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2025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촛불행동
[초점] 2025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촛불행동 ‘전쟁하는 나라와 야스쿠니 시스템 부활’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200여 명의 우리는 행사장인 전수도회관 앞 도로에서 행진 구도로 섰다. “선생님! 선생님은 여기, 여기 서세요.”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행렬의 선두를 추스렸다. 이희자, 박남순, 박진부 선생들과 서승 선생이 맨 앞이다. 물론 낮부터 회관 앞에서 진을 치던 일본 극우들과 경찰들도 꽤 있었다. “야스쿠니 노오(야스쿠니 반대)” “고우시 한따이(합사 반대)” “사베츠 한따이(차별 반대)” “오키나와 기지 한따이(오키나와 기지 반대)” “센소우 한따이(전쟁 반대) “헤이와 마모루(평화 수호)” 우리는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낭랑한 구호를 따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비바람 부는 8월 10일 일요일 저녁 7시 도쿄 한복판이었다. 야스쿠니의 어둠에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이 올해 20주년이니 촛불집회도 20회째이다. 한국, 일본, 대만, 오키나와 4개국에서 활동가들과 단체가 함께 하였다. 1시부터 5시간 30분 동안 열린 심포지엄에서 각국의 상황과 평화현안이 발표되었다. 다카하시 선생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란과 이스라엘 전쟁은 가히 세계 3차대전이라 불릴 수 있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움직임과 한국, 대만, 일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하였다. 후지이 선생은 대만 집권당의 문제와 대만 젊은이들의 엄혹한 현실과 희망 찾기를 절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조선대 노영기 선생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군과 정치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윤석열 파면을 이끈 광장의 의미를 다루었다. 이상의 심포지엄 주제는 그날 밤 비바람 속에서 행진하며 외친 구호로 요약된다. 곧 야스쿠니 NO는 전쟁 반대,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회의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초점]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회의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근현대사기념관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8월 8일(금) 강북구청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였으며 재단법인 역사와 책임이 후원하였다. 학술회의는 기조 발제와 4개의 주제 발표 그리고, 종합토론으로 구성되었다. 기조 발제는 ‘독립국가 건설의 이상과 지향(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을 다루었다. 첫 번째 주제는 ‘수립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법치·주권’ 국가 이상’(김은지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을 다루었고, 두 번째 주제 ‘조선민족혁명당의 ‘혁명’과 그 추진 활동에 관한 검토: 해방과 국가건설 구상을 중심으로’(류동연 국가보훈부 학예연구관)를, 세 번째 주제 ‘코민테른의 민족통일전선론과 조선 공산주의자의 신국가 수립 구상’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에 관한 내용을, 네 번째 주제는 ‘조선건국동맹 운동가의 해방일지 : 장용석의 편지와 해방정국의 삶’(이규수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장)을 다루었다. 종합토론은 김민철 경희대 교수가 주재하였다.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주제별 발표자와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조은경(독립기념관 학예연구관), 윤덕영(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조형열(동아대 교수)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참여해 뜻깊은 논의를 나누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열들이 어떤 나라를 꿈꾸었는지 조명하고, 대한민국의 미래상에 대한 지혜를 모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이현아
근현대사기념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 근현대사기념관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 개막식을 8월 1일(금) 오후 2시에 개최하였다. 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강북구 이순희 구청장과 강북구의회 김명희 의장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번 특별전은 수유 국가관리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삶과 정신을 재조명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양한 유물과 기록을 통해 되돌아보고, 그분들이 우리에게 남긴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자리다. 무너미 언덕에 고요히 잠든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느끼며,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시는 서울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여 12월 31일까지 진행된다. 또한 국가보훈부 지원을 받아 제작된 디지털 실감 영상 ‘조국의 밤을 지킨 별들’도 전시되어 관람객의 몰입감을 높인다. 이 영상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정신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전시에 깊이를 더한다. 광복절 당일에는 체험행사 ‘광복구의 영웅을 소개합니다’를 진행하였다. MBTI로 나만의 독립운동가 찾기, 퀴즈풀이, 손병희 자개 틴케이스 만들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어린이와 청소년, 학부모 등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와 함께 광복 80주년 기념전시 ‘Heritage: 되찾은 빛, 이어갈 유산-이현승 옻칠 특별전’이 서울북부보훈지청과 근현대사기념관 주최·주관으로 8월 12일부터 9월 26일까지 진행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정햇살
광복 80주년 맞아 기념음반 〈해방의 노래〉 제작 보급
[초점] 광복 80주년 맞아 기념음반 〈해방의 노래〉 제작 보급 연구소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가 〈광복 80주년 기념 : 해방의 노래〉 음반을 제작해 보급한다. CD와 USB에 실린 음원들은 광복 직후부터 1940년대 말까지 해방의 감격을 표현해 대중의 사랑을 받은 노래들이다. 당시 발매되었던 SP음반을 복각한 20곡과 악보를 바탕으로 재연한 17곡 등 총 37곡을 함께 실었다. 누가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라고 말하는가? 일제의 패망은 필연이었다. 해방 며칠 전인 7월 24일에도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인 ‘경성 부민관 폭파 의거’가 일어나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들과 아시아 각국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해방의 그 순간에도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과연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온 것인가? 아니다!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 아니라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려왔다. 〈해방의 노래〉 음반은 그때의 감격이 오롯이 실린 가요 모음집이다. 작사가와 작곡가의 면면은 해방공간의 실상을 반영하듯 다양하다. 일제 말 군국가요가 우리 음악사의 어둠이 었다면,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해방의 노래들은 빛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의 노래〉 음반에 담긴 37곡에 작사·작곡, 노래, 연주 등으로 참여한 56명 중 14명(김건, 김성태, 김해송, 남인수, 박시춘, 안익태, 이봉룡, 이인범, 이재호, 이흥렬, 임학수, 장세정, 조명암, 최희남)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천황’의 나팔수로 군국가요를 전파하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애국자가 되어 해방을 찬양했던 행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여파로 월북하거나 납북되어
연구소, 독립운동가 37명 포상 신청
[초점] 연구소, 독립운동가 37명 포상 신청 민족문제연구소는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부에 37명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연초부터 연구소는 체계적인 독립유공자 발굴 계획을 수립하고 조사·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 결과 1차로 37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상세한 내용이 담긴 포상신청서를 작성한 것이다. 이번 독립운동가 발굴과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의 분석 대상은 2023년에 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이하 약명부)에 실린 인물들이다. 『약명부』는 일제 고등경찰이 요주의 조선인에 대한 인물정보를 각 도별로 정리해 일본과 조선 등지의 보안 관계자 그리고 연안·국경 지역의 경찰서와 헌병대 치안 책임자에게 배포한 문서철이다. 1945년 3~4월 무렵 작성된 『약명부』에는 모두 790명의 신상 정보와 함께 당시 주소와 직업, 항일 행적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일제판 블랙리스트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을 입증할 강력한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중요자료이기도 하다. 연구소는 『약명부』에 수록된 인물 가운데 169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지만, 나머지 인물들 가운데도 독립운동 업적이 명백한 이들이 상당수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1차로 전라남도 관할 인물을 대상으로 정밀 조사를 실시했다. 전라남도 관할 인물은 모두 206명인데, 이미 서훈된 분이 59명이었다. 연구소는 나머지 인물들 가운데 국가보훈부의 현행 서훈 기준을 충족하는 인물을 선별하는 작업을 먼저 진행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정부보고서에 수록했던 이선홍, 강영석 같은 친일파는 물론, 1945년 현재 ‘면서기’, ‘면장’ 등 부일 협력 행적이 있는 사람들은 조사대상에서 제외했다. 최종적으로 일제에 의해 ‘처벌’받은 기록이 있는
순국오열사(殉國五烈士) 인쇄물
[소장자료 톺아보기 73] 순국오열사(殉國五烈士) 인쇄물 이번 호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한국광복청년회(韓國光復靑年會)에서 제작한 순국오열사 인쇄물이다. 이준(李儁)을 중심으로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의 사진이 있고, 왼쪽에는 각 인물들의 약력이 간략히 적혀있다. 상단 중앙에 태극기가 위치하고 각 사진 주변에는 무궁화 문양이 감싸고 있다. 다만 제작일자는 기재되어있지 않다. 먼저 순국오열사의 이력을 전재한다. 이준(1859~1907) 선생 서기 1907년, 전 평리원 검사로 관계를 떠난 선생은 우국단심에 불타는 동지 이상설(李相卨)선생과 동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여 침략자 왜적의 비행을 봉쇄하려고 고종황제의 밀칙(密勅)을 받들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대기중인 동지 이위종(李瑋鍾) 선생과 마침내 동년 4월에 국경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약소국 평화를 유지하려는 회의는 아니었으니 그들은 세 선생을 한국의 정식 대표임을 끝끝내 거부하다가 최종일인 7월 5일에야 겨우 이선생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우국지성에 불타는 선생의 일언일구는 왜적 대표에 폐부를 찔러 당황케 하였으나 선생의 정의를 인식치 못한 열국 대표는 도리어 왜국의 비행을 지지하려 하나 통분한 선생은 그들 면전에서 할복하여 정의를 절규하시어 열국 사신의 간담을 서늘케 하시고 순국의 충혼이 되시었다. 안중근(1880~1910) 의사 1880년 황해도 출생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열렬한 애국지사이었다. 침략자 왜적에게 소위 5개조약(을사늑약), 7개조약(정미조약) 등으로 국운은 날로 기울어짐에 통분한 의사는 조약의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세 발의 총탄으로 즉사시키고 조선만세를 고창하며 분연히 포박되어 1910년 3월 26일 의사는 교수형의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민족사랑 202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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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관련한 단상들
[후원회원마당] 독도와 관련한 단상들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은평역사답사> ‘2025, 독도 영유권 칙령 반포 125주년 기념 울릉도·독도 답사’를 6월 26일(목)부터 28일(토)까지 기획·진행해주신 은평구청과 민족문제연구소에 감사드리며, 독도 수호에 선구자적인 노력을 하신 최종덕·이종학 두 분의 공적을 이번 답사 참가하신 분들과 함께 되새겨보고자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 2025년 7월 1일 울릉도 독도 답사 참가자 한상권 아룀 1.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이고, 우리가 실효 지배하고 있다(고유 영토설). 교육부가 마련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에는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역사적 연원과 내력을 통해 증명하고,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독도 불법 편입 과정의 문제점”을 한국사 교과서에 서술하도록 되어 있다. ‘고유 영토설’에 입각해,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이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부당한 것임을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 러·일 전쟁 때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과서에 서술하라는 게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인 것이다. 2. 반면 일본은 독도, 센카쿠열도 등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독도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독도를 분쟁지역화하겠다는 입장 을 날로 강화하고 있다(분쟁 지역설). 일본 교과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 내용이 실리기 시작한 시기가 2005년부터이다. 일본 고등학교 지리교과서를 보면, 독도를 시마네현 소속으로 하고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포함시켜 일본의 고유영토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독도 관련 내용 기술도,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5종), ‘독도가 한국에 점거되어 있다’(3종) ‘한일 간에 독도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3종)
견피(犬皮) 공출과 임실 견혼비의 건립과정
[식민지 자료관 3] 견피(犬皮) 공출과 임실 견혼비의 건립과정 이순우 특임연구원 “왕년에 내가 만주서 개장사할 때는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사람이라면 필시 살면서 이런 식의 농담을 몇 번쯤은 입에 담아봤을 것이다. 왜 하필 만주에서 개장사를 했다는 표현이 생겨났을까도 싶지만, ‘개털모자’라든가 ‘개가죽외투’의 존재에서 떠올려지듯이 만주지역의 지독한 추위와 어우러진 그 시절의 고생담(苦生談)이 그러한 표현으로 함축되어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보면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벌어진 무수한 식민지 수탈사를 통틀어 우리 개들이 겪어야 했던 어마어마한 희생(犧牲)의 장면들도 결코 빼놓기가 어렵다. 일찍이 『동아일보』 1934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조선견피(朝鮮犬皮), 연(年) 8만 5천 매(枚), 군수용품(軍需用品) 및 방한(防寒) 등에 애용(愛用)되고, 외국수출(外國輸出)도 다수(多數)」 제하의 기사를 보면, “군수용품은 적피(赤皮)로써 가격은 중품(中品)이 많이 수요되며, 용도는 방한용(防寒用)의 동의(胴衣)에 사용된다”고 소개한 구절의 눈에 띈다. 그리고 이러한 군용피복을 생산하기 위한 견피공출(犬皮供出)이 본격화한 것은 — 다음의 신문기사에서 보듯이 —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의 시점이었다. (1) 『매일신보』 1938년 1월 16일자, 「방한피복(防寒被服)의 재료(材料)로 조선견모피(朝鮮犬毛皮) 헌납(獻納), 조선개의 모피는 퍽 따뜻하다, 군당국(軍當局)은 크게 감사(感謝)」 제하의 기사: 방한피복의 재료로서 모피가 부족되어 그 보급(補給)에 대하여는 비상시인 만큼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이것이 충분치 못하여 군당국에서는 각 방면과 협력해서 모피자원의 공급방법을 여러 가지로 연구해 왔었다. 그런데 이번 경기도 농무과의 스기모토 기사(杉本技師)는 경기도 내의 축견가(畜犬家)와 연락하여 방한피복재료로서
지금도 조문기는 독립전쟁 중이다
[특집] 지금도 조문기는 독립전쟁 중이다 방학진 기획실장 일제는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이어 9월 3일에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총포 및 화약의 제조·판매·운반·교환·소유를 금지하면서 시행령을 통해 그 단속 방법까지 치밀하게 규정하였다. 화약은 모두 불태우고(燒棄) 만약 불태울 수 없으면 물속에 버려서 나중에 건져서 말려도 사용할 수 없게 할 것. 탄환도 화약과 같이 처리할 것. 총포류는 병기로 사용하지 못하게 처치하기 위하여 변형·절단 등 적당한 방법을 집행할 것. 활(弓)·화 살(矢)·칼(刀)·창류는 불태울 것(燒棄). 고대 갑옷과 투구(甲冑)는 군부에 송부할 것. 변형 또는 소기한 금속 본질은 신분이 확실한 자에게 매각할 것. 군아(郡衙)에서 이전에 모아둔(募置) 것으로서 포군이 사용한 병기도 앞과 같이 정리할 것. 한마디로 한반도 전역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다. 산포수 대장이었던 홍범도가 본격적으로 의병 투쟁에 나선 계기도 바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제정이었다. “단군 이래로 포수의 총을 빼앗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소. 총을 포기하는 포수는 포수가 아니오.”(소설 <범도>에서)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총과 폭탄을 사용한 독립투쟁 즉 의열투쟁은 진공 상태에서 소리를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현재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등재된 독립운동가 18,258명을 운동 계열별로 보면 3·1운동(34.86%)–국내항일(17.22%)–의병(15.00%)–만주방면(13.81%) 순이다. 의열투쟁 계열은 133명으로 1%도 되지 않는다. 의열투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경우는 모두 국외에서 전개한 의거이다. 국내에서 진행된 의열투쟁은 1905년 8월 서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