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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기증자료

2019년 9월 19일 122

• 8월 7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3번째로 자료를 기증했다. <哲學硏究>(1926), <國史槪說>(1933), <새마을>(1985) 등이다.  • 7월 15일 무궁화모임(むくげの會)에서 <무궁화 통신> 등 도서 42권을 기증했다. • 7월 19일 임헌영 소장의 친우로 한국문학 연구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아이자와 가쿠(愛澤革) 씨가 <재일총합지 항로> 1호 ~ 4호 4권을 기증했다. • 거제지역 시민운동가 류금렬 선생이 7월 26일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운동 백서’를 보내주었다. • 7월 29일 김정만 회원(서울북부지부)이 <대한민국 5000년사>(1991) 7권을 기증했다. • 7월 30일 이재명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이 연극, 영화 관련 도서를 기증했다. • 7월 30일 미시마 아유미(三嶋あゆみ) 씨가 편지엽서와 도쿄의 하라미술관 도록 <자연국가>를 기증했다. • 8월 18일 하시다 사나에(橋田早苗)씨가 ‘비키니 바다 그림연극을 만드는 모임 ビキニの海の紙しばいを 作る会’에서 제작한 비키니 섬 그림 1세트(총 16점)와 신문 스크랩 1점을 기증했다. • 8월 18일 ‘한국병합100년도카이행동실행위원회 韓國倂合100年東海行動實行委員會’에서 3.1독립운동 100년 스터디 보고집 등 도서 2권을 기증했다. • 8월 19일 김정희 씨가 가와사키시(川崎市) 후레아이관(ふれあい館)에서 제작한 재일조선인 1세 할머니들이 인생의 추억을 바탕으로 손수 만든 낱말카드를 기증했다. • 8월 19일 지난 3월에 이어 ‘적기편집국편집위원회 赤旗編集局編集委員会’에서 <韓國, 朝鮮植民地支配と日本の戰爭>(2019) 2권을 기증했다. • 8월 20일 박중현 씨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초창기 활동 기록 영상을 담은 8mm 테이프와 사진 등을 기증했다. • 8월 21일 가스야 켄이치(糟谷憲一) 씨가 <함께 배우는 인간의 역사>(2017), <중학역사교과서>(2016) 2권을 기증했다. • 8월 28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관람 온 김건주 씨가 십전, 일원,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후손과 함께 하는 경술국치 추념식 ‘국치일을 아십니까’ 개최

2019년 9월 19일 101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후손과 함께 하는 경술국치 추념식 ‘국치일을 아십니까’ 개최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 1주년인 8월 29일 경술국치 109주년을 맞아 국치 추념식 ‘국치일을 아십니까’를 개최했다. 이날 추념식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항증, 차영조, 장병화, 김수옥, 김세걸)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소속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과 임헌영 소장, 권위상 부위원장,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연구소 상근자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추념식은 현악 4중주팀 ‘공감’의 클래식 연주로 시작되었다. 임헌영 소장의 개졌고, 권위상 부위원장이 직접 지은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기림시를 낭송했다. 이어서 소프라노 권설희의 선창으로 ‘국치일의 노래’, ‘국치가’, ‘국치추념가’를 함께 불렀다. 마지막으로현악 4중주팀 ‘공감’이 한국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을 연주했다. 이어 방학진 실장이 찬 죽 먹기의 의미를 소개한 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손수떠준 죽을 함께 나누었다.     이번 추념식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국치일을 어떻게 추념해 왔는가에 대한 패널 전시가 열렸다. 전시 패널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일제 강제병합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순절로 항거할 뿐 아니라 일본군·헌병과 교전을 벌인 의병항쟁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료를 통해 국내외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매년 국치일을 추념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전국 곳곳에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이 붙었으며, 시장은 철시를 감행했고, 감옥의 독립투사들은 집단 단식으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해외 동포들은 국치 추념 행사를 열고 이날 하루 단식으로 독립의 결의를 다졌다.

8월 15일 ‘민족문학연구회’ 창립식 열려

2019년 9월 19일 134

[초점] 8월 15일 ‘민족문학연구회’ 창립식 열려     8월 15일 오후 3시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민족문학연구회의 창립식이 열렸다. 민족문학연구회는 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을 중심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학에 활력을 더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산하 연구회로 창립되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한국근현대 민족문학에 대한 조사・연구와 자료발굴, 일제강점기의 항일・친일문학 비교 연구, 분단시대의 남·북·해외 민족문학 조사・연구, 통일시대를 예비하는 창작활동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특히 민족문학연구회는 문학계의 일제잔재와 친일문인 기념사업 철폐운동을 전개해 역사정의 실현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삼았다. 창립식에 앞서 오후 2시에 열린 민족문학연구회의 창립총회에서 민족문학연구회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맹문재 교수가 연구회 회장으로, 권위상 부위원장이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맹문재 회장의 진행으로 회칙과 앞으로 운영방안, 임원 선임이 진행되었다. 오후 3시에 창립식이 시작되었다. 창립식엔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소장과 조세열 상임이사, 박수현 사무처장, 방학진 기획실장이 참석했고, 80여명의 문인들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권위상 사무국장이 국민의례와 묵념을 진행하고, 맹문재 회장의 내빈소개, 연구회 경과보고, 창립 기념사, 임헌영 소장의 축사 순으로 이어졌다. 임헌영 소장은 “역사적으로 문인들은 시대를 이끄는 역할을 했으며, 현재 시국에서 민족문학의 가치는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앞으로 연구회에 속한 문인들이 그 가치를 지켜나가기를 당부했다. 이어서 창립선언문 낭독으로 민족문학연구회의 창립을 힘차게 선언했다. 이후 독립운동가 기림시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실린 시낭송이 이어졌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명한 시를 지은 시인들이 직접 낭송을 하니 더욱 비장하게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다가왔다. 숙연하게 5편의 시를 읊은 후에 만세삼창을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와 국제평화행진 열려

2019년 9월 19일 82

[초점]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와 국제평화행진 열려   지난 8월 15일 서울광장에서는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가 열렸다. 태풍의 영향으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열린 대회에서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과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 일본인 등 2천여 참가자들은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 촉구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는 임헌영 소장의 대회사에 이어 이희자 보추협대표와 야노 히데키 일본 강제동원공동행동 사무국장, 오다가와 요사카즈 일본 전국노동조합총연합 의장과 김명환 민주노총위원장 등이 대법원 판결의 조속한 이행, 아베 정권과 피고 기업의 사죄와 배상, 한일시민연대를 통한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호소했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가 무대에 올라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시민대회에 이어 두 분 피해자를 선두로 참가자들은 일본 대사관 앞까지 평화행진을 벌였다. 역사의 증인들이 시민들과 함께 일본정부와 피고 기업을 향해 외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함성은 장대비를 뚫고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근현대사기념관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 백산무역과 경주 최부자의 독립운동’ 특별전 개최

2019년 9월 19일 131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 백산무역과 경주 최부자의 독립운동’ 특별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8월 9일 경주 최부잣집의 가전(家傳) 문서들을 중심으로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백산무역과 경주 최부자’ 특별전을 개막하였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와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12대 경주 최부자 최준의 백산무역주식회사 경영을 중심으로 최부자 일문의 독립운동 자료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11대 최부자 최현식의 경주 지역의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들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개막식은 오전 11시 근현대사기념관 앞뜰에서 진행되었으며,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이백균 강북구의회의장,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지역위원장의 축사와 최염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이사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그 외 역사학자 이이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정륙 선생, 그리고 현지 주민들이 함께 자리해주었다. 개막식 이후 내빈과 일반 시민들은 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로 자리를 옮겨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의 전시 설명과 함께 전시물을 관람하였다. 공식 일정을 마친 후 방송 3사에서 경주 최부자 주손인 최염 선생을 인터뷰하는 등 이번 전시는 주요 언론으로부터 많은 조명을 받았다.   지난해 6월 경주 교촌의 최부잣집 광에서 발견된 다량의 고문서들을 통해 일부 사료와 전언에 의지했던 경주 최부자의 독립운동을 확인할 수 있는 실물자료들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이어서 특별전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최준이 사장으로 있던 백산무역주식회사가 대한 민국임시정부의

2019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2019년 9월 19일 103

[초점] 2019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고양문화재단이 각각 주관, 주최를 맡고 경기문화재단이 후원한 2019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가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중국 심양, 유하, 통화, 백두산, 압록강 등에서 진행됐다.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답사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를 단장으로 하여 모두 28명의 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됐다. 답사단은 1911년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을 시작으로 광화진 합니하, 고산자진 대두자 본교 터, 통화현 쾌대모자 분교 터 등을 답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과 올해 육사 졸업식 축사에서 “육사의 역사적 뿌리도 100여 년 전 신흥무관학교 에 이른다”고 언급할 정도로 많은 국민들이 신흥무관학교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답사단은 신흥무관학교 터는 찾는 데 여전히 애를 먹었다. 급속한 도시화로 신흥무관학교 터와 그 주변은 나날이 변형되어 가건만 중국 당국은 신흥무관학교 터에 표석 설치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공안이 한국 답사단을 감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올해 답사의 경우에도 사람 키보다도 훨씬 높게 자 란 옥수수 탓에 각 답사지마다 현장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몰려든 청년들로 교세가 가장 확장되었던 고산자진 대두자촌의 신흥무관학교 본교 터를 지척에 두고도 빽빽한 옥수수 때문에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컸다. 더구나 통화현 시내의 신흥무관학교 쾌대모자 분교 터는 현재 통화현립 유치원이

학교에도 부활하는 군국주의

2019년 9월 19일 449

짐이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 천황들이 이 나라를 열어 크나큰 덕을 세움이 두텁다. 나의 신민들은 지극히 충효를 다하여 수많은 신민이 한마음으로 대대손손 아름다움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우리 국체의 정화이며 교육의 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신민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부부가 화합하고 친구는 서로 믿으며, 공손하고 검소함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이웃을 널리 사랑해야 한다. 배움을 닦고 기예를 익힘으로써 지능을 계발하고 착한 행실과 뛰어난 재능을 갖추어 나아가, 공익에 널리 이바지하고 국헌을 존중하며 국법을 준수해야 한다. 일단 위급할 때에는 충의와 용기로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천지와 더불어 무궁의 황운皇運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그대들은 짐의 충량한 신민이 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 선조의 유풍을 현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는 실로 우리 선조 천황들의 유훈遺訓으로 자손인 천황과 신민이 함께 준수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고금을 통해도 어긋남이 없으며, 이를 나라 안팎에 베풀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바가 없다. 짐은 그대들 신민과 더불어 이를 항상 잊지 않고 지켜서 모두 한결같이 덕을 닦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교육칙어’의 내용과 의미를 상세하게 풀어 쓴 해설서 「교육칙어봉석」이다. 1890년 10월 30일 일본의 ‘천황’ 메이지는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을 정한다는 취지로 「교육에 관한 칙어教育ニ関スル勅語」를 공포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교육칙어」라고 부른다. 국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원리로서 교육칙어는 ‘충효’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학교교육의 기본원리와 국민의

제주 4・3평화기행 ‘死삶’과 함께 진정한 평화로

2019년 7월 25일 349

[회원마당] 제주 4・3평화기행 ‘死삶’과 함께 진정한 평화로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지난 6월 9일부터 11일까지 2박 3일 동안 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 워크숍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진행하는 제주 4・3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제주4・3평화공원과 선흘 목시물굴, 북촌너븐숭이, 이덕구 가족묘 및 이덕구 산전, 사리물궤와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등 평소에 쉽게가 볼 수 없는 4・3 유적지를 찾았다.   목시물굴, 은신했던 주민들의 심경을 헤아리며 워크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 중 하나는 목시물굴에 들어가 본 것이었다. 목시물굴은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초토화된 후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은신했다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장소이다. 4・3 당시 주민들이 숨어 지냈다던 굴을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하니 놀라웠다. 그러나 막상 목시물굴을 눈앞에 두고 보니 두려움이 조금 엄습했다. 지하로 난 아주 좁은 입구로 몸을 구부려 들어가야 했고, 아무리 몸을 작게 구부려도 통로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천장과 양 옆, 바닥에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온몸이 부딪히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조금만 참고 통로를 지나니 넓은 내부의 모습이 나왔다. 넓다고도 하기 어렵지만 비좁은 통로를 뚫고 지나온 터라 내부가 널찍하게 느껴졌다. 동굴 내부에서도 높이가 제각기 달라 어떤 곳에서는 성인 남성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설 수 있는 정도였다. 우리는 잠시 그때 당시 주민들의 마음을 느껴보기 위해 모든 불빛과 소음을 차단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용산육군묘지, 남산 기슭에 터를 잡은 침략전쟁의 기념공간 – 이곳이 개인별 묘지가 아닌 합장묘탑의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2019년 7월 25일 455

[식민지 비망록 49] 용산육군묘지, 남산 기슭에 터를 잡은 침략전쟁의 기념공간 이곳이 개인별 묘지가 아닌 합장묘탑의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7)에 수록된 제물포 일본군 묘역의 모습이다. 표목 옆에 기재된 ‘보병 제21연대’라는 구절이 이들의 정체가 청일전쟁 때의 전사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찍이 우리나라와 관련한 근대시기 서양도서자료에 입문하던 시절에, 영국인 여행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가 지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을 뒤져보다가 개인적으로 꽤나 궁금증이 일던 사진 한 장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제물포(濟物浦)의 어느 언덕 위에 백여 기(基) 남짓한 일본군 묘지가 빼곡히 들어선 모습을 담아낸 사진이 바로 그것이었다. 먼저 떠오는 물음은 저들은 누구이며, 왜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추론컨대 버드 비숍은 1894년 3월에 처음 서울을 찾은 이래로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한 행적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필시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전사자를 가매장(假埋葬)한 광경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표목(標木) 측면에 표시한 ‘보병 제21연대(步兵 第二十一聯隊)’라는 구절은 이들이 일본군 쪽의 선발대인 오시마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의 주력 예하 부대(보병 제11연대와 보병 제21연대)에 소속된 군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곳 묘지에 묻힌 이들 유골이 그 후에 어떻게 수습되어 어디로 옮겨갔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인천부청(仁川府廳)에서 편찬한 <인천부사(仁川府史)>(1933), 1424~ 1425쪽에

박자혜의 삶과 투쟁

2019년 7월 25일 850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3]   박자혜의 삶과 투쟁 예지숙 선임연구원   박자혜(1895~1943)는 당대에 흔치 않은 직업여성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간 신채호의 부인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페미니즘의 부상에 따라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호응하여 이 글은 ‘직업여성’ ‘사회인’으로서 박자혜의 성장과 활동에 방점을 두고자 한다.   근대문명으로의 전환과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의 등장 박자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근대문명으로의 전환기의 여성의 위상과 젠더 규범의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사에서 ‘여성’이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 활동기인 1898년이었다. 양반 부인들은 조선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讚揚會)’를 결성하고 한국 최초의 여권선언이라고 불리는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하여 관립여학교 설립을 청원하였다. 이들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근대적 정치운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퇴위를 당하고 국권 침탈의 위기에 직면하자, 양반부인과 기생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다. 근대문명의 유입과 함께 여학교가 생기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에는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은 여성들이 전면에 나섰다. 여학생, 교사, 전도부인, 간호부 등은 기존의 내외규범을 위배하고 집과 학교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진출했다. 3·1운동 이후 “가장 열렬하게 급진한 것은 부인계”라는 평가나, <개벽> 창간호(1920.6)의 논설에 “노동문제, 부인문제, 인종문제, 사회문제”를 전인류의 문제라 언급한 것은 ‘여성’의 등장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누군가의 아내/딸이 아닌 대체 불가의 자아를 가진 개인으로 성장한 여성들이 공적 공간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학교, 교회, 직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