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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2018년 9월 27일 420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 허은 여사 건국훈장 추서

2018년 9월 27일 283

정부는 의병장 허위 선생의 후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여사(1907∼1997)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허 여사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만 6세가 되던 1915년에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 이후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군복을 만들어 배급하고 군정서 회의 때 식사를 조달하는 등 공적을 세워 서훈을 받게 됐다. 당시 이상룡 선생은 경학사,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 항일 투쟁 단체를 조직·운영하는데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상룡 선생의 집은 항상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장소로 쓰였다. 따라서 의식주 해결 등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에 허은 여사의 공은 남달랐다. 광복 후 독립투쟁의 후유증이 남아 위로 4남 1여를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고, 아들과 외동딸을 고아원에 보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생활고를 이겨가며 자녀와 손자·손녀들을 돌보며 임청각을 지켰다. 말년에는 독립운동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1995년 초간, 2010년 개정판 발간)라는 수기를 출판해 독립투쟁 때 의식주에 대한 생활사를 담아내기도 했다. 이 수기는 〈서간도 시종기〉 〈장강일기〉와 더불어 여성의 시각에서 독립운동의 뒷모습을 사실적으로 기록해 독립운동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허은 여사 아들인 이항증 선생(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은 “여성들의 의식주 해결 덕에 독립운동이 가능했다”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는 올해 광복절부터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을 개선한 결과 177명 중 여성이 65명(36.7%)에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2018년 9월 27일 207

비가 흩뿌리는 주말 오후 가슴 벅차고 감동이 넘치는 뮤지컬을 보았다. 사실 배우로 나오는 지창욱을 좋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신났던 나는 그곳에서 내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나라의 독립만 이뤄진다면 목숨도 아낌없이 내놓은 독립운동가 팔도를 만났고, 밀정 동규와 죽은 군인들도 깨워서 독립을 이루겠다는 나팔을 만나게 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오프닝 곡은 지금도 입속에 맴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군무와 장면마다 표현되는 색조와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무대는 순간순간을 집중하게 만든다. 독립은 가난하고 무학의 사람이 하는 하찮은 일로 여기는 이완용의 대사에 분노했고, 독립을 위해 신분, 재산, 목숨까지 바쳤던 선조들은 동지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훗날 그들을 기억할 수 없는 아쉬움을 남겼으며, 다음날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처연한 모습과 동지의 죽음을 알면서 다음은 내 차례라며 격려하고 안아주는 장면에서는 가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있어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1910년 그때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나라 잃은 백성의 치욕을 온몸으로 감당했을 선조들은 힘 있는 나라를 위해 무장하고 훈련하는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을 꿈꾸고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관람 내내 내가 팔도가 되기도 하고, 나팔이 되었다가, 반전 포인트 밀정 동규는 안타까움이고, 끝까지 친구로 남았던 팔도의 의리의리한 의리는 먹먹함으로 남는다. 젊음을 대한독립을 위해 바칠 수 있다니 나라면

반쪽짜리 우리 땅, 용산에 가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용산 답사기

2018년 9월 27일 169

내게 용산은 무척 친근한 동네다. 이웃 동네인 동작구에 살고 있는 탓에, 도심으로 나갈 때면 늘 거쳐 가야만 하는 동네인 까닭이다. 주말이면 영화 보러, 쇼핑 하러 자주 들르는 동네이기도 하다. 이렇듯 용산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그저 놀고, 먹고 무언가를 소비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관 기념으로 용산 답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용산에 뭐가 남아있긴 할까’ 내심 의구심만 들었다. 그래도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 호기심에 9월 1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1·2차 답사에 동행했다. 두 차례에 걸친 답사는 모두 토요일 오후에 진행됐다. 황금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하고 용산에 모였다. 답사의 진행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려 애쓰지 마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답사란 원래 여러 번에 걸쳐서 천천히 기억하는 과정이고, 한 번 왔을 때 공간에 대한 인상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마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답사에 임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해방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반도 남쪽에 상주한 미군은 일본군이 물러간 용산을 차지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병식을 통해 위용을 자랑했던 연병장은 미군기지로 옷만 바꿔 입었다. 그래서일까. 이순우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 촛불행동을 다녀와서

2018년 9월 27일 142

지난 8월 11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는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라는 행사가 열렸다. 연구소가 ‘야스쿠니신사 반대공동행동’의 한국 사무국이고 올해로 13년째 열리는 행사인 만큼 연구소에서도 여러 상근자가 유족들을 모시고 참가했다. 먼저 다녀온 연구소 선배들의 경험담과 조언이 끊이질 않았는데, ‘하마터면 우익들이 휘두르는 흉기에 맞을 뻔 했다.’ ‘확 잡아 챌 수도 있으니 일행들과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등등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출국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지말까’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직접 보고 싶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전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외치고 있다고! 촛불행동에 참가하기 위해 8월 10일 오전 김포공항에 모였다.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유족분들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야스쿠니신사의 무단합사를 취소시키고 한일 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싶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걱정 안하려고 했으나 긴장한 모습이 보였는지 유족분들께서 별거 아니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연출되었다.   1시간 조금 넘는 비행 후 도쿄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물리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심리적인 거리감이 너무나도 먼 일본이 낯설게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마침 택시기사분이 재일동포였다. 일본의 연휴 첫날이었기 때문에 고속도로에 차가 막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재일동포들이 일본 내에서 어떤 핍박과 차별을 받고 힘들게 살고

기증자료

2018년 9월 27일 405

도쿄지회 덴사키 회원, 재일조선인 사진 등 자료 기증 도쿄지회(총무 조영숙) 덴사키 회원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덴사키 회원의 아버지 사진과 인터뷰 영상(30분)인데 조영숙 회원이 자료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메모를 첨부했다. 덴사키 회원은 일본인 속에서 혼자 ‘조선인’의 정체성을 알리지 않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삶에 큰 연민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2016년에 이어 지난 8월 11일에 오쿠무라 리쓰코(奥村律子)씨가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오쿠무라 리쓰코 씨는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에 참석하여 박물관에 기증할 자료를 찾아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주요자료는 「朝鮮大戰爭之圖」, 「朝鮮暴動記」 등 니시키에(다색판화) 2점과 대륙전진병참기지 조선의 사진이 실린 <興亞國策と朝鮮>(1941)등이다.앞으로도식민지역사박물관에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겠다는 의사도 전달했다. 8월 4일 조노 도시유키(城野俊行) 씨가 ‘땅 속에서부터 인권의 평등을 말한다’ 리플렛과 ‘명치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우표’ 총 5점을 기증했다. 8월 8일 오카모토 아사야(岡本朝也) 씨가 <ミレパガイドブック(미래를 위한 역사 패널전 가이드북) 2018>1권을 기증했다. 8월 16일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히로시마 관련 도록 4권과 리프린트 지도 6점을 기증했다. 8월 16일 재일교포 박정화 씨가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山友會 회원 사진, 조선영화, 국제교류회 관련 자료 등이다. 8월 5일 최재호(경북동부지부) 회원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부친이 사용했던 안경, 시계, 졸업증서, 상장 등 총 10점이다. 8월 22일 이건제 회원이 창작과 비평 등 소장 도서를 기증했다. 8월 29일 송영옥(충북지부) 회원이 1972년에 창립한 민학회 회보(34권)와 도록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흥행 행진

2018년 9월 27일 305

육군본부가 창군 70주년을 기념해 기획안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가 9월 9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막을 올려 현재 흥행 중이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독립 전쟁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를 배경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담아낸 작품으로 제작단계부터 지창욱, 강하늘 등 인기 배우 출신 사병들이 캐스팅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실제로 지난 8월 진행된 티켓 오픈에서 예매율 1위를 석권하며 2018년 하반기 최고 화제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육군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뮤지컬 제작을 위해 지난해 2월 전 장병을 대상으로 소재 공모를 거쳤고 그 결과 300여 편의 응모 소재 중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최종 선정했다. 이 뮤지컬은 서울 공연 이후 연말까지 성남, 안동, 목포, 춘천, 울산, 전주, 대전, 강릉, 부산, 대구 등 13개 지역 전국투어가 진행된다. 윤경로 상임대표, 이항증 공동대표 등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임원진도 육군의 초대를 받아 9월 15일 뮤지컬을 관람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2018년 9월 27일 116

8월 11일 도쿄의 한국YMCA에서는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이 진행되었다. 이 행사는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2006년 8월 도쿄에서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의 촛불을 들기 시작하여 올해 13회를 맞이했다.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한국사무국을 맡아왔는데, 매년 도쿄의 중심가에서 야스쿠니 반대의 촛불을 밝혀온 이 행사는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야스쿠니의 문제를 한국과 일본 사회에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올해의 심포지엄은 “‘메이지(明治)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아베 정권은 메이지유신 150년을 맞이하여 강제노동의 역사를 숨긴 채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을 비롯하여 메이지 영광의 부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화를 달성하였다며 선전하는 메이지 시대는 오키나와, 타이완, 조선 등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의 영광에 가려진 일본의 침략사,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아베 정권의 평화헌법 개정 시도, 그리고 야스쿠니의 역할 등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이명구 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머나먼 남태평양의 팔라우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신의 지난했던 삶을 증언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에서 하루라도 빨리 빼내야 한다고 절절하게 호소하여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서 첫 해부터 촛불행동의 대미를 장식해

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2018년 9월 7일 739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매일신보』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2018년 9월 6일 408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일제 강점기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은 함경남도의 오기섭 주영하, 함경북도의 김채룡, 평양북도의 백용구 김인직, 황해도의 김덕영 송봉욱 등이었다. 개천 출신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던 현준혁(1904~1945)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활동가인 김용범, 이주연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고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만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전선 조직인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왔고, 이튿날 치스챠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수뇌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조만식과 현준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대표하여 치스챠스코프 대장을 찾아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성격에 대해 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8월 29일 두 사람은 소련군 25군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 각각 소련군이 온 목적과 평양 정세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앞으로 협력하자고 합의하였다. 이 무렵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내부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 분파별로 소련군과의 관계 설정과 정국 현안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운명의 그날인 1945년 9월 3일, 조만식과 현준혁은 일제 트럭을 타고 평양시 교외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커브길에서 17,8세로 보이는 적위대 차림을 한 청년이 트럭에 올라타 현준혁의 가슴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조만식의 증언)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