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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기념 축구대회’… 운동장에 깃든 독립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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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독립전쟁 기념 축구대회’… 운동장에 깃든 독립정신

이정윤 백기환 선생 증손녀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지켜낸 시민들의 자축의 시간
2025년 6월 22일, 운동장 한복판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날은 단순한 경기의 날이 아니었다. 114년 전의 바로 이날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고, 105년 전 봉오동 전투에서 첫 승전고가 울렸다. 그리고 오늘, 후손들은 그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축구공을 들었다. 기념식도, 학술 세미나도 아닌 ‘독립전쟁 기념 축구대회’가 열린 것이다. 축구와 독립운동이 무슨 상관이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도 ‘메르데카(Merdeka) 컵’이라는 유서 깊은 축구대회가 있다. ‘메르데카’는 말레이어로 ‘독립’을 뜻한다. 독립은 군복 입은 사람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 경기장에서처럼 독립정신을 기억하려는 시민의 몸짓 또한 독립운동이다.

한동건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윤석열 정권은 육사 내 독립전쟁 영웅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하려 했지만, 시민들이 지켜냈습니다. 이번 대회는 그 승리의 축제입니다.”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이회영. 그분들은 총을 들었고, 우리는 오늘 공을 들었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시민은 다른 방식으로 독립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졌던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하며 봉오동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6월, 바로 그 상징성을 담아 6월을 ‘경기의 달’로 택했다.

독립정신의 상징적 장소들, 그러나 연이어 거절되다
처음 독립전쟁 기념 축구 경기를 열고자 했던 곳은 국회 운동장이었다. 2024년 12월, 계엄군 헬기가 착륙했던 바로 그 자리, 그 공간에서 “독립정신으로 내란세력과 역사부정세력을 이겨내자”고 외치려 했다. 그러나 국회 운동장은 다른 단체가 예약해 놓았기에 주최 측은 육군사관학교 운동장의 사용 허가를 요청했다.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과 광복군임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공식적인 사유는 “다른 단체가 먼저 예약했다”는 것이었지만, 육사가 운동장을 빌려주지 않은 진짜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12·3 내란 당일, 소형기 교장이 전격 취임했고, 계엄 직후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계엄 지지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그런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지금, 육사는 여전히 내란세력의 뿌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독립정신이 깃든 그 공간조차 시민들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축구 경기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경기기계공고 운동장에서 열렸다. 더는 상징적 공간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누구도 가로막지 못하는 공간, 시민에게 열려 있는 공간을 선택했다. 그곳은 우원식 국회의장의 지역구 한복판이었다.

국회의장 취임 전까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카자흐스탄과의 우호 증진에 노력한 우원식 의장의 시축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이날 두 팀-신흥 FC와 홍범도 FC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경희대와 연세대 민주동문회 등 시민사회와 학계, 민주화운동 세대가 함께 구성한 팀이었다. 경기 결과는 1:1과 2:2 보기 좋은 무승부였다.

이어진 번외 경기에는 대한고려인협회 소속 20대 청년팀이 출전했다. 40대 이상으로 구성된 신흥 FC와 홍범도 FC를 상대로 이들은 날렵하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단지 세대 간 체력의 차이를 넘어서, 청년들이 역사를 잇는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우원식 의장은 시축 후 이렇게 말했다. “저의 외조부 김한 선생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뒤 소련으로 망명했고, 결국 스탈린에 의해 희생된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 역시 고려인의 후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 “이제는 고려인 청년들과도, 사관학교 생도들과도 함께 어우러지는 더 큰 대회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 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국군의 정체성이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되묻는 복원의 외침이자, 이 시대의 시민연대가 만들어낸 공동 선언이었다.

법만 바꾼다고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이 세워지지는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연혁을 보면 공군만이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기록하고 있다. 육군은 미군정 시절을, 해군은 연혁상 공백을 두고 있다. 헌법이 명시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여전히 공염불로만 존재한다. 부승찬 의원은 지난해 10월, 국군조직법 제1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한국광복군의 역사를 계승하는 국민의 군대”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내용의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국군의 정통성은 법안 문구 하나 고친다고 저절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현재 사관학교 교육과정을 보면 한국사 교육은 약소하고 민주시민교육은 아예 없다”면서 사관생도들이 6·25 전적지 방문과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 그리고 4.19 묘지, 5.18 묘지도 참배해야 하며 더 나아가 교육과정의 개정뿐 아니라 사관학교의 문화 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군은 단지 전투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정신을 계승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 정신은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 동시대의 시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만 살아남는다.

다음 경기는 9월 17일, 광복군 창설일
경기는 무승부였다. 하지만 운동장 밖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진짜 승자는 시민이었다는 것을. 그날, 우리는 묻고 있었다. “이 땅의 군대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가?” 그날의 경기, 박수와 함성, 그리고 운동장 위에서 흘린 땀방울까지 모두 다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직접 되살려낸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일을 기념하는 다음 경기를 준비 중이다. ‘독립기념 축구대회’가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시민과 독립군의 후예인 사관생도(육사, 해사, 공사, 3사관학교, 간호사관학교) 간의 단합과 소통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그날까지, 그리고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총 대신 공을 들고, 기념식 대신 운동장에 서며, 역사왜곡에 맞선 시민의 독립전쟁을 이어갈 것이다.

* 이정윤 씨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백기환 선생의 증손녀로 현재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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