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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특별강좌 진행

2019년 10월 29일 84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개최된 ‘백산무역과 경주최부자의 독립운동-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기획전시와 연계하여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였다. 최부자를 비롯한 한국 전통 명문가와 자산가의 청부(淸富) 정신과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조명함으로써 지도층의 사회적 도덕적 책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고귀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강좌는 9월 21일에서 10월 6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매 강좌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특별강좌와 기획전시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 주었다. 첫 번째 강좌는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상임이사가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의 독립운동〉이란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기획전시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 이외에도 경주 최부자 고택에서 발견 된 많은 유물의 사진 자료들을 확인하고 최부자 댁의 ‘청부 정신’과 최준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백산 안희제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서 국민대학교 김성민 교수가 강의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산 안희제선생의 민족교육운동과 백산상회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3강 경주 최부자 주손이신 최염 선생의 회고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고령의 연세임에도 할아버지 최준 선생에 대한 기억과 최부자 댁의 많은 일화를 들려주었고,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듯 한 추억과 함께 최준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외에도 4강 〈연해주

식민지역사박물관 가을역사강좌 ‘사료를 읽다, 근대 역사와 만나다’

2019년 10월 29일 90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가을역사강좌 ‘사료를 읽다, 근대 역사와 만나다’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진행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가을역사강좌가 9월 5일부터 시작하여 10월 22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일 시         강 사   주 제 9.5 .  (목) 서민교 진중일지에 기록된 의병학살 9.10.  (화) 권보드래 매일신보로 본 3•1의 밤 9.17.  (화) 예지숙 회고록으로 본 친일여성들의 기억과 망각 9.19.  (목) 이태훈 시사평론을 통해 본 친일의 논리 9.24.  (화) 이임하 전쟁미망인 구술로 본 한국전쟁 9.26.  (목) 이형식 일기와 서한으로 읽는 식민지 조선의 침략자들 10.1.  (화) 이순우 항공사진으로 본 식민지 경성의 공간 10.8.  (화) 최우석 한일관계사료집으로 읽는 독립운동사 10.10.(목) 김민철 일기로 본 일제말기 전시수탈과 강제동원 10.15.(화) 송병권 GHQ문서에 담긴 해방 전후 한반도와 패전 일본 10.17.(목) 전명혁 일제강점기 형사사건과 형사기록물(치안유지법사건) 10.22.(화) 김승은 한일시민의 투쟁으로 공개된 한일회담 외교문서 사료를읽다,근대역사와만나다’를 주제로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화, 목요일 7~9시에 진행하는 강좌임에도, 매회 30여 명이 넘는 인원이 꾸준하게 참석하여 역사학습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근현대사의 전개와 그 속에서 부단하게 움직인 한국인의 삶을 포착하고자 하는 강좌여서 내용이 쉽진 않다. 일기·서한집·사진 등 개인의 기록, 진중일지와 명부·신문(訊問)자료·외교문서 등 전시기 기록과 통치사료, 선언문·사료집 등 독립운동 관련 기록, 그 외에 신문·잡지 등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해방이 아닌 침략구호, ‘대동아공영권’

2019년 10월 29일 374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이다.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한 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 지도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과 항공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적이 본토를 폭격하는 가상도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아래로 일제가 꿈꾸었던 대동아의 인구, 면적, 일본인 진출 수 등 각종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직접적이고 전격적인 군사점령 대신 ‘함포외교(Gunship Diplomacy)’라는 우회 침략의 방식을 취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등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유혈 진압하면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1910). 일본의 야욕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부는 ‘황군(皇軍)’을 자처하며 군국주의로 나아갔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주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대공황에 따른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결합하면서 군부의 모험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벌써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1937년

용산중학교, 일본 군인과 철도종사원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 포진한 일본인 학교들의 연혁

2019년 9월 20일 394

[식민지 비망록 50] 용산중학교, 일본 군인과 철도종사원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 포진한 일본인 학교들의 연혁   이순우 책임연구원   총독부 기관지인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는 이른바 ‘용중(龍中, 용산중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인 무로 켄조(室兼三)라는 육군대위가 중국 난주(蘭州) 공습에 참가하였다가 고사포에 맞아 자폭(自爆)하면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그의 모교 담임선생이었던 마츠나가 교유(松永 敎諭)의 말을 빌려 그가 용산중학교를 다닐 때의 증언담이 이렇게 실려 있다.   무로 군은 소화 5년(1930년) 치바중학(千葉中學)에서 전학을 왔는데 소화 7년(1932년) 졸업 당시는 전체 생도 183명 중 141등으로 전혀 볼품이 없는 성적이었으나 졸업 후에 육사(陸士, 육군사관학교)의 난관돌파를 목표로 삼아 맹렬히 분발하여 마침내 희망하던 육사를 패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바리즘(頑張りズム)은 소위(所謂) 용중혼(龍中魂)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왼쪽)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 수록된 ‘용산중학교’ 출신 육군대위 무로 켄조의 전사관련 보도내용이다. 그가 이 학교를 졸업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조선 주둔 제20사단장인 탓이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30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신임 제20사단장 무로 켄지 중장’의 모습이다. 그의 아들이 용산중학교로 전학 와서 졸업한 시기는 그의 재임기간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그가 애당초 일본에서 경성으로 전학을 온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이 용산 주둔 일본군 제20사단장인 육군중장 무로 켄지(室兼次, 1876~1966. 재임 1930.8.1~1932.8.8)였던 것이다. 일본 치바현(千葉縣)에 자리한 육군야전포병학교(陸軍野戰砲兵學校)의 교장이던 무로 중장이 조선군사령부 제20사단장으로 부임한

신흥무관학교는 스스로 독립하려는 독립군을 돕는다

2019년 9월 19일 426

[답사기] 신흥무관학교는 스스로 독립하려는 독립군을 돕는다   김수빈 2019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단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다(7.26) 집을 나서기 10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의 첫 답사,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꿈속에서 헤맨다면 모를까, 그곳을 내가 직접 밟게 된다니 꿈속에서도 꿈처럼 느껴 질 것 같은 현실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답사한다는 소식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청서를 낸 것은 이번에 휴학하면서 나 스스로와 한 다짐 때문이었다. ‘힘들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삶을 들려주자. 내가 방황하고 좌절했을 때 독립운동가의 삶을 알아가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듯이,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운동가를 심어 준다면 그들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결심을 한 나도 사실은 책이나 유물로밖에 독립운동가들을 접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답사가 더욱 간절했다. 독립운동 중 무장투쟁 노선을 택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분들이 걸었던 길을 직접 밟아본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개무량하였다. 답사지에서 설명해주는 내용을 내가 알아듣지 못할까봐 합격한 날부터 출발하기 직전까지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고 내 나름대로 답사 일정동안 스스로 수행할 미션들을 정해놓았다. 신흥무관학교 옛터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부를 것, 백두산 천지에서는 백기완 선생님 사진과 책을 들고 사진 찍을 것, 내가 준비해 간 질문들을 방학진 국장님께 꼭 여쭐 것 등등… 사소하지만 나름의 미션을 정하면서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가 국군의 뿌리로 인정받은 지 2년도

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2019년 9월 20일 394

할아버지, 증손녀 올가예요. 겨우 한 줄 썼는데, 눈물부터 나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수용소. 평생을 대한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애쓰신 할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추운 곳에 가둬놓고 언 땅을 파게 했을까요. 2012년 KBS 역사스페셜 다큐를 만들 때, 제가 그곳에 갔어요. 문서에는 거기 병원 근처에 할아버지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아니었어요. 솔제니친도 갇혀 있었다는 그 수용소에는 무덤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대요. 강제노역과 영양실조로 쓰러진 수용자들이 눈을 감으면, 포크레인 같은 기계로 땅을 파서 시신을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대요.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깊이 묻지도 않아서 조금만 땅을 헤쳐도 유골이 산더미처럼 드러났대요. 그래서 옛날부터 그 동네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뼈를 가지고 놀았다고 그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이리나라는 할머니가 증언해 주셨어요. 할아버지의 조국에 갔어요. 국립현충원이란 곳에도 갔어요.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모신 국가묘지래요. 거기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어요. 제가 직원분들에게 애원했어요. 제발 우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서 이곳에 모셔달라고요. 그냥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빈말이라도 노력해보겠다고 답해줬으면 덜 야속했을 텐데…. 그 수용소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갇혔대요. 자기 조상이 거기 묻혀있다고, 후손들이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대요. 일본 정부는 알았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유해를 가려내 자기 나라로 가져갔대요. 서울 가기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벌써 몇 년 전에 폴란드도 그렇게 했고, 그리스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그렇게 못해요? 저더러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2019년 9월 20일 273

[회원마당]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전병택 구미지회장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許亨植, 1909~1942)이 경호원 왕조경과 진운상을 데리고 소부대 현지지도를 다니던 중, 1942년 8월 3일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계곡에서 일제 관동군과 괴뢰국인 만주군에 의해 추격을 받아 교전중 33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1915년 음력 3월 장군이 6살 때 가문 전체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난 지 27년 만이다. 한편 허형식 장군보다 8살 어린,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출신 박정희(1917~1979)는 이 무렵 25살로 일본군이 세운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여 나중 일본군 장교가 된다. 박정희는 왜왕에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며 제국주의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지 77년 만에 추모식을 거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김도화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손성진 임영태. 3·1운동 100년을 맞아 식민과 분단, 독재와 이념의 장벽으로 가려진 대표적인 남한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경북 구미 출신. 13도 연합 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의 종질이자 이육사의 외당숙) 전적지 등 북만주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여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기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관한 역사평화기행의 핵심인 허형식 장군의 77주년 초모식을 중국 현지에서

연구소가 발굴한 <대정8년 보안법 사건> 번역 출간

2019년 9월 19일 179

[초점] 연구소가 발굴한 <대정8년 보안법 사건> 번역 출간   연구소는 2010년 3·1절을 앞두고 일본 도쿄에서 입수한 <대정 8년 보안법 사건>를 공개하고 보도자료를 낸 바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한 이시카와 노부시게 검사는 1919년 함흥지방법원에서 근무하며 3·1운동 참가자들의 탄압과 처벌에 관여한 인물이다. 1908년 12월 통감부 검사에 임용돼 1919년 말 조선총독부 검사로 퇴임하기까지 의병운동과 3·1운동 탄압에 앞장섰다. 이 문서는 이시카와 검사가 3·1운동 참가자를 조사하고 기소 준비를 위해 작성한 희귀 자료다.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대응과 탄압 양상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 학계로부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는 이번 광복절에 <대정 8년 보안법 사건>을 탈초, 번역해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자료 ⅠⅡ>를 발간했다. 1권에는 일본어 원자료 번역문과 탈초문을 함께 실어 일반인의 이해를 도왔고, 2권에는 원자료를 대조 확인할 수 있도록 영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은 이시카와 검사의 조사자료의 해제작업을 맡아 수개월의 공동 연구 끝에 45쪽 분량의 해제를 집필하여 1권에 실었다. 특히 이 문서에는 3·1운동 참가자 950여 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의 판결문 등 일제가 남긴 행형자료를 추가로 조사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음에도 아직 주목받지 못한 181명이 발굴되었다. 연구소는 새롭게 확인된 인 물들에 대해서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추천할 계획이다. 한편 연구소는 10월 4일(금),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도쿄에서 함흥으로 :

민문연 발전을 기원하며

2019년 9월 20일 77

[회원마당] 편집자주 ― 신호근 부산지부 회원이 8월초 편지와 함께 얼굴마사지기 100개를 연구소로 보내주었다. 사연인즉 <민족사랑> 7월호에 실린 결산서에 400만원 적자가 난 것을 보고 회비를 증액했다고 한다. 신 회원의 연구소에 대한 관심과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부산회원 신호근입니다. 저는 평생 과학기술자로 살고 있습니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몇일 전 소식지에 있는 결산서를 보고 운영 적자가 발생된 것을 알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십수년 전, 고향 형님, 선배들과 같이하는 자리에서 당시 친일재산환수 문제로 설왕설래하던 중 제가 민문연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 “야가!! 빨개이 아이가 니는, 니 혼자 저기 가서 먹어라”고 하여 충격받고, 이후 어디에서도 민문연 회원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참고로, 저는 부산에서 선조부터 20대 이상을 거주하고 있습니다.) 외삼촌이 해방 직후 철도청 근무하였는데 학교 동문들 모임에 찬조하였다는 이유로, 보도 연맹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오래전부터 알게 되었고 다른 외삼촌들은 적색분자 연좌죄로 공무원 취직도 안 되고, 군 생활에서도 보직 차별을 겪었다고 들어서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향 형님들 만나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정재계 활동하시다보니 이런 얘기는 피하는 입장인데, 최근 변화가 있더군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듯이 용기를 내어서 연락드리고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민문연 창립과 함께 초기 활동하신 분들의 초심과 같이 운영하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생각은 있으나, 저와

뭉치면 산다

2019년 9월 20일 104

[기고] 뭉치면 산다 강인수 편집자주 – 지난 7월 하순에 일제강점기 형평사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강상호 지사의 아드님인 강인수 선생(대구 거주)이 북미교섭과 일본의 경제보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못마땅해하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행태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우국시를 보내왔다.   대통령이 6. 25 민족상잔을 겪은 우리 민족이 또 다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유럽으로 아세아로 아메리카로 온 세계로 동분서주 평화를 애걸복걸 절규하고 다니는데 왜 대통령을 좌파독재자라고 사정없이 몰아세울까 우리 동포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오순도순 잘 살자 하는 것이 어찌 좌파독재가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일제강점에서 해방한지 벌써 일 갑자년(甲子年)이 쑥 넘어섰는데도 일본은 아직도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다시 군국 제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 우리나라가 망하라고 경제보복으로 재침을 시작하였으니 아! 힘을 합하여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국민이 국론통일로 단결하여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왜 우리 대통령이 아무 일도 못하게 무능한 대통령이니……. 온갖 막말을 주저 없이 내뱉으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반대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좌파독재자라면 대통령이 우리의 국적(國敵)이란 말인가 분하게도 일본 정치인이 무례(無禮)하게 감히 우리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내정간섭을 하고 일부 우리 언론인마저 대(對)일본 기사에서 한국인이 무슨 낯짝으로 일본을 대할 것인가라며 맞장구를 치고 어느 야 정당(政黨)도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사법부의 판결이 잘못된 것처럼 아베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무조건 항복하고 용서를 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