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일본인 도지사의 휘호로 새겨진 ‘안양풀(安養プール) 바위글씨(1932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7] 일본인 도지사의 휘호로 새겨진 ‘안양풀(安養プール) 바위글씨(1932년)’ 1938년에는 혼다 사다고로(本田貞五郞) 안양역장의 기념비도 건립 이순우 특임연구원 수도권 전철 1호선 관악역(冠岳驛,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서 내려 10여 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안양예술공원의 초입에서 삼성천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옛 유유산업 안양공장 터에 남아 있는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이 나타난다. 이 구역의 주변에는 중초사지 당간지주, 중초사지 삼층석탑, 안양 석수동 마애종(磨崖鐘)은 물론이고 그 위쪽으로 안양사 귀부(安養寺 龜趺) 등이 흩어져 있으므로 이러한 문화유적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가는 도중에 예술공원교의 난간에서 상류 쪽을 바라보면 하천 바닥에 물막이 둑을 만들어놓은 자리가 눈에 띄는데, 여기에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 하나가 더 남아있다. 이곳을 내려가서 살펴보니 석축 사이에 끼인 큼직한 바위에 “安養プール, 昭和七年八月 竣工, 松本誠 書[안양풀, 소화 7년(1932년) 8월 준공, 마츠모토 마코토 씀]”라는 제법 큼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흔히 안양유원지(安養遊園地)라면 가장 먼저 퍼뜩 떠올리는 ‘수영장(水泳場, pool)’의 존재를 알려주는 동시에 그것이 있던 자리가 바로 여기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치이기도 한 셈이다. 여기에 나오는 마츠모토 마코토라는 이는 이 글씨를 쓸 당시에 경기도지사(재임 1931.9.23~ 1934.11.5)였고,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8년 동안 조선제련 사장을 거쳐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회장을 지내는 등 식민지 조선에서 총독부 고위관료 출신이면서 나름 재계(財界)의 거물로 군림한 인물이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북리(덕적도)에 남아 있는 ‘조난자위령지비(遭難者慰靈之碑)’의
어느 ‘장수 청년’의 사이판 종횡기
[연구소 글방 12] 어느 ‘장수 청년’의 사이판 종횡기 김명환 선임연구원 어르신을 만난 것은 2007년 5월의 햇살 좋은 날이었다. 당시 필자는 태평양전쟁 동안 남양군도로 동원되었던 분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연락이 닿아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내달렸다. 어르신의 집은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아울리는 곳에 있었다. 당시 82세였던 어르신은 이 고장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하였다.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난 적이 한번 있었는데, 그 시절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시국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불가피한 사건은 너무도 강렬하여 여든이 넘은 노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 겪었던 일의 대강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야기의 주인공을 ‘장수 청년’으로 부르고자 한다. 고향을 떠나 사이판으로 가다 장수 청년은 1926년생으로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그나마도 다 마치지는 못하였다고 했다. 보통학교는 식민지시기 조선인 아동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다. 보통학교는 4년제 혹은 6년제로 운영되었는데, 장수 청년이 살던 곳은 한적한 시골이었으므로 4년제 보통학교가 설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도 다 마치지는 못하였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 장수 청년은 일본어를 못하였다고 했다. 고달픈 일상이 연속이던 ‘소화16년’ 어느 날 장수 청년의 눈길을 끄는 일이 있었다. ‘흥발주식회사’라는 곳에서 이민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흥발주식회사의 이민 모집원들이 남원, 순창, 임실 방면을 돌며 노무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흥발주식회사’의 본 명칭은
한국군 베트남 참전 60주년에 떠난 ‘몽투투 평화기행단’
[기행문] 한국군 베트남 참전 60주년에 떠난 ‘몽투투 평화기행단’ 김순흥 광주지역위원장 1964년 그날, 젊은이들은 총을 들고 떠났다. 2024년 오늘, 우리는 꽃을 들고 떠났다. 베트남으로. 관광지를 찾아 떠난 여행이 아니다. 휴양차 간 여행도 아니다. 국가폭력의 가해자 입장에서 우리가 저질렀던 참혹한 현장을 찾아 사죄의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다.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경험한 우리가, 사죄는커녕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을 향해 가졌던 피해자의 입장을 알기에 꼭 가야 한다고 벼르던 여행이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문제로 30년이 넘게 일본정부를 향해 투쟁하면서 우리에게 사죄하고 있는 나고야의 의인(義人)들처럼, 우리도 이제는 우리가 저지른 것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첫날(3.21) 바오닌 작가와 만남 하노이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전쟁을 처절하게 그린 소설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 선생의 아파트로 갔다. 아파트 동단위로 경비원과 아파트 입구 현관 경비원이 2중으로 있는 강남 못지않은 고급 아파트였다. 작가의 잘사는 모습에서 전 세계적으로 그 소설이 꽤나 잘 팔렸고 인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바오닌은 대장 수술 후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일찍 퇴원했다고 한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작가가, 열흘 전에 대장 절제 수술을 한 환자의 몸이라서 자신은 밥도 술도 하지 못하면서도, 반가이 맞아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저녁을 차려준다. 큰 사람의 모습이다. “17살에 동료 500명과 입대하여 6년간 치열하게 싸워 승리했을 때, 살아남은 동료는 5명뿐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동작구, 국립묘지 그리고 김학규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
[인터뷰] ‘동작구, 국립묘지 그리고 김학규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 방학진 기획실장 개봉 초반 집권여당과 반공 기독교회가 총결집해 띄워 준 영화 〈건국건쟁〉이 국민의 외면과 영화 〈파묘〉 개봉으로 주춤하자 〈건국건쟁〉 김덕영 감독은 〈파묘〉를 언급하며 “항일 독립? 또 다시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며 “건국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건국전쟁을 덮어버리기 위해 파묘로 분풀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여하튼 윤석열 정권이 전폭 지원한 〈건국건쟁〉은 수구언론의 호평이 무색하게 1일 평균 관객 2만 4천명에 불과했다. 반면 올 최초 천만 영화에 등극한(3월 24일 현재) 〈파묘〉는 작년 〈서울의 봄〉과 함께 새삼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드높였다. 〈파묘〉와 〈서울의 봄〉의 공통점은 묘지다.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 맞선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의 묘지가 있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늘어날 때마다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이다.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외에 ‘마음껏’이라는 마을공동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을 펴냈고 동작FM에서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라는 팟캐스트도 하고 있습니다.” 김학규 소장의 책 내용은 대부분 〈오마이뉴스〉에서 ‘동작민주올레’를 검색하면 읽을 수 있다. 김학규 소장의 이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민주열사박종철열사사업회 사무국장 경력이다. “저는 국사학과로 언어학과인 박종철 열사와 학과는 다르지만 대학 동기이다 보니 10여 년간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을 맡게 됐고 자연스럽게 현재까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약칭 추모연대)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모연대 교육위원장 직함도 있습니다. 현재 추모연대는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2)
[소장자료 톺아보기 57] 풍속화보 청일전쟁편에 깊숙이 녹아있는 ‘문명과 야만’이란 편향된 시선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2) 1894년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군 군함을 기습공격해 격침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청일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논설을 기고하였다. 그 논설에서 후쿠자와는 청일전쟁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전쟁은 청일 양국 사이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근원을 따지자면 문명개화의 진보를 꾀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고 하는 자 간의 싸움이지, 결코 양국 간의 싸움이 아니다.(「日淸の戰爭は文野の戰爭なり」, 『時事新報』 1894.7.29)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은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침략의 정당성을 담보하고 일본인의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어 당시 지식인과 언론인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었다. 『일본신문(日本新聞)』의 사장 겸 주필인 구가 가쓰난(陸羯南)도 청일전쟁이 조선의 현상(現狀)을 좌시할 수 없는 인도상의 후의(厚誼)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전쟁의 목적은 “동양의 진보를 꾀하기 위해 중국이라는 야만을 치는 데 있다”(「征韓の王師」 1894.8.16)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정한론(征韓論), 북진론(北進論)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이후 대동아공영권이란 미명하에 1930~40년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추동하는 대외침략의 이데올로기로 확장되었다. 청일전쟁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벌인 최초의 근대전이어서 전사회적으로 전쟁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대단했다. 이에 따라 『아사히신문』, 『고쿠민신문』, 『요미우리신문』등 주요 일간지나 잡지사들은 조선과 중국의 전장에 수많은 종군 기자와 화가, 사진사를 파견해 그때그때의 전쟁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자 했다. 조재곤의 연구(조재곤 2024, 336쪽)에 따르면, 청일전쟁 당시
민족사랑 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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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2
[후원회원마당]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2 – 수운 최제우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입각한 인간상 – 이정아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이번 〈민족사랑〉에 싣는 글은 천도교 기관지 〈신인간〉 160호에 실었던 졸고 「방정환의 새로운 어린이」와 〈방정환 연구〉 5호에 실었던 「천도교 개벽사상을 기반으로 한 방정환 어린이교육운동의 현재적 함의」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방정환이 생각한 교육의 목적을 ‘어린이 주체성 확립’으로 보고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1.9.~1931.7.23.)에 관한 두 번째 교육적 단상을 논의하고자 한다. 방정환은 이전의 전통적 아동교육관과 대비하여 새로운 아동교육관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통적 아동교육의 목적이 ‘성인의 도’에 이르게 하는 바를 비판하였다. 이에 교육의 목적을 아동이 주체가 되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린이 스스로가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어린이’가 되는 데에 두었다. 이러한 아동중심교육의 바탕은 천원 오천석(天園 吳天錫 : 1901.11.12.~1987.10.31.)을 아동중심교육의 시초로 보는 경향성과는 다른 시각이다. 오천석은 존 듀이(John Dewey: 1859. 10.20.~1952.6.1.)로 대표되는 서구 아동중심 교육사상의 뿌리를 두고 해방 후 ‘새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인물이다. 하지만 오천석 이전에 방정환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교육관을 제시하였다. 전통적 아동교육관을 볼 때, ‘동몽(童蒙)’은 무지몽매한 불완전한 존재이었으며 이러한 동몽교육은 습관의 형성과 기질의 변화를 일차적인 관심사로 삼는 수신에 목적이 있었다. 특히 ‘소학(小學)’의 교육목적은 ‘대학(大學)’에서의 지식의 습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심성적 함양 및 태도를 형성하고자 배우는 것이었다. 동몽교육의 성격은‘성인의 길로 나아가기
숭의여대 안에 보이는 저 자연석 빗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6] 숭의여대 안에 보이는 저 자연석 빗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성신사 천만궁에 놓여 있던 ‘하이쿠비(俳句碑, 1923년)’의 조성 내력 이순우 특임연구원 ‘안중근 의사 동상’이라고 하면 대개 누구라도 남산 중턱에 자리한 안중근의사기념관(1970.10.26일 개관) 앞의 그것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처음 이 자리에 등장한 것은 1967년 4월 26일이었다고 하는데, 얼추 잡아도 반세기를 훌쩍 넘어 6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때의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동상의 최초 건립후보지는 ‘서울역 광장’이었다. ????동아일보???? 1957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안 의사(安義士)의 동상(銅像), 서울역 광장에 건립」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건립장소의 미확보로 공사추진이 지연되고 있던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이번 관계당국의 양해를 얻어 서울역 광장에다 건립하기로 결정 —. 오는 7일 상오 11시 서울역 광장에서 기공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한다. 안 의사의 동상은 지난 4월부터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씨에 의하여 제작중에 있다고 하며 오는 10월 26일 안 의사의 ‘하루핀’역전에서의 의거일을 맞이하여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해 9월 4일 기공식까지 올렸으나 서울역 광장의 소유자인 교통부(交通部) 측에서 돌연 사용승인을 철회하고 공사중지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동상 제막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관리사무 일체가 문교부(文敎部)의 소관으로 변경되었으며, 자연스레 새로운 건립후보지의 물색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이때 장충단 구역의 옛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사찰) 터와 남산 부엉바위약수터
독립투쟁의 계승과 항일노래 전승
[항일노래 함께 보기 5]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마지막) : 독립투쟁의 계승과 항일노래 전승 이명숙 책임연구원 1919년 국내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이어 1920년 독립군의 봉오동·청산리 전투 대승 이후, 일제와 일본군은 만주와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세력을 뿌리 뽑기에 혈안이 되었다. 중국 관헌과 마적단, 군대까지 앞세워 독립운동가 탄압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무차별적으로 감행했다. 게다가 보복성의 한인 양민학살까지 자행해 그간 항일독립투쟁에 인적·물적으로 든든한 배후였던 동포사회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를 입혔다. 서간도 지역도 예외 없는 탄압에 직면하면서, 사실상 독립운동세력의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한편으로 1920년경은 상해 임시정부뿐 아니라 한중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각종 독립단과 단체들이 거국적 3·1운동에 힘입어 국내로 진격하는 독립결전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간 일제 관공서와 경찰 등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게릴라전에서, 독립운동 제 세력과 단체가 모두 연합한 대규모 전투를 상정했던 것이다. 즉 고립분산된 형태의 대일투쟁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각종 조직을 통합하여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우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고 그 실행을 위한 노력들이 경주되던 시기였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 검성중학교의 「국치일 노래」 1911년 6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신흥강습소로 출발 했던 신흥무관학교는 설립 10여 년 만인 1920년에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 정보를 입수하고 집단적 이동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허은, 2013,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이 시기 상황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경신년(1920) 10월 일본 토벌대들이 전
두문동 72현 기억법
[연구소 글방 11] 두문동 72현 기억법 권시용 선임연구원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를 검색하다가 두문동사원(杜門洞祠院) 건립 기사를 보게 됐다. 조선후기에 그토록 성했던 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처에 47개만 남기고 다 사라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무너졌던 서원들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시 슬금슬금 부활해 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그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930년대 중반에 건립된 두문동사원도 그런 움직임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흔히 알려진 ‘두문동 72현’이 아닌 130명의 위패가 두문동사원에 모셔졌다고 한다. 무슨 일일까? 두문동사원 건립 두문동사원(두문동서원으로도 부른다) 건립은 전국적 규모의 사업이었다. 1932년 2월 개성 유지들이 뜻을 모았다. 임시 사무소를 마련하고 전국 유림에 통문을 보내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사원을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해 8월 19일에는 사원을 지을 땅에서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했다. 성금은 전국에서 답지했다. 강릉의 최동길은 석재를 전부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개성의 전흥원은 기와를 모두 부담했다. 담양국씨 문중에서는 건축 부지 5,282평을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문중 대표는 우선 1,200원의 수표를 보냈다. 전라남북도에서는 건립사무소 분소를 설치하고 성금 모금에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광주노씨 문중은 3백 원, 위풍이씨 문중은 2백 원,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1천 원을 내놓았다. 건축 공사는 1933년 5월부터 시작됐다. 건축비 15,900원을 들여 106칸 조선 전통 기와집으로 짓기로 하고, 그 창건 기공식은 음력 4월 15일에 열렸다. 그해 8월 6일에 열린 두문동사원 상량식에는 개성부윤 등 고관과 유지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드디어 19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