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72]
김창숙, 오세창의 휘호와 김구 사진,
그리고 신익희의 서신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모두 심정섭 지도위원이 기증해준 소장품이다. 위 자료와 관련된 네 분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은 혁신유림으로 일제와 이승만 독재정권에 강력히 항거한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호는 심산(心山), 벽옹(躄翁)이며 자는 문좌(文佐)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 130여 명을 규합해 이들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한중호조회 결성에 힘썼고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천고(天鼓)』,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했다. 1927년 상해 조계에서 일본 영사관원에 체포되어 압송된 후 14년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두 다리가 마비 되어 출옥했다. 광복 후 일제강점기 일제에 협력한 유림계를 개혁하는데 진력하여 1946년 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했다.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김구와 함께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저항한 투쟁을 한평생 지속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했고, 1956년 이승만 정권이 효창공원의 삼의사묘역 이전을 추진하자 이를 적극 막았으며 1959년 보안법 반대운동을 펼치며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자 한국서화사 연구에 기여한 서예가다. 서울 출신으로 호는 위창(葦滄, 韙傖) 자는 중명(仲銘)이다.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고 1906년 귀국 후 『만세보』·『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천도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은거하여 부친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편술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의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집성하였으며,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畫彙)』 등 귀중한 자료를 펴냈다. 본인도 전서와 예서로 쓴 품격있는 유묵을 다수 남겼는데 위 휘호도 그 중의 하나다. 광복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 민주의원, 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피난지 대구에서 사망하여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구(金九, 1876~1949)는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환국한 김구는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했다. 1947년 11월 유엔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적극 지지했고, 1948년 초 북한의 입국 거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이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가서 4자회담에 임했으나 협상이 결렬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선거를 거부하고 이후 한국독립당 정비와 건국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건국실천원양성소 사무에 진력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나의 소원> 중에서)
신익희(申翼熙, 1894~1956)는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그해 3월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고 이후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1인으로 귀국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부회장, 국민대학 학장 등을 맡았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초대 부의장에 선출되었다가 8월 국회의장 보궐선거에서 의장에 선출되었다. 1955년 장면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어 선거유세를 다니던 중 급서하고 말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박광종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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