한 ‘특권’이 시대사조에 희생당하고있는 것이다. 이에 몇 유족들 가정을 찾아 그들의 근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 동아일보 편집자 ① 이준 선생 따님 이종숙 여사 시내 사직동 262의 36에 있는 조촐한 2층 양옥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이준 열사 따님 이종숙(李鍾肅) 여사는 ‘따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색할 정도로 얼굴에 주름이 흔한 진갑이 지난 할머니(64세)였다. “그때 내 나이 12세 양원(養源)학교 3학년이었지요. 헤이그로 가셨는지 어디로 가셨는지 전혀 집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글쎄 7월 14일 멀리 이국땅에서 자결하셨다는구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15일 하오 2시경이었는데 전보를 받아든 어머니는 하도 놀라서 그때부터 심장병을 얻어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고종 황제의 밀사로 멀리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서 왜제(倭帝)의 도적행위를 규탄하고 스스로 배를 갈라 창자를 ‘독립의 거름’으로 뿌린 이준 열사의 ‘역사적 장거’를 이 외동따님은 반세기 전의 가물가물한 감회를 섞어 띄엄띄엄 이렇게 회상해 나갔다. 선친의 비보를 받은 지 3년 후에 모친은 성묘라도 하여볼 셈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나온 오빠 이용(李鏞) 씨를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있다는 이상설(이준 열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염상(鹽商)’ 최병희(崔炳熙) 삶의 명과 암

2026년 7월 1일 296

[돌려보기] 일제강점기 ‘염상(鹽商)’ 최병희(崔炳熙) 삶의 명과 암 일제강점기 소금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 지역에서 일제에 적극 조력하다 박종선 부천지역위원장 1935년 10월 14일 부천군 소사역(현 부천역) 부근에서는 진흥관(振興館) 개관식이 성대히 열렸다. 일제의 식민 침탈과 식량 수탈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소사(素砂)에 극장뿐만 아니라 공동회의와 집회를 진행할 수 있는 복합문화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진흥관을 만들 수 있도록 비용을 댄 사람이 최병희(崔炳熙)였다. 이 당시 진흥관을 만드는데 15,000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고하는데 그렇다면 최병희는 그 당시 부천에서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거대한 금액을 낼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지역의 유지였던 최병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최병희의 생애 최병희는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출신으로 1891년에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일찍 부모와 함께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하였다.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상업에 일찍 뛰어들었으며, 1910년대 최병희가 뛰어든 인천의 상업계는 이미 일본인 거상들에게 잠식되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1913년 모회사 외교원으로 입사하여 장사를 할 수 있는 밑천 자금 3-400원을 모았으며, 1918년 소규모의 중국소금 수입상점을 인천 지나정에 열었다. 하지만 일본대상과의 경쟁에서 밀려 실패하였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 상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을 준비하는 동시에 중국인들과 직접 무역을 하기 위해 중국어를 집중 연구하였다. 1923년이 되어 중국 상인들에게 신용을 얻어 성공을 할 수 있었으며 이때 이미 10만 원의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중국 지부항의 유명한 무역상 덕표창과 거래를 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