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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삼성의 도움으로 재벌이 된 판사

2022년 5월 12일 134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홍진기 판사가 부모 유산 없이 재벌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사회적 지탄까지 받게 되면, 판사를 그만둔 뒤 재벌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유산도 많지 않고 사회적 지탄까지 받았는데도 재벌 기업의 초석을 닦은 판사 출신이 있다. 4·19 혁명 시기인 1960년 3월 23일 시위 진압 책임자인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친일파 홍진기가 바로 그다. 그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내무장관에 홍진기씨’는 그의 일제 치하 경력을 “4273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73년 10월 고문(高文) 사법과 합격, 76년 10월 전주지법 판사”로 소개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1940년에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통과해 일제 판사가 된 것이 그의 친일 이력의 출발점이다. 친일판사, 4.19 땐 “국민 살상의 죄” 사법시험 통과와 판사 부임 사이에도 경력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에 따르면, 경성지방법원과 이 법원 검사국에서 시보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는 검찰이 법원에 속했기 때문에 법원 검사국 시보는 지금의 검사 시보였다. 그는 일제 패망 5년을 남겨놓고 사회에 진출해 친일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기간은 친일행위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1917년에 경기도 고양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판사 재직 당시 20대 중반이었다. 1945년 8·15 해방은 홍진기에게 내려진 ‘역사의 선고’였다. 28세 때 받은 역사의 선고를 그는 43세 때도 받았다. 1960년 4·19 혁명 때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자 “국민을 살상한 죄”를 지었다.

[오마이뉴스] 아산 염치읍 학살지에서 탄피 대신 낫이 출토된 이유

2022년 5월 9일 148

7일 오후 유해 매장 확인… 수십여 구 추정 충남 아산 염치읍에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찰에 의해 집단 희생된 민간인 유해가 추가 발굴됐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아산유족회(이하 아산유족회)에서는 이곳에서만 최소 8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산유족회는 7일 오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새지기 일원에서 집단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아산시와 아산유족회는 아산시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유해매장추정지에 대한 유해 매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 조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날 유해가 확인된 새지기 일원에서의 집단희생은 1950년 9월 26일 새벽부터 3일 동안 마을 내 우익성향의 청년들과 치안대 등이 마을 내 좌익활동 관련자들을 마을 공회당에 구금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이들은 구금자들을 새지기 공동묘지로 끌고 가 집단 살해했다. 증언에 의하면 살해 도구는 총이 아니었다. 쇠몽둥이와 낫, 쇠스랑 같은 농기구였다. 농기구를 마구 휘둘려 상처를 낸 다음 사람들을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로세로 약 8m)에 몰아 놓고 그대로 생매장했다. 이날 시굴 조사에서는 희생자의 두개골과 다리뼈 등 유해와 함께 고무신 등 유품 다수가 나왔다. 다른 집단희생지에서 함께 출토되는 탄피와 탄두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증언을 뒷받침하듯 살해 도구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녹슨 낫이 발굴됐다. 2019년 발굴에서 유해 7구 발굴… 두 명은 형제 이곳에서는 지난 2019년 아산시가 주도한 발굴에서도 유해 7구가 발굴된 바 있다. 이 중 두 명은 서로 친형제였다. 유품으로는 단추,

[오마이뉴스] 우리가 몰랐던 지폐 속 세종대왕 초상화의 진실

2022년 5월 11일 96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1TV <태종 이방원> KBS1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세종대왕의 이미지가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묘사됐다. 훗날 세종으로 불리게 될 충녕대군(김민기 분)이 형인 양녕대군(이태리 분)을 제치고 세자가 되는 과정을 <태종실록> 기록을 근거로 묘사했다. 그와 양녕대군 사이에서 경쟁관계가 있었으며, 그가 아버지 이방원에게 자기 능력을 적극 어필했다는 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형제 사이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식의 우애관계가 실제는 없었으며 세종이 형의 양보를 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의욕을 보였다는 이 드라마의 묘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떨어트리지 않는다. 세종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걷어내고 그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종의 참모습에 접근하려면, 이 외에도 극복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친일파들이 만들어놓은 세종의 허구적 이미지를 걷어내는 일도 그 중 하나다. 세종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원권 지폐 속의 세종 초상화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속 인물, 화가의 상상력 역사 속의 인물을 그릴 때는 화가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상상에는, 관행적으로 지켜지는 기준이 있다. 임오군란 2년 전인 1880년에 출생한 역사학자 신채호는 “역사는 역사 자체를 위해 기록해야 한다”며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기록해서는 안 된다”라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예컨대, 화가가 사람의 얼굴을 그릴 경우를 생각해보자. 연개소문을 그릴 때는 생김새가

[한겨레] 80년 5월18일 새벽미사 뒤 정보부요원이 들이닥쳤다

2022년 5월 9일 108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2) 5·18 민중항쟁 80년 5월 남산에 두달 감금…‘김대중 내란음모’ 공작 시달려 석방뒤 광주학살 소식에 충격…광주는 “민족의 십자가”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그 안에서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쉴 곳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된 것을 보고 그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오 12,42-45)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그 여자는 배 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묵시록 12,1) 박정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바라던 민주주의가 곧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거저 얻은 것은 거저 잃게 마련입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뜻밖의 결단,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함께 손잡고 유신 잔재를 척결해야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면 두 배 세 배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야말로 분골쇄신해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장을 찢는 결단’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정치 사회적 표현으로는 과거 청산입니다.

[오마이뉴스] 김구가 천만장자의 별장에서 사망한 사연

2022년 5월 4일 191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창학 친일파 최창학은 손꼽히는 일제강점기 재벌이었다. 그는 금광왕으로 불렸다. 1934년 1월 13일 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 등에서도 “금광왕 최창학 씨”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로도 조선 왕실은 그대로 유지됐고 조선 군주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왕이란 표현이 여전히 사용됐기 때문에, 민간인이 왕으로 불리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용인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재력이 막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그가 해방 뒤 얼마 뒤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해방 10년 뒤에 발행된 1955년 11월 20일 자 <경향신문> 3면 하단 기사는 “왕년의 광산왕 최창학 씨”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게 불린 것은 그 이전부터 그의 쇠락이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위 기사가 나오기 6년 전에 발행된 1949년 8월 10일 자 <조선일보> 2면 하단 기사는 최창학을 “과거 조선 광산왕”으로 소개했다. 같은 달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 기사는 광업계의 원로급 지도자 다섯이 그달 1일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금광 개발을 건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30일 자 기사는 최창학을 그 다섯 중에서 첫 번째로 거론했다. 이는 1949년 당시의 최창학이 예전 같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재계 원로로 활동할 만큼의 재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반에는 훨씬 더 쇠락해졌던 것이다.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그의 사업장 중 하나가 매각된 사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1938년에는

[통일뉴스] 서중석 “48년 남북연석회의, 2000년 6.15로 결실 맺었다”

2022년 5월 4일 289

민족문제연구소, 남북연석회의‧남북협상 74주년 특강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 제 정당 단체들은 공동 명의로서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층 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1948년 4월 30일 남북의 16개 정당과 40개 단체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결과를 담은 공동성명서를 발표, ‘외국군대 즉시 철거’, ‘내전 발생, 여하한 무질서 발생 허용하지 않을 것’,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창하며 이같이 밝혔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4월 30일 오후 2시 경기도 파주시 민족화해센터 대강당에서 개최한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및 남북요인회담 74주년 기념 특강’에서 “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써 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남북협상)이 열렸다고 강조했다. 특히 ‘내전 발생’에 대한 심각한 우려도 있었다고 짚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당시 남북요인들의 전쟁과 분단의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백범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울며 호소함’(48.2.10)을 예시했다. “제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랴!… 마음 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김구는 소원 대로 38선을 넘어 남북연석회의와 남북협상에 참석했고, 우사 김규식도 뒤늦게 방북해 남북협상에 참석, 4월 30일 남북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가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1_민족영화의 대명사 “아리랑과 나운규”_식민지시대 사람들 7편

2022년 5월 4일 155

☞ (05.03) ‘역발상’ 시즌 1: 민족영화의 대명사 “아리랑과 나운규”_식민지시대 사람들 7편 오늘 이야기:파란만장한 나운규의 삶 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전설이 되었나? 출연:한상언(영화역사연구자,한상언영화연구소 대표) 이준희(옛가요 전문가,성공회대 교수) 해방 후 나운규는 남과 북 모두에서 영화계의 전설이 되지만 아쉽게도 그가 만든 영화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한 편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역발상에서 나운규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주 희귀한 녹음본을 구해 여러분께 들려 드립니다. 아리랑은 어떻게 민족의 노래가 되었나? 3.1운동과 러시아혁명 그리고 도판부 사건 <심청전>의 심봉사로 연기를 깨우치다 <아리랑>을 만들다 나운규의 전성시대 방탕과 방종 그리고 몰락 영화계 복귀와 좌익극 활동… 그리고 <임자없는 나룻배> 토오키 시대의 시작과 <말못할 사정> <아리랑 3편>과 <오몽녀> 그리고 죽음 남북 모두에서 민족영화의 첫 자리에 자리한 나운규 ※지난 방송 ☞ (04.19) ‘역발상’ 시즌 1: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 최고의 가수 ‘이난영”_식민지시대 사람들 5편 ☞ (04.12) ‘역발상’ 시즌 1: 영화로 혁명을 꿈꾸다 ‘주인규”_식민지시대 사람들 4편 ☞ (04.05) ‘역발상’ 시즌 1: 식민지시대 사람들 3편 _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난 조선영화의 개척자 “이경손” ☞ (03.29) ‘역발상’ 시즌 1: 식민지시대 사람들 2편 _한국의 고가 마사오 ‘박시춘’ 탁월한 대중성으로 군국가요도 탑 ☞ (03.22) ‘역발상’ 시즌 1: 식민지시대 사람들 1편 _대중가요 최초의 슈퍼스타 남인수 “군국가요에서부터 국가보안법 피해까지” ☞ (03.15) ‘역발상’ 시즌 1: 새로운 시작 그리고 재일조선인단체사전 발간

[한겨레] 5월1일은 근로자의날 아닌 노동절이다

2022년 5월 9일 154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1) 노동절 ‘8시간 노동제’ 위한 투쟁 등 노동자의 정신 기리는 노동절 박정희때 ‘근로자의날’로 격하 날짜 찾았어도 정명 회복 못해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나, 너희 땅, 너희 성안에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품팔이꾼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의 품삯은 그날로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하여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므로,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품삯을 주어야 한다.”(신명기 24,14-15)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온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를 높여 우십시오. …… 그대들이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보 5,1-4) 인류의 역사는 강자들 중심으로 강자의 시각에서 쓴 기록입니다. 우리 역사의 현실도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약자의 처지에서 약자들을 배려하는 하느님의 큰 가르침을 선포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품삯을 보장하도록 부자들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20세기 후반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The preferential option for Poor)이 교회와 신앙인의 핵심임을 깨닫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월1일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관련 법령은 “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령에는 모순과 함정이 있습니다. ‘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서 막상 노동자를 근로자라고 기술한 저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중요성은 노동자의 품위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근로자라고 지칭한 그 배경을

[콩나물신문] 2018년, 부천의 일제 잔재 청산이 시작되다 – 친일 문인 작품의 철거

2022년 4월 29일 125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4 친일반민족행위자(줄여서 ‘친일파’)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에 의해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으로 대변되는 강대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미군정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으며, 해외에서 오랜 세월 독립운동을 했던 임시정부 대표 김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에 비해 국내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친일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해방 후 친일파를 처벌하자던 사회적 열기는 뜨거웠으나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결과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파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며 기득권층이 되었으며, 반성과 자숙을 해야 할 친일파들은 오히려 권력을 통해 독립운동가분들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등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덕적 불감증에 걸린 친일파들은 권력과 힘이 정의라고 호도하며 친일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항변하며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조까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들은 우리 사회의 상식과 정의를 철저하게 파괴하였으며 이로 인해 우리의 민족정기와 가치는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래로 그리고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의 친일 문인 작품을 철거하다 우리 부천에서는 2018년 상동의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설치된 친일 문인 3인의 4개 작품에 의해 청산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동천」, 주요한의 「샘물이 혼자서」,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가 그것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JTBC뉴스] ‘친일 화가’ 논란에…100원 동전 속 ‘이순신 얼굴’ 바뀔까

2022년 4월 29일 153

[앵커] 100원짜리 동전 속에서 많이 본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입니다. 그런데, 이 초상을 그린 화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고, 그림 속 복장도 시대에 맞지 않는단 이유로 3년째 바꾸자는 논란 속에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이선화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이순신 영정을 걸어둔 사당 앞에서 오늘(28일)도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대한민국 표준영정 1호인 이 초상, 그러나 지정해제 심의가 진행 중입니다. 이 영정을 그린 월전 장우성 화백이 지난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면서 논란이 시작됐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일제가) 징병제를 기념한다든지, 미국과 영국 연합군을 격퇴하자는 미술대회 결전 미술전 이런 곳에 출품하게 만들었고.] 후손들은 적극적 친일매국 행위가 아니라며 반발하지만,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는 2010년 처음 지정해제를 신청했고, 당시 문체부는 ‘화가의 행적은 심의 규정에 없다’며 반려했습니다. 그러나 초상화 속 복장도 시대에 맞지 않다는 지적까지 나오면서 현충사는 2017년 또 한 번 지정해제를 신청했는데, [권오창/화가 (표준영정 다수 제작) : 19세기의 옷을 착용하고 있는 게 아쉽고, 여기 있지 말아야 할 병부 주머니를 착용하고 있다든가 이런 것이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는 물론 화폐까지 바꿔야 해 사회적 혼란과 비용이 예상된단 겁니다. 재작년 6월, 현충사의 세 번째 신청에도 논의만 3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 : 작년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원활하게 개최를 못 해서 올해는 한두 달 간격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논의사항이 많고 신중하게 검토를 해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