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가슴 떨렸던 난징, 항저우, 상하이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답사기] 가슴 떨렸던 난징, 항저우, 상하이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정해성 교사 2026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경기남부 역사교사모임의 주도하에 4박 5일의 난징-항저우-상하이 답사가 있었습니다. 답사의 주요 목적은 1926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설립된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독립운동가분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동했던 유적지를 체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답사에는 18명의 역사 선생님, 6명의 가족분들과 함께 해설사로 참여해주신 전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 독립운동여행사 ‘후라’ 김재운 대표, 대성투어 이민정 이사 등 총 28명의 답사단이 함께하였습니다. 우리 답사팀은 24일 오전 12시 30분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후, 떨리는 마음을 안고 약 2시간을 이동하여 ‘난징의 루커우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국 난징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정부(당시 국민당)와 교섭하기 위해 설치한 공식 외교 기구였던 ‘주화대표단’의 건물이었습니다. 본래 이 건물은 충칭에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충칭에서 난징으로 대표단 건물이 이전되었고, 1948년에 해체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내 외교사무를 전담하였습니다.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귀국 등 여러 가지 현안들을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의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철거될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건물의 외형이 잘 보전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화청교’를 방문하였습니다. 화청교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 바로 김구 선생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흥(자싱)’에서 인연이 닿았던 여인이자 뱃사공이었던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하고
어느 신입회원의 비효율적인 답사기
[답사기] 어느 신입회원의 비효율적인 답사기 김선미 후원회원 ‘현재’는 너무 천연덕스럽게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저에 있는 또 다른 방향의 에너지를 종종 가늠하지 못한다. 역사책에 나오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보며 항상 궁금했다. 그 당시를 살던 김 아무개와 최 아무개는 본인들이 어떤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지 체감했을까? 그들의 경험과 기억이 다음 세대에게 어떤 씨앗이 되고 또 어떤 함정이 될지 자각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쩐지 조급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지점에 서 있나. 만약 내가 어떤 중요한 순간을 관통하는 중이라면,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아니,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누군가는 거창하게 굴지 말고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나 충실하게 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그편이 더 안전하고 실속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질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면 꼭 그것에 관한 경험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두 발로 대지를 디디며, 몸으로 잘근잘근 씹어서 흡수해야만 비로소 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비효율적인 태도. 나는 항상 그러한 태도에 마음이 끌렸다. 2026년 1월 21일, 연초의 정신없는 회사 일정에도 불구하고 3박 5일의 답사를 덜컥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었다. ‘중국 광동지역 항일유적 답사-아리랑 로드를 가다’는 나의 첫 번째 민문연 모임이다. 2025년 하반기에 후원회원이 되었던 터라 민족문제연구소를 민문연으로 줄여 부르는 것조차 익숙지 않았다.
선농단(先農壇) 자리의 ‘청량대’ 비석은 경성여자사범학교 시절의 유산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1] 선농단(先農壇) 자리의 ‘청량대’ 비석은 경성여자사범학교 시절의 유산 ‘청량대(淸凉臺)’라는 명칭은 『채근담(菜根譚)』에서 따온 표현 이순우 특임연구원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역(祭基驛)’에서 내려 1번 출구 쪽으로 나오면 곧장 선농단역사공원(선농단역사문화관)과 서울종암초등학교 방향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왕산로19길)이 길게 이어진다. 이곳으로 접어드는 초입에는 ‘느티나무어린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숲을 이룬 공간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표지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터(1954년 12월~1975년 2월) 여기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6천여 명이 넘는 교육계의 동량을 길러내던 곳이다. 이제 지난날의 웅지를 기리고 겨레와 함께 교육의 미래를 열고자 하는 뜻을 담아 기념표석을 세운다. 2006년 10월 25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서울대학교 사범대학동창회. 여기에 표시된 내용처럼 이 일대는 서울대학교가 새로 조성한 관악캠퍼스로 1975년에 통합이전을 완료한 때까지 ─ 경성여자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대학 시절까지 합치면 ─ 3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사범대학(1968년 12월에는 ‘가정대학’ 분리신설)이 터를 잡고 있던 구역이었다. 그에 앞서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원잠종제조소(京畿道原蠶種製造所, 1916년 12월 이전), 경기도농사시험장(京畿道農事試驗場, 1917년 4월 개설), 경기도잠업취체소(京畿道蠶業取締所, 1929년 9월 이전) 등의 조선총독부 산하 농잠실무기관이 순차적으로 들어섰다가 1938년 3월 1일에 이르러 일괄하여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벌응절리의 신축청사로 옮겨갔고, 다시 그 자리는 1939년 9월 이후 경성여자사범학교(京城女子師範學校)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이래로 이 일대는 선농단(先農壇, 제기동 274번지)과 아울러 그 아래쪽으로 동적전(東籍田, 용두동 138번지)이라는 너른 벌판이 펼쳐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역대
경기도 독립운동 참여자 및 유공자 발굴 연구 보고
경기도 독립운동 참여자 및 유공자 발굴 연구 보고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1.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는 2025년 5월부터 2026년 1월까지 경기도 용역 사업 「경기도 독립운동 참여자 및 유공자 발굴 연구」를 진행했다.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인 김도훈 전 교원대교수를 책임연구원으로 관련분야 전공자 10여 명으로 팀을 꾸려 3‧1운동, 국내항일, 해외항일 부문으로 나눠 연구를 진행하였고 연구소에서는 박광종, 안정희, 임무성 연구원이 참여하였다. 사업회는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본적 또는 주소가 경기도 출신인 독립운동 참여자를 발굴하고 정리하였다. 연구원들은 국내외 3,000여 건의 자료를 확보하여 사료 목록으로 정리하고 분석 대상을 분류한 후 인명부, 판결문 등의 행형기록 분석과 추가로 미전산 자료와 국외 자료까지 분석하여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이중에 648명의 공적조서를 작성하여 국가보훈부에 포상신청을 하였다. 2.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착수‧중간‧결과 보고회를 경기도청에서 가졌고 여기서 나온 의견들을 연구에 적극 반영하여 더욱 세밀하고 다양한 형태로 독립운동가 발굴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대학교의 전문연구자를 초빙하여 2차례의 자문회의를 하였다. 자문위원들은 한결같이 사업회의 이번 연구는 조사 대상 자료 범위가 광범위하고 체계적이고 타당하며, 지역민의 애향심과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것으로 광역지자체 사업으로는 획기적인 성과와 의의를 둘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연구 결과는 경기도 내 각 지역의 전시자료 및 콘텐츠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자료의 현장 확인과 추가 발굴을 위해 도내 31 개
[취임사]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모든 구성원 여러분
[취임사]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모든 구성원 여러분 김민철 신임 소장 오늘 저는 민족문제연구소 제4대 소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연구소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이 1990년 겨울이니 벌써 3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책임연구원, 연구실장, 연구위원으로서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었던 저로서는 이 자리가 영광이자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동료 후배들이 저를 놀리는 말로 ‘무책임연구원’이라 부르곤 합니다. 주로 일은 벌여놓고 뒤처리는 떠맡기는 때문인지 일종의 경고성 놀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쓸모가 있을 때면 ‘무책임’의 ‘무’에 ‘한’을 붙여 ‘무한책임’으로 슬쩍 바꿔 놓기도 합니다. 이제 그게 현실이 된 것 같아 몸과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집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권력도, 자본도 아닌 시민의 자발적 결의와 연대가 모여 연구와 실천을 해 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단체입니다. 시민이 스스로 기억의 주권자가 되어 만든 독특한 지성과 실천의 공간이자 의지의 집합체입니다. 35년 동안 연구소를 지탱해 온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5년 전 연구소가 출범했을 때 한국 사회는 군사독재의 해체 이후 새로운 민주 질서를 모색하던 전환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과거를 바로 세우는 일은 곧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지는 일이었으며, 친일 문제 제기와 사전 편찬은 보수적인 지배 엘리트에게 지난날의 정치적 과오를 세상에 드러내는 기소장이자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가를 묻는 선언이었습니다. 친일파에게 법적·정치적·역사적 책임을 묻는 일은 특정 인물을 비판하는
민족사랑 202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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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가 국가유공자 둔갑 웬말?” 분노의 ‘4·3버스’
[후원회원마당] “학살자가 국가유공자 둔갑 웬말?” 분노의 ‘4·3버스’ 한요나 후원회원, 시민기자 2026년 1월 14일, 제주에서 육지로 향하는 ‘육지로 가는 4·3 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참가한 100여 명의 시민은 왕복 1000km에 달하는 경로를 따라 역사정의를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번 답사는 제주 4·3 당시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박진경 대령이 지난해 11월, 국가보훈부에 의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추진되었다. 소리소문 없이 진행된 이번 지정은 제주 4·3의 역사적 성격과 제주도민들이 겪은 상처를 다시금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의 주도로 결성된 답사단에는 제주 4·3 유관 단체를 비롯해 역사학자, 4·3 유족회,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국가보안법 피해자와 세월호 활동가 등 다양한 시민단체와 문화예술인 100여 명이 가세하며, 여정은 왜곡된 성역으로 둔갑한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역사연대의 장으로 전개되었다. 뒤틀린 과거사 청산: 학살 주범이 유공자로 부활한 모순 이번 답사의 출발점은 ‘역사정의’의 회복에 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제주 4·3 당시 미군정에 의해 발탁되어 진압작전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부임 직후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위협에 그치지 않고 이후 전개된 혹독한 양민 학살 작전의 지침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박진경의 부임은 4·3의 전개 양상을 ‘치안 유지’에서 ‘양민 학살 작전’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지점이었다. 그는 부임 한 달 열흘 만에 약 6천여 명의 도민을 무차별
진도 의신공립보통학교 국기게양탑 건립기
[식민지 자료관 6] 진도 의신공립보통학교 국기게양탑 건립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축제일을 당하여 축의를 표하기 위하여 국기를 게양함은 신민 된 자의 본분이라. 그러하지마는 올봄에 소요가 있은 이후로부터 우리 조선사람 중 회사 혹은 은행을 제하고는 도무지 국기를 게양하지 아니하였도다.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이겠지마는 생각건대 이는 외부의 협박으로 말미암음이 가장 많도다. 이제는 소요도 진정되고 불령한 자들의 자취도 점점 없어져 가며 또는 저자들의 빙자하는 강화회의도 끝났도다. 그러하지마는 상금껏 축제일에 국기를 달지 아니하는 것은 신민 된 본분에 위배되었으며 동시에 국가의 큰 불상사일지라. 천장의 가절이 박두하였는 바 식자의 의견을 들을지어다. (이하 개별 의견 있음). 이것은 거족적인 삼일만세시위가 있던 바로 그해 가을, 『매일신보』 1919년 10월 30일자에 수록된 「국기게양문제(國旗揭揚問題), 천장가절이 목전에 박두해, 식자의 의견을 들을지어다」 제하의 기사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 당시에는 일장기에 대한 거부감이 확연히 강했던 탓인지 ─ 식민통치자들로서야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는 노릇이었을 테지만 ─ “조선사람들이 도무지 국기(일장기)를 게양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년 9월 18일)의 국면이 되자 중대한 시국변화(時局變化)의 전개를 빌미 삼아 즉각적으로 국기 관념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동시에 이를 의무 게양하고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정책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 점에서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1932년 1월 22일자로 이뤄진 정무총감의 통첩(通牒) 「국기게양방 여행에 관한 건(國旗揭揚方勵行ニ關スル件)」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에 있어서는 종래
경성고학당 출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연구소 글방 24] 경성고학당 출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박광종 특임연구원 1. 경성고학당의 8년간 고투(苦鬪) 고학당의 설립은 이준열의 자발적인 교육운동에서 비롯되었다. 공업전문학교의 조선인 자치조직인 공우회(工友會) 회장이었던 이준열은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그해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공전(工專) 동창생 최의창을 만나 대중적 교육사업에 의기투합했고 지방 출장 중에 우연히 대한광복회 박상진 열사의 아들 박응수한테서 당시 3만원 가치의 산야를 기증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학비를 전액 면제하는 고학당(苦學堂) 설립안을 구체화했다. 최근 신문을 의거하건대 고학생 구제방법에 대하여 박응수, 이준열, 최의창 등 제씨의 고심한 결과로 고학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고학당을 설립하려고 획책중인 바 그 학당에 입학하는 학생은 중등 정도의 교육을 5년간에 완전히 졸업하도록 교수할 터이라 한다(『조선일보』 1923.2.23). 고학당은 무산자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을 표방했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자 하는 헌신적인 교육자들의 자발적 지원이 있었기에 각 교과별로 적정한 교사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교사들은 과거 경력에 따라 ① 경성공업전문학교 동창 ② 현직 교사들 및 교육사업가 ③ 해외 유학생 출신으로 분류된다. 설립 초기에는 공업전문학교 동창인 최의창, 김용현, 이대우, 최성옥이 교사진에 참여했고(『매일신보』 1923.4.6), 이후 다른 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중견 교사와 교육사업가들이 결합하였다. 1923년 5월 개교 당시 교사진은 다음과 같다. 배재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권진규가 고학당에 출강하였으며, 박형남이 한문 역사 과목을 담당하고, 타학교 교원이었던 조종환이 수학을, 남상목이 영어, 최성옥이 체조, 그리고 설립자 이준열은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신 과목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