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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치열하고 자랑스런 ‘항일 독립운동’ 세계에 알리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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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아직도 내 귀엔…’ 영문판 낸 시인 이육사 증손 이재원군

시인 이육사의 종손인 이재원군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손자며느리인 허은(1907~1997) 선생 회고록이다. 1995년 정우사에서 초판이, 개정판은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왔다.

허은 선생은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왕산 허위의 재종손녀이다. 8살이던 1915년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이주해 1932년 환국 때까지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가 종부로서 안살림을 맡은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등 독립운동 서훈자를 11명이나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회고록은 서간도 항일투쟁의 실상을 드러내는 한편으로 집안 남자들이 항일 투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갖은 어려움 속에서 가계를 챙겨온 여성들의 활약상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의 전체상을 그려낸 첫 연구서인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2001, 서중석)이 가장 크게 기댄 텍스트도 이 회고록과 우당 이회영 아내인 이은숙 선생 회고록(서간도 시종기)이다.

이 회고록이 출간 30년 만에 영문본을 얻게 되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영문판 번역자는 용인한국외대부설고 3년 이재원(18)군이다. 그는 시인이자 항일운동가인 이육사(1904~44·본명 이원록)의 증손자이다.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이군을 만났다.

허은 회고록과 이군이 번역한 영문판.

이군의 조부 이동박(1942~2013) 선생은 육사의 동생인 고 이원창 선생 삼남으로 해방 1년 전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 육사의 양자로 입적했다. 지금도 이군의 집에서는 매년 육사 순국일 (1월 16일)에 증조부모 제사를 지낸다.

이군은 회고록 저자와도 혈연관계이다. 허은 선생 고모가 바로 육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육사의 항일 의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허규(1884~1957) 선생은 허은 선생의 숙부, 육사의 외숙부이다.

이군이 번역에 들인 시간은 단 두달이란다. “지난 3월부터 매일 5~6시간씩 번역했어요. 아버지 직장 때문에 초등학생 때부터 중국의 국제학교와 미국 학교에 다녀 충분히 영어로 번역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서부터 역사를 좋아해 대학은 역사나 정치외교학 전공을 생각 중이라는 이군은 3년 전에는 ‘간추린 한국 고대사’란 이름의 영문 소책자를 아마존 출판 플랫폼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왜 번역했을까? “집에 있던 회고록을 지난 2월 처음 읽고 무척 감동을 받았어요. 제가 아버지 직장 때문에 중국에 간 게 8살이었는데요. 허은 여사께서 가족과 함께 중국 망명한 시기도 그 무렵이더군요. 저와 대조가 되어 슬프기도, 감사하기도 했죠. 저는 비행기 타고 편하게 갔는데 허은 여사께서는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수백 ㎞를 걸어서 갔어요. 망명 초기에는 농사가 잘 안돼 먹을 것을 빌리러 다니기도 하고요.”

그는 이 책으로 학교의 영문 독후감 숙제를 하기로 맘먹고 정확한 영어 제목을 찾기 위해 검색하다 아직 영문 번역이 이뤄지지 않은 걸 알게 되었다. “책 내용이 훌륭해 저라도 번역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바로 옮기기 시작했죠. 백범일지나 육사 할아버지의 시집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책이 이미 영어로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상룡 선생 손부 허은 회고록 옮겨
‘항일운동’ 여성 활약상 보여줘
“8살에 수백㎞ 걸어 중국 망명하고
먹을 게 없어 고생한 이야기 ‘감명’
증조부 이야기도 많이 나와 번역”
허은 선생 고모가 이육사 어머니

“독립운동 폄하, 역사이해 부족 탓”

책에 증조부 이야기가 많은 것도 번역 결심에 영향을 미쳤단다. “어릴 때부터 증조부가 독립운동가이시고 훌륭한 분이니 저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이번 책을 보니 구술체로 증조부의 독립운동 이야기가 많이 나와 지금껏 증조부에 대해 알던 것과 조금 다르게 다가왔어요. 증조부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커졌다고 할까요.”

책을 옮기며 어떤 기대감을 가졌을까? “우리 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우면 미국 독립선언이나 프랑스혁명 내용이 세세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세계사 수업 때 보니 한국사는 한국전쟁 정도 이야기하고 건너뜁니다. 한국의 치열한 독립운동이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인데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이 번역서가 한국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지금 케이(K) 문화가 유행이잖아요. 이에 힘입어 우리 역사도 더 알려지면 좋겠어요.”

“한국 독립은 연합국 승리의 선물”(김형석 독립기념관장)과 같은 독립운동 폄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고 하자 그는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일부 있다”며 말을 이었다.

“(2차대전) 승전국이 패전국 식민지 중 독립을 안 시켜 준 나라들도 있어요. 19세기 후반까지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옛 류큐 왕국)가 그렇습니다. 지금도 일본땅입니다. 연합국이 우리 독립 과정에 큰 축을 담당한 것은 맞지만 단순히 그들이 이겨 우리가 독립했다고 정리하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해요.”

시인 이육사의 종손인 이재원군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요즘 보면 독립운동가를 재미로 비난하는 콘텐츠가 유튜브 등에서 많이 보여 얼굴이 찡그려질 때가 많아요. 얼마 전 교보문고에 가보니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도 있더군요. ‘킬(kill, 죽이다)구’라는 표현까지 나오고요. 저는 그렇게 비난하는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당신들이 그렇게 놀리고 비난할 자유를 준 분들이 바로 그 독립운동가들이라고요.”

인터뷰를 마치며 증조부의 시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물었다. “1940년 발표한 ‘광인의 태양’이라는 짧은 시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죠. 그래서 더 좋아해요. 증조부의 독립투사로서 면모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항상 요충지대를 노려가다’ 같은 시구가 대표적이죠. 투사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분이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증조부께서 실제는 독립투사이자 무장투쟁을 지향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잘 나타나는 것 같아 좋아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25-10-14> 한겨레

☞기사원문: “치열하고 자랑스런 ‘항일 독립운동’ 세계에 알리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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