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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친일파 인사 35명이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 급히 모인 까닭은? 표석 하나로 남은 이봉창 의사의 효창동 집터

2020년 5월 26일 487

[식민지 비망록 58] 친일파 인사 35명이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 급히 모인 까닭은? 표석 하나로 남은 이봉창 의사의 효창동 집터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36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식 요리점 식도원(食道園)의 근하신년광고이다.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를 남쪽으로 건너자마자 곧장 나타나는 한성은행(漢城銀行, 나중의 조흥은행) 을 끼고 두 번째 가게 옆으로 감아돌면 남대문로 쪽으로 출입구를 낸 식도원(食道園, 남대문로 1가 16번지 및 삼각동 78번지 일대)이라는 유명한 조선식 요리점이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생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明月館)의 주인이던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1920년 11월에 식도상회(食道商會)와 더불어 설립하였으며, 궁중식(宮中式) 조선요리와 함께 일본식 및 서양식 요리를 곁들여 제공하는 한편 신식교육을 받은 젊은 신랑신부의 결혼식도 곧잘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의 범인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친일파 인사 35명이 식도원 요리점에 급히 모 여 충성 결의를 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된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런데 1932년 정초가 되어 9일째가 되던 날에 이곳 식도원에 35명이나 되는 서울 장안의 난다 긴다 하는 친일파 인사들이 근심 어린 낯빛으로 줄줄이 모여들었다. 참석자 가운데 도지사 출신의 신석린(申錫麟)을 좌장으로 삼아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림이 잠시 이어지더니 이들은 다음과 같은 회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하나,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및 동상중(東上中)의 총독(總督)에게 봉위(奉慰)의 전보(電報)를 타전(打電)함. 하나, 7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총독부, 군사령부를 방문, 봉위의 뜻을 표함. 하나, 3일간은 일체 도락적 연회(道樂的 宴會)에 출석치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2020년 5월 26일 360

[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2020년 5월 26일 249

[후원회원마당]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김경현 후원회원(행정안전부 전문위원)   2001년 8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김경현 후원회원은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팀장을 지냈다. 현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2018년 타계한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으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를 맞이해 고인과의 인연을 되돌아보고 쓴 회고담이자 추도사이다.- 엮은이 박노정 선생님의 생전 모습(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박노정(朴魯貞, 1950~2018) 선생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을 이야기해야 제가 맺은 인연에 대한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노정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진주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 교육장을 지낸 부친과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형이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습니다. 경상대학교 농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전방에서 육군보병 소대장을 지냈으나 폭압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의가사로 제대했습니다. 이후 출가하고 입산해 팔공산 원효암 등지를 전전하며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세에 나왔는데, 고향 진주에 돌아온 후 시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문인활동으로 ‘동기 이경순선생’ 전집간행위원회 상임위원, 진주문인협회장, ‘진주 가을문예’운영위원장, 진주민예총 회장, 이형기시인 기념사업회장, 경남시인협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이경순(李敬純)은 일제 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진주의 시인이고, 이형기(李炯基)도 시 「낙화(落花)」로 유명한 진주의 시인입니다. 특히 사회단체활동으로 남성당 김장하(金章河) 선생께서 설립한 진주 남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를 비롯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정신지키기모임 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2020년 5월 26일 229

[돌려보기] 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3. 사마천으로서의 이병주 이병주를 작가가 되도록 만든 건 투옥인데, 감방에서 사마천을 만난 계기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사마천-사기의 세계????라고 밝힌다. 필시 일본평론사(1943)나 문예춘추사(1959)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연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두 번째로 이병주가 역사와 만난 건 2차대전 중 일본 군속으로 끌려가 전몰한 동포들의 명단이 발표되던 시기인 1966년 7월, 마르크 블로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이 인물에 감동받아 「변명」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여섯 아이의 아버지며 나이가 이미 53세를 넘은 블로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인 신분으로 일개 대위로서 자진 군에 입대했다. 불란서가 항복한 뒤 곧 항독운동에 참가, 리옹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6월 16일 나치스의 흉탄을 맞고 생을 마쳤다.((<마술사>, 한길사, 81) 이 작품도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정작 이병주에게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심어준 것은 역시 사마천이지만, 누가 봐도 사마천이 되기에 그는 체질적으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현실적인 데다 두뇌회전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초기에 그는 역사 대하소설을 쓰면서 정치사적으로는 이미 권력을 쥔 세력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치사적인 기득권 세력을 인정하면서 이를 논증해 나가는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했으며, 그 일련의 작품들은 마키아벨리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계열의 작품은 냉전체제의 반공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집권층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즐겨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2020년 5월 26일 198

[돌려보기]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조시현 연구위원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2020년 5월 26일 139

[후원회원마당] 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조영숙 도쿄지회 총무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기증자료

2020년 5월 26일 145

[기증자료] 도쿄지회 조영숙 총무가 4월 22일 ‘승리의 무후 선열님 추모와 미래세대를 위한 기도’ 펼침막(길이 390cm)과 사진첩 6권 등을 연구소로 우송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 정부 100년이 되는 2019년에 도쿄지회는 이를 기념하여 의미있는 기념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서울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모셔진, 유해를 찾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선열 130여 분을 기리는 펼침막을 제작하기로 하고 작년 한해 동안 꾸준히 작업하여 11월 17일 무후선열님들의 존함을 새겨 이 펼침막을 완성했다. ‘승리의 무후 선열님 추모와 미래세대를 위한 기도’의 글씨는 조영숙 총무를 비롯한 도쿄지회 후원회원들의 의미 있는 옷가지들을 잘라 만들었고 무후선열 130여 분의 성함은 후원회원들이 일일이 자수로 새기는 등 펼침막을 제작하는 데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뜻깊은 기념물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해준 조영숙 총무와 도쿄지회 후원회원들에게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4월 16일 wam(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 회보와 자체 제작한 「일본군 ‘위안소’ 지도」 등 총 10점을 기증했다.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광범위한 지역에 수많은 ‘위안소’가 설치되었던 사실과 일본군의 범죄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로, wam의 웹 사이트(https://wam-peace.org/ianjo/)에서도 공개하고 있다. • 4월 20일 사노 미치오(佐野通夫) 씨가 대학원 시절부터 42년 동안 연구 활동을 하면서 모은 한국 근현대사, 식민지 교육, 재일조선인, 대만에 관한 도서 및 자료 총 3186점을 기증했다. 2017년부터 4번째 기증이다. • 4월 23일 다니구치 요코(谷口洋子) 씨가 3월에 이어 강제동원, 한일교류 등의

연구소,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 종료

2020년 5월 26일 289

[초점] 연구소,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 종료 연구소는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을 2019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하여 올 4월 17일에 종료하였다. 객원연구자로 참가한 조재곤 교수, 김도훈 교수와 소내 조세열 상임이사와 이순우 책임연구원 등 9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다. 작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경기도에서 현재까지 향유되고 있는 무·유형의 문화 속 친일잔재를 체계적으로 수집, 기록, 관리하여 지속적인 연구 교육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의도하에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간 조사연구용역 사업은 착수보고 후 중간보고회, 자문회의 등을 거쳐 2020년 4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병행하며 일제잔재를 조사, 수집하였으며 기존의 잔재를 찾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원, 안성의 일제식 지명 존속이나 각급 학교 교표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는 등 새로운 성과도 일궈냈다. 1905년 러·일전쟁기부터 1945년 해방 전후기를 시간적 범위로 설정하고, 공간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기도 한정하여 유·무형의 친일문화잔재를 조사 연구하였다. 연구 보고서는 친일문화잔재 이상의 카테고리로 “일제잔재”의 개념 정리, 친일 인물과 문화계에 남겨진 그들의 행적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는 기념비, 송덕비, 기념탑, 동상 등의 기념물 및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그 뒤로 친일인물이 작사·작곡한 교가와 교표에 남겨진 일제 잔재 등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일본식으로 변경된 지명과 특히 “영동(榮洞: 일제지명 榮町)”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수원과 안성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해외의 친일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일제잔재의 청산 전망과 과제를

3대 이사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선종

2020년 5월 26일 105

[초점]  3대 이사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선종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4월 25일 오전 0시 5분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 종했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고인은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고인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동일방직사건대책위원회 위원장,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반대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2년 충남 공주군 유구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9년 사제로 서품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63년 뒤늦게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다. 2008년 2월 별세한 조문기 이사장을 이어 2008년 7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지내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이후 친일수구세력의 준동과 공격을 막아내는 등 역사정의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김 몬시뇰은 2018년 12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을 비롯해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역정(歷程)을 담았다. 정부는 ‘대한민국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유신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인천 서구 당하동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기념엽서

2020년 5월 26일 788

[소장자료 톺아보기•15]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기념엽서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복궁 앞에 공사 중인 조선총독부 신청사, 조선총독부청사신영지, ⓒ 국립중앙도서관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식민통치 기관 설립을 위해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朝鮮総督府設置ニ関スル件)」을 공포, 최고 통치기구이자 수탈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입법·사법·행정기구는 모두 조선총독에 직속되었고, 1910년 9월 30일에 칙령 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중앙 조직이 1관방 5부제로 구성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이 새롭게 구성하게 되자 총독부와 중앙기관의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 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에 위치하였던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중앙기관의 청사는 기존의 중앙관아나 관찰부, 일본이사청 등의 건물을 사용하였다.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청사를 증축하였는데 ‘청사의 산재(散在)로 인한 집무 불편 및 노화’를 이유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이 추진되어 1916년 6월 26일 지진제(地鎭祭)와 함께 신청사가 착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기 때문에 조선 내 최고기관으로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입지 선정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위압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의 중심부인 경복궁, 그것도 경복궁의 중심이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근정전 앞에 대규모의 건축물로 계획하여 영구적인 청사로 사용하고자 했다. 또한 도시의 중심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