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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경기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대회 성료

2026년 1월 2일 97

[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경기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대회 성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는 지난 12월 1일 오후 수원특례시 광교푸른숲도서관 강당에서 경기도청이 주최하고 본 회가 주관한 <경기도 독립운동 참여자 발굴과 향후 과제> 학술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대회는 경기도 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걸맞은 예우와 선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행사에는 기념사업회 조세열 홍보위원장과 방학진 사무국장, 이용창 학술위원장을 비롯해 김해련 경기도 복지정책과장, 김호동 광복회 경기도지부장 등 40여 명의 관계자와 시민이 참석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방학진 사무국장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조세열 기념사업회 홍보위원장의 개회사와 김훈 경기도 복지국장(김해련 과장 대독)의 축사로 문을 열었다. 조세열 위원장은 “경기도는 항일 의병 전쟁부터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투쟁의 현장이었음에도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영웅들이 많다”며 이번 대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제 발표에서는 역사적 현장 분석부터 구체적인 정책 제언까지 폭넓은 논의가 이어졌다. 첫 번째 발표를 맡은 김명섭 단국대 연구교수는 ‘항일의 현장에서 만나는 경기독립운동’을 주제로, 경기 동·남부와 서·북부의 지역적 항일 투쟁 특성을 분석했다. 김 교수는 “남한산성 연합의병과 서울진공작전 등 무장 투쟁의 요충지였던 경기 지역의 특성을 살려, 안양 원태우 의거지나 이천 이수흥 의거지 등을 ‘살아있는 항일 독립정신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해 주목을 받았다. 이어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김대용 여주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은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 포상 현황과 과제’를 통해 정부와 지자체의

군국가요의 원류인 일본 군가 음반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

2026년 1월 2일 233

[소장자료 톺아보기 76] 군국가요의 원류인 일본 군가 음반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 이번 달에 소개하는 자료는 류영철 회원(대구지역위원회)이 일본 육군 수뇌부의 봉천회동 사진과 함께 기증한 일본 군가 음반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이」이다. 이 음반은 종이 케이스에 들어있는데 그 구성은 30cm 크기의 레코드 2장, 수록곡 목록과 가사, 여러 전쟁터 사진으로 구성된 내지와 구 일본 제국 시기의 임시소집영장, 군인칙유(軍人勅諭), 제국해군의 견장(肩章)으로 이루어진 광고물이다. 제작사는 현재도 음반 제작을 비롯한 각종 사업을 운용하고 있는 ‘일본 크라운 주식회사’(日本クラウン株式会社, Nippon Crown Co., Ltd.)로 1963년 도쿄에서 창립되어 1973년부터 1990년까지는 ‘크라운 레코드 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2장 음반의 정식 레코드 번호는 GW10013과 GW-10014이다. 레코드와 내지, 광고물 어디에도 제작일자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앞의 일본 크라운 주식회사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동일한 사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 음반도 이 시기에 발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군가(軍歌)는 막부 말기 서양식 군대 훈련을 위해 도입된 후, 1882년 <발도대(抜刀隊)>1의 등장을 계기로 전 국민이 부르는 하나의 장르로 확립되었다. 청일전쟁 시기에는 전황을 전하는 뉴스이자 오락으로서 폭발적으로 유행했으나, 러일전쟁 때에 과도한 생산으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져 전황 묘사보다는 특정 영웅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평화기였던 다이쇼 시대에는 신작 대신 기존 멜로디에 가사만 바꾼 개사곡이 성행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군가 멜로디가 노동가나 반전가, 심지어 조선과 중국의 혁명가로 변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일전쟁 이후 당국의

민족사랑 2025년 12월호

2025년 12월 30일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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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생가에 제주4·3학살 책임 묻는 안내판 설치

2025년 12월 1일 196

[후원회원마당] 조병옥 생가에 제주4·3학살 책임 묻는 안내판 설치 박진우 후원회원, 시민기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위원장 최기섭)와 천안지회, 그리고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이사장 백경진)는 11월 9일(일) 천안시 동남구 병천읍에 조성된 조병옥 생가 앞에 해방과 정부수립과정에서 경무부장 조병옥이 행한 학살의 진실을 밝히는 안내판을 설치했다. 시민단체들은 ‘조병옥의 역사적 과오를 기록하다’라는 제목으로 천안시(1995년 천안군수)가 세운 조병옥을 찬양하는 안내판 옆에 학살의 진실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하여 방문자들이 조병옥의 ‘공’과 ‘과’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난 4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제221차 집행이사회가 제주4·3의 학살과 진실을 밝히는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국가유산청 누리집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내 ‘제주4·3기록물’에는 제주4·3기록물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세계적 냉전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 지역적으로 압축되는 양상을 하나의 사건을 통해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냉전시대의 희귀한 기록물이며, 대한민국 행정·입법·사법부, 미군정 및 미군, 봉기세력 등 제주 4·3 당시 이해 당사자들이 각자 생산한 기록물, 사건의 서사적 진실을 담고 있는 희생자와 유족의 피해신고서와 구술증언, 그리고 민간과 정부기관의 진상규명과정 기록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제주 4·3의 완전한 기록물로 볼 수 있다. 제주 4·3의 해결 과정은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폭력성을 넘어 화해와 상생이라는 인간성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점에서 제주4·3기록물은 전 세계 과거사 해결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인권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제주4·3 세계기록유산은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기록’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었으며, 1948년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옥중 엽서 등

하얼빈 역사 기행 답사기

2025년 12월 1일 191

[후원회원마당] 하얼빈 역사 기행 답사기 김윤슬 윤슬국어학원장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을 두드린 지 15년이 훨씬 넘었다. 서울에서 지낼 땐 그래도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관심을 두기도 했는데 제주라는 작은 섬에 온 뒤로는 연구소 활동은 보내주시는 소식지로 접하는 것이 전부였다. 대학 입시를 위해 한국사는 30점 이상만, 4등급 이내에 만들면 된다고 말하는 학생들을 보며, 이 아이들에게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는 역사도 알려주고 싶었다. 선조들이 피와 눈물로 지켜주신 이 나라의 이야기를 단순히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내 생각을 지지해주시고 응원해 주신 제주지부의 많은 분과 방학진 실장님을 비롯하여 연구소 식구들 덕분에 올해 초에는 제주의 강태선 지사님도 뵙고, 역사 교과서에 기록조차 없는 법정사 항일 무장 운동을 공부하고 60명이 넘는 학생들과 2회에 걸쳐 답사도 다녀올 수 있었다. 또 『끝나지 않는 석정의 노래』의 저자이자 밀양 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 선생님을 모셔 의열단의 삶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강연을 들은 아이들 또한 직접 밀양과 난징에 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뜻깊은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난징은 서울 가는 거리와도 비슷하므로 꼭 한번 추진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민족문제연구소와 HURA에서 주관하는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안중근 의거 116주년과 이석영 선생 탄생 1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라고 했다. 116년이 흐른 2025년 10월 26일에 내가 하얼빈역에 설 수

재중 조선족 작가의 항일문학과 재중 동포문학의 현재

2025년 11월 27일 274

[돌려보기] 재중 조선족 작가의 항일문학과 재중 동포문학의 현재 리홍규 (중국 하얼빈) 시인·소설가 중국조선족 항일문학은 광복 전에는 재중 조선인(한국인)에 의해 광복 후에는 중국조선족에 의해 중국 본토에서 한글과 한어(漢語, 중국어)로 창작했거나 발표된 항일 관련 문학작품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 항일문학은 시간적으로 크게 광복 전과 후로 갈라볼 수 있고 광복 후 조선족문학은 또 중국의 개혁개방을 분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광복 전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 광복 후 30여 년간 조선족 항일문학, 개혁개방 후 조선족 항일문학, 중국조선족 문학의 현재 등 네 개 부분으로 나뉘어 서술하게 된다. 편폭의 제한으로 광복 전 항일문학은 항일가요와 항일연극을 위주로, 광복 후 항일문학은 소설과 항일 관련 전기문학을 위주로 다루고자 한다. 1. 광복 전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 광복 전 재중 조선인 항일문학을 살펴보기에 앞서 항일문학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배경이 되는 중국 동북으로의 조선인 이민과 그 과정에서 조선인 이민공동체문화와 그 구성부분인 조선인문학의 형성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 당시 만주(滿洲)라고 불렸던 중국 동북으로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이민은 1869년부터 1874년까지 5년에 걸쳐 조선북부의 흉작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후 농민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간도(間島)라는 현재의 연변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시작으로 식민통치가 날로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 목격담

2025년 11월 27일 230

[식민지 자료관 5]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 목격담 이순우 특임연구원 일제 패망 직전에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펴낸 『새로운 조선(新しき朝鮮)』(1944)이라는 선전책자의 첫머리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禿山の赤土山の山つづき 悲しき國をつくれるもの哉(벌거숭이 붉은 흙산의 산줄기가 슬픈 나라를 만든 것일까)” 일찍이 어느 가인(歌人)이 탄식했듯이 자토색(赭土色)의 민둥산과 빨래하는 백의부인(白衣婦人), 이것이 20년 전 혹은 10수년 전까지의 조선의 인상(印象)이자 슬픈 현실이었다. …… 일찍이 ‘슬픈 나라’라고 읊었던 가인은, 지금 이 싸우는 조선(戰ふ朝鮮)의 격렬한 기백과 늠름한 현실을 직시하고 과연 뭐라고 노래할 것인가. 조선은 전진(前進)한다. 그 목표는 단 하나 ‘황국일본(皇國日本)의 무궁(無窮)한 발전(發展)과 함께’ 조선은 전진한다. 당당(堂堂)하고, 또 역강(力强)한 2,600만 동포(同胞)의 밀물 같은 전진의 공음(跫音, 발소리)에, 우리 잠시 귀를 기울여보지 않겠는가. 여기에 “어느 가인(歌人)”이라고 적어놓은 이의 정체는 야마지 하쿠우(山地白雨, 1879~1914) [본명은 야마지 쥰이치(山地純一)]이다. 그는 현직 체신서기(遞信書記; 경성우편국 근무)이면서 이런저런 문필활동을 했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심장마비로 급작스레 죽자 절친했던 — 신문기자 출신이자 언론출판인으로 활동했던 —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888~1934)의 손으로 그의 유고문집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곧 『슬픈 나라(悲しき國を)』(1922)이다. 이 책을 뒤적이다 보니 「총형(銃刑)」이라는 제목의 글이 퍼뜩 눈에 띈다. 이것은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1904년 9월 21일 집행) 당시의 목격담인데, 러일전쟁 당시 이 땅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김성삼(金聖三), 이춘근(李春勤), 안순서(安順瑞) 등 3인의 조선인이 억울하게 ‘철도파괴범’으로 몰려 마포 공덕리 부근에서 공공연하게 포살(礮殺)로 처형된 바 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앞서 『민족사랑』 2019년 12월호에

[제19회 임종국상 수상소감] 언론 부문 수상자 이은지

2025년 11월 27일 151

[제19회 임종국상 수상소감]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언론 부문 수상자 이은지 당신은 임종국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전화 통보를 받고, 단박에 뇌리를 스친 생각은. ‘고객 맞춤형’ 피싱이구나. 네? 제가요? 임종국 선생이 누구인가. ‘친일역사 연구’의 개척자이자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일평생을 바친 위대한 학자이자 역사운동가 아니신가. 그런 분의 유지를 잇는 이 영광된 상을 받을 자격이 내게 있는가. 수많은 ‘부끄러움’이 수일에 걸쳐 가슴을 잠식했습니다. 이 부끄러운 감정의 뿌리를 찾고자 지난 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친일행위에 대한 참회와 반성, 발본색원이 없는 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다.” 임종국 선생이 남긴 유고입니다. 역사학자로서 느꼈을 부끄러운 감정을 감히 추측해봅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를 제작할 때 백하 김대락의 후손 김시중 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3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 취재 중 마지막 질문. 증조부는 왜 ‘망명’을 선택했을까요. “나는 한 마디로 ‘부끄러움’이라고 봐.” 그는 또 백하 선생의 부끄러움을 다른 말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어른의 ‘염치’라고 칭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전해주던,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부끄러웠을 감정도 헤아려봅니다. 시인 윤동주도 그의 작품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럽지 않기를 기도하며 글을 적었지요. 시대의 아픔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괴로웠을 감정도 어렴풋이 가늠하려 애써봤습니다. 처음, 만주 땅을 밟았던 날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내적 각성’ 말입니다. 다큐 〈서간도의 별들 3500〉을 제작하기 위해

[제19회 임종국상 수상소감] 학술 부문 수상자 김영범

2025년 11월 27일 157

[제19회 임종국상 수상소감] 오래된 회한과 뒤늦은 변명 학술 부문 수상자 김영범 ‘임종국 상(賞)’이 있는 줄은 때때로 보도를 접하여 알고 있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한다는 정도 말고는 내용을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매년 수상자가 발표되면 관심이 가고 축하의 마음도 자연스레 들었지만, 자신을 결부시켜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었으니까요. 그런데다 멀리 시골에 박혀 산다고 시상식에 와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올해의 학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두렵기조차 하여 감당이 어렵다고 느껴짐에 수상을 고사하고 싶었고, 그 의사를 주관처에 표했다가 면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올해 들어 순전히 개인적인 의미와 이유를 몇 가지 담아내며 출간을 준비하여 두 권의 졸저를 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의 하나가 지목되어 임종국상을 받게 되었음은 정말 뜻밖입니다. 당연히 영광스러울 일이긴 하지만, 그리된 데에 어떤 곡절과 연유가 있는지 정말 모르겠고, 너무도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심경을 새삼 언표하는 것은 그저 겉치레의 겸양이 아니라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돌이켜보면 격동의 시절이던 1988년의 봄인지 가을인지의 어느 날, 임종국 선생님을 천안시 삼룡동의 댁으로 찾아 뻧었습니다. 그때 저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풋내기 연구원이었고, 연구용 도서 구입으로 인연 맺어진 천안 시내의 서점주 겸 사회운동가 김대기 씨의 귀띔을 받고 동행해서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김형이 작고하시기 전의 선생님을 계속해서 5년간 시봉했다는군요. 큰길에서 한참 들어가 외진 들머리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남북화해·협력 기원, 백두대간 산행

2025년 11월 27일 110

[초점] 남북화해·협력 기원, 백두대간 산행 1998년 11월 18일 시작한 금강산관광은 2008년 8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으로 인해 그 이튿날부터 전면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연구소는 금강산관광이 시작된 27주년을 기억하고 금강산관광 재개를 통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11월 15일, 16일 이틀 동안 ‘남북 화해·협력 기원 백두대간 산행’을 진행했다. 우리 연구소 회원 30명은 강원도 고성군이 제공한 버스로 구리역을 출발하여 옛 알프스스키장 주차장에서 마산봉까지 왕복 4시간을 산행했다. 쾌청한 날씨 덕분에 마산봉 정상에서는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육안으로도 잘 보였다. 하산 후 저녁 식사 자리에 동석한 함명준 고성군수는 새 정부 출범으로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동해북부선 철도와 도로는 물론 백두대간도 다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금강산콘도에서 숙박한 회원들은 이튿날 폐쇄된 제진역과 현대아산 고성사무소 등을 둘러보고 새로 개관한 화진포 셔우드홀 문화공간 관람을 끝으로 다시 구리역에 도착했다. 첫날 산행에는 여러 차례 백두대간을 등반한 구자명 회원(전 천안 한마음고 교장)이 길잡이를 맡아 수고해 주었다. 앞으로도 우리 연구소는 금강산은 물론 철길, 도로 등 끊어진 백두대간을 잇는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