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전북대 후면으로 쫓겨난 ‘덕진공원지비(덕진운동장건설비)’의 건립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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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7]

전북대 후면으로 쫓겨난 ‘덕진공원지비(덕진운동장건설비)’의 건립 내력
전주 덕진공원의 최초 구상은 이른바 ‘일본황태자 결혼기념사업’이 발단

이순우 특임연구원

『자유신문』 1951년 12월 25일자에는 「3도(道)에 종합대학(綜合大學), 기존 대학을 개편설치, 실업교육(實業敎育)에 치중」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문교부에서는 대학 설치에 지역적 균형을 얻기 위하여 명년 4월 새학기부터 경북(慶北), 전남(全南), 전북(全北)의 3도에 국립종합대학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번 국회에 제출된 신년도 예산안에 3대학교의 운영경상비로 경북 9억 원, 전남 8억 8천만 원, 전북 2억 4천만 원의 신규예산을 요구하였다.
이 세 국립종합대학은 대구와 광주 또는 전주에 기설된 각 도립 단과대학, 예를 들면 각 의과대학, 사범대학, 농과대학 등을 토대로 하여 사립대학 등을 종합하여 종합대학교로 개편 설치하려는 것으로 경북의 과수(果樹), 전남의 방적(紡績), 전북의 제지공예(製紙工藝) 등 지방특색을 살려 실업교육에 치중케 할 계획이라 한다. 각 종합대학은 다음과 같다.
▲ 경북종합대학교 =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정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
▲ 전남종합대학교 = 문리과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 전북종합대학교 =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이 가운데 전북대학교는 이리농과대학(공립), 전주명륜대학(사립), 군산대학관(사립)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국립종합대학교(1951년 10월 6일 설립인가)가 만들어졌으며, 초기에는 대학본부와 소속대학 등이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으나 1953년 10월에 처음으로 전주 덕진못에 인접한 국유지 21,185평을 학교 땅으로 편입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 이후 1962년 9월에 건설부 소관 잡종지 7,733평을 넘겨받은 데에 이어 1963년 12월에는 구황실(舊皇室) 소유임야 75만 평을 불하받아 지금의 전주캠퍼스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대는 원래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전주공설운동장이 있던 지역이었고, 그러한 탓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북대 안쪽 제1학생회관 바로 옆에는 ‘덕진공원지비(德津公園之碑)’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진 일제의 기념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새로운 학생타운의 신축공사 진행과 아울러 비석 자체에 대한 친일잔재 논란이 불거지면서 지금은 덕진공원 쪽에 가까운 전북대 항공교육실습장 북편 공터(2024년 3월 10일 이전 완료)로 옮겨진 상태에 있다.

‘덕진공원지비(덕진운동장건설비)’의 비문 판독 및 내용 풀이

『조선신문』 1924년 1월 25일자에는 이른바 ‘동궁전하 어성혼 봉축행사’와 관련하여 이를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덕진공원 및 공회당의 건설’을 추진했던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이때의 일은 예산관계로 무산된 듯하고, 그 이후 5년이 지나 미야자키 키치조와 박기순의 기부금으로 결국 덕진공원(덕진운동장 포함)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1934년 3월에 전주읍장 후지타니 사쿠지로(藤谷作次郞)의 이름으로 세워진 이 비석에는 기단부 석축의 전면 아래쪽에 ‘덕진운동장건설비(德津運動場建設碑)’라는 것이, 후면 아래쪽에 ‘덕진공원개요(德津公園槪要)’라는 내용의 석판(石板)이 각각 부착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전주시내의 유지인 일본인 미야자키 키치조(宮崎吉造, 1880~?)의 기부금 5천 원에다 조선인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기부금 3천 원을 보태어 이를 함께 재원으로 하여 1929년 10월에 운동장 시설과 공원의 설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야자키 키치조라는 이는 쿠마모토현(熊本縣) 출신으로 1911년 이후 전주에 정착하여 재목상(材木商), 토목건축업, 토지부동산업 등의 사업을 통해 재산을 일군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박기순은 미곡상 출신의 전북지역 대지주로 전주농공은행장과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이며, 그의 아들인 박영철(朴榮喆, 1879~1939) 역시 일찍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 참여관, 전라북도 참여관, 강원도지사, 함경북도지사를 거쳐 조선상업은행 두취, 중추원 참의를 두루 역임한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덕진공원의 설치경위와 세부시설에 대해서는 전주부(全州府)에서 펴낸 『전주부사(全州府史)』(1943), 600~602쪽에 정리된 내용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주면 시대(全州面 時代), 본도(本道, 전라북도) 중심도시로서 건전한 발전을 이뤘음에도 아직 공원의 설치가 없는 것은 시민의 보건상 유감이라고 하여 소화 4년(1929년) 공원설비비(公園設備費)로서 독지가(篤志家) 미야자키 키치조(宮崎吉造)로부터 금(金) 오천 원(圓, 엔)의 지정기부(指定寄附)가 있었으므로 모리야마 면장(守山面長)은 즉시 덕진지반(德津池畔)의 국유임야(國有林野) 11정(町) 8반여보(反餘步)의 대여(貸與)를 청원하여 허가를 얻고, 기부금에 면비(面費) 600원을 더하여 설비했던 것인데, 이것이 곧 덕진공원이며 실로 소화 4년(1929년) 10월의 창시(創始)이다. 당시의 상황은 「공원 및 운동장 사무처리 인가인청서류」에 뚜렷하므로, 다음에 이를 전재(轉載)한다.
…… 이와 같이 계획서와 같은 설비를 하였으나, 그 후 은사원잠종제조소(恩賜原蠶種製造所)의 이전 건축용지(移轉建築用地)로서 사용방(使用方) 희망신출(希望申出)이 있은 즉(卽), 차용지(借用地) 가운 데 1정(町) 5반여보(反餘步)를 반환했다.

이에 따라 덕진운동장 쪽도 설치공사를 대략 완료하고 나서 1929년 11월 2일에는 육상경기장에서 전라북도지사 하야시 시게키(林茂樹)와 참여관 김영진(金英鎭) 이하 대소 지방관 및 다수의 지방유지를 비롯하여 수만 명의 관중이 몰려든 가운데 개장식(開場式)이 거행된 바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덕진공원의 설치구상은 실상 이때보다 5년이나 앞선 시점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에 관한 흔적은 『조선신문』 1924년 1월 25일자에 수록된 「전주(全州)와 대전기념사업(大典記念事業), 덕진공원(德津公園) 및 공회당(公會堂) 건설, 경찰문고(警察文庫) 신설 기타」 제하의 기사에 또렷이 남아 있다.

전주에 있어서 동궁전하 어성혼(東宮殿下 御成婚) 경사봉축방법은 좌(左)와 여(如)히 결정했다.
1. 일반은 국기(國旗)를 걸고 봉축의 뜻을 표할 것.
2. 어거식(御擧式)의 시각(오전 9시)에 연화(煙火, 불꽃) 3발(發)을 타양(打揚)할 것.
3. 오전 9시 전주신사(全州神社)에서 제전(祭典)을 행하고 일반시민은 동 시각에 참배(參拜)할 것. (중략)
전주의 어성혼 기념사업(御成婚 記念事業)
– 시민일반(市民一般) : 덕진공원(德津公園) 및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덕진공원은 덕진지반(德津 池畔) 및 부근일대의 광막한 송림(松林)에 공원도로를 개착(開鑿)하고,기타 공원으로서의 제반설비.
– 도경찰부(道警察部) : 경찰문고를 신설하며 경찰부를 본고(本庫)로 하고 도내 각 경찰서에 지고(支庫)를 설치함과 아울러 동군(同郡, 전주군)에서 발행하는 『향상의 벗(向上の友)』 임시기념호를 발행하고 오로지 황실의 일과 양전하(兩殿下)의 일 모두를 만재(滿載)하여 일반경찰관에게 황실이 여하(如何)한 곳인지를 주지(周知)시킬 것.
– 전주소학교(全州小學校) : 직원, 생도 및 모자회(母姉會) 등의 갹금(醵金)에 의해 피아노를 구입 한다.
– 전주농업학교(全州農業學校) : 직원, 생도의 갹금에 의해 멋진 정원(庭園)을 영조(營造)한다.
– 도내 각 경찰서 : 여러 서(署)의 고안(考案)에 따라 각서 공통이 되는 기념사업을 시행한다. (전주)

여기에서 말하는 ‘동궁 전하’는 장차 소화천황(昭和天皇)이 되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 1901~1989)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당시 섭정궁(攝政宮)의 노릇을 했던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식은 1924년 1월 26일에 있었다. 당초 결혼식은 1923년 가을로 예정되었으나, 그해 9월 느닷없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관동대지진)의 발생으로 한 차례 연기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까 전주지역에서 이러한 자기네들의 더할 나위 없는 경사를 오래도록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선택한 것이 바로 ‘덕진못’을 낀 부근 일대에 ‘덕진공원’을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다만, 이러한 거창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 재정긴축방침에 따른 기부금 지출이 불가능해진 상황으로 인해 — 건설비용을 확보하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탓인지 실제로는 집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에 이 시기 동경제대 농과대학 교수이자 공원설계의 제1인자로 유명했던 임학박사(林學博士) 혼다 세이로쿠(本多静六, 1866~1952)가 전라북도지사 이스미 츄조(亥角仲藏)의 초청으로 1924년 5월 11일 이후 여러 날에 걸쳐 전북 일대의 유적지, 명승지, 산간계곡 등을 두루 시찰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그는 덕진못의 취향정(醉香亭)을 찾아가서 그곳 현장에서 직접 덕진공원의 시설방안에 관한 찬성의견과 조언을 남겼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결과로 덕진공원의 건설계획은 좀 더 구체화하는 단계로 들어갔는데, 이에 대해서는 『경성일보』 1924년 9월 27일자에 수록된 「덕진지(德津池)를 중심으로 하여 일대공원(一大公園) 신설」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전주의 덕진지는 예로부터 연(蓮)의 명승(名勝)으로 유명했으며, 거기에 더하여 주위는 수리(數里)에 걸쳐 이왕가 소유(李王家 所有)의 송림(松林)으로써 둘러싸여 있는데, 앞서 혼다 임학박사(本多 林學博士)가 내도(來道)했을 때도 덕진공원은 특히 그 시설방법에 대해 상세히 살펴본 바였으며, 이스미 지사(亥角知事)의 의견으로는 시비(是非, 아무쪼록) 도립(道立) 또는 군립공원(郡立公園)으로 할 심산인 듯하고, 요전에 지사는 군수, 면협의회원, 면장, 경찰서장, 기타 중요 인사 20여 명을 대동하고 덕진지를 시찰하였는데, 우선 연지(蓮池)의 회유도로(廻遊道路), 삼림중(森林中)에 종횡으로 자동차가 통하는 도로를 뚫는 것을 기다리며, 머지않아 이왕가(李王家)에 대해 이것들의 교섭을 개시할 예정이므로 정말로 실현된 뒤에는 일대공원으로서 명승지에 일층 광채를 더할 것이리라고.

그런데 덕진공원에 관한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덕진못가에 자리한 취향정(醉香亭)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자는 원래 박기순이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는 뜻에서 1917년 봄에 새로 지었던 것으로 1931년 봄에 이르러 이를 — 전주시내에 자리한 ‘청학루(靑鶴樓)’와 더불어 — 전주면사무소(全州面事務所)에 기증한 내력을 지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정자 바로 앞에 박기순이 직접 짓고 쓴 ‘취향정기(醉香亭記)’ 비석이 지금껏 고스란히 남아 있으므로, 여기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박기순은 이미 1917년 이래 취향정 일대의 국유지 7,700여 평에 대한 대부허가(30년간)를 받아놓은 상태였는데, 이곳의 차지권(借地權)도 함께 전주면사무소 쪽으로 넘긴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한 내용은 역시 전주부(全州府), 『전주부사(全州府史)』(1943), 602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된 내용이 남아 있다.

[사설공원(私設公園)의 승계(承繼)] 여기에 역시 독지가인 박기순(朴基順)은 독력(獨力)으로 사설공원을 경영하고자 대정 6년(1917년) 7월부터 향후 30년간의 대부허가(貸付許可)를 받아 국유임야 2정(町) 5단(段) 7무(畝) 23보(步)의 땅에 상당한 시설을 하여 왔는데, 그 위치는 읍(邑)에서 경영하는 덕진공원(德津公園)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미터 떨어진 거리의 접속지(接續地)이며, 지반 경치가 빼어난 장소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동인(同人)으로부터 그 시설 일체를 본읍(本邑, 전주읍)에 기부하고, 차지권(借地權)도 양도한다는 뜻의 신출(申出)이 있었으므로, 면(面)은 이것도 수입(受入)하고 특히 동인이 창시(刱始)하여 만든 연못가의 취향정(醉香亭)에는 이것의 유지비로 충당하고자 검암정(劍岩町)의 논 1,238평(坪)을 덧붙여 기부하였으며, 그 소작료(小作料)는 해마다 동정(同亭)의 유지기금(維持基金)으로서 면(面) 이래로 적립하고 있다.
게다가 읍시대(邑時代)가 되면서 소화 7년(1932년) 7월부터 향후 30개년 간의 대부지령(貸付指令)을 받아 종래의 경영방침을 계승하고 축차(逐次) 제반의 설비를 정비하여 공원으로서의 목적 달성에 노력했던 것이다. (하략)

덕진못은 일찍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산천조(山川條)에 “[덕진지(德眞池)] 부(府)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건(乾, 북서쪽)이 비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기맥이 새어버린다. 그런 고로 서쪽 가련산(可連山)에서부터 동쪽 건지산(乾止山)으로 이어 큰 뚝을 쌓는 것으로써 이를 멈추게 하였고, 이름을 덕진(德眞)이라 하였으니, 둘레가 9,073척(尺)이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매우 유서 깊은 역사공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곳이 일제잔재와 친일의 흔적이 잔뜩 배어있는 공간으로 남게 된 것인지, 그러한 내력에 대한 기록 자체도 후대를 위해서 더욱 꼼꼼히 챙겨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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