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2026년, 중국 대장정(大長征) 90주년과 그 의미
[후원회원마당] 2026년, 중국 대장정(大長征) 90주년과 그 의미 신동순 숙명여대 중어중문학부 교수 중국공산당은 왜 대장정을 시작했을까? 그 지난한 과정의 배경은 1920년대로 올라간다. 1921년 7월 상해에서 창당한 중국공산당, 그들은 쑨원(孫文) 선생에 의해 반제·반봉건을 기치로 1924년 1월 광저우(廣州)에서 국민당과 제1차국공합작(第一次国共合作)을 한다. 하지만 1925년 쑨원 선생의 사망으로 이들의 합작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양당은 주도권 쟁탈을 위한 밀고 밀리는 치열한 내부 전쟁을 벌이게 된다. 국민당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蒋介石)는 북벌 과정 중 노동자·농민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확보한 공산당을 견제하였고 그들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1927년 상하이(上海) 4월 12일(4.12정변) 장제스가 공산당원들과 진보 노동자 대중들을 대규모 체포 처형하면서 국공합작은 결렬된다. 그는 난징(南京)에서 단독 정부를 수립하였고 공산당 소탕을 위한 추격에 나선다. 이에 공산당은 장제스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며 1931년 11월 장시성 뤼진(江西省 瑞金)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를 세우고 마오쩌둥(毛澤東)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이들의 정부 수립은 장제스에게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다. 즉 공산당이 독자적인 헌법과 정부 조직을 갖춘 국가 형태를 선언함으로써 국민당 정부는 그 정통성에 타격을 받았고, 중국 안에는 두 개의 정부가 만들어졌다. 국·공 전쟁 중, 공산당 정부가 장시성(江西省)을 중심으로 농촌 지역에서 큰 지지를 얻게 되자 장제스의 통일 정부에 대한 구상은 좌절된다. 그는 공산당 정부를 괴멸시키기 위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총력전을 펼쳤고 토벌전을 감행하였다. 1931년 만주 9.18사변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도 장제스는 “안내양외(安内攘外)”(먼저 내부의 반란을 평정하고 외부의
‘경계를 따라’ 가는 역사 기행을 다녀와서
[후원회원마당] ‘경계를 따라’ 가는 역사 기행을 다녀와서 배지원 후원회원 이번 여행으로 나를 이끈 건 여러 해 전에 마주친 한 장의 작디작은 흑백사진이었다. 시인 백석이생활했다는 단둥 압록강 일대의 사진엔 시인이 파 한 다발을 늘어뜨리고 걸었다는 압록강 철교도 보였는데, 너무 작아 어찌나 감질나던지. 조중(朝中) 경계를 따라간다는 담대한 여행 코스도 참을 수 없으리만큼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구나 다롄에서 출발해 투먼에서 끝나는 전체 일정의 딱 중간에 절정을 치는 백두산 천지 감상은 요즘 말로 여행의 ‘킥’이 될 터였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려면 여기저기 양해를 구해야 하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그보다 더 고민이 컸던 건 백두산만은 우리 땅을 밟으며 함께 오르자던 오랜 벗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우리 젊은 날의 진지했던 약속이 생생하건만, 나는 기어이 혼자라도 가보겠다는 욕구를 억누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휴전선 거친 철책이 담담했고, 통일이나 민족 같은 단어들은 입속에서만 맴돌다 시들어간 지 오래였지만. ‘그래, 그 영산 앞에 서서 죽비를 맞든 면죄부를 찾든 가보는 거다’. 주관사 ‘후라’ 대표님 등 서른세 명의 여행자가 공항에 집결했다. 중학생부터 여든이 넘으신 원로까지 우리를 실은 비행기는 무사히 다롄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난 이미 첫 방문지인 뤼순 감옥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국경을 넘는 것부터 큰 난관이었다. 공안들은 후라가 만든 여행 안내서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일행의 소지품에서 ‘미국인’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가져가는가
부산동부경찰서 앞에 터를 잡은 ‘부산진매축기념비(1939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3] 부산동부경찰서 앞에 터를 잡은 ‘부산진매축기념비(1939년)’ 부산진(釜山鎭) 매립공사가 그토록 느릿느릿 진행된 까닭은? 이순우 특임연구원 경부선 KTX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부산지하철로 갈아타고 초량역과 부산진역(8번 출구 방향)을 경유하거나 직접 도보로 2킬로미터 남짓 북쪽을 향해 이동하면 그곳에서 ‘동구문화플랫폼’이라는 이름의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그 옛날 완행열차 ‘비둘기호’의 종착역으로 사용되던 경부선 ‘부산진역사’를 리모델링한 문화공간이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 1월 1일 경부철도 전통영업(全通營業; 남대문~초량 구간)이 개시될 때부터 존재했던 부산진역(釜山鎭驛)은 원래 지금의 자리보다 1리(哩, 마일) 즉, 1.6킬로미터 더 위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부산진 매축지가 새로 조성되자 이쪽으로 선로를 이설하고 역사(驛舍)를 신축 이전하여 영업을 재개한 것이 1920년 10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다시 눈길을 돌려 길 건너편 약간 대각선 방향으로 살펴보면 부산동부경찰서가 곧장 눈에 띈다. 바로 이곳에도 이 일대가 매립지를 기반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려주는 일제 기념물이 하나 남아 있는데, 경찰서 정문 옆 북동쪽 모서리에 터를 잡고 있는 ‘부산진매축기념비(釜山鎭埋築記念碑, 1939년 4월 건립)’가 바로 그것이다. 이비석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보다도 전면 좌측에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씀(朝鮮總督 南次郞書)’이라는 표시가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이 퍼뜩 눈에 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나미 총독(南總督, 재임 1936.8.5 ~ 1942.5.29)이라고 하면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쇄신(敎學刷新), 농공병진(農工倂進), 서정쇄신(庶政刷新)이라는 통치의 5대강령(五大綱領)을 앞세워 내선일체, 국어상용(國語常用; 일본어상용),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 지원병제도를 비롯하여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5. 순종 사망과 <내 고향을 이별하고> 1926년 4월 25일 오전 6시 10분, 한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인 순종(純宗)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통상 조선의 제27대 마지막 왕으로 불리지만, 아울러 그는 1905년 11월 한일 간 조약 체결 이후 껍데기만 남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기도 했고, 1910년 9월부터는 일본제국의 일부가 된 조선의 첫 번째 이왕(李王)이기도 했다. 이왕 시절에는 흔히 ‘창덕궁 전하’로도 불렸다. 오래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을 보지도 못했던 순종은, 1926년 3월 이후 병세가 눈에 띄게 악화했다. 창덕궁 이왕과 그 가족의 가무(家務)를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순종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정리해 발표했고, 언론에서도 그 내용을 받아 공개적으로 지면에 실었다. 『조선일보』 4월 24일 석간을 보면 사망 하루 전 순종의 수면 시간, 음식 섭취량, 체온, 맥박, 호흡, 심지어 오줌량까지 알 수 있다. 이름뿐인 왕이었다고는 해도, 그러한 정보 공개는 전에 없었던, 어쩌면 ‘근대적’인 변화이기도 했다. 사망 나흘 뒤인 4월 29일, 순종은 그때 비로소 순종이 되었다. 이왕직과 종친, 대한제국 시절 옛 신하들이 모여 논의한 뒤 사후에 붙이는 묘호(廟號)를 순종으로 정했다. 순종 국장의 발인일은 6월 10일이었는데, 이때도 7년 전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고자 하는 계획이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학습(?)을 한 조선총독부에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시위는, 준비
‘야스쿠니 반대’ ‘무단합사 반대’ 2026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을 다녀와서
[현장 보고] ‘야스쿠니 반대’ ‘무단합사 반대’ 2026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을 다녀와서 최하연 대외협력실 활동가 2026년 8월 8일 오전, 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 9명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3명은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을 위해 도쿄로 떠났다. 야스쿠니신사는 과거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천황’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미화한다.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야스쿠니신사에는 식민지시기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2만 1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합사되어 있다. 합사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은 2001년부터 일본에서 무단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피해자의 손주 세대가 원고로 참여한 무단합사 철폐 3차 소송이 도쿄지방법원에서 진행 중이며, 2025년 12월 한국에서도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를 상대로 무단합사 철폐소송을 시작했다. 2006년 한국, 일본, 대만, 오키나와 시민들이 조직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햇수로 21년째 매년 8월 도쿄에 모여 야스쿠니신사의 본질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연대와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들은 도쿄에 도착하여 첫날인 8일 일본 청년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침략전쟁의 역사를 미화하는 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행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십 년 동안 해오셨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도 평생 모은 야스쿠니신사 관련 자료를 기증해 주신 즈시 미노루 선생의 자세한 해설을 들으며 전시를 둘러봤다. 유슈칸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아시아 민중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 여성
국치일에서 광복절까지 2026 “기억과 성찰” 특별주간 운영
[초점] 국치일에서 광복절까지 2026 “기억과 성찰” 특별주간 운영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광복 81주년을 맞아 8월 15일부터 29일까지 3주간 매주 토요일 국치일에서 광복절까지 2026 “기억과 성찰” 특별주간을 운영하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이어진 일제 식민지배 35년의 아픔을 성찰하고, 저항과 연대를 통해 평화와 인권의 기틀을 마련한 민중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기획되었다. 첫 순서로 8월 15일 광복절 오후 3시에는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집 『결국, 뿌리로 산다』 북토크 〈후손과의 대화〉가 열렸다. 50여 명의 참가자가 5층 강의실을 가득 채운 가운데, 김창숙·김찬기 지사의 후손 김주 여사와 이관술 지사의 후손 손옥희 여사가 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진 독립운동가 집안의 삶을 증언했다. 김주 여사는 어머니 손응교 님이 남긴 수첩일기를 바탕으로 일제 말기 독립운동가 집안의 궁핍과 경찰의 감시 등 고단했던 현실을 생생하게 전했다. 손옥희 여사는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조작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되어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아픔을 털어놓았다. 2025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으나 올해 광복절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현실을 밝히며, 올바른 역사를 세우는 데 함께 힘을 보태달라고 호소했다. 이날은 북토크와 함께 상설전시 특별해설과 체험 프로그램 〈독립 아이템을 모으자〉도 진행되었다. ‘이육사의 변장용 안경’, ‘지청천 장군이 망명할 때 숨겨간 일본군 군사지도’, ‘독립운동가의 적 친일파가 수록된 친일인명사전’, ‘윤봉길 의사의 폭탄이 된 수통’,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등 독립운동가의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 근현대사기념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 개막식을 8월 7일(금) 오후 3시에 개최하였다. 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김민철 소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정창수 강북구청장, 이희정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번 특별전은 강북구가 낳은 여성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일생을 조명했다. 박자혜는 비밀결사 ‘간우회’를 조직해 3‧1혁명에 앞장섰던 간호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아기 나인에서 여학교 학생으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사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동지이자 아내로, 그리고 조산원을 운영하며 의열단투쟁의 숨은 조력자로 살았던 그의 삶은 조국을 향한 헌신의 여정이었다. 전시는 박자혜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관련 유물과 기록을 통해 그의 삶과 독립운동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 박자혜가 운영했던 인사동 조산원을 전시 공간에 재현하고, 일제강점기 강북구 일대 지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적부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졸업대장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불분명했던 박자혜의 출생지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적사항,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조산부과의 학적사항과 졸업 연도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는 2027년 2월 28일까지 진행될 예정으로 그동안 ‘단재 신채호의 아내’라는 이름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박자혜의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되돌아보고,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삶과 숭고한 헌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정햇살
역사를 입다, 진실을 외치다 —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시민 긴급행동’ 이후에 부쳐
[초점] 역사를 입다, 진실을 외치다 —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시민 긴급행동’ 이후에 부쳐 2024년, 일본 정부는 에도시대 금 채굴 기술만을 앞세워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러나 사도광산은 결코 화려한 산업유산으로만 포장될 수 없다. 일제강점기 1,5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끌려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며 혹독한 강제노동을 견뎌낸 비극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하 갱도에서 목숨을 잃었고,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 진폐증과 광산노동 후유증에 시달리며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이 같은 참담한 역사가 배제된 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의 반열에 오른 배경에는 윤석열 정부의 굴종적 대일외교가 있었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미명 아래, 당시 정부는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일본 정부의 시도에 사실상 동조하며 외교적 항의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일본 정부가 약속했던 ‘전체 역사’ 기록은 흐릿해졌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세계유산 회의장 문밖으로 내몰렸다. 2026년 7월 21일 화요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부산 벡스코(BEXCO) 현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등 여러 시민단체와 시민들은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시민 긴급행동’을 펼쳤다. 참여한 시민들은 일제의 광풍 속에 끌려가야 했던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이름과, 2022년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함께 펴낸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노동 – 한일공동조사보고서』에서 발췌한 피해자 증언이 앞뒤(국문‧영문)로가득 새겨진 대자보(몸자보)를 직접 입고 거리에 섰다. 하얀 대자보를 입은 시민들이 벡스코 주변을 행진하고 퍼포먼스를 벌이자,
민족사랑 202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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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 이관술 선생의 회상기
[자료소개] 학암 이관술 선생의 회상기 기미년 3‧1운동이 일제의 말발굽 아래 덧없이 유린되고 일부 상층 계급이 타협적인 노선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뒤 조선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일반인민의 반제국주의투쟁의 형태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투쟁에서 생겨난 것이 공산주의운동이요, 그것을 지도한 것이 공산당이었다. 이리하여 1925년 4월 17일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고 그 뒤 당과 그 운동을 습격한 일제의 무수한 박해와 잔인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 유일한 반일본적 혁명운동으로 공산주의운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하였으며 그 운동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끼친 공헌은 절대한 바가 있다. 이제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일제 붕괴 전 최후의 수년간을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지하에서 활동한 조선공산당 이관술 씨의 회상기를 소개하는 바이다 — 현대일보 기자 ① 반제투쟁의 회상 내가 반일혁명투쟁에 첫걸음을 들여놓기는 광주학생사건이 발발하여 전국이 들끓던 1929년경이다. 그전 해 나는 일본 동경고사(東京高師.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학교에 와있었는데 나는 본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동경고사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 보자는 이상에서 들어갔고 또 이민족[일본을 말함]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의식의 강화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 그때 나의 생각은 우리민족을 위해서 도움되는 일이라면 경중대소(輕重大小)를 막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자는 일념뿐이었다. 그때 당시 도쿄에서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이러한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견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