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소년독립운동을 기억하십니까?
[후원회원마당] 소년독립운동을 기억하십니까? 이주영 어린이문화연대 상임대표 1. 소년독립운동이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일자 아침 신문을 읽다가 「일제 맞서다 옥고 치러도…10대들 독립운동 인정 ‘높은 벽’」이라는 기사 제목1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기사를 읽어 보니 짐작한 대로 일제강점기에 어린 나이로 독립운동에 기여했지만 단순히 어리다는 이유로 정부 서훈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입니다. 1931년 9월, 전남 완도군 대신리 유치원에서 당시 15살이던 윤덕율 소년이 ‘일본어와 국어’라는 제목으로 웅변하였답니다. 우리 말과 한글을 잘 살려서 써야 한다는 내용인데, 웅변이 끝나자마자 일제 경찰한테 마을 사람 7명이 끌려갑니다. 그중 윤덕율 소년을 지도한 야학교사 고 김병규(당시 44살) 씨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청년 5명도 각각 징역 1년∼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답니다. 그러나 15살로 미성년자였던 윤덕율 소년은 열흘 동안 폭행을 비롯한 가혹행위를 당하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해방 후 6명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날 웅변한 윤덕율 소년은 그동안 8차례나 서훈 신청을 했지만 계속 탈락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이 웅변 사실과 체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판결문에 ‘내용도 모르면서 지도교사가 써준 대로 낭독만 했 다’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례는 그나마 조금 알려진 독수리소년단에서도 발견됩니다. 독수리소년단은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에서 8세에서 17세 소년 14명이 만든 비밀모임입니다. 체력을 길러서 18살이 되면 만주 독립군으로 가겠다는 꿈을 갖고 체력을 단련함과 더불어 군자금을 모으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1942년 3월 초에 장호원 읍내와 버스 뒤에 항일 구호를 붙인
간도특설대 선전 화보와 매일신보 관련 기사
[자료소개] 간도특설대 선전 화보와 매일신보 관련 기사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동맹사진특보(同盟寫眞特報)』 1943년 1월 1일자의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선전 화보와 『매일신보』 1943월 1월 11일자의 「현지보고 – 반도징병제에 선구(先驅)하는 간도특설대의 활약」 기사이다. 1942년 12월말 일제의 국책통신사인 동맹통신사(同盟通信社)는 1943년 신년호 준비를 위해 나카무라(中村) 특파원을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로 파견했다. 나카무라 특파원은 북풍한설 속에서 간도 일대의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고 소만 국경의 수비를 위해 복무하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취재하고 이 부대의 위용과 공적을 칭송하는 화보와 기사를 작성해 『동맹사진특보』 1943년 신년 화보와 『매일신보』의 현지 보고 기사로 내보냈다. 이 화보와 기사에서는 “북변 진호에 철벽의 방비로 지키는 만주국군의 정예” “북변 진호의 중책을 맡아 황군과 협력, 빙설의 광야에서 활약하는 용사” “가혹한 한파에 맞서 철화(鐵火)의 맹훈련을 이어가는 용사” “일만공동방위에 민족협화의 꽃” “엄정한 군규, 충성과 유신의 대도를 매진하는 그들”이라고 간도특설대를 과대 포장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과연 간도특설대의 활약상을 선전하는 내용을 1943년 신년 화보와 기사로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개시로 일제는 전장 확대로 인한 병력 보충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와 괴뢰국 즉 조선, 대만, 만주국, 남양군도 등에서 징병제를 실시해 부족한 병력 수급을 해결하고자 했다. 만주국에서는 이미 1941년 징병제를 전면 시행했고, 조선에서는 1943년 3월 징병제를 공포, 8월에 시행했으며 아울러 10월에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했다. 이러한 징병제 시행 일정을 감안할 때 1943년 1월초에 간도특설대
“요강을 바칩시다!” 강연꾼 이동화
[연구소 글방 25] “요강을 바칩시다!” 강연꾼 이동화 권시용 선임연구원 1937년 2월 16일 일본 도쿄시의회 선거가 있었다. 이때 도쿄시 후카가와구에서 입후보한 이동화는 ‘반도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시의원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큰 뜻을 품고 도쿄에 건너가 분투하기를 20년, 일본 제국의 심장부에서 일본인 유력자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시의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언론은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이 된 박춘금이 노동계급의 추대로 당선된 것이라면, 이동화는 인텔리 계급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했다. 영예의 자리에 선 이동화에게 지난 20년의 기억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강연꾼의 등장 이동화에게는 ‘강연꾼’, ‘선전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동화는 인기 있는 강연가였고, 강연은 그의 삶을 이끌어 간 기관차였다. 이동화가 강연을 삶의 동력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1920년의 일본 대학생단 순회강연이었다. 이동화는 1893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장식은 교장과 면장을 역임한 ‘엄청난 일본 우호가’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일본에 친밀감을 가지고 일본을 동경하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사립 진명학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동화는 191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배운 후 니혼대학에 입학했다. 1920년 7월 29일 일본 도쿄 각 대학 학생들로 조직된 순회강연단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들은 ‘일선융화를 목적으로 하는 학생단’을 표방했다. 와세다 대학 설립자이자 총리대신을 지낸 오쿠마 시게노부, 대아시아주의 주창자이며 일본 우익의 대부 도야마 미쓰루, 정치가 시마다 사부로의 후원을 받은 이들은 조선을 시찰하며 동시에 일선융화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려는 목적을 가진 강연단이었다.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2)
[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2) 이순우 특임연구원 (4) 강우규 의사가 직접 그렸다는 수류폭탄의 모양 스케치 『매일신보』 1920년 1월 30일자에 게재된 예심결정문을 보면 강 의사가 남대문역두에서 사용한 수류폭탄의 정체와 입수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 내용이 나온다. …… 수월 전에 동부 시베리아 ‘우수리’철도의 어떠한 역[청룡역]에서 어떠한 노국사람[러시아인]에게 사용법을 배워가지고 사두었던 주석으로 만든 예화수류폭탄(曳火手榴爆彈, 그 형상과 구조로부터 미국제 영국식의 예화수류탄이라고 추정하는 것) 1개를 가지고 그것으로써 총독을 살해할 목적을 달하고자 다시 포렴사덕[블라디보스톡]에 가서 그 폭발탄은 헝겊조각에 싸서 허리에 차고 교묘히 숨어서 동년 6월 11일 동지를 출항하는 기선 월후환(越後丸, 에치고마루)을 타고 동월 14일 아침에 조선 원산부에 상륙하여 …(중략) … 오른손으로 폭탄을 끄집어내어 장치한 안전전(安全栓. 안전핀)을 빼어들고 총독을 목격하여 폭탄을 던졌는데 그 폭탄은 총독이 탈 마차 앞 약 7보(步)의 거리 되는 곳에서 큰 소리를 내이며 폭발되고 폭탄의 조각은 사방으로 비산하여 그중 두어 개의 폭탄조각은 총독의 탑승한 마차에 맞고 한 개는 마차 뒤를 뚫어 사이토 총독의 허리에 띤 혁대를 손상케 하였을 뿐이므로 총독은 다행히 무사하였으나 사면으로 헤어지는 탄환 조각으로 그 주위에 있던 (하략) 『조선공론』 1924년 9월호에 수록된 강우규 폭탄사건 회고록 관련 기사에는 “강우규가 몸소 그려 보여준 폭탄의 그림”이라는 스케치 한 장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전범기업 일본제철, 미쓰비시로부터 반드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자 힘써 – 대법원 판결 이행 촉구를 위한 방일행동 보고
[초점] 전범기업 일본제철, 미쓰비시로부터 반드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자 힘써 – 대법원 판결 이행 촉구를 위한 방일행동 보고 이번 방일행동은 2018년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는 전범기업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에 판결 이행을 강력히 촉구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96세의 고령인 강제동원 피해자 정신영 할머니와 유족인 이창환, 정종오 씨, 그리고 한일 시민단체들이 함께 도쿄를 방문하여 가해 기업의 본사를 직접 항의 방문하고 사죄를 요구했다. 방일단은 매달 전범 기업 본사 앞에서 열리는 ‘마루노우치 행동’ 집회에 합류했다. 정신영 할머니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81년 만에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방문하여 사죄와 배상을 담은 요청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기업 측은 “담당자가 없다”거나 “예약이 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면담을 거부하고 이들을 문전박대했다. 일본제철 역시 책임 회피와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비겁한 태도를 보였다. 정신영 할머니(피해자 원고)는 “일본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14살에 나고야로 끌려갔지만, 현실은 배고픔과 강제노역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사죄 대신 ‘탈퇴 수당’ 명목으로 99엔(약 931원)을 보낸 일본의 행태에 대해 “과잣값도 안 되는 돈을 왜 보냈느냐”며 격분했다. “100세가 되더라도 죽기 전에는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창환 씨(유족)는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고 이춘식 씨의 장남으로서, “일본제철은 뒤로 숨지 말고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며 배상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결의했다. 정종오 씨(유족)도 미쓰비시 히로시마조선소로
4.4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주권자 승리의 날, 시민행동 부스 참여
[초점] 4.4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주권자 승리의 날, 시민행동 부스 참여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4월 4일 〈4.4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주권자 승리의 날 시민행동〉 부스에 함께했다.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록합니다〉를 주제로 끝나지 않은 내란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을 기억하고, ‘전쟁 반대! 야스쿠니 반대!’ 활동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부스에서는 지난해 박물관에서 개최한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기록집 발간 안내와 기록집 배부 사전 신청을 받았다. 전시 개막 1주년에 맞춰 발간 예정인 기록집에는 윤석열 탄핵과 내란 청산을 위해 12월 3일부터 4월 4일까지 123일간 시민들의 투쟁과 연대의 흔적이 담길 예정이다. 이날 기록집 발간 홍보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무단 합사의 문제점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활동도 함께 진행했다. 시민들은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실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NO WAR! NO YASUKUNI! YES PEACE!”라는 문구의 피켓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다. 완성된 피켓은 8월 도쿄에서 열릴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참가자들이 직접 들고 행진할 예정이다. 2006년부터 이어온 촛불행동은 올해로 21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시민행동 부스 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아쉽다면, 현재 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세상을 바꾼 시민, 함께 만든 역사〉 전시에서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사용될 현수막 함께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다. 연구소와 박물관은 지난 2025년 12월 시작된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지원 등 앞으로도 관련 활동을 활발히 펼칠 계획이다. 다음 달 예정된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기록집
탄핵 1년, 우리가 지켜낸 것과 우리에게 남은 과제
[초점] 탄핵 1년, 우리가 지켜낸 것과 우리에게 남은 과제 – 현장 보고 탄핵에서 내란 재판 1년 기념 강연과 대담 ‘다시 민주주의를 묻다’ 지난 4월 3일, 윤석열 탄핵 1년을 맞아 열린 강연과 대담 ‘다시 민주주의를 묻다’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진행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포럼 진실과 정의가 공동 주관한 이번 행사는 전 헌법재판관 이석태 변호사의 강연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임재성 변호사, 박선경 고려대 교수의 대담으로 진행되었다. 강연과 대담에서는 윤석열 탄핵 재판부터 내란 관련 재판에 이르기까지 판결의 의미를 법적 판단을 넘어 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확장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의 첫 순서로 이석태 변호사는 ‘윤석열 탄핵과 내란 판결의 의미’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 변호사는 탄핵이 대통령 개인에게 내려지는 결정이지만, 실제 문제의 해결은 형법 적용과 관련된 고위직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내란 사건을 다루는 재판의 중대성을 언급하며, 재판부의 높은 책임감과 사명 의식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나아가 두 건의 내란 관련 사건 모두에서 유죄가 인정된 점의 의미를 짚으며,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시민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함을 당부했다. 이어 김민철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대담에서는 이석태 변호사, 임재성 변호사, 박선경 교수가 내란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갔다. 박선경 교수는 민주주의 다양성 지수를 언급하며,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흐름 속에서도 한국이 상당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민족사랑 202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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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1)
[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1) 이순우 특임연구원 거족적인 3·1만세의거 당시 독립선언사건 관련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무죄선고로 방면)를 치렀던 임규(林圭, 1867~1948) 선생이 남긴 『북산산고(北山散稿)』(1959년 필사영인본)라는 책이 있다. 여기를 보면 그 당시 감옥창살 안에서 전해 들었던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폭탄투척의거에 대한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 구절이 나온다. 1919년 9월 2일 바로 그날 오후 5시, 가혹했던 무단통치의 원흉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전임 총독이 경질된 자리를 물려받은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남대문정거장에 막 당도했을 때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사이토 내외가 탄 마차(馬車)에서 7보(步) 떨어진 자리에서 터졌다. 그 바람에 총독 저격에는 실패하였고, 주변에 있던 영접 인파 속에서 37명의 부상자(중상자 5인 포함; 전체명단은 『매일신보』 1920년 1월 30일자에 게재된 ‘예심결정문’에 서술)가 발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경기도 순시(巡視; ‘순사’와는 다른 별개의 직급) 스에히로 마타지로(末弘又二郞)가 좌편 대퇴부를 뚫은 탄환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8일 뒤인 9월 11일에 숨졌고,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경성특파원 타치바나 코키츠(橘香橘, 1881~1919)도 복부 손상에 따른 복막염과 폐렴 증세로 그해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경성특파원 야마구치 이사오(山口諫男, 1880~1924) 역시 흉부에 파편을 맞아 여러 해에 걸쳐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도져 그 또한 1924년 4월 11일에 이르러 끝내 세상을 떠났다. 거사 이후 강 의사는 여러 동지의 주선으로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 개최
[초점]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 개최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2월 27일(금)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특별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동농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고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가 주관하였다. 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동농문화재단 김선현 이사장, (사)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권영관 회장,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수옥 회장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조선민족대동단이 창설된 지 107년 만의 첫 전시로, 조선민족대동단의 독립정신과 대동 정신을 재조명하고 있다. 조선민족대동단은 직업과 신분, 성별, 종교를 초월하여 황실 인사부터, 관료, 유림, 종교인, 교사, 학생, 상인, 보부상, 백정, 기생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을 포용하였다. 이들은 대동 정신을 실천하여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 이번 전시는 여러 역사적 기록과 자료들을 통해 조선민족대동단이 지향했던 가치와 그 의미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관람객들은 전시를 통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조선민족대동단의 무차별의 절대평등 정신과 실천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전시를 통해 직접 확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꼭 실천해야 할 덕목임에 큰 공감을 표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제2차 3·1혁명선언’으로 불리는 ‘대동단선언’과 총재 김가진이 작성한 ‘시국강연회’, ‘일제 본토 침공계획을 의논한 편지’ 등 30여 점의 희귀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그중에서도 ‘일제 본토 침공계획을 의논한 편지’는 총재 김가진(1846~1922)이 무정부장(武政部長) 박용만(1881~1928)에게 보낸 비밀편지로, 10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편지는 조선민족대동단이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 너머 전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