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민족사랑

두문동 72현 기억법

2024년 3월 26일 200

[연구소 글방 11] 두문동 72현 기억법 권시용 선임연구원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를 검색하다가 두문동사원(杜門洞祠院) 건립 기사를 보게 됐다. 조선후기에 그토록 성했던 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처에 47개만 남기고 다 사라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무너졌던 서원들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시 슬금슬금 부활해 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그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930년대 중반에 건립된 두문동사원도 그런 움직임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흔히 알려진 ‘두문동 72현’이 아닌 130명의 위패가 두문동사원에 모셔졌다고 한다. 무슨 일일까? 두문동사원 건립 두문동사원(두문동서원으로도 부른다) 건립은 전국적 규모의 사업이었다. 1932년 2월 개성 유지들이 뜻을 모았다. 임시 사무소를 마련하고 전국 유림에 통문을 보내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사원을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해 8월 19일에는 사원을 지을 땅에서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했다. 성금은 전국에서 답지했다. 강릉의 최동길은 석재를 전부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개성의 전흥원은 기와를 모두 부담했다. 담양국씨 문중에서는 건축 부지 5,282평을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문중 대표는 우선 1,200원의 수표를 보냈다. 전라남북도에서는 건립사무소 분소를 설치하고 성금 모금에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광주노씨 문중은 3백 원, 위풍이씨 문중은 2백 원,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1천 원을 내놓았다. 건축 공사는 1933년 5월부터 시작됐다. 건축비 15,900원을 들여 106칸 조선 전통 기와집으로 짓기로 하고, 그 창건 기공식은 음력 4월 15일에 열렸다. 그해 8월 6일에 열린 두문동사원 상량식에는 개성부윤 등 고관과 유지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드디어 1934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여러분 고맙습니다

2024년 3월 26일 561

[특별기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여러분 고맙습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와 21년째 동행 2001년 2월 23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라는 이름으로 닻을 올린 지 23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의 한(恨) 보따리를 끌고 민족문제연구소 울타리에 둥지를 튼 지도 올해로 21년입니다. 피해자들이 세상에 기댈 언덕 하나 없이 광장에 나섰을 때 우리의 손을 맞잡아 준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입니다. 연구소에 책상을 마련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네요. 오십 전후의 나이였던 우리 유족들이 팔십을 넘긴 지금까지 쉼없이 활동해 올 수 있었던 것도 오직 연구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회원여러분들의 한결같은 응원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법원 승소 판결, 민족문제연구소 덕분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은 그동안 많은 일들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보추협이 진행한 강제동원 피해 소송운동은 올해 초까지 한국 대법원에서 모두 승소 판결을 이끌어내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던 것은 모두 패소 또는 기각으로 끝났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5월 1일부터 한국 법원으로 그 투쟁의 장을 옮겨 소송운동을 다시 시작한 것도 보추협이었습니다. 2001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여러 시민단체가 연대하고 보추협이 앞장서서 추진한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운동은 2004년 특별법 제정의 값진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국보다 먼저 오랜 기간 강제동원 진상규명 활동을 해오던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은 모든 피해자들의 잃어버린 인권회복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005년부터 피해자 신고를 받아 진상규명

홍범도 장군,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24년 3월 26일 168

[초점] 홍범도 장군,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3·1운동 105주년 특별기획전 ‘홍범도와 ХОН БОМДО’를 개최하며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3‧1운동 105주년을 맞아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기획전을 개최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월곡고려인문화관 결,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번 전시는 2023년 8월부터 불거진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에 대해 시민들과 함께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다. 전시 자료는 독립기념관, 월곡고려인문화관 결,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에서 협조를 받았고, 곳곳에 QR코드를 제시해 국가보훈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의 공공디지털아카이브를 직접 탐색할 수 있도록 했다. ‘홍범도와 ХОН БОМДО’ 전시는 크게 6부로 구성되었다. 본격적인 관람에 앞서 이번 기획전을 잘 이해하기 위해 홍범도의 생애와 관련 인물, 사건연표를 개관하였다. 1부 「머슴에서 산포수 의병대장이 되다」에서는 장군의 유년 시절과 산포수 의병부대의 활동을 다루었다. 특히 1907년 의병전쟁의 주요세력이었던 산포수 의병부대의 특징과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약은 2부 「날으는 홍장군, 왜적 군대 쓰러진다」로 이어진다. 산포수 의병들이 함경도 산악지대의 특성을 배경으로 백두산에서 짐승 잡던 사냥술을 활용해 일본군과 전투에 연전연승했던 의병전쟁을 소개했다. 그들의 총구가 일본의 앞잡이 일진회를 향했던 이유와 독립운동에 온 가족이 희생된 거룩하고 가슴 아픈 가족사도 주목하였다. 3부 「대한독립군 대장, 독립전쟁을 이끌다」에서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한인 동포들의 삶과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담았다. 그리고 봉오동전투의 생생한 회상기와, 연이은 일본군의 대학살을 다뤘다. 4부 「나라 잃은 동포와 함께 ‘의병’으로 살다」 에서는 뼈아픈 역사인 자유시 사변과 연해주에서도 독립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홍범도

송현공원에 ‘4월 혁명 역사관’을 세우자

2024년 3월 26일 350

[시론] 송현공원에 ‘4월 혁명 역사관’을 세우자 한상권 덕성여대 명예교수 여는 글 윤석열 정권의 역사 쿠데타가 독립운동가 폄하에서 독재자 찬양으로 확대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승만 기념관 건립모금에 동참한 가운데, 오세훈 서울시장도 ‘시민 동의가 우선’이라는 당초 입장을 바꾸고 종로구 송현동 공원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 시장은 시정질문에서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의에 “네”라며 “가능성이 제일 높게 논의되는 데가 송현동 공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독재자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면 안 되겠지만 특히 송현동 공원은 안 된다. 이곳은 4월 혁명의 ‘장소성’을 내포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송현공원은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부가 민주시민을 향해 발포한 중앙청(지금의 광화문)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공터이다. 발포 현장의 지근거리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것은 광주 금남로에 전두환 기념관을 짓겠다는 발상과 진배없다. 또한 송현공원과 이웃하고 덕성여자중학교가 있는데 4월 혁명에서 덕성여중생 두 명이 희생당했다. 이와 같은 장소성에 비추어 볼 때, 송현공원에 독재자 이승만 기념관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쓰러져간 영혼들을 달래는 ‘4월 혁명 역사관’을 세우는 것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정신에 부합한다. 1. 경찰 발포와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9일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중고생들이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으로 모여들었다. 10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여 크게 기세를 올린

시민특강 “여성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

2024년 3월 26일 141

[초점] 시민특강 <여성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반인 대상으로 여성사 특강을 실시하고 있다. <여성 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라는 주제로 3월 한 달 동안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가량 ZOOM을 통해 진행되는 시민강좌는 원래 교원 대상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박물관 관람객들이 여성사를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달하였고 교원연수의 반응도 뜨거웠기에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수강료는 20,000원이며,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회원의 경우 무료이다. 자료집은 사전 신청자에게 별도로 배송하고 있다. 3월 7일 첫 번째 강의는 이지원 대림대 교수의 “여성이 남긴 기록으로 밝힌 여성 독립운동 이야기”였다. 특히 연구소가 회고록을 펴낸 독립운동가 허은‧한도신‧지복영 선생 등 여성들의 수기‧일기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복원했다. 이뿐 아니라 기존 ‘남성 중심의 역사 쓰기’가 밝혀내지 못한 ‘이름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3월 14일 두 번째 강의는 이상의 인천대 교수의 “여성 피해자의 목소리로 밝힌 강제동원 이야기”였다. 여성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술자료를 통해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를 다면적으로 조명했다. 국외 피해자보다 덜 주목받았던 국내에서 동원된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욱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상의 교수는 국내 동원 피해자들이 정부 지원을 별로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짚어 주었다. 수강생의 강의평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감춰진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의 취지와 관점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용감한 여성 선조들에 대해

경기도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

2024년 3월 26일 117

[초점] 경기도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 경기도청 1층 로비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주최하고 경기문화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하는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기간은 3월 11일부터 22일까지로 평일에만 관람할 수 있다. 친일파로 이름난 ‘송병준’, ‘송종헌’, ‘윤덕영’의 이름과 ‘팔굉일우’의 제국주의 구호가 새겨진 탁본 등 40여 점의 탁본을 Ⅰ부와 Ⅱ부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Ⅰ부는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 그들을 칭송하고 고마워하며 찬양하는 화려한 미사여구의 글귀를 검은 먹바탕에 새하얗게 돋아올렸다. 이들에 대한 칭찬이 4·4조의 대구를 이루며 비면 가득히 채워져 있다. ‘선정’, ‘영세기념’, ‘치적’, ‘시혜불망’, ‘애민불망’, ‘청덕불망’ 등의 수식어들이 비석의 주인공 이름 뒤에 이어지며 그들의 추악한 이면을 감추고 있다. 한편 뭉개져서 판독할 수 없는 글자들이 듬성듬성 있다. 이름자 앞 성씨이거나 연도 앞 연호들인데, 창씨명과 쇼와(昭和)·다이쇼(大正) 같은 일왕의 연호가 여지없이 지워진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큰 글자와는 대조적으로 오른쪽 한켠에는 작은 글씨로 주인공의 행적을 소개한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려 있는 일제강점기 그들의 삶의 발자취를 요약한 것이다. 군수, 도평의원, 조합장, 면장뿐만 아니라 조선귀족, 중추원 의원, 국방금품헌납자, 일본제국 수훈자를 두루 거친 이들이 많다. 화려한 미사여구 이면의 어두운 흑역사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Ⅱ부의 탁본은 식민통치 관련 기념비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대체로 비의 면적이 크고 비석 네 면에 글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권업모범장’, ‘치산치수’, ‘수룡수리조합’, ‘기동보린사’ 비에는 식민통치의 기간산업인 농업과 관련된 내용이

국제학술회의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 개최

2024년 3월 26일 96

[초점] 국제학술회의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 개최 민족문제연구소는 2월 22일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 “재조일본인의 사회경제자료 통합DB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열렸다. 연구소는 일제 식민지배의 구체적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이에 관한 조사·분석 및 DB구축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수행의 성과를 점검하고 연구의 확대 심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이번 국제학술회의 개최를 준비한 것이었다. 국제학술회의는 제1부 “일본인의 식민지 이주와 귀환” 및 제2부 “일본인 ‘재외재산’ 처리문제와 『재외사유재산실태조사표』”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제1부에서는 “일본인의 식민지 이주와 귀환”이라는 주제로 식민지기 조선 및 타이완 거주 일본인의 현황과 재조일본인의 조선 통치 인식등을 살펴보았다. 발표는 최영호(국제생활연구소), 중수민(鍾淑敏, 타이완 중앙연구원 타이완사연구소), 기무라 겐지(木村健二, 시모노세키시립대학 명예교수) 등이 담당하였다. 최영호는 발표문 「통계자료로 본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의 현황과 추이」를 통해 해방을 전후한 시기 재조일본인의 인구통계에 집중하여 재조일본인 통계의 부정확,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당시의 한반도, 재조일본인 여성인구의 의미, 출생률 및 사망률 분석, 재조일본인의 출신지 등에 대하여 검토해보았다. 중수민은 「통계자료로 본 식민지시기 대만 거주 일본인 현황」에서 일본의 타이완 지배정책의 변화, 타이완 거주 일본인사회의 형성, 일본인 인구의 변화 및 지역 분포, 직업 등을 살 펴보았다. 대만 거주 일본인 현황뿐만 아니라 최근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2024년 3월 26일 239

[소장자료 톺아보기 56] 표지화로 보는 청일전쟁의 실상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➊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78호 일청전쟁도회 제1회』(1894.9.25.) 청일전쟁 관련 기사를 다룬 첫 번째 풍속화보지. 아산만 풍도해전(豊島海戰, 7.25)과 성환에서의 육지전투(7.29)를 상세히 다루었다. 표지화는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국 순양함 ‘제원’과 ‘광을’을 격침시키는 장면이다. ➋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2호 일청전쟁도회 제4회』(1894.12.20.) 7월 개전 후 일본군은 평양, 의주를 거쳐 북진을 계속해 11월 이후 구련성, 금주성, 대련, 여순을 함락시켜 압도적 우위에 섰다. 표지화에서 보듯이 일본군 장군이 청국군 지휘관을 군기로 깔아뭉갤 정도로 일본군은 승전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➌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4호 정청도회』 제5편』(1895.1.25.) 제5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더불어 조슈(長州) 3걸로 일컬어지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角五郞. 1836~1915)의 조선 체류 기록인 『한성내잔몽(漢城廼殘夢)』(1891.10)을 전재하였다. 이노우에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말 조선에 건너와 조선의 외교고문에 임명되었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와 교류하며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하였고 거사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과 일본을 왕래했으며 1894년 직후 조선공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한성내잔몽』은 갑신정변 당시의 조선 정세와 외교관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표지화는 갑신정변 실패 후 다케조에 이치로(竹添進一郞) 공사와 개화파가 일본으로 도주하자 이에 격분한 조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는 모습을 담았다. ➍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6호 정청도회』 제6편』(1895.2.25.) 1894년 12월초 일본군 제1군사령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육상교통로의 요충지인 해성(海城) 공략에 전력을 기울였다. 12월 13일 해성을 점령했으나

민족사랑 2024년 3월호

2024년 3월 22일 250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1

2024년 3월 6일 165

[후원회원마당]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1 – 수운 최제우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입각한 인간상 – 이정아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어린이 인권 선언’ 100주년을 맞아 작년 11월 9일부터 11월 12일까지 ‘방정환과 21세기 세계의 어린이들’이라는 주제로 2023 세계방정환학술대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필자는 11월 11 숙명여대 르네상스 프라자에서 진행된 <제4부 연구발표> 중 ‘어린이에 관한 한국의 사상운동과 21세기 어린이운동’을 주제로 한 <제3분과>에 발표자로 참여하였다. 발표 제목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서설」이었다. 감사하게도 박상진 서울대 교육연구소 객원연구원이 토론을 맡아 주셨다. 이날 발표된 글은 『신인간(834호)』에 실린 졸고 「소파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의 내용에서 ‘인내천 사상’을 ‘시천주 사상’으로 수정하고 발췌하여 핵심내용을 짧게 요약한 글이었다. 의암 손병희의 사상은 보통 ‘인내천(人乃天)’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래 수운 최제우의 자각은 ‘인내천’이 아니라 ‘시천주’였다. ‘시천주’는 ‘모든 사람 안에 거룩한 한울님이 모셔져 있다’는 의미이다. 시(侍)는 ‘모심’을 의미하며, 천(天)은 한울이며, 주(主)는 존칭어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소파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이 아닌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서설」로 제목을 바꾸어 발표하였다. 그리고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으로 첫째, 시천주 사상에 입각한 평등사상, 둘째, 동심천사주의와 대비되는 동심한울사상, 셋째, 보국안민을 위한 개벽정신을 들었다. 이번 <민족사랑>에 싣는 글은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이 천도교에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하여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의 첫 번째 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