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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민족사랑 2022년 04월호

2022년 4월 27일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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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현대그룹으로 흘러들어간 호남 갑부 가문의 과거

2022년 4월 27일 83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현준호 일제강점기 때의 ‘호남 출신 재벌’ 하면 <동아일보> 김성수가 떠오른다. 지금은 많이 잊혀 있지만 현준호(1889~1950) 역시 손꼽히는 일제강점기 호남 재벌이었다. 김성수처럼 현준호 역시 친일파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백서 <친일재산조사, 4년의 발자취>는 친일파 현준호에 대해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를 한 자에 해당”한다고 기술한다. 정규직 갑부 친일파 그가 일제 치하에서 역임한 관직은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만이 아니었다. 광역의회에 해당하는 전라남도 도평의회에도 참여했다. 또 전쟁 협력을 위한 기구에도 가담했다. 전남 특별지원병후원회 부회장, 전남 군사후원연맹 부회장, 국민정신총동원 전남연맹 이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도 역임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도 관여했다. 동족 청년들에게 학병 참여를 권장하는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조선의 자치제도 주장했으나 이는 일제의 미움을 사는 일이 아니었다. 일본제국의 테두리 내에서 자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또 금전도 많이 기부했고, 금 현물도 많이 기부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에 따르면, 1939년 4월 본인 명의로 금제품 26점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기부했고, 다음 달에는 그의 부인이 조선군애국부에 금제품을 헌납했다. 이런 행위들로 인해 상을 많이 받았다. 일본 정부가 주는 상도 받고 총독이 주는 표창도 받았다. 만 32세 때인 1927년에는 다이쇼 일왕(천황) 장례식에 참석할 전남 대표로도 선정됐다. 또 중추원 참의로 일하는 대가로 오랫동안 봉급을 받았다. 이 봉급은 1930년 6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1_대중가요 작사의 쌍두마차 박영호와 조명암_식민지시대 사람들 6편

2022년 4월 26일 162

☞ (04.26) ‘역발상’ 시즌 1: 대중가요 작사의 쌍두마차 박영호와 조명암_식민지시대 사람들 6편 오늘의 이야기: 대중가요 작사계의 투톱 출연: 이준희(옛가요 전문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모두 해방 이전 대중가요 작사를 대표하는 쌍벽, 박영호와 조명암. 두 사람이 다양한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은 대략 1100여 곡. 작사자가 확인된 작품이 대략 3500여 곡이니, 약 1/3을 점하는 셈. <꿈꾸는 백마강> ■ 두 사람은 또 특이하게 같은 필명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김다인이 바로 문제의 필명. 김다인 명의로 발표된 작품 중 어떤 것이 조명암의 작품이고 어떤 것이 박영호 작품인지는 확정하기 어려운 문제. 음반회사를 기준으로 보는 것이 그나마 타당. <온돌 야화> ■ 대중가요에서 작가의 개성을 찾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두 사람의 대비는 그래도 꽤 확인되는 편. 박영호는 작사가인 동시에 극작가로 활약했고, 조명암은 역시 극작도 했지만 시인으로 문필 활동을 시작. 가사만으로 작사자를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곡들도 다수 존재. <타국의 여인숙> ■ 작품 활동만 했던, 그래서 그런지 작품 수가 좀 더 많기도 한 조명암과 달리, 박영호는 음반 기획을 총괄하는 음반회사 문예부장을 몇 차례 맡기도. 녹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가사를 완성하지 않아 가수들을 초조하게 했다는 박영호의 집필 스타일이 그런 상황과 관련이 있는지도. <오빠는 풍각쟁이> ■ 많은 작품을 발표한 두 사람은 군국가요에서도 역시 쌍벽을 이루는 작가. 특히 조명암은 확인된 군국가요의

[영상] 한승헌 변호사님 ‘민족문제연구소에 소장자료를 기증하며’

2022년 4월 26일 260

한승헌 변호사님은 평소 기록의 소중함을 강조해 오셨습니다.2012년 유신40년 특별전에 한 변호사님이 맡으셨던 시국사건 변론 기록물을 출품해 주셨고, 2018년에는 소장도서와 사건 기록 등을 기증해 주셨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이 주신 뜻, 남긴 말씀 깊이 새기고 이어가겠습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십시오.

[통일뉴스] 역사의 공백 ‘일제하 재일조선인’, 조직활동으로 조명

2022년 4월 26일 337

[화제의책] 한일공동편찬위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바퀴벌레라고 불렀지. 땅 속에 다시 처박아야 된다면서.” 최근 인기리에 ‘애플TV’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파칭코> 속 대사 한 대목이다. 일본땅에서 일제 암흑기를 견디며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본군성노예(‘위안부’)나 강제징용자들의 한맺힌 일대기들이 더러 소개되기도 했지만 식민본국 일본땅에서 일제시기를 살아낸 ‘재일조선인’들의 삶은 드라마 <파친코>가 그러하듯 이제야 우리 곁으로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1945년 해방 당시 2,500만 조선인 중에 재일조선인이 200만에 달했던 사정에 비추어 보면 그들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너무 소홀했고, 늦었다 할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해낸 민족문제연구소가 10년간 공을 들여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이하 사전)을 올해 3.1절을 맞아 세상에 내놓았다.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그들이 몸담았던 ‘조직’을 통해 조명한 1,263쪽에 달하는 역작이다. 재일조선인이 주로 모여살았던 ‘집중 거주지’ 중심으로 동향(同鄕) 조직, 상호부조 조직, 민족단체, 노동단체, 학생 조직, 예술‧연극 단체, 종교 단체 등 다양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일본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재일조선인”들은 이러한 ‘조직’에 참여해 ‘자주적 운동’을 펼쳐나갔다. 1934년에 재일조선인 단체는 1,000개가 넘었고, 1937년 재일조선인은 73만 5,685명 중 조직인원이 15만 6,842명에 달했다. 성인 남성 중심으로 계산할 경우 매우 높은 조직률인 셈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둘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화된 이후에는 재일조선인들의 자주적 단체를 해산시키고 통제하는 것이 치안 당국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고, 좌익 단체들은 사실상 탄압 속에 사라져갔다. 도쿄에서 조직된 대표적

우리 연구소,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2022년 4월 25일 237

  [수상] 우리 연구소,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우리 연구소가 민간차원에서 통일운동 활성화와 통일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포상제도는 2020년도부터 시행되었으며 평화통일 기반 구축과 통일역량 확충을 위해 제정되었다. 올해 ‘민간통일운동 유공 정부포상 전수식은 4월 25일 오후 3시 정부서울청사 통일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시상은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주관하였으며 방학진 기획실장이 연구소를 대표해 수상했다. 통일관련 시민강좌 개최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의 전국 순회전시 등을 통해 통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점이 이번 심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장과 수치(綬幟)

[서울뉴스통신]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 년전 그들의 선택’ 개막

2022년 4월 26일 56

【경기·남부 = 서울뉴스통신】 김인종 기자 =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관장 김기섭)은 오는 27일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 년 전 그들의 선택’을 개막한다. 이 전시는 경기도 31개 시군의 항일독립운동과 친일파(親日派)에 대해서 조명하는 특별전으로, 한말~일제강점기에 경기도에서 펼쳐진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의 장소 및 인물을 기리고,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얻은 친일파 및 일제잔재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역사의 엄중함과 국가·공동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자 기획한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국권 강탈은 조약 형식을 띠었으므로 이에 협조하는 친일파들이 있었고, 시간이 흘러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렇지만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국내외의 항일운동과 무장 독립전쟁이 본격화하였다. 근대 이후 한국은 수십 년간 식민지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났지만, 치열한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그 역사가 초라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 전시 담당자의 설명이다.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며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1백 년 전 깊은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을 예측했을까? 1백 년 전 우리는,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전시실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물음표가 가득하다. 이 전시는 경기도의회가 지난해 5월 20일 제정한 ‘경기도 일제

[오마이뉴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독립운동가의 집… 황망했다

2022년 4월 25일 205

고 임우철 애국지사가 70여년 거주한 곳… ‘독립운동 기념공간’으로 사용할 순 없었을까 며칠 전 동작구 향토사학자인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김학규 소장의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 상도동에 있던 독립운동가 고 임우철(1920~2021) 애국지사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임 지사의 집이 철거됐다, 허탈하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임우철 지사는 1941년 6월부터 1942년 12월 사이 일본 도쿄의 공옥사고등학교(攻玉社高等學校) 토목과에 재학 중 동급생들과 함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허구성과 궁성요배(宮城遙拜: 일본 천황이 사는 궁궐을 향해 절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던 중 피체됐다. 붙잡힌 임 지사는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이러한 항일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2001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바 있다. 철거된 현장에 직접 가보니 공교롭게도 나 역시 상도동 주민으로서 지사께서 생전에 머물던 집이 근방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언젠가 한 번 찾아가보기 위해 벼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철거 소식을 접하니 황망할 따름이었다. 지사의 집이 있던 주소를 찍어보니 중앙대학교 근처 주택가로, 내가 사는 곳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택가 골목을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황량하게 비어있는 임우철 지사의 집터를 발견했다.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표현이 적확할 정도로 현장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줬을 아름드리 나무 역시 잘려나간 채 밑동만이 휑뎅그렁하게 남아있었다. 철거된 집터 위에는 물건과 편지, 그릇 등등이 굴러다니며 방치되어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고

[경향신문] 한승헌 변호사님 영전에 [추도사]

2022년 4월 22일 340

우리 스스로 메시아가 되어야 할 시대의 유머리스트 연약한 사슴, 붓으로 검에 맞서다. 존경하는 한승헌 변호사님, 구순을 기어이 못 맞으시고 이렇게 황망히 우주 삼라만상의 순회에 드셨습니까. 작년 9월, 산민 한승헌 변호사 기념문집 <산민의 이름으로>(이지출판)를 펴내시면서 생의 마지막 잔치로 출판기념회를 고대하셨지만 코로나로 무산되면서 전화로 인사를 대신하셨지요. 건강 문제로 뵈올 기회가 드물어져 안타까웠지만 ‘두뇌와 입’은 지장이 없다시기에 전화로라도 “제발 그 재담 계속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빈다”고 저는 썼지요. 문안 전화 때마다 유머를 날리시기에 버나드 쇼를 능가하는 재담으로 이 세상 더 즐겁게 만들다가 가시겠다면 저승사자도 양해할 거라니까, “그 잡귀가 혼자 돌아가기 심심해 꼭 나를 데려갈 거요.” 하신 게 저와의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55킬로그램 밴텀급 육신으로 그 많은 직함에 팔방미인으로 우리 시대의 모든 과업에 투신했지만 ‘한변’이란 애칭으로 통했던 분, 어떤 장중한 모임에서도 반드시 웃음의 명 펀치를 날려 좌중을 즐겁게 해주신 해학가에 휴머니스트, 율사란 본업 못지않게 온갖 잡사에 능하셨던 한승헌 변호사님. 무진장 3개 군 중간인 고향 진안을 ‘무주 구천동 옆 팔천동’으로 소개하시며, 아호 산민이 행여 빨치산이냐면, “변호사라서 운동이라면 석방운동”만 했다며, 한국의 헌법을 어긴다는 본명 때문에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다던 분.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고교생으로 시 창작을 하다가 대학생 때는 신석정 시인에게 격려까지 받았으나 약관 23세에 고시 8회 합격으로 서울지검에 근무 중 1965년부터 변호사를 본업 삼고 민주화에

[SBS꼬꼬무] 분노와 슬픔의 역사 ‘군함도’…”강제노역 없었다”는 일본의 두 얼굴

2022년 4월 22일 186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1일 방송된 ‘꼬꼬무-1943 지옥의 문,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송영규, 이이경, 개그우먼 이은형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전국에서 일어난 연쇄 소년 실종사건 때는 1943년 1월, 전라북도 익산에 살던 15세 최장섭 군.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이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상을 놓친 적이 없는 소년이야. 장섭이가 집에 있던 어느 날, 마을 면사무소 직원 윤씨가 찾아왔어. 다짜고짜 따라오라 하는 윤씨의 말에 장섭이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따라나섰어. 장섭이가 군청에서 만난 군수는 장섭이를 훑어보더니 “얘는 너무 어린 거 아닌가?”라고 말했어. 그러자 윤씨는 “거기는 어릴수록 좋다”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어. 장섭이 외에도, 어떤 아이는 동네 이장님이 불러서, 어떤 아이는 형사가 오라고 해서,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름에 잡혀 왔어. 아이들을 한 방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갔어. 연쇄적인 소년 납치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거야. 아이들은 이 부름에 거부하면 부모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가족에게 돌아갈 배급을 끊어버린다는 협박에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어. 다음날, 장섭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