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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식민지역사박물관,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기획전 개최

2019년 5월 24일 144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5월 8일 어버이날에 특별한 어버이를 기리는 전시회를 개막했다. 3‧1운동 100주년 두 번째 기획전으로 마련한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는 일제 침략전쟁에 끌려가 희생당한 강제동원피해자와 유족들의 통한의 삶을 담은 전시회이다. 개막식은 박물관 1층 돌모루 홀에서 열렸다. 이날 개막식에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소속 강제동원피해자 유족들과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남상구 소장과 용산구청‧청파동 주민센터, 민주인권기념관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해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함께 추모했다.     개막식은 특별영상으로 시작해 임헌영 소장의 인사말과 이희자 보추협 대표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특별히 일본에서 참석한 야노 히데키 씨는 1995년부터 한국의 강제동원피해자와 함께 투쟁해 왔던 과정을 소개하며 하나 둘 고인이 되신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유족의 이름을 호명해 참석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이번 전시회는 2011년 연구소와 보추협이 한일시민단체의 후원을 모아 천안 망향의 동산에서 개최한 일제하 강제동원 희생자 합동추모제를 다시 재현했다. 추모제는 친족들의 애도 속에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타지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강제동원 피해자분들을 기리는 합동장례식이었다. 그때 사용했던 목상여를 9년 만에 다시 꺼내어 전시장 한 가운데로 옮겨 놓았다. 돌아가신 이의 시신도 유골도 혼도 없는 빈 상여지만 남은 이들의 애끓는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이 담긴 상여이다. 상여 주위 “끌려간 사람들, 남겨진 이야기”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20명의 사연이 전시되었다. 강제동원의 피해가 당사자에 그치지 않고 남은 가족의 삶마저 파괴하고, 자식들의 미래조차 집어삼키는 폭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끌려간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 용산을 걷다’ 상반기 정기답사 개최

2019년 5월 24일 209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상반기 정기답사가 4월 20일, 27일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 용산을 걷다’를 주제로 20일에는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배후 공간인 용산 일 대, 27일에는 1919년 3·1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마포전차길을 따라 마포 일대를 둘러보았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현장안내로 진행된 이번 답사는 답사 신청이 빠르게 마감 될 정도로 역사 현장답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번 답사에는 가족 단위 참가자와 비회원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자녀로 구성된 대가족과 모자, 부녀 참가팀 등, 가족 모두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또한 연구소·박물관 후원회원이 아닌 참가자도 여럿이 있었는데, 답사뿐만 아니라 연구소에서 하는 일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추후에 있을 행사에도 참가를 희망하였다. 3시간이 넘는 대장정이었음에도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열기가 넘쳐났다. 특히 일제강점기 용산과 마포 일대의 일제식민통치기관의 설치와 변모, 수탈의 현장에 대한 해설이 진행될 때는 회한과 분노의 표정이 얼굴 가득하였다. • 임무성 교육위원

한국병합기념장을 끝까지 수령하지 않았던 사람들

2019년 5월 24일 436

[소장자료 톺아보기 4] 일본제국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적 경사가 발생하거나 잇따른 침략전쟁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확장할 때마다 이를 영구히 기리는 뜻에서 칙령(勅令)을 통해 각종 기념장이나 종군기장을 발급하였다. 이를 통해 전쟁참가자들과 기타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 내거나 이를 재확인하는 수단으로 삼곤 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이후에도 이러한 대업(大業)의 달성을 그냥 넘길 리는 없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12년 3월 28일에 제정된 칙령 제56호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제정의 건(件)’이다. 이에 따르면 ① 한국병합의 사업에 직접 관여했던 자 및 한국병합의 사업에 동반하여 요무(要務)에 관여했던 자, ② 한국병합 당시 조선에 재근(在勤)했던 관리 및 관리대우자 및 한국병합 당시 한국정부의 관리 및 관리대우자, ③ 종전 일한관계(日韓關係)에 공적이 있는 자가 이 기념장의 수여대상자로 정해졌다. 일본제국의 각종 기념장, 종군기장, 전첩기장, 잡종기장, 휘장 발행 연혁 <매일신보> 1912년 4월 7일자에 수록된 「한국병합기념장」 제하의 기사에는 이 병합기념장의 주조수(鑄造數)는 약 3만 개 가량에 이를 것이나 수여 인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 후 ????일본제국관보???? 1913년 4월 9일자(부록)를 통해, 기념장 수여자가 처음 공표되었는데, 1912년 8월 1일자로 소급하여 상훈국(賞勳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표시된 이 명단에는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전 내각총리대신은 물론이고 이른바 ‘창덕궁 이왕’과 ‘덕수궁 이태왕’의 신분으로 격하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관보>의 경우에는 이들 명단 가운데 ‘조선 관련 해당자’만 따로 추출하여 1913년 4월 10일자 이후 총 18회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추가소송에 나서다

2019년 4월 29일 308

3·1혁명 100주년 기념 특별 강좌와 답사가 연구소 교육장 5층에서 3월 2일(토) 오후 3시에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서 개, 돼지 대접도 안 해주었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이제라도 일본정부와 국민들은 과거를 생각할 때 반성해야한다.” 20대 청년으로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한 김한수 할아버지는 100세의 몸을 이끌고 기자들 앞에 서서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일본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었다. 4월 4일(수)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는 일제 강제동원사건 추가소송의 제소를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구소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지원단으로 지난해 10월 30일 역사적인 대법원 승소판결을 이끌어 낸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와 함께 이번 추가소송을 제기했다. 기자회견에서 조시현 연구원은 이 모든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당한 일이 아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 공동체의 문제이다. 개인에게 문제해결을 맡길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는 노력을 보여야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소는 강제동원소송 대리인단을 구성한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함께 지난 1월 25일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설명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후 두 달여에 걸쳐 300명에 가까운 강제동원 피해자 및 그 유족들과의 상담을 통해 추가소송을 준비해 왔다. 이번 1차 추가소송에서는 4명의 생존 피해자와 사망한 6명의 피해자 유족 27명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일본코크스공업(옛 미쓰이광산)을 상대로 원고들이 당한 불법적인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했다. 특히 이번 추가소송에서는 이미 배상책임이 인정된 일본제철, 미쓰비시, 후지코시에 이어 일본코크스공업이 피고

용산총독관저 앞 언덕에 초대형 무선 송신탑이 들어선 까닭은?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의 부산물로 탄생한 육군무선전신소

2019년 4월 30일 434

[식민지 비망록 46] 용산총독관저 앞 언덕에 초대형 무선 송신탑이 들어선 까닭은?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의 부산물로 탄생한 육군무선전신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조선 주둔 일본군대는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듯이 때마다 대규모 기동훈련을 벌였다. 이러한 훈련은 대개 가을철에 시행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용산에 주둔했던 제20사단 의 경우, 이를 ‘경성사단 추계연습(京城師團 秋季演習)’ 또는 ‘추계기동연습(秋季機動演習)’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특히, 사단 예하의 여단끼리 편을 나눠 대항전의 형태로 참가할 때는 이를 ‘여단대항연습(旅團對抗演習)’이라고 불렀다. 이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시행되는 기동훈련으로는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 있었다. 잇따른 침략전쟁에 예하부대의 병력동원이 잦았고 여기에 예산 확보 문제가 겹쳐 사단 규모의 대항전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1930년과 1935년, 단 두 차례 거행하는 것에 그쳤다. 그 가운데 1930년 10월 9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진행된 첫 번째 사단대항연습은 조선에 상주했던 2개 사단, 즉 제19사단(나남)과 제20사단(경성)이 각각 북군(北軍)과 남군(南軍)이 되어 3만여 명의 병력이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가상 공방전을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이었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수많은 군중이 참관하는 가운데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때의 기동훈련과 관병식의 상황은 <소화5년 어조선 사단대항연습사진첩(昭和五年 於朝鮮 師團對抗演習寫眞帖)>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므로 많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이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관병식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의 배경에 높은 철탑들이 솟아있는 모습이 곧잘 포착되어 있어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대규모 기동훈련의 말미에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이 거행되는 장면이다.

조국은 하나다

2019년 4월 29일 246

[추도사] 조국은 하나다   1975년 4월8일 학생운동조직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돼 구속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상고심 공판에서 민복기 대법원장이 8명 사형, 무기 9명 확정판결문을 읽고 있다. 이수병 등 8명은 이튿날 아침 4월 9일 전격 사형당했다. <보도사진연감>   경애하는 4.9통일 8열사 선생님―서도원 열사님, 도예종 열사님, 송상진 열사님, 우홍선 열사님, 하재완 열사님, 김용원 열사님, 이수병 열사님, 여정남 열사님! 영령들이시여! 저승의 세월도 이 속세에서처럼 유수같이 흘러가나요? 저승으로의 행차 날짜가 같으시니 오늘로 이제 만 44살이 되셨겠군요. 얼마나 통탄스러운 긴 44년이었습니까! 그동안 여러 열사님들의 뒤를 이어 시차를 두고 그곳으로 떠나신 분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석구 선생, 이재문 선생, 전재권 선생, 유진곤 선생, 조만호 선생, 정만진 선생, 이태환 선생, 이재형 선생, 나경일 선생, 이성재 선생님 모두 10열사님이 가셨으니 이제 열여덟 열사님의 영령이 이 자리에 함께 하셨겠군요. 여기 소생 몸과 마음 가다듬어 정중히 인사 올립니다. 1975년 4월 9일, 그때 34살이었던 저가 어언 78살이 되었습니다. 기자촌에 살던 저는 버스로 서대문구치소 앞을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지나다녔습니다. 열사님들이 가시기 불과 1년 전인 1974년에 저가 문학인 간첩단 사건으로 갇혔던 곳이라 남들은 얼굴도 돌리기 싫어한다지만 저는 지날 때마다 그곳을 찬찬히 살피곤 했답니다. 여전히 그곳에는 존경하는 여러 선배님들과 동지와 후배들이 울분을 토하며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투쟁을 이어가던 때여서 그랬습니다. 1974년 봄, 그때 저는

25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구소를 성원하고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온 박영환 회원

2019년 4월 29일 289

[인터뷰] 25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구소를 성원하고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온 박영환 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4월 2일 11시 연구소 회원 중 최고령인 박영환 회원(92세)이 연구소를 방문해 인터뷰에 응했다. 거동이 약간 불편할 뿐 연세에 비해 정정하고 과거의 일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어 인터뷰가 무난히 진행되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상근자들을 격려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을 전달하였다. 박영환 회원은 1995년 가입한 이래 지금껏 빠짐없이 회비를 내주었고 서울남부지부(예전의 서울관악동작지부) 고문을 맡아 지부에서 추진한 박흥식·김석원 동상 철거 촉구 시위 등 친일청산 활동에 앞장서 왔다. 박 회원께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건강하시길 빈다.   문 : 일제시대 학교 다닌 이야기를 말씀해주세요. 답 : 1928년 경기도 장호원에서 평범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어요. 장호원심상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2년도쿄로 건너갔어요. 20살 터울의 큰형님이 도쿄에서 토목일을 하고 있었어요. 큰형님 댁에 얹혀살면서 도쿄부립 8부중학교에 다녔어요. 1945년 8부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복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죠. 일본 유학 생활 때 가장 기억나는 것은 형님집 근처 슈퍼마켓의 주인 아들과 교류한 거였어요. 그 일본인 학생을 통해서 당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경제학자가 쓴 <빈곤의 철학>이란 책을 했어요. 그 책을 통해 자본주의 하의 빈부 격차, 노동착취 등 사회문제에 눈뜨게 되었어요. 문 : 해방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하셨나요. 답 : 해방 직후 우리집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어요. 친지의 권유로 1946년 5월경

일제강점기 강제징집 집결소였던 육군 30사단에서 ‘항일음악회’ 열려

2019년 4월 29일 273

고양시(시장 이재준)는 4월 13일 고양시 화전동 육군 30사단 연병장에서 항일음악회를 열었다. 고양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연구소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한 이번 행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의 주둔지이자 강제징집 피해자들의 집결소로 알려진 현재 30사단 지역의 역사적 아픔의 의미를 되새기고, 잊혀져가는 광복군가 등의 항일음악 연주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평화의 불씨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진행됐다.   이재준 고양시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그간의 발전과정을 차분하게 성찰하는 동시에,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 100년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날 음악회에는 1,000여 명의 시민 및 군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양시 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시작으로 힙합댄스팀 이지크루, 고양신한류예술단, 노관우 밴드, 30사단 군악대, 가수 신형원씨 등이 출연해 연구소가 발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노래를 중심으로 노래하고 연주했다. 사회는 연구소 팟캐스트 진행자인 노기환 MC가 맡았고 김주경 씨가 음악감독을 맡아주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2019년 4월 30일 241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1]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조한성 선임연구원   경성고보 학생들, 시위에 나서다 3월 1일 오후 1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박노영, 박쾌인은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을 모아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각 교실에 들어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있을 만세시위운동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했다. 교사들은 평소와 달리 쉬는 시간에 너무 조용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학교 내에서 불온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경성고보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인 많은 시민, 학생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덕수궁과 동대문 방면으로 나뉘어 행진을 하면서 각국 대사관을 들려 조선의 독립 선언을 알리고, 조선총독부가 있는 진고개(현 충무로2가)로 집결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박노영   예심판사가 박노영에게 물었다. “조선 독립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일합방의 취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총독정치는 마치 조선을 식민지와 같이 취급하고,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하지 않습니다. 총독정치의 근본정책은 동화정책이라 하는데, 민족을 달리하고 역사를 달리하는 두 민족이 동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다른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날이 보고 듣는 일 중에 우리의 감정을 해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긴 것입니다.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3월 1일 오후 3시 경운동에 있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2)

2019년 4월 30일 151

[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2)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4 조각배에 몸을 싣고 상하이를 일본이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연이은 의거로 일제는 대대적인 수색과 검거를 벌였다.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기 어려워진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미국인 피치 목사의 도움으로 비밀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연출로 상하이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싱 백범 피난처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청년백범 1기 답사단   자싱의 지역 유지인 저보성의 집에 숨어들었다. 저보성 일가는 국민당에서 높은 지위의 당원이었고, 윤봉길 의거 등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백범은 중국인처럼 옷을 입고 광동 사람인 척하면서 ‘장진구’ 또는 ‘장진’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동말을 잘 하지 못하는 백범은 벙어리나 다름없는 답답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백범과 임시정부는 따로 또는 같이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백범은 자싱, 하이옌, 항저우 등을 오가며 피신하고 있었고, 임시정부는 항저우, 진강 등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답사단이 자싱의 백범 피난처를 찾으니, 피난처 앞 갑판에는 중국인 강태공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조용하던 호숫가가 우리 답사단 때문에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강태공들은 시끄러운걸 싫어한다. 시끄러운 소리에 고기가 도망가기 때문이다. 조용한 동네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우리 답사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국 강태공들은 자신들의 낚싯대가 펼쳐진 자리를 순순히 비켜주며 단체사진을 찍으란다. 중국인 강태공들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모양이다. 먼 데서부터 제 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온 이방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