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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을사늑약 120년, 일본 역사부정-군국주의 부활 규탄”
[현장]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국가 책임 회피 비판… “한일-한미일 군사협력 중단해야” 을사늑약 120주년을 맞아 시민사회단체들이 일본의 역사 부정과 군국주의를 규탄하고, 한국 정부에 과거사를 외면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을사늑약 120년, 역사정의와 평화 그리고 올바른 한일관계를 위한 각계 인사 기자회견’이 지난 17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정의연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자유언론실천재단, 자주통일평화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등 단체 대표들이 참석했다. 기자회견문에서 참가자들은 “다카이치 총리는 위안부 강제성 부정, 무라야마 담화 수정 주장,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극우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가 역사 왜곡과 국가 책임 회피를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 총리가 공식 석상에서 대만 개입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매우 위험한 선례”라며 “군사대국화와 대만 군사 개입 야욕을 규탄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후쿠시마 오염수, 사도광산, 간토대학살, 재일 조선인 차별 등 핵심 이슈를 외면한 것은 역사 정의의 포기”라며 “정부의 과거사 외면 및 굴욕 외교”를 비판했다. 참가자들은 “한국 정부 또한 과거사를 외면하고 굴욕적인 외교를 이어가고 있다”며 “일본의 전쟁 가능성을 전제한 모든 군사협력, 한일·한미일 군사협력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발언에 나선 이나영 정의연대 이사장은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명백히 무효이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강제동원, 학살, 성노예제 등 구조적 범죄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박석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는 “을사늑약 120년, 두 번째 60갑자의 해를 맞아 반복되는 일본 군국주의의 어두운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보도자료] 아름답지만 슬픈,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김산 따라 아리랑 로드로』 출간
☞ 다운로드: [보도자료] 아름답지만 슬픈,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김산 따라 아리랑 로드로』 출간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는 11월 10일 김산 따라 아리랑로드로-혁명과 반혁명의 광둥 3년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아리랑 노래를 통해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 김산(金山, 장지락)의 햇수로 4년, 기간으로 만 3년간의 ‘광둥 시절’을 사건사적 배경과 전체 맥락을 실제와 최대한 가깝게 재구성하면서 순차대로 복원시켜 보려는 소박한 시도다. 이 책의 저자 김영범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는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 의열투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사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사회학자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2020년부터 진행한 ‘아리랑 답사’ 심화작업의 하나로 진행된 ‘아리랑 로드’ 사전 답사에 참여하면서 이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이 책의 1부. ‘김산과 광저우 봉기’는 김산의 ‘광둥 시절’의 배경이 되는 중국 국민혁명의 소용돌이 속 국공합작과 분열의 시기, 광저우 봉기와 의열단의 기의 가담에 대한 사건사적 배경과 아리랑 로드의 이야기를 엮어 김산의 행적을 자세히 다룬다. 2부. ‘100년 후의 옛길과 격정의 흔적들’에서 광저우 시내의 황포군관학교 유지와 광저우기의 기념관부터 시작해, 김산이 퇴각했던 화현(花縣), 룽먼현(龍門縣)을 거쳐 하이루펑의 펑파이 생가 그리고 최종 탈출지였던 산터우(汕頭)까지 이어지는 고난의 로드를 직접 추적한다. 저자는 답사를 마무리하며 ‘역사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겹의 것이며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음도 다시금 실감했다’고 소회를 남긴다. 이는 김산의 흔적을 쫓으며 현장에서 느낀 감회와 수많은 역사적 평가들이 겹쳐진 결과일 것이다. 김산의 ‘광둥
[새책소개] 『김산 따라 아리랑 로드로』
바로가기 >>>☞ [도서구매] [주요내용] 『김산 따라 아리랑 로드로 ― 혁명과 반혁명의 광둥 3년을 찾아서』 민족문제연구소는 11월 10일 『김산 따라 아리랑로드로-혁명과 반혁명의 광둥 3년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아리랑 노래를 통해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 김산(金山, 장지락)의 햇수로 4년, 기간으로 만 3년간의 ‘광둥 시절’을 사건사적 배경과 전체 맥락을 실제와 최대한 가깝게 재구성하면서 순차대로 복원시켜 보려는 시도다. 제19회 임종국상 학술상 수상자인 김영범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는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 의열투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사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사회학자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2020년부터 진행한 ‘아리랑 답사’ 심화작업의 하나로 진행된 ‘아리랑 로드’ 사전 답사에 참여하면서 이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저자는 답사를 마무리하며 “역사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겹의 것이며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음도 다시금 실감했다”고 소회를 남긴다. 이는 김산의 흔적을 쫓으며 현장에서 느낀 감회와 수많은 역사적 평가들이 혼재된 결과일 것이다. 김산의 ‘광둥 시절’은 표면적으로 ‘패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김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혁명적 낭만주의와 ‘패배’가 있었기에 조국 독립이라는 ‘승리’도 가능했다. 최근 들어 독립운동가 중 사회주의 계열 활동으로 인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재조명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산에게 아리랑은 ‘비극의 상징이고 죽음의 노래이며, 아름답지만 슬픈 노래’였다. 전투에서 패하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맬 때 동지들과 부르던 것은 ‘패배의 노래’였지만,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 때 이 노래는 ‘희망의 숨구멍 같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광주일보] 이길 수도 질 수도 없었던…‘광주고보 야구사건’ 만화로 부활
송재영 작가, 1924년 ‘광주고보 vs 일본야구단’ 다룬 ‘볼셋!국용’ 출간 선수 연행 반발 동맹 휴학, ‘광주학생독립운동’ 촉발…크라우드펀딩 시작 “선동열, 이종범, 서재응, 김병현…. 이들을 배출한 야구 명문 광주제일고에 100여년 전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야구 경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1924년 일제강점기,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현 광주일고)와 일본인 야구단의 승부가 펼쳐졌다. 일장기와 태극기가 운동장에 나란히 걸렸다. 이 경기는 단순한 체육대회가 아니었다. 식민지 지배 아래 조선 학생들이 절대 질 수 없었던, 그러나 섣불리 이길 수도 없는 ‘두렵고도 위험한 경기’였다. 광주고보는 1-0으로 승리했고 운동장에는 마치 광복이 온 듯 “만세!”가 터져 나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경기에서 승리의 순간은 소요로 번졌다. 일본팀 단장 안도 스스무가 경기 운영에 항의하며 폭력을 행사했고, 400여 명의 학생과 관중이 뒤엉키며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은 광주고보 선수 9명을 모두 연행했다. 불합리한 처분에 한국인 학생들은 3개월여간 동맹휴학으로 항거했다. 다수의 학생이 퇴학·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이 흐름은 결국 1929년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고보 야구사건’을 모티브로 광주의 역사와 항일정신을 되살린 만화 한 편이 최근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해 눈길을 끈다. 작가이자 문화기획자로 활동 중인 송재영(여·42)씨가 13일 플랫폼 ‘텀블벅’에서 만화책 ‘볼셋! 국용’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작품 속 줄거리는 이렇다. 왕년에 야구천재였지만 지금은 평범한 백수 아저씨가 된 ‘한국용’. 시한부 판정을 받은 어느 날 그의 머리 위로 붉은 야구공이 떨어지고, 정체불명의 혼령 ‘홍구신’과 함께 100년 전 조선으로
[경남도민일보] 진주중총동창회 ‘남인수’ 포함 음악회 비판
15일 진주중서 남인수 등 기리는 음악회 친일 인사 기리는 음악회 개최 비판받아 남인수 진주중 출신 여부도 불분명해 친일 행적으로 비판 받은 가수 남인수와 관련한 음악회 개최 논란이 진주에서 계속되고 있다. 최근 남인수가요제가 열린데 이어 진주중학교총동창회 주최로 남인수가 포함된 진주중 출신 음악가를 추모하는 음악회가 진주중학교에서 열릴 예정이다. 특히 남인수는 진주중 출신인지 여부조차 분명하지 않아 비판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진주중총동창회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3시 진주중학교 강당에서 진주중 출신 음악가 ‘남인수, 이봉조, 이재호’를 기리는 음악회를 연다. 진주예총과 진주연예인협회가 공동으로 여는 이번 음악회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지역 가수들이 참여해 이들 음악가 노래를 연주하고 부를 예정이다. 진주중총동창회 측은 “남인수가 부른 ‘산유화’가 당시 활동했던 진주중 교사 출신인 작곡가 이재호 선생의 작품이었고 작곡가 이봉조 선생은 이재호 선생의 제자였다”라며 “이번 음악회는 진주가 낳은 음악가들의 예술적 유산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친일행적으로 비판 받는 남인수를 포함한 음악회를 학교에서 개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는 진주중을 다녔다는 근거가 없어서 이번 음악회에 남인수를 포함시킨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남인수는 진주중 전신인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하거나 다녔다는 학적부 등 기록은 전혀 없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에서만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진주중총동창회 측은 남인수가 진주중을 다녔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으며 객관적인 근거가 될 수
[남도일보] [광복 80주년 기획]광주전남 해외 항일 현장을 찾아서(12) 독립운동 유공자 발굴
‘후손 못 찾아’…서훈 미전수 광주·전남 독립유공자 296명 국외 활동 많아 후손 찾기 어려워 묘소 위치 확인 중 유공자도 441명 독립운동 인정받고도 행적 논란에 미서훈자 다수…장재성·이기홍 등 시·도,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전개 전남, 미서훈자 2천584명 발굴해 1천103명 서훈 신청…32명 확정 “시간이 갈수록 발굴 어려워져”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주와 전남이 지역 독립운동가를 찾기 위한 조사와 후손 연결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광주시는 올해 역사문화 프로젝트를 본격화했고, 전남도는 단계별 발굴·서훈 신청 사업으로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뜻은 1895년부터 1945년 8월 광복 이전까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여러 가지 민족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을 뜻한다. 10일 광주시·전라남도 등에 따르면 지난 8월 18일 기준 광주·전남지역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는 1천551명에 달한다. 그 중 전수자는 1천255명으로 미전수자는 296명이다. 미전수자는 ▲독립장 7명 ▲애국장 70명 ▲애족장 67명 ▲건국포장 25명 ▲대통령표창 127명이다. 300명에 가까운 광주·전남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찾지 못해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광주는 포상자 126명 중 전수자 100명, 미전수자 26명이고 전남은 포상자 1천425명 중 전수자 1천155명, 미전수자 270명이다. 발굴인원과 서훈신청 인원이 다른 이유는 ‘서훈신청 요건’이 미충족됐기 때문이다. 다만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10일 기준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전수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찾기’ 대상은 289명이다. 같은 이유지만 ‘묘소 위치’ 등을 확인 해야 하는 독립 유공자도 441명이나 된다.
[경남도민일보] [사설] 공공자산으로 친일 미화, 다시는 안 된다
진주에서 열린 ‘남인수가요제’가 공분을 사고 있다. 남인수기념사업회가 진주시로부터 ‘일반 음악회’ 명목으로 남강야외무대를 대관 받아 행사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진주시는 이를 위법으로 보고 주최 측을 경찰에 고발할 방침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행정 위반을 넘어, 공공 자산이 친일 인물을 기리는 데 사용된 심각한 역사 인식의 부재를 드러낸다. 친일 청산은 과거사 정리이자 민주주의 회복의 출발점이다.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한 반민족 행위자들을 단죄하는 일은 해방 이후 국가 정체성을 세우는 첫 과제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해체하며 그 과제를 무너뜨렸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서야 노무현 정부가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했고,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면서 비로소 친일 인물의 실상이 공론화됐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은 발간사에서 역사가 언제나 권력자의 편이라는 자조적 인식이 확산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친일 역사 청산 책임을 외면한 대가는 교과서 역사 왜곡,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지연, 친일 인물 미화 현상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역사 앞에서 책임을 미루는 순간, 사회는 진실 대신 편 가르기로 갈라지고 민주주의 토대마저 흔들리게 된다. 진주시는 남인수기념사업회의 요청에 따라 ‘남인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대관을 허가했지만, 주최 측은 이를 어기고 ‘남인수 가요제’를 강행했다. 이미 지난해와 올해도 진주시는 같은 이유로 대관을 불허했으나, 사업회는 장소를 옮겨 행사를 열거나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집요하게 기념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음악 행사가 아니라, 역사적 책임을 부정하고 친일 인물을 미화하려는 행위라 하지 않을
을사늑약 체결 120년, 당신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11월 17일은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이 체결된 지 120년이 되는 날입니다. 치욕적인 역사의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을사늑약 체결 과정을 되짚어보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을사늑약은 어떻게 체결되었는가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했고, 11월 17일 어전회의에서는 하세가와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현 덕수궁) 안팎을 포위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은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는 내용의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 보호국이었으나 사실상 식민지가 되고 말았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습니다. 을사오적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고 고종에게 ‘보호조약안’ 승인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조약 조인에 찬성했던 대신들(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을사오적이라 부릅니다. 을사오적 자세히 알아보기 불법적인 을사늑약, 이를 망각에 묻어둔 1965년 ‘한일협정’ 1906년 프랑스 국제법 학자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는 대표적 국제법 학술지 Revue générale de droit international public(국제공법총서)에 을사조약의 무효를 강력히 주장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후 국제법 학계는 1935년(미국 국제법학회)과 1963년(유엔국제법위원회)에 국가의 대표를 강박한 상태에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는 국제법 인식을 정립했으며, 그 대표적 사례로 ‘을사늑약’을 꼽았습니다.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했던 외교권과 국권 침탈의 문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이미 무효’라는 애매한 해석으로 남아, 오랜 식민지 피해자들의 고통을 망각 속에 가두었습니다. 2025년 10월 30일부터 시작한 을사늑약 120년·한일협정 60년
[한겨레] 다시 돌아온 ‘사도광산’ 반쪽 추도식 [특파원 칼럼]
홍석재 | 도쿄 특파원 “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침에 만든 빵인데요.” 지난해 11월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서 아침 일정을 나서는 길이었다. 뜻밖에 숙소 주인이 비닐봉지에 담긴 수제 빵 하나를 내밀었다. 한눈에도 맛있어 보이는 빵을 ‘짐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건네는 그의 손에서 일본 시골의 인심이 느껴졌다. 우리 돈 10만원 정도로 값싼 숙소였지만 아침·저녁 식사를 주고, 바닷가와 맞닿은 아름다운 풍광은 덤이었다. 지난 400여년간 일본 광산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현재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 사도광산이 자리한 섬은 그렇게 소박함과 따뜻함으로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안타깝게도 한-일 갈등의 불씨가 살아 있다. “과거사에 대해 일측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지난해 11월 일본 정부가 마련했던 ‘사도광산 추도식’이 파행을 빚자 우리 외교부는 이런 발표를 냈다. 상황은 꽤 심각했다. 추도식은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에 한국이 동의해주는 조건으로, 일제강점기 사도광산에서 희생된 강제동원 조선인 노동자 등을 위로한다는 취지로 한·일이 합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첫 추도식에서 일본 정부 대표는 ‘조선인 강제동원’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쪽이 행사 명칭에 ‘감사’라는 표현을 넣어 ‘강제성’을 희석하려 했던 게 큰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결국 11월24일 추도식 하루 전, 외교부는 전격 불참을 선언했다. 당시 윤석열 정부의 ‘저자세 대일 외교’로 유지되던 한·일 우호 분위기도 소용이 없었다. 이튿날 우리 정부는 과거 조선인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숙소 ‘제4 상애료’ 터 앞에서 자체 추도식을 열었다.
[대전 MBC] 민족문제연, 천안 조병옥 생가에 ‘역사적 과오 기록’ 표지판 설치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와 제주 4.3범국민위원회는 천안시 병천면 조병옥 박사 생가에 ‘조병옥의 역사적 과오를 기록하다’라는 표지판을 설치했습니다. 표지판에는 제주 4.3 당시 “제주 주민 90%가 좌익이라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제거할 수 있다”며 평화적 해결 대신 강경 진압을 주장한 내용 등이 담겼습니다. 시민단체 회원들은 미군정청 초대 경무국장인 조병옥이 제주 4.3과 여순 사건 등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과오를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교선 기자 <2025-11-09> 대전 MBC ☞기사원문: 민족문제연, 천안 조병옥 생가에 ‘역사적 과오 기록’ 표지판 설치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제주4.3 단체와 충남시민사회, 천안 조병옥 생가에 ‘과오 표지판’ 세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