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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제2차 ‘야스쿠니무단합사 철폐소송’ 판결에 대한 성명] 도쿄지방재판소의 부당판결을 규탄한다.

2019년 5월 28일 368

[제2차 ‘야스쿠니무단합사 철폐소송’ 판결에 대한 성명]  -도쿄지방재판소의 부당판결을 규탄한다. – 오늘 도쿄지방재판소는 일본 제국주의에 동원되어 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한국인 군인, 군속의 유족들이 야스쿠니신사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무단합사철폐 소송에서 원고청구 기각판결을 했다. 우리는 일본 사법부의 부당한 판결을 강력히 규탄하며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또한 해방 74년이 지난 오늘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희생자들이 침략신사 야스쿠니에 전쟁범죄자들과 함께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 1945년 8월 식민지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군인, 군속으로 끌려간 수 많은 조선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끌려간 사람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던 한국의 많은 유족들이 오늘날 까지도 가족의 생사에 대한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1959년 부터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는 한국의 유족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식민지 조선인’들을 야스쿠니신사의 군신으로 합사해 왔다. 2006년 11월에 일본의 후생노동성은 1959년 부터 1976년까지 6차례에 걸쳐 무단으로 합사한 한국인 사망자가 2만1000여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1990년대 말에 들어서야 야스쿠니신사의 무단합사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의 유족들은 침략신사 야스쿠니에서 아버지, 남편, 오빠의 이름을 뺄 것을 요구하며 줄기차게 싸워왔다. 이번 판결은 2001년 6월의 재한군인군속 소송, 2007년 2월의 제1차 합사철회 소송에 이어 2013년 10월에 한국인 유족 27명이 합사철폐를 요구하며 제기한 제2차 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아버지를 빼앗겨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한 원고들은 일본의 법정에서

“야스쿠니서 아버지 빼라” 호소 외면한 日…합사취소訴 원고패소(종합)

2019년 5월 28일 195

도쿄지방재판소, 한국인 야스쿠니 합사취소 소송서 유족들 주장 기각5년7개월 끌었던 소송, 판결문 낭독에 ‘5초’…판결 이유 설명 없어유족들 “일본이 죽인 아버지, 왜 일본의 신이 돼야 하냐” 오열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제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된 한반도 출신 군인·군속들을 합사에서 빼달라며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 법원이 원고인 유족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도쿄지방재판소(법원)은 28일 합사자 유족 27명이 지난 2013년 10월 22일 제기한 2차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서 원고의 요구를 기각했다. 이날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지 5년 7개월만의 긴 시간이 흐른 뒤 나온 것이지만, 재판부가 판결을 읽어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초 정도였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모든 요구를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 측이 부담한다”는 짧은 판결만 내 놓은 채 판결 이유도 밝히지 않고 판사석에서 일어났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재판부는 합사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측의 주장을 “합사 사실이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합사됐다는 것이) 불특정 다수에 알려질 가능성이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고측은 일본 정부가 전몰자의 정보를 신사에 제공한 것이 종교활동을 금지한 헌법에 위반된다며 일본 정부에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야스쿠니신사는 정보제공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합사하고 있다”는 이유를 대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스쿠니신사는 근대 일본이 일으킨 크고 작은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의 영령을 떠받드는 시설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한 246만6천여명이 합사돼 있다. 실제로 위패와 유골이 있는 것이

‘100년만의 귀환’…일본인, 평양 독립선언서 독립기념관에 기증

2019년 5월 28일 139

사토 마사오 씨 “조부가 평양서 습득 보관…제 자리 찾아야” (천안=연합뉴스) 이은중 기자 =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 원본이 일본인에 의해 독립기념관에 기증된다. 독립기념관은 나가사키현에 사는 일본인 사토 마사오(佐藤正夫·67) 씨가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 원본을 28일 오후 기증한다고 27일 밝혔다. 3·1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의하면 서울 보성사에서 인쇄된 선언서는 총 2만1천장이었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된 진본은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선언서를 포함하여 모두 8장이다. 개인 소장(이희선, 박종화, 최봉렬, 미국거주 최학주)과 기관 소장(독립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관)이 각각 4장이다. 이 중 독립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본 외에 6장은 모두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수득한 선언서로 알려져 있으며, 판본도 같다. 독립기념관 소장본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3·1운동을 주도한 김선량 씨의 후손이 1984년에 기증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본은 최근에 함흥지방법원 일본인 검사의 조사철 ‘대정8년 보안법 사건’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판본은 각각 다르다. 따라서 현존하는 보성사판 선언서의 판본 유형은 총 3가지다. 이번에 기증되는 사토 마사오 씨 소장본은 독립기념관 판본과 동일한 것이다. 이 선언서는 사토 마사오 씨의 조부 사토 요시헤이(佐藤芳兵)가 1919년 3월 1일 아침에 수득해 보관하다가 1929년 일본으로 귀국할 때에 갖고 간 것이다. 이 선언서의 존재는 1954년에 조부가 작고한 다음에 그의 유품 속에서 발견돼 후손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기증자의 부친인 사토 도시오(佐藤俊男·목사) 씨가 이를 보관하다가 역사교사(나가사키현립 농아학교)인

[단독] 청룡봉사상 시초, ‘제주4·3, 인혁당’ 인물들 요정만남

2019년 5월 27일 269

조선일보 사주·주필·국회의원·경찰총수 고급요정서 만나 첫 논의 상 제정 논의한 경찰 총수는 ‘1차 인혁당 사건’ 담당 검사 금암 최치환 제주 4·3 사건 당시 토벌대 지휘, 김무성 장인 역사계 “민갑룡 청장 4·3 사죄하더니 진정성 의심돼” 지난 1967년 조선일보 청룡봉사상 탄생 과정에서 ‘제주 4·3 사건’ 당시 경찰 부대를 지휘한 인물과 ‘인혁당 사건’ 검사 출신 경찰 총수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조선일보 고(故) 방우영 전 회장과 모인 사모임 자리에서 청룡봉사상을 만들기로 결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제주 4·3 사건을 공식 사과하는 등 적폐 청산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논란이 되는 상을 경찰이 그대로 강행하는데 대한 학계 비판도 거제지고 있다. ◇’고급 요정’에서 논의 시작된 청룡봉사상, 제주 4·3 진압한 최치환도 참여 조선일보 고(故) 방우영 전 회장이 지난 2008년 발간한 회고록에는 청룡봉사상 제정 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회고록에 따르면 청룡봉사상은 1967년 1월 방 회장과 조선일보 최석재 주필, 국회의원 금암 최치환, 내무부 치안국장 한옥신 등 네 명이 고급요정에서 만남을 가지면서 처음 논의됐다. 조선일보 사주와 주필, 유력 정치인과 경찰 총수가 모인 장소는 바로 서울 종로구 청진동 ‘장원’이었다. 이 곳은 60~70년대에 ‘요정(料亭) 정치’라는 말을 낳은 고급 한정식집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정치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날 만난 네 사람은 모두 경찰과 인연이 있었다. 방 회장은 “최(치환) 의원은 32세에 경찰 보안과장을

“야스쿠니에 전범과 합사된 아버지 빼달라” 유족소송 28일 결론

2019년 5월 26일 219

‘야스쿠니 합사철회’ 2차 집단소송 1심 판결…소송제기 후 5년 7개월 만에 결론제국주의 상징 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 조선인 2만명 이상…1차 소송은 모두 패소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제 강점기 징병됐다가 숨진후 A급 전범들과 함께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인 일본 도쿄(東京)의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合祀)된 조선인들은 2만1천181명으로 추정된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끌려왔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도 서러운데 죽어서는 전범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런 억울한 영혼들을 합사자 명단에서 빼달라고 요구하며 한국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제기한 집단소송의 결론이 소송제기 5년 7개월 만에 나온다.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 ‘노(no) 합사’와 한국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도쿄지방재판소(법원)는 오는 28일 오후 3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반도 출신 군인·군속의 유족들이 일본 정부와 신사측을 상대로 제기한 합사 철회 소송의 선고 공판을 연다. 소송은 합사자 유족 27명이 한국과 일본 시민 및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13년 10월 22일 제기한 2차 소송이다. 지난 2007년 제기한 1차 소송에서는 원고가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이후 더 많은 유족이 모여 2차 소송을 제기했다. 1차 소송에서 재판부(2심)는 합사를 신사의 ‘종교적 행위’로 표현하며 유족들에게 오히려 ‘관용’을 강요하는 억지를 부렸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가 신사의 종교적 행위로 감정이 상했다는 것을 문제 삼았지만, 타인의 종교 자유에 대해 관용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야스쿠니신사는 근대 일본이 일으킨 크고 작은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의 영령을 떠받드는 시설이다. 태평양전쟁 A급

[TF이슈] 韓日, 쟁점 ‘강제징용 배상’ 어디까지 왔나?

2019년 5월 25일 335

전문가 “일본 언론의 희망적인 보도 수준…물밑접촉 수준” [더팩트ㅣ외교부=박재우 기자]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놓고 한일 외교장관은 23일 회담에서 평행선을 그리는 데 그쳤다. 역대 최악이라는 한·일 관계 속에서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우리 정부와 양국 기업이 참여하는 기금을 만들어 피해자들에 보상하자는 절충안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우리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23일(현지시간) 오후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프랑스 파리에서 OECD 각료회의 참석을 계기로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고노 외무상은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강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이 같은 날 ‘일본이 판결을 수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이는 사안의 중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단히 심각한 발언으로 한일 관계를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 장관은 이에 대해 “일본도 피해자들의 고통과 상처 치유를 위해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고, 양국 정부 간에는 긴밀한 소통이 지속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강 장관은 일본 측에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부 일본 언론들의 희망적인 보도가 있었지만, 두 장관이 평행선을 그린 만큼 아직 구체적인 틀은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NHK는 청와대와 외교부가 지난달 강제징용 재판의 원고 측에 일본 기업의 자산매각 절차를 미뤄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고, 요미우리 신문은 23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계속되는 ‘친일파 안용백’ 흉상 철거 목소리

2019년 5월 24일 226

민족문제연구소 부산지부·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 부산 경남고 앞 항의행동 부산 경남고등학교에 세워진 ‘친일파’ 안용백의 흉상을 둘러싸고 철거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산지부에 이어 부산지역 교육단체도 “흉상을 철거해 친일 잔재를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산지부,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부산교육희망넷)는 23일 부산 경남고를 찾아 ‘친일파’ 안용백 흉상 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행동에 나섰다. 두 단체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수년간 흉상철거 시위를 벌였음에도 이를 아직도 존치하고 있다”며 학교 측과 동문회의 대응을 비판했다. 이날 행동은 부산교육희망넷이 최근 학교 내 친일 잔재 청산 운동 전개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관련기사:부산 학교 곳곳 친일잔재 청산 나선다> 내선일체·황국신민화 선동 친일파‘안용백’ 흉상이 경남고 교정에철거 등 “친일파 청산”요구 이어져교육단체도 함께 동참 일제강점기 시기 안용백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며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친일 행적에도 해방 후 경남중고등학교 초대 교장, 이승만 정부 시절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등을 역임했다. 전남 보성 국회의원 선거까지 출마했으나 부정개표로 당선무효 굴욕을 겪었다. 이후엔 2대 전남 교육감을 지냈다. 이런 이력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 안용백을 친일·반민족 행위자 1006명 중 1명으로 포함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4월 경남고 개교기념일에 졸업생의 기증으로 안용백 흉상이 건립되면서 논란을 예고했다. 흉상에는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사한다”는 기증자의 글만 있을 뿐 진상규명위가 지적한 안용백의 친일행적은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 부산지부가 ‘친일파 안용백’ 문제를 거론하며 대응에 나섰다. 부산지부는 경남고 앞에서 안용백의 행적을

민족사랑 2019년 05월호

2019년 5월 24일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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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3: 14편 “홍찬” 대표적 친일영화인 해방 후 반민특위와해 공작 가담

2019년 5월 22일 158

[바로듣기] ☞ (5.21)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4편 “홍찬” 대표적 친일영화인 해방 후 반민특위와해 공작 가담 ☞ (5.14)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3편 “윤치호” 근대적 지식인이었으나 패배주의에 물든 개량주의자로 변절 ☞ (5.07)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2편 “황신덕” 여성인권에 앞장섰지만 제자를 근로정신대 지원을 독려 ☞ (4.30)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1편 “박인덕” 여성계몽운동가로 화려한 활동 그러나 황국식민의 여성으로 급격한 변신 ☞ (4.23)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0편 “문명기” 애국기 헌납운동을 일으킨 맹목적 친일파 ☞ (4.16)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9편 “이승우”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앞장 서 추진한 변호사 ☞ (4.0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8편 “김우영” _내선융화의 상징, 조선인 부영사 되다 ☞ (4.0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7편 “최린” 독립선언의 주역, 변절의 아이콘이 되다 ☞ (3.26) ‘내역사’ 시즌 3: 강제동원 3편 “피해자 변호인단에게 판결과정과 향후 활동계획을 듣는다 ☞ (3.21)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6편 “박중양” 3.1운동 진압을 위해 자제단을 이끈 거물급 친일파 ☞ (3.1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5편 “김대우” –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하여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인물 ☞ (3.0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2부 ☞ (3.05)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 (2.27)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2부 ☞ (2.26) ‘내역사’ 시즌 3:

독립운동했는데 ‘빨갱이’ 낙인… “재조명해 유공자로”

2019년 5월 22일 186

사회주의운동 이유로 처형… 유족 등 “학암 이관술 선생 유공자 서훈 검토해야” 움직임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사회주의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 당하고 가족들까지 고통 받았던 울산 출신 학암 이관술(1905-1950) 선생의 재조명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등은 “학암 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유공자 서훈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약산 김원봉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유공자 서훈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라, 이들의 활동이 더 주목된다. 앞서 이관술 선생 유족은 지난 2012년 “학암 선생이 국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국가가 유가족들에게 그동안 입은 피해를 배상을 해야 한다”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같은 대법원 판결에도 이관술에 덧씌워진 ‘빨갱이’ 프레임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에 지난 4월, 시민사회단체와 연구자, 이관술의 후손은 뜻을 모아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재조명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울산 동구 지역구인 김종훈 의원(민중당)이 주관한 ‘항일운동가 이관술 국회 세미나’가 22일 오전 10시30분 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열렸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우리역사바로세우기운동본부가 후원했다. 해방 후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로 꼽힌 이관술 1902년 울산 입암에서 출생한 이관술은 서울 중동고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동덕여고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학암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1930~40년대 국내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수배, 체포를 거듭하며 투옥돼 모진 고문을 겪었다. 해방 직후 잡지 <선구>의 최초 정치여론조사(1945.12)에서 여운형,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