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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동해바다 독도수호의 작은 불씨가 되고자 강치상을 세우다 – 강치상을 기증한 청심국제중고등학교 학생들

2018년 11월 26일 97

인터뷰 – 자료실 김슬기 10월 2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한켠에서는 독도 지킴이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강치상을 기증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청심국제중고등학교 동아리 해밀의 학생들이었다. 11월 11일 일요일에 박물관에서 이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기숙사에 사는지라 집에 올라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일 텐데도 졸린 기색 하나 없이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에 찾아와 주었다. 이 자리에는 강치상을 제작한 김성래 작가도 함께하였다. “독도에 사는 강치를 기억함으로써 역사의 영속성을 알리고, 국력을 키우는 작은 불씨가 되고 싶어 강치상을 제작했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 : 동아리 이름이 해밀이라고 했는데요. 어떤 뜻으로 지어졌나요? 답 : (한재원) 해밀은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저희도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사회적인 이슈들을 저희만의 해석과 시선으로 해결해서 갠 하늘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자 동아리 이름을 이렇게 짓게 되었어요. 2016년에 여기 있는 소윤이, 선배님(태영), 그리고 저를 포함한 7명이 창단 멤버로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문 : 해밀은 주로 어떤 활동들을 해왔나요? 답 : (문소윤) 지구촌 불평등 국가 아이들을 위해 전래동화 번역을 하고요. 방학 때는 캄보디아로 해외봉사, 매년 겨울에는 요양원 김장봉사를 해요. 또 저희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가평 내의 지역아동센터에서 매주 목요일에 바이올린, 영어 등으로 재능기부도 하고, 놀이로 강치를 알리고, 강치벽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한재원) 가장 주요한 활동은 독도를 알리는 활동인데요. 독도에 가서 강치를 보고 배지 같은

기증자료

2018년 11월 26일 87

심정섭 지도위원 제70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01점 보내와 10월 4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0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고창, 보성, 구례 등에서 발행된 토지소유권보존등기신청서, 벌채허가서, 곡물판매대금 증서 등이다. • 10월 16일 네이버 오디오클립 <아빠 한국사여행 떠나요> 구독자 일동, 청소년 어린이책작가회의 회원 일동, 3.1운동 100주년 시민박물관 프로젝트 참가자 일동이 어린이 도서 200권을 기증했다. • 10월 18일 오세명 씨가 <대한협회회보> 등 도서 17권을 기증했다. • 10월 24일 박기서(경기부천지부) 회원이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전 육군 소위를 처단한 정의봉, 안중근 의사 어록, 김구 조형물 총 3점을 기증했다. • 10월 26일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에서 원폭피해자 곽귀훈 씨의 자료를 기증했다. 군복무 시절 사진과 기록 영상물 등 총 9점(복제본)인데 1944년 징병 1기로 강제동원되어 서부 제2부대에서 찍은 초년병 시절 사진과 군대수첩,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재증명서 등이다. 최미경(충남지부) 최장원(서울서부지부) 회원, 의병대장 최구현 선생의 자료 기증 • 10월 15일, 독립유공자의 후손 최미경, 최장원 회원이 소장하고 있던 증조부 故 최구현 의병장의 유품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최구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에 울분, 1906년 충남 당진소난지도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의병대장이다. 기증 자료는 교지, 성적표(합격증), 화살 등 총 15점이다. 최구현 선생은 호가 유곡, 본관이 경주로 1866년 면천군 매염리(송산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여 1887년 과거(무과)에 급제 후 훈련원

110년 만에 고향 구미에서 처음 열린 왕산 허위 선생 추모식

2018년 11월 26일 79

12월 1일 창립 예정인 연구소 구미지회(준)는 10월 21일 구미시 임은동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옆 묘소에서 허위 선생(1855~1908)의 장손인 허경성 선생(92)을 비롯해 회원과 구미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순국 11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이번 추모식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110년 만에 구미시민들이 마련한 첫 추모제다. 대구에서 맏손자 허경성(92세) 선생 내외와 서울에서 후손 허벽(84세) 선생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운강 이강년 의병장에 이어 경성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순국한 허위 선생 가문은 10여 명이 항일투쟁에 참여해 안중근,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 일송 김동삼 가문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5대 항일 가문으로 꼽힌다. 그동안 구미시는 역대 시장이 앞장서서 1천억 원이 넘는 혈세를 들여가면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추모제와 탄신제는 지냈지만 허위 선생의 추모제는 지내지 않았다. 이것이 연구소 구미지회(준) 회원들이 추모식을 발 벗고 준비한 이유다. 장세용 구미시장은 추모식이 열리기 전, 기념관을 찾아 허위선생 유족에게 감사의 말씀과 함께 세계 여러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왕산 유족 가운데 고향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분을 위한 주택 대책을 마련해 보라고 즉석에서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이날 추모식은 전병택 회원의 사회로 박도 회원(역사 저술가)이 허위와 허형식 장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구미 시민 김형숙 님이 이육사의 시 <광야>를 낭독했다. 박찬문 회원은 추모식 경과보고를 했고 장호철 회원은 허위 선생 행장을 소개했다. 장기태 회원의 눈물어린 추도사로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서울시는 1966년 왕산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2018 연구소 수련회 개최

2018년 11월 26일 49

10월 13·14 양일간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마곡사 인근의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연구소 수련회를 개최하였다.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로 인해 수련회가 늦춰지게 되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50여 명의 회원들과 상근자가 참가한 가운데 결의와 우의를 다지는 뜻깊은 자리였다. 저녁식사 후 연수원 앞마당에서 진행된 공식 행사에서 먼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고 임종국 선생의 누이 임경화 여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정섭 공주시장 등이 축사를 하였다. ‘올해의 모범지부’ 영예는 부천시민역사강좌, 강화도 평화기행 등 시민과 함께하는 행사를 활발히 진행한 부천지부에 돌아갔다. 이어서 노래운동가 주하주 회원(광주지부)의 지도하에 8, 90년대 애창되었던 민중가요를 참석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열창하였다. 정준찬·최수련 부부 명창이 진행하는 우리가락 한마당에서 신명나는 판소리 가락에 어깨춤이 저절로 춰졌고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등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혹한(?)의 날씨로 인해 식당으로 들어가 뒤풀이 행사를 진행하였다. 늦은 시간까지 많은 회원들이 술과 다과를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튿날 숙소를 나와 전날 마곡사를 안내해준 지수걸 공주대 교수(연구소이사)를 따라 동학농민군의 숨결이 배인 공산성과 우금치 전적비를 답사했다. 지수걸 교수의 깊이 있는 해설로 새로운 역사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유적지를 보는 시야를 한결 더 넓힐 수 있었다. • 편집부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촛불’ 2주년에 돌아보는 역사전쟁

2018년 11월 26일 77

조세열 상임이사   “이것이 나라냐?”고 분노하며 시민들이 촛불을 든 지 벌써 2년이 됐다. 그간 정권교체도 이루어졌고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한 전망도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촛불민심이 요구한 ‘적폐청산’과 ‘국가재조’라는 혁명적 과제는 현실정치와 경제논리에 발목이 잡혀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잠시 자숙하는 시늉을 하던 수구세력은 자신감을 되찾은 듯 촛불항쟁의 정신을 외면하고 거침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들은 분단 70년이 넘어 찾아온 민족의 명운이 걸린 절호의 기회를 한갓 정치적 득실을 따져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 숱한 개혁 입법도 제대로 논의조차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두 차례 보수정권에서 고질화한 관료사회의 퇴행도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이제 일각에서 조직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고함을 강변하며 현 정권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통설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남의 탓만으로 돌리며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더 늦기 전에 문제의 근원을 찾아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은 촛불민심의 선택과 위임을 받아 출범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그 요구에 응답하고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피할 수 없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함께 외쳤던 주장이 무엇이었던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거창한 명제가 아니었다.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하야–퇴진–탄핵-구속 촉구로 이어지는 각 단계별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지만, 이를 관통하는 구호는 ‘기본권의 보장’에 다름

용산역, 침략군대가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공간 – 군용철도 경의선과 경원선의 분기점이 용산에서 형성된 까닭은?

2018년 10월 20일 251

식민지 비망록 40 이순우 책임연구원 「경성급용산」 지도자료에 표시된 왕십리의 원래 위치. 이 지도를 통해 왕십리 마을은 서울도성 광희문과 왕십리정거장의 중간쯤에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철도여행안내>, 1915)   서울 성동구에 있는 왕십리역전광장 한쪽에는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흉상과 더불어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그의 시 <왕십리(往十里)>를 새긴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비를 볼 때마다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과연 이곳이 김소월이 말하는 왕십리가 맞는가 하는 사항이다. 그가 월간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 제9호에 이 시를 발표한 것이 1923년 8월이었다. 이 점 에 착안하여 그 시절과 가장 근접한 ‘경성부 관련’ 지도자료를 살펴보면, 왕십리역 앞쪽에는 ‘행당리’로 표기된 작은 마을이 있었을 뿐이고 정작 ‘왕십리’는 이곳과 뚝 떨어져 지금의 왕십리 뉴타운 지역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보듯이 흔히 사람들은 왕십리라고 하면 ‘오리지날’ 왕십리의 위치에 대해서는 잘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왕십리역이거나 왕십리네거리 언저리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위치 혼동은 모름지기 ‘왕십리역’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인 듯하다. 이 역은 1911년 10월 15일 일제에 의해 경원선(京元線, 용산~의정부 구간)의 운수영업이 처음 개시될 때 뚝도정거장(纛島停車場)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이내 1914년 4월 11일에 왕십리정거장(往十里停車場)으로 개칭되었다. 단순히 기차역의 소재지로 본다면 ‘행당역’ 정도로 명명되는 것이 맞았을 테지만 지명도가 약한 탓에 공연히 중랑천 건너편에 있는 ‘뚝섬’을 가져다 ‘뚝도역’이라고도

가족과 함께 본 식민지역사박물관

2018년 10월 20일 167

박찬희 <구석구석 박물관1> 지은이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혼자 가도 좋지만 같이 가면 더 좋을 텐데. “얼마 전에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겼는데, 같이 갈래?” 다른 때는 박물관에 가자고 하면 두어 번쯤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벌이는데, 웬일인지 이번은 다르다. 딸아이가 박물관을 본 후에는 자기가 가고 싶은 데 가자며 흔쾌히 대답했다. 같이 박물관을 간다는데 그 정도쯤이야. “그런데 거기 뭐하는 데야?” “옛날에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지배를 당한 적이 있어. 그때 역사를 잊지 말자고 만든 곳이야.” 아내와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지인들과 박물관을 새롭게 보는 활동을 하는 덕분에 개관하기 전 미리 박물관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사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아내와 딸은 어떻게 박물관을 볼지 무척 궁금했다. 요즘 우리 가족이 박물관을 관람하는 방법은 이렇다. 나와 딸아이가 같이 다닌다. 대장 역할은 딸아이가 맡고 나는 딸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반면 아내는 따로 다니며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박물관에서 발걸음을 멈춘 곳은 박물관 입구였다. 그곳은 일반적인 박물관과 다르다. 입구를 따라 늘어선 벽에는 후원한 사람과 단체의 이름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이 벽 자체가 무엇보다 강렬한 박물관의 역사였다. 후원자들은 자기 이름을 찾아보면서 얼마나 뿌듯해 할까. 1층은 관람자를 맞이하는 공간이다. 의자와 책상이 놓인 널찍한 곳으로, 나중에는 기획전시 실로 사용할 계획이란다. 딸과 같이 둘러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초석을 놓은 임종국 선생님의 글 앞에서 섰다. 이런 글은 실제로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심의방청기

2018년 10월 20일 180

최태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장관의 건의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사회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세워진 입법기관이다. 1946년 10월 간접선거로 선출된 45명의 민선의원과 하지 미군사령관이 임명한 관선의원 45명으로 구성되어 1946년 12월 12일 개원하여 1948년 5월에 해산하였다. 이 기간에 입법의원에서 제정한 주요 법률로는 「입법의원선거법」,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조선임시약헌(朝鮮臨時約憲) 등이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6월호에 실린 최태신(崔泰信)의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심의방청기」다. 이 자료는 친일파 처단을 규정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 제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민선의원와 관선의원들의 치열한 대결 양상을 상세히 다루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사료다. – 편집자주   1946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기념사진. ⓒ 국가기록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작년(1946년) 12월 12일 개원 직후, 동원법(同院法)을 심의할 때에 동원법 초안에는 특별위원회로서 자격심사위원회, 임시헌법과 선거법기초위원회, 행정조직법 기초위원회, 식량물자대책위원회, 적산대책위원회 등 다섯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규정하였던 것을 원세훈(元世勳) 의원(좌우합작위원회 소속 관선)의 동의에 의하여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전범(戰犯) 간상배(奸商輩)에 대한 특별법률조례기초위원회를 설치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당시 원세훈 의원의 동의가 만장일치로 순조롭게 가결된 것은 아니었던 것만큼 후일에 정원 90 의원 중 무시할 수 없을 반동적 방해 의원이 없으리라고 예상 안된 바도 아니었지만 하여튼 동위원회 설치 가결은 과도입법의원 자체가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에 대한 처벌법 제정을 입법의원 자신의 일대 사명으로 부하(負荷)하고 나온 것이었으니 해방 이후도 민족반역자 친일파가 일반의 원성이 귀에도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치욕을 회피하지 말고 확실하게 기억하자는 배움터입니다

2018년 10월 20일 142

김판수 전북지부 회원 우리는 많은 열성과 많은 노력과 많은 시간을 들여서 준비한 ‘식민지역사박물관’(Museum of Japanese  Colonial History in Korea)을 국치 108년 만에야 문을 열었습니다. 감개가 무량하고 기쁘고 축하받고 자축할 일이지만 국치 후 조국광복을 위하여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재산과 목숨까지도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셨던 독립열사 순국선열 앞에서는 고개 들 면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식민지역사를 부끄러운 역사라고 외면하고 침묵하고 냉담했던 과오를 반성하면서 치욕을 기억하고 무능을 참회하는 성찰과 치열한 각성으로 일본제국 침략전쟁범죄를 낱낱이 명백하게 밝혀두고 끝까지 망각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민문연 가족들의 단합된 의지는 위대했습니다. 우리는 또 한 번 정의가 불의를 이겼다는 기록과 업적을 남기고 한 걸음 더 전진했습니다. 평화를 이룩할 발판을 이루어냈습니다. 우리가 피식민국의 오욕을 씻어내려면 침략국의 침략전쟁책임을 철저히 밝혀두고 철저하게 물어야 합니다. 침략전쟁을 벌이고 악랄한 식민통치로 죄업을 쌓은 일본이 태평양전쟁 종전 73년이 지나도록 패전은 인정하지 않고 종전으로만 기억하면서 과거의 침략역사를 번영과 영광으로만 기억하고자 하는 후안무치한 일본은 가엾은 나라입니다. 일본이 침략국인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침략전쟁은 불의이고 범죄이므로 일본이 전범국이었음을 부인할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음에도 반성이 없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세워놓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가해국 일본이 우리 피해국의 수난과 고통, 상처와 아픔, 수모와 치욕을 함께 기억하고 전범국의 과오를 깨우치는데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장래에는 일본이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주리라 기대합니다. 고마운 분들은 민문연 회원만이 아닙니다.

제2의 광복군이 되어 통일의 그날까지!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장병화 회장

2018년 10월 20일 103

  10월 8일 오전 10시 방학진 기획실장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성남산업진흥원을 찾았다. 성남산업진흥원 원장으로 있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장병화 회장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장병화 회장은 환하고 밝은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선한 인상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인데도 구김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정말 그 많은 풍상을 겪으신 분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에게서 아버지 장이호 선생의 광복군 활동, 기업인으로 자수성가하기까지 겪은 경험담,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후 지속해온 역사실천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문 : 부친 장이호 선생은 젊은 나이에 광복군에 투신해 국내 진입을 준비하고, 광복 후에도 중국에 남아 동포들의 보호와 안전귀국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뒤늦게 귀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친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답 : 사실, 제가 너무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어린 시절은 외갓집에서 보냈는데, 그때 우리 식구는 너무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죠. 하루 세끼 제대로 먹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보냈어요. 아버지에 대한 관심보다 눈앞의 허기를 채우는 것이 먼저였죠. 고생 끝에 음향회사를 차려 자리를 잡아갈 무렵 당시 남대문시장 안에 광복군동지회가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갔어요. 어르신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분들은 저희 가족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계셨죠. 너무도 반갑게 절 맞아주셨어요. 동지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며, 아버지와 지청천장군이 함께찍은 사진을 내보이시며 일제와 맞서 싸우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열아홉 나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