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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5)겨레·헌신·일꾼…교가 속에 쟁쟁한 식민주의·국가주의 유산

2020년 3월 9일 196

교가 – 식민주의 전승과 소리의 기억 긴 겨울을 뚫고 만물이 생동하는 3월이다. 매년 이맘때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기지개를 켜는 곳이 있다. ‘학교’가 바로 그곳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인해 일선 학교에서는 학사일정의 혼선이 빚어진 상황이지만, 신입생들을 맞을 채비로 학교는 그 어느 곳보다 분주하다. 신입생의 신분으로 맞이하는 3월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이면서도, 무엇보다 새로운 학교의 역사와 학풍에 대해 익히는 시기이다. 학교의 전통을 상징하는 ‘교가’(校歌)를 처음 접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그런데 이 영구불변의 상징물인 교가를 둘러싸고 기억전쟁이 시작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일본 식민지배 이후 만들어진 교가 제국주의 위한 획일적 인간상 담아 조국·민족 위해 충성·헌신 요구 해방 후 대부분 교가에 그대로 전승 군사정권·독재시대 거치며 심화 ‘교가’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각종 행사를 비롯해 매주 조회시간에 제창 형식으로 부르게 되는 교육용의 노래이다. 학창 시절의 일과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교가는 그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일상의 불가피한 속성인 ‘하찮음’은 교가가 담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적인 지점들을 간단히 덮어버린다. 그 별것 아닌 노래 속에 제국주의와 개발독재라는 질곡의 시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교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이다. 메이지 정부의 국시인 근대화 또는 국민화 작업은 공교육 기관을 중요한 거점으로 하여

[뉴스톱]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2020년 3월 4일 241

[김언경 칼럼]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 도쿄 2심 재판 결과에 부쳐 * 이 글은 위안부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온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칼럼입니다. 지난해 10월, 저는 한겨레 전 부사장이신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임 선생은 그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그를 지지하기 위해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을 만들었는데 그들이 일본에 가니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 사무처장이 함께 가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불매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3박4일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저는 우에무라 기자의 자서전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를 읽었고,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삿포로 재판소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서 저는 또 다시 우생모와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그의 도쿄 재판소의 2심에서 또 다시 패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판결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전해 받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매우 큽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느낀 우에무라 기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누구이며, 어떤 재판인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62)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91년 8월 11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우에무라 다카시 “27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위안부 문제 보도하겠다” 뉴스톱 인터뷰 기사 참고). 그의 보도 사흘

[미디어오늘] 친일인명사전, 조선일보 방응모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2020년 3월 3일 408

편집회의서 일제 입장 용어 강요, 조선일보 폐간되자 조광에 일제전쟁 미화…수차례 침략전쟁 옹호 강연도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발간사에서 이를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이라 했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서문에서 “참회와 화해의 첫걸음이 되길” 바랐다. 이는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조광 발행인)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고,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방응모를 친일파로 규정하자 조선일보 측은 반발했다.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손자 방우영 전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방응모 전 사장이 친일행위를 한 적 없다”며 정부에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방우영 전 회장이 2016년 세상을 떠나자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등이 다툼을 이어갔다. 법원에선 방응모를 끝내 친일파로 봤다. 다만 8년에 걸친 소송에서 친일행위의 범위가 줄었다. 원래 반민규명위에선 잡지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 일제에 군사물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에서 발기인·감사를 지낸 행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등 세 가지를 친일행위로 봤다. 대법원은 이 중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만을 인정했다. 여전히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조선일보와 방 사장 일가가 방응모의 친일행적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아서다. 방응모는 자신의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방재윤의 아들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방상훈 현 조선일보 사장은 방일영의 첫째 아들이다. 이에 미디어오늘은 법원 판결취지와 방응모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활동을

[오마이뉴스] “민족반역자 이름 새겨진 바위 앞에 안내판 세워”

2020년 3월 2일 270

시민의모임, 진주 뒤벼리 입구 “이재각, 이재현, 성기운은 민족반역자” “이재각, 이재현, 성기운은 민족반역자입니다.” 경남 진주 뒤벼리 입구에 이런 제목의 안내판이 다시 세워졌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부 회원들을 비롯한 ‘뒤벼리 민족반역자 이름 처리를 바라는 시민의 모임’은 1일 오전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1999년 이곳에 비슷한 내용의 안내판을 세워 놓았으나 이후 누군가 훼손한 흔적이 있었고, 이날 시민들이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시민들은 팻말 주변 정비 작업도 벌였다. 이재각, 이재현, 성기운은 민족반역자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이들의 이름이 진주 뒤벼리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바위에 새겨진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지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글자를 새길 경우 바위 훼손이 우려되고, 교훈을 삼아야 한다고 해 팻말을 세웠던 것이다. 시민의모임은 “뒤벼리는 진주8경의 하나로 옛날부터 남강의 명승지로 알려졌다”며 “1930년대 이후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이 더럽혔다”고 했다. 이들은 “일제에 부역하면 이름이 새겨진 바위처럼 영구히 빛나리라는 생각에서 경술국치를 맞게 한 천인공로할 반역자와 그 친족 이름까지 이곳에 새겼던 것”이라고 했다. 이재각(李載覺)은 일왕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오늘날 수백억 원에 해당하는 15만 원의 은사금을 받았고 일장기가 그려진 훈장을 받은 대표적인 친일파다. 이재현(李載現)은 군수와 관찰사 재임 중 조선말에 일어난 애국 의병들을 회유, 토벌, 재판한 주동자이고, 성기운(成岐運)은 경남‧전남‧충청 관찰사로 의병을 토벌하거나 재판을 했고 일왕으로부터 수백억원에 해당하는 15만원의 은사금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시민의모임은 <국사대사전>과 <인명대사전>, <고종‧순종실록>, <관보>, <매일신보>,

[가톨릭평화신문]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

2020년 3월 2일 186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참석 금했지만 군국주의 막지 못한 교회 해방된 지 75년. 그 긴 세월이 흘렀지만, 신사(神社) 참배는 한국 천주교회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신사 참배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는 친일 행각을 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했다. 55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교회는 2000년 대희년 12월 과거사 참회 예식을 거행, 신사 참배와 함께 일제 침략 전쟁에 협력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신자들을 단죄한 잘못을 참회했다.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국가 신도’는 금지됐지만,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명맥을 계속 잇고 있다. 군국주의 망령이 일본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국가 신도 또한 부활할 것이라는 생각이 우려만은 아니다. 한국외방선교회 유가별 신부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학부 통합과정과 석ㆍ박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한 뒤 ‘1882년부터 1936년까지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사 참배를 주제로 한국과 일본 교회, 교황청 등지의 사료를 기초로 쓴 최초의 박사 학위 논문이다. 3ㆍ1절 101주년을 맞으며 유 신부의 논문을 기반으로 ‘신사 참배’를 주제로 한 특집을 싣는다. 1920~1930년대 한ㆍ일 교회 1932년 5월, 일본 예수회가 운영하는 도쿄 조치대 학생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 이에 조치대에 파견됐던 교관은 격분해 이 사건을 일본 육군성에 보고하고 대학에서 전격 철수한다. 이 사건으로 장교 임용이나 군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조치대 입학 지원자가 격감하고 조치대는 존폐 기로에 선다. 그뿐만 아니라

[보도자료] 3·1운동 때 처단된 일제경찰 추모비 사진 발굴

2020년 2월 28일 475

[보도자료] [다운로드] 3·1운동 때 처단된 일제경찰 추모비 사진 발굴 1919년 3·1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다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처단된 일본인 경찰들을 위령하기 위해 일제가 건립한 추모비 사진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경기도가 추진하고 있는 일제잔재 전수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초 문헌자료 조사과정에서 관련 사진자료를 발굴하여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이를 공개했다. 그간 일제가 3·1운동 때 ‘순직’한 경찰관을 위해 초혼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실물사진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석의 전면에 ‘순직경찰관초혼비(殉職警察官招魂碑)’란 비명이 새겨져 있는데, 주인공은 수원경찰서 소속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와 화수리경찰관주재소 소속 순사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로 3·1운동 전시기에 걸쳐 시위현장에서 처단된 일제경찰은 이 둘 밖에 없다. 이 비석은 수원화성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언덕에 세워져 1926년 6월 27일 제막식을 가졌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매년 4월 이곳에서 초혼제가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관련자료로, 소장하고 있는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1937)도 함께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1운동이 비폭력저항을 지향하고 있었음에도 2명의 일경이 처단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화성 일대의 항쟁이 워낙 치열하였고 일제가 총칼로 이를 진압하고자 했던 탓이 컸다. 제암리학살사건 등 화성 지역에서 벌어진 일제의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만행은, 국제사회가 3·1운동을 주목하고 한

[연합뉴스] “문학은 민족 생존권 깨닫게 할 거대담론 다뤄야”

2020년 2월 24일 196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50년 뒤, 100년 뒤에도 남는 문학은 거대담론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는 세계문학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에요. 그렇지 않은 당대 베스트셀러는 풍화작용 속에서 사라질 겁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24일 종로구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소설 ‘광장’을 쓴 최인훈을 인용해 “민족 생존권을 본능적으로 알고 깨닫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임 소장은 친일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으로 유명하지만, 본업은 문학평론가다. 문예지 ‘현대문학’에 1966년 ‘장용학론’을 투고해 평론가로 등단했고, 이후 ‘문학과 이데올로기’, ‘분단시대의 문학’ 등 문학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썼다. 그가 최근 소명출판을 통해 그간 발표한 글을 묶은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를 출간했다. 장용학, 이호철, 최인훈, 박완서, 이병주, 남정현, 황석영, 손석춘, 조정래, 박화성, 한무숙 등 이른바 “권력에 먹물을 뿌린 작가”를 살폈다. 임 소장은 “소설가들은 훌륭한 작품을 썼는데, 평론가들이 중요한 대목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알리지 못해 안타까웠다”며 “평론은 아니고 평론적 에세이로, 문학을 하지 않은 사람도 볼 수 있도록 재미있게 썼다”고 말했다. 흥미를 강조한 발간 의도와 달리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상당히 묵직한 편이다. 그는 신간 머리말은 물론 간담회에서도 ‘거대담론’이라는 용어를 거듭 강조했다. 임 소장은 “사악하고 추악한 시대에 살면서도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자세로 고고한 미학적 사도인 양 미세담론에만 열중하는 (문학계의) 그 편집증 현상이 거대담론을 부추겼다”며 “정치를

[오마이뉴스] 대전시청 북문 앞 ‘금송’ 옮겨졌다… “일본 왕실 상징”

2020년 2월 25일 135

대전광역시가 대전시청 북문 입구에 있는 금송 두 그루를 한밭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다고 25일 밝혔다. 박준용 대전시 청사관리팀장은 “시청 북문 앞 금송을 지난 23일 한밭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다”고 밝혔다. 박 팀장은 이식 배경에 대해 “금송은 일본이 원산지로 이에 대한 시민 정서를 고려했다, 또 북문 출입구에 심어져 있어 개방감을 확보하려는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문제의 금송은 지난 2000년 1월 신청사 개청과 함께 지역의 한 건설·토목업체 대표이사가 기증했다. 대전시는 금송이 있던 자리에 우리 고유 수종인 반송을 심었다. 앞서 대전민족문제연구소와 대전광복회는 지난해 8월부터 시청 북문 앞에 있는 금송 두 그루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나무가 일본 왕실을 상징해 대전시를 대표하는 시청 출입구에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금송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코야마키’라는 나무로 일본서기나 일본 신화, 일본 신사 등에 일본 사무라이 정신, 일본 왕실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경표 대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다른 곳으로 이전을 요구해 왔다”며 “늦은 감 있지만, 대전시의 금송 이식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대전민족문제연소는 지난 해에는 아산 현충사 경내에 있던 금송을 옮겨 심게 했다. 충남도교육청은 지난해 부터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충남도내 56개 학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무분별하게 심어진 금송과 왜향나무(가이스카 향나무) 등 일본 원산지 나무 정리작업을 벌이고 있다. 충남도교육청의 전수조사 결과 362개교에서 왜향나무 7720그루, 금송 212그루를 확인했고 왜향나무를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52개교에

[한국타임즈] 광양시, 유당공원 내 친일인물 이근호·조예석 비석에 단죄문 설치

2020년 2월 21일 210

[한국타임즈 광양=권차열 기자] 전남 광양시는 지난 20일 시청 상황실에서 문화유산 보호관리 위원회를 개최해 유당공원 내 친일인물 비석에 대한 정비 방안을 심의하고 단죄문 설치를 의결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제 국권침탈 협력자인 이근호, 조예석 비석에 대한 정비 방안을 심의했다. 시에 따르면 유당공원에는 2008년 광양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3기의 비석이 있으며, 이 중 ‘관찰사이공근호청덕애민비’와 ‘행군수조후예석휼민선정비’ 2기가 친일인물 관련 비석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시는 지난해 9월 시정조정위원회 자문회의와 시의회 의원간담회를 열고 ‘유당공원 내 친일논란 비석에 대한 정비’ 안건을 상정해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 심의 과정에서 이적행위를 한 인물의 비석을 별도의 위치로 비석을 옮겨 다른 비석과 구분하고 단죄문을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동 시 천연기념물인 이팝나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고, 문화재 원형 보존의 원칙과 비석 13기가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있어 의미가 있다는 의견으로 인해 기존 비석 앞에 단죄문을 설치하는 것으로 의결됐다. 이근호(1861~1923)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으로 1902년 2월부터 제5대 전라남도 관찰사 겸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앞장 선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또한 일제 강점하 반민족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돼 있는 인물이다. 조예석(1861~?)은 1902년부터 1904년까지 광양군수를 지냈고,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관계한 조선 관리들에게 일본 정부가 수여한

민족사랑 2020년 02월호

2020년 2월 18일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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