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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강만길저작집 출간기념회 개최

2019년 1월 2일 76

12월 7일 오후 6시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이하 ‘역사재단’) 주최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에서 강만길저작집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강만길 고려대명예교수의 의사에 따라 직접 논문 지도를 받은 제자들만 참여하는 소박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신용옥 역사재단 상임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서 저작집 간행위원회 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 신용옥 이사가 저작집 출간 경위 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제자인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의 감사인사, 저작집을 펴낸 창비 기획편집위원장인 백영서 교수 및 임헌영 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강교수는 답사에서 “이번 저작집 역시 학자로서 치열하게 살고자 한 삶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며 “앞으로 후학들이 나를 넘어서는 뛰어난 연구업적을 남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강만길저작집은, 역사재단이 2010년부터 기획한 것으로 역사재단과 창비사의 2년간의 노력 끝에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출간 40주년을 기념해 올 12월에 간행된 것이다. 강교수의 첫 저작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시작으로 초판 출간 연도에 맞춰 19권의 저서를 순서대로 배치하고 2010년에 나온 〈역사가의 시간〉은 자서전이라는 성격을 고려해 저작집의 마지막 권으로 했으며 미출간 원고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었다. 특히 제자 20명이 각 저서에 대한 사학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해제를 실어 그 의의를 더했다. • 편집부

표창원 의원, 효창묘역 성역화 토론회 열어

2019년 1월 2일 70

• 방학진 기획실장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은 11월 27일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효창묘역 성역화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를 열었다. 효창묘역은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의 묘소가 위치한 곳으로 역사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효창운동장과 같은 이질적 시설물들이 혼재되어 있고 더구나 지자체가 관 리하는 근린공원과 사적지로 지정·운영되는 실정이어서 연구소를 비롯해 여러 단체들이 독립된 추모공간으로서의 성역화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김삼웅 지도위원(전 독립기념관장)이 발제를 맡았으며 차영조회원(임시정부 비서장 동암 차리석 후손), 홍소연 회원(심산김창숙기념관 전시실장), 김광진 회원(대통령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설혜영(용산구 구의원),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표창원 의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효창묘역 성역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토론자들은 참여정부 당시 성역화 사업이 무산된 원인을 분석 하고,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사업 초기부터 보장하고, 사업 주무부처를 국가보훈처 대신에 국무 총리실 등 상급기관으로 격상할 것을 주문했다. 한편 12월 11일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무회의에 상정·의결돼 국회에 제출됐다. 개정안은 효창공원은 물론 여운형 등 독립유공자 16명이 묻힌 수유리 애국선열묘역 등도 국립묘지로 지정되기 전이라도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되면 예산과 전담인력이 투입돼 국립묘지와 같은 수준으로 체계 있게 관리된다 .

근현대사기념관 ·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항일음악회 잇따라 열어

2019년 1월 2일 55

• 방학진 기획실장   근현대사기념관이 11월 17일 덕성여대 덕성아트홀에서 ‘2018 항일음악회 – 우리가 함께 불러야 할 노래’를 개최한데 이어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가 11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2018 항일음악회 – 다시 부르는 희망의 노래 독립군 아리랑’을 잇따라 열었다. 항일음악회는 지난 2017년 8월 출간된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편저,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을 바탕으로 서정성과 역사성이 담긴 음악을 선별하여 국악, 재즈, 락 등 여러 장르로 편곡해 무대에 올려 큰 호응을 받고 있으며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연구소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단순히 음악만을 들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충실한 작품 설명도 하고 있어 교육적 효과도 뛰어나다. 11월 17일 덕성아트홀에서 열린 항일음악회는 덕성여대(설립 초기 근화槿花여학교) 설립자이면서도친일파송금선(1905~1987)에 가려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차미리사(1880~1955) 선생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지난 광복절 훈장이 추서된 허은(1907∼1997) 여사의 사연을 아들 이항증 선생(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11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항일음악회는 독립군과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라는 주제로 꾸며졌다. 국방부 군악대대가 찬조 출연했고 광복군 장이호(1916~1950) 선생의 아들 장병화선생(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편지를 낭독했다. 특히 이날 음악회는 배우 강하늘·지창욱, 아이돌그룹 인피니트의 김성규 등 연예인 출신 병사들이 참여하는 육군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팀이 무 대에 올라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이 밖에 두 차례의 항일음악회에는 가수 이상은, 안치환과

제12회 임종국상 시상식과 임종국 선생 29주기 추모 답사 개최

2019년 1월 2일 53

• 김혜영 연구원 제12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11월 9일 오후 7시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회원 및 각계인사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의 축사, 이민우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경위 설명, 시상 그리고 수상자들의 수상연설, 임종국 선생이 사용하시던 기타 기증식,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14건, 사회·언론 부문 5건 등 총 19건이 올라왔으며, 10월 12일 열린 심사위원회 본심에서 열띤 토론 과정을 거쳐 학술부문에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 소장을, 언론부문에는 원희복 경향신문 선임기자를 수상자로 최종 선정하였다.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하여 김동명 국민대 교수, 박찬승 한양대 교수, 장완익변호사, 정근식 서울대 교수,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은, 199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 참여해온 활동가이자 2004년부터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관으로 과거사 청산작업에 참여한 연구자이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미결과제가 산적한 가운데 해산된 뒤에는,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산하 인권평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히는 지난한 작업을 지속해왔다. 수상저서인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1백만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의 실태를 총체적으로 조명한 노작이다. 이 책은 민간인학살의 양상을 유형화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실화해위원회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피해상황도 정리해 담았다. 신기철 소장은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한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2019년 1월 2일 45

김민철 책임연구원   10월 30일, 한국대법원은 마침내 긴 세월을 끌었던 사건에 마침표를 찍었다. 신일철주금이라는 일본의 글로벌회사에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강제동원·강제노동의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1997년 일본에서 제소한 때로부터 21년, 다시 2005년 한국에서 제소한 지 13년 만에 나온 판결이다. 역사의 눈으로 보면 1945년 12월 재일조선인들이 신일철주금의 전신인 일본제철을 상대로 미수금과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작한 때로부터 73년 만의 결론이었다. 다시말해 73년 만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법적으로 구제된 것이다. 실은 너무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일한 대가를 받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그 사실 자체가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그 비정상의 시간을 정상으로 바꾸는데 이렇게 오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비단 시간뿐이겠는가. 피해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지원자와 시민들이 흘린 땀 역시 그 시간의 두께만큼 쌓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온 법원의 판단이기에 도중에 논리가 바뀐 것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식민지배로 인해 빚어진 강제동원의 피해를 확정하고 배상의 책임을 밝혔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구제 선언이라 평가할 만하다. 과거청산 또는 과거극복의 모범국이라 불리는 독일조차 독일 정부와 기업이 기금을 내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을 만들어 강제동원 피해자를 구제할 때도 ‘법적 책임’을 부정했다. 그런데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게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책임을 물었다. 개인의 권리 구제라는 측면에서 국제법상으로도 매우 획기적인 판결이 나온

조봉암의 필화와 진보당 강제 해산

2018년 11월 26일 296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 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 편집부   한국정치사는 수구세력의 부패와 무능이 당장 붕괴할 것 같지만 야권은 지리멸렬과 편협성, 분파성 때문에 국민이 쟁취해준 집권 기회조차 도로화(徒勞化)시킬 것 같은 막장 드라마의 연속이다.   분당해도 집권을 위해서는 태연히 뭉치는 철면피 오뚝이 수구세력과는 달리 야권은 같은 당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꿍꿍이 속셈이 제각각인 콩가루 집안이다. “악마는 나이 지긋하다”(괴테)는 지적처럼 악랄과 교활로 단련된 둔갑술로 종횡무진하는 괴력 앞에 알몸으로 맞선 야권. 순진한 정의가 교활한 불의에 패배할까 불안한 세월이다. 민주세력 분열의 비극 조봉암   이런 정치행태, 수구세력의 몰염치와 민주세력의 지리멸렬이란 정당구조가 굳어진 갈림길에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1899~1959)의 필화와 진보당의 강제 해산이 자리하고 있다.   8·15 해방 직후, 공산당과 결별한 조봉암은 불가피한 상황이면 단정 총선에도 참여하여 통일을 추구해야 된다는 현실적인 행보를 취했다. 그는 극우극좌 노선인 친미·친소나 반소·반미가 아닌 비미비소(非美非蘇) 민족노선을 주창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정치역학은 유럽의 보혁이념성 양당구조가 아닌 미국식 보수 양당제로 얼어붙어버렸다. 야당의 아킬레스건인 레드 콤플렉스에 기죽어 북진통일 노선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의 비극이 조봉암의 필화였다.   늙은 여우 이승만의 종신집권에

효창원 수난사는 왜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나? – 효창공원, 결국 애국선열묘역으로 남다

2018년 11월 26일 397

식민지 비망록 41  이순우 책임연구원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6월 15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이날 아침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때마침 쏟아지던 소나기도 그치고 요란하던 전차와 자동차 소리도 잠시 적막으로 변하던 순간 김구(金九) 민주의원 총리와 함께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윤봉길(尹奉吉, 1908~1932), 백정기(白貞基, 1896~1934)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였다. 최석봉(崔錫鳳, 한독당 경남지부장), 윤남의(尹南儀, 윤봉길 의사 동생), 이강훈(李康勳, 상하이 육삼정 의거 동지) 등 세 사람의 가슴에각각 안겨 운구된 이들 유해는 역전 광장에 모여든 추모 인파를 헤치고 두 대의 봉영차에 나뉘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로 옮겨져 그곳에 안치되었다.   이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그해 7월 6일에는 삼의사의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원래 계획은 6월 30일에 장의를 실시하려 했으나 여러 날 폭우가 내려 교통이 두절되면서 삼의사의 유가족과 각 지방 대표자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묘역 조성을 위한 산역(山役)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일정이 연기되었다고 알려진다.   이날 아침 10시에 태고사를 출발한 장의행렬은 안국동 네거리, 종각, 남대문, 서울역, 연병정(남영동), 용산경찰서 앞을 거쳐 금정(錦町, 효창동)에 이르렀고, 효창원에 도착한 것이 낮 12시40분이었다. 특히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가 ‘원효로 2가’인데다 1918년에서 1924년 사이에 살았던 집터인 ‘효창동 118번지’가 행로 도중에 인접한 까닭에 남다른 감회를 자아냈다. 이어서 오후 1시에 식이

김병상 신부님, 인천 하늘의 붉은 독수리 신부님

2018년 11월 26일 311

임헌영 소장 이 글은 올 12월에 출간 예정인 ‘김병상 신부님 자서전’에 실린 글이다.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 신부님은 지금 병상에 계신데 하루속히 쾌차하시길 빈다.   작년(2017년) 봄 어디선가 가톨릭 인천교구 사제였던 고 최분도(Benedict Zweber, 1932-2001) 신부의 평전인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에 대한 안내 기사를 보며 울컥 하며 홀연히 저 어두웠던 1970년대의 후반기를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통치가 정면 공격을 당하면서 한참 휘청거렸던 시기에 나는 모종의 인연으로 이재문 선생과 자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제1차 인혁당사건(1964)에 연루되었던 까닭에 제2차 인혁당 사건 조작을 위한 검거(1974) 조짐이 보이자 발 빠르게 잠수를 타고 대구를 벗어나 서울에 머물렀다. 만약 그가 체포당했다면 박정희 정권 최대의 사법살인사건인 역사적인 1975년 4월 9일의 8열사가 9열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억울한 희생에 가장 가슴 치며 크게 통곡한 이는 아마 가족 말고는 이재문 선생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선생은 매년 이날을 맞아 추모의 예를 올리곤 했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쨌든 이재문 선생은 서울에서 마술사 같은 변장으로 피신하면서도 민주투쟁을 그치지 않았고, 이와 정비례해서 수사당국은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 못지않은 투사인 부인 김재원 여사가 어린 남매들을 데리고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인천 최분도 신부의 성당이었다. 신부님은 김재원 여사의 정황을 익히 알고서 스스로 보호해주고자 그 가족을 성당에 기거토록 했기에 감시는 으레 따를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 소송, 원고 승소 최종확정 판결

2018년 11월 26일 225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주식회사’)에 동원되었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최종 확정했다.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청구권은 한일협정으로 소멸되지 않았다”고 하며 원고들의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피고기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소송의 원고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제철의 오사카 제철소, 가마이시 제철소, 야하타 제철소에 동원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이다. 2005년 2월 28일, 원고들은 서울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하며 원고 1인당 1억 원의 위자료를 청구했지만 1심과 항소심에서 원고들의 청구는 모두 기각당했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던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바 있다. 이후 5년이 넘게 대법원 심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최근 검찰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 박근혜와 대법원장 양승태가 ‘재판거래’를 하며 이 사건의 판결을 지연시키고, 결론을 뒤집으려 했던 것이 드러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번 판결은 국내에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 3건 중 첫 번째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로 나머지 2건의 항소심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재판거래’로 인해 심리가 지연되면서 2018년 11월 현재, 3건의 ‘신일철주금’ 소송 원고 12명 중 10명이 사망했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박정희 합성사진 관련 명예훼손 피고 방자경 형사재판 방청기

2018년 11월 26일 235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10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 301호 법정 문이 열렸다. 긴장된 마음으로 방청석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방자경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분이죠?” 그러면서 자기가 쓴 것이라며 책 2권을 내밀었다. 임헌영 소장님께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고 어이도 없었지만, 이 소송이 시작된 2016년부터 재판 때마다 매번 봐온 사이니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었다. 별말 없이 책을 받아서 옆에 놓을 때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왔다.   방자경 씨를 고소했던 2016년, 경찰조사를 받던 방자경 씨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전화로 사과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수년간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각종 태극기 집회에서 연구소를 종북, 간첩, 빨갱이로 비방하고 박정희 합성사진을 조작한 범죄자로 낙인찍은 사람이 고작 ‘사과 전화’ 한 통으로 끝내겠다니. 그런 방식의 사과는 받을 수 없었다. 연구소는 거부의 뜻을 명확히 전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방자경 씨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정절차도 있었지만 방자경 씨는 그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민사재판 때부터 방자경 씨 옆에 항상 함께 있던 그 사람, 서석구 변호사가 보이지 않았다. 동년배의 여성 한 명만 동석해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고 방자경 씨가 피고석으로 나갔다. 사실 필자는 이 재판부에 불만이 많았다.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피고측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재판부의 태도에 패소를 예상하기도 했었다. 피고가 나오지 않으면 기다려주고 선고를 연기해서 방어권을 최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