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을사늑약 120년‧한일협정 60년 기획전시 〈1965, 망각에 가둔 과거 – 부정에 맞선 질문들〉 개최
[초점] 을사늑약 120년‧한일협정 60년 기획전시 〈1965, 망각에 가둔 과거 – 부정에 맞선 질문들〉 개최 을사늑약 120년‧한일협정 60년을 맞아 오래도록 실타래처럼 얽힌 한일 관계를 다시 돌아보는 기획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는 민족문제연구소·재단법인 역사와책임·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주최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후원하였고, 10월부터 내년 2월까지 운영될 예정이다. 전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 「한일회담을 이해하기 위한 8가지 질문」에서는 한일 관계의 얽힌 실타래의 시작점이 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강화조약의 문제점과 한국과 일본의 협상에 대한 인식 차이, 그리고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진행 과정을 시기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2부 「굴욕외교 중단하라, 평화헌법 준수하라」에서는 한일협정에 대한 한국과 일본 양국 국민들의 협정 반대 운동의 모습과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부 「나는 싸우고 있다」에서는 한일회담 논의 선상에서 소외되어 아무런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한 여러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 운동사를 상세히 조명하고 있다. 4부 「망각과 부정에 맞선 질문들」에서는 일본군에 포위된 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강력히 주장한 1906년 프랑스 국제법 학자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의 논문 등 국제법 자료들을 인용하며 을사늑약의 불법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 불법 강점에 대한 사죄와 반성 없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과거사를 봉인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해 을사늑약 120년‧한일협정 60년을 맞아 우리는 어떤 자세로 역사를 올바로 인식할 것인지 박물관은 관람객들의 도전적인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무료로 배포되는 전시 리플릿에는 이 전시의 이해를 돕는
1905년 7월 러일전쟁 일본측 육군 수뇌부 8인의 봉천 회동 사진
[소장자료 톺아보기 75] 1905년 7월 러일전쟁 일본측 육군 수뇌부 8인의 봉천 회동 사진 이번 달에 소개하는 자료는 류영철 회원(대구 지부)이 기증한 ‘러일전쟁 일본측 육군 수뇌부 8인의 회동 사진(1905.7.26)’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측 육군 수뇌부 전체가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한 사진이 희소하여 역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 또한 회동 장소, 일시와 참석자 이름이 뚜렷이 박혀 있다. 즉 사진 한켠에 “於奉天 明治三十八年(1905) 七月二十六日 黑木大將(구로키 다메모토) 野津元帥(노즈 미치즈라) 山縣元帥(야마가타 아리모토) 大山元帥(오야마 이와오) 奧大將(오쿠 야스카타) 乃木大將(노기 마레스케) 兒玉大將(고다마 겐타로) 川村大將(가와무라 가게아키)”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사진이 좋은 재질로 표구되어 있음을 비추어볼 때 이 사진의 위상이 당시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하게 한다. 1904년 1월 1일 일본군 제3사단이 러시아 제1태평양 함대의 근거지였던 여순항을 함락한 것을 필두로 육상과 해상 전투 양쪽에서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격퇴하였다. 1905년 2~3월에 전개된 격렬한 봉천(현재의 심양) 전투에서 일본군이 쿠로파트킨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을 선양 북쪽으로 밀어부쳤고 1905년 5월 쓰시마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침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1905년 7월 러시아군과의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자 일본군 참모총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①)가 봉천 일대의 전략 요충지를 시찰하였다. 1905년 7월 25일 봉천성에서 야마가타 참모총장을 영접하기 위해 중국에 진주해 있던 육군 수뇌부 대부분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야마 이와오 만주군 총사령관(④), 고다마 겐타로 만주군 총참모장, 구로키 다메모 제1군 사령관, 오쿠 야스카타 제2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키 제3군
민족사랑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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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지역위원회, 조병옥 역사적 과오를 기록하다
[단신] 충남지역위원회, 조병옥 역사적 과오를 기록하다 최근 제주 4·3 역사를 왜곡한 영화 <건국전쟁 2>가 개봉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우리 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위원장 최기섭)는 제주 4·3 당시 민간인 학살 책임자인 조병옥의 역사적 과오를 알리는 표지판을 천안 병천 조병옥 생가 앞에 설치할 예정이다. 안내판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병옥의 역사적 과오를 기록하다 조병옥(1894~1960)은 공주 영명소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배후 혐의, 수양동우회 사건 등으로 5년간 수감되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였고 미군정청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다. 조병옥은 친일경찰을 pro-JAP(친일파)이 아닌 pro-JOB(직업인)이라고 옹호하면서, 친일경찰들이 미군정을 거쳐 한국 경찰의 주류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조병옥의 지휘를 받은 경찰들은 대구 10월항쟁, 제주 4·3,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제주 4·3 당시 조병옥은 평화적 해결에 반대하고 강경 진압을 주장하며,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민 학살에 대거 동원하였다. 조병옥은 ‘(제주) 주민 90%가 좌익’이라 규정하고,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함으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쓸어 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25년 4월 제주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여,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직접 지시했던 조병옥의 과오를 다시 새겨 기록한다. 2025년 11월 9일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천안지회 제주4·3범국민위원회
소년이 간다
[후원회원마당] 소년이 간다 김순흥 광주지부장 고3 때 5.18을 겪은 소년시민군 김향득 5.27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올 때까지 YWCA를 지키다 잡혀서 뚝뚝한 성격 때문에 유난히 고문을 많이 받았던 소년시민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발로 짓밟는 고문으로 ‘볼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소년시민군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으면서 마지막 2년은 병원에서 지내다 이제 간다 소년이 간다 소년시민군이 간다 병상에 눕기까지 평생을 카메라를 메고 도청앞 광장을 비롯 5‧18, 세월호, 촛불… 아픈 역사의 현장 구석구석을 백만 장의 사진 기록으로 남긴 역사의 증인 병상에 눕기 전 마지막 5.27 새벽에도 도청앞 광장에서 밤을 새우다가 이제 먼 길을 간다 소년이 간다 소년시민군이 간다 10월 7일 광주 대동고 3학년으로 1980년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에 맞서 끝까지 현장을 지키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던 김향득 사진작가가 별세했다. 향년 62세. 생전에 고인은 “광주의 민중들은 과거나 현재나 도청으로 모이고, 역사를 바꿔갔다”면서 “광주 곳곳에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는 곳곳에 5·18의 역사가 서려 있다”고 말했다.
철원이 낳은 독립운동의 거목 우성 박용만 나신터 비석 제막식
[후원회원마당] 철원이 낳은 독립운동의 거목 우성 박용만 나신터 비석 제막식 김용빈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독립운동의 의지가 높았던 철원의 기운을 바로 세우고 우성 박용만선생의 독립정신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발자취를 기억하고 따르기 위한 나신터 비석 제막식 및 서세 97주기 추모제와 학술 세미나가 지난 10월 17일 선생의 생가터에서 열렸다. 1부 추모제와 제막식은 철원의 단체장, 이장님들과 주민분들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철회선생의 후손분들, 독립기념관 이문원 초대관장, 실학 훼밀리 회원 여러분, 광복회 강원지부 김문덕회장, 박용만 선생의 친필로 비석 글씨를 집자한 날개 안상수선생, 대형초상화와 만장을 준비해서 달려오신 김건태선생일행, 그리고 선생의 유적비가 있는 철원초등학교 학생들, 화환을 보내온 우원식 국회의장 등 각계의 관심과 참여 속에 열렸다. 제막식 후에는 2부 행사로 ①선각자 박용만 선생의 활동과 독립운동사에서의 위상 ②1910~1920년대의 출판활동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가 진지한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우성 박용만 선생(1881~1928)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109번지에서 출생하여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해외에서 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 군인으로 독립의 길에 일생을 받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우성은 문무를 두루 갖춘 독립운동가로 미국의 네브라스카주에서 소년병학교를 세우고 독립을 위한 실질적인 무력 투쟁의 힘을 기르기 시작했고 하와이에서는 한인군사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무력을 통한 독립투쟁을 줄기차게 준비하였습니다. 언론인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한민보, 하와이에서 국민보의 주필 등으로 활동을 하였고 군사 학교에서 필요한 ‘군사수지’ 수첩을 저작하고 모국어를 잃어가는 이주 한인 2세대들을 위한 모국어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국어
‘서대문국민학교 교적비’ 옆에 잔존한 유구는 ‘봉안전’의 흔적(?)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9] ‘서대문국민학교 교적비’ 옆에 잔존한 유구는 ‘봉안전’의 흔적(?) 선인 학교에는 1937년 12월 이후에야 천황 사진을 차별 배포 이순우 특임연구원 서울 정동길을 따라 걷다가 커다란 회화나무(서울시 보호수 서2-3, 1976년 11월 17일 지정)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캐나다대사관(옛 하남호텔 자리) 앞에서 발길을 돌려 서울성벽이 지나는 창덕여자중학교(정동 28번지) 구역으로 올라가면, 그 안쪽에서 옛 프랑스공사관 시절의 흔적 하나를 만날 수 있다. ‘RF 1896’이라는 글자와 더불어 프랑스공화국의 상징 문양인 오크와 올리브 가지가 나란히 새겨진 정초석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공사관은 맨 처음 수표교 쪽에 터를 잡았다가 1889년 10월에 정동으로 옮겨왔으며, 그 이후 우연의 일치인지 — 을사조약의 여파로 프랑스총영사관으로 격하된 상태에서 — 조선총독부가 출범하던 바로 그 날인 1910년 10월 1일에 서대문 밖 합동(蛤洞) 30번지에 있던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의 별서(別墅)로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정동에 남겨진 옛 프랑스공사관 구역은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귀속되었고, 이 자리에는 1914년에 일본인 아동의 전용 학교로 설립된 서대문소학교(西大門小學校)가 들어서게 된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서대문소학교’는 ‘서울서대문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달고 존속했으나 1973년에 이르러 폐교되었으며, 그해 2월 18일자로 종로구 재동에 있던 창덕여자중학교가 곧장 이곳으로 옮겨오는 과정이 이어졌던 것이다. 운동장 남동쪽 모퉁이를 찾아가면 약간 경사진 언덕의 구석 자리에 지난 1991년 12월 30일에 건립한 ‘서울서대문국민학교 교적비’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서울의 사대문
태항산을 품은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기] 조선의용대 답사기 태항산을 품은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따라! 최필숙 ‘약산 김원봉과 함께’ 단원 ‘약산 김원봉과 함께’가 기획하고, HURA가 주관한 이번 답사는 시작부터가 이전과는 달랐다. 석가장으로 직행하는 비행기는 처음이다. 석가장은 하북성 성도이지만, 공항은 정정현(正定縣)에 있다. 정정현은 시진핑이 복무한 적이 있었고,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에 위치해서인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복잡한 북경 공항이 아니니 출입국 과정이 편안했고, 태항산 관광을 하는 한국인들만 공항에 머물고 있어 중국이라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스물여덟 명이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직접 답사하려는 마음을 품고 함께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후원과 홍보에 힘입어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멕시코 지부장까지 참여하였다. 모두 나름의 커리어와 조국 광복에 헌신한 분들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떠난 터였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후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조직된 조선인만의 부대다. 처음 출발 당시 구대(교육적 기구)에서 지대(군사적 기구)로 변경되었다. 약산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고, 본대와 1, 2, 3지대까지 구성된 조선의용대는 무한방어전에 참여하고, 계림을 거쳐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1940.9.17.), 여러 이유로 인해 일본군과 직접 전투하고, 대원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조선인이 많은 화북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했다. 1941년 1월, 중경의 조천문에서 출발한 본대와 각 전구에 배치된 대원들이 화북으로 진격하던 중, 중국 팔로군의 근거지인 태항산에 뜻하지 않게 들어서게 되고, 이후 그들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우다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포로로 붙잡히는 등 피맺힌 투쟁의 역사가 배어있는
9만여 한글 어휘를 정리한 원고를 기증한 한글학자이자 교육자인 늘봄 이상춘
[연구소 글방 23] 9만여 한글 어휘를 정리한 원고를 기증한 한글학자이자 교육자인 늘봄 이상춘 박광종 특임연구원 조선어사전편찬회 결성과 9만여 어휘 원고 기증 1929년 10월 31일 하오 7시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이 조선연구회 회원들과 교육계, 언론계 인사들이 조선교육협회 회관에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조선어연구회 회원 신명균의 개회사와 안재홍의 축사로 기념식을 간단히 마친 후 이극로의 발의로 우리글의 정리와 발전을 위해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회를 열고 준비위원 이윤재로부터 경과보고를 듣고 규약을 통과한 다음, 준비위원 30여 명을 선임하였다. 준비위원에는 이광수 주요한 등 문예계 인사와 방정환 안재홍 유억겸 정인보 등 명망가 그리고 이극로 이만규 이상춘 이윤재 이중건 이희승 정열모 최현배 등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이 뽑혔다. 이들 위원 중 이극로 이중건 신명균 이윤재 최현배가 집행위원이 되어 실무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듬해 1월 6일 서울 화류정 29번지로 사무실을 옮겨 구체적인 후속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에는 “금일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할 첩로(捷路)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의 지름길은 조선어사전 편찬에 있다고 보고, “본회는 인물을 전 민족적으로 망라하고 과거 선배의 업적을 계승하여 … 엄정한 과학적 방법으로 언어와 문자를
2025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수련회–안동(10.18~19)
[초점] 2025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수련회–안동(10.18~19) 10월 18일부터 19일까지 경북 안동에서 2025 회원수련회가 열렸다. 지난 9월에 파주에서 열린 첫 번째 회원수련회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안동 수련회에는 상근자를 포함해 총 78명의 회원과 회원 가족이 참여했다. 첫날, 참가자들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집결해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기리는 답사로 일정을 시작했다. 기념관 관람 후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로 이동해 백하 김대락의 고택이자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던 ‘백하구려(白下舊廬)’,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의 생가, 의성김씨 종택을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는 백하 김대락 선생의 후손인 김원일 회원이 함께해 직접 안내해주었다. 이어서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문인 고성이씨의 종택 임청각으로 이동해 실경 역사극 ‘서간도 바람소리’의 20분 요약 공연을 관람했다. 이후 군자정에 모여 회원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가졌다. 대구·부산·전북·광주 등지 회원들의 참석이 두드러졌는데 회원 간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유대감을 다지고, 임청각과 이상룡 선생의 이야기를 나누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예끼마을에서 식사를 마친 뒤 숙소인 ‘이육사문학관’ 생활관으로 이동했다. 숙소 배정 후 자유롭게 뒤풀이가 진행되었다. 안동의 차명숙 회원이 준비한 홍어무침과 여러 회원들이 가져온 안동소주를 나눠 마시며 즐거운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이튿날 아침, 이육사기념관을 관람하고 이육사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이 자리에 이육사 선생의 딸 이옥비 여사가 함께해 ‘아침이슬’을 다같이 부르고, 부친과의 일화를 들려주며 뜻깊은 시간을 나눴다. 특히 광주지역위원회에서 제작한 거대 태극기에는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나, 정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