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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한동훈이 소환한 정형근…다시 떠오른 ‘고문 검사’ 악몽

2026년 5월 8일 376

정형근 후원회장 위촉은 고문피해자 2차 가해 김근태 고문에 이근안 투입, 정형근이 배후에 서경원 전 의원 수사 때 참고인 얼굴에 주먹질 방양균 “그가 다녀간 뒤엔 매번 더 포악해져” 김기춘에 진형구, 김학의까지 공안검사 면면 국가폭력 끈질긴 추적·단죄가 내란 청산 완성 법무부는 5월 7일 신임 검사 임관식을 열었다. 같은 날 부산 북구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서는 무소속 한동훈 후보는 정형근 전 의원을 후원회장으로 위촉했다. 신임 검사들이 장차 어떤 검사가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선배 검사 정형근을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말은 해주고 싶다. 그리고 정형근을 후원회장으로 위촉한 한동훈 후보의 행위가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2차 가해라는 사실도 알리고 싶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죽음을 계기로 지난달 정부는 국가폭력 가해자들에게 수여된 정부포상을 취소하기 위해 전수조사에 나섰다. 1985년 민청련 의장이던 김근태 고문의 배후가 정형근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이었다. 정형근 단장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직접 방문해 묵비권을 행사하던 김씨를 향해 “혼을 내서라도 철저히 밝혀내라”며 고문수사를 지시한 사실이 박처원 전 치안감의 진술을 통해 확인됐다. 그의 지시가 있은 뒤 이근안 경감이 투입됐고, 김근태는 23일 동안 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정형근은 ‘국가 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는 보국훈장(1991, 1993)을 두 차례나 받았다. 따라서 정형근이 받은 훈장도 당연히 취소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후반기 국회는 반드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시효 등에 관한

[기자회견문] “선거 앞둔 ‘극우 구애’ 감사의 정원, 준공식이 아니라 ‘감사’가 먼저입니다”

2026년 5월 7일 222

☞ 다운로드: [기자회견문] <기자회견문> “선거 앞둔 ‘극우 구애’ 감사의 정원, 준공식이 아니라 ‘감사’가 먼저입니다” 서울시가 오는 5월 12일 ‘감사의 정원’ 준공식을 강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방선거를 불과 20여 일 앞둔 시점입니다. 이처럼 촉박한 시기에 사업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공개하는 것은 정상적인 행정 절차로 보기 어렵습니다. 충분한 검증과 점검이 이뤄지지 않은 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는 의심을 낳기에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준공식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먼저, 이 사업의 성격 자체가 문제입니다. ‘감사의 정원’은 ‘극우 구애용 정치사업’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오세훈 후보는 “절윤은 피할 수 없는 보수의 길”이라고 말하며 극우와의 결별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행보는 달랐습니다. ▲영화 ‘건국전쟁’ 관람과 홍보, ▲광화문광장 국기게양대 설치 추진, ▲송현동 ‘이승만 기념관’ 건립 시도 등 특정 이념 성향을 반영한 콘텐츠 확산과 공간·상징물 조성이 이어지며, 지지층 결집을 겨냥한 움직임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감사의 정원’ 역시 선거를 앞두고 지지층 결집을 염두에 둔 사업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광화문광장은 특정 정치세력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공간이 특정 메시지를 담는 상징물로 채워지는 것은 공간의 정치화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따라서 이 사업의 준공에 앞서, 정치적 의도와 추진 과정 전반에 대한 검증과 감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둘째, 절차를 무시한 ‘졸속 행정’입니다. ‘감사의 정원’은 애초 대형 태극기 게양대 계획이

[발자국통신] 이희자 선생을 응원하며(이재승)

2026년 5월 7일 212

10·29이태원참사진상규명법은 ‘기억, 추모, 애도를 받거나 할 권리’를 피해자의 권리로 명문화하였다(제3조 4호). 애도를 받을 권리나 애도할 권리의 상대방은 어떤 의무를 지는가! 에우리피데스의 <간청하는 여인들>은 이 권리의 진지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테베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아르고스의 일곱 장수들의 시신을 테베가 방치하자 전몰자의 어머니들은 아테네의 테세우스에게 유해 송환에 앞장서줄 것을 간청하였다. 요즈음의 말로 외교적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아테네와 테베 간의 평화 교섭이 결렬되자, 테세우스는 애도권의 침해(유해 방치)를 이유로 전쟁을 일으켜 시신을 탈환하였다. 그는 국가란 모름지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시전하면서 아테네의 엘레우시스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현대판 아르헨티나의 ‘5월광장 어머니들’과 이행기 정의의 실현을 보는 것 같다. 야스쿠니신사의 조선인합사 문제는 유족들이 2025년 12월 한국에서 합사 취소 소송을 제기하면서 다시 점화되었다. 이 소송의 원고는 이희자 선생이다. 이희자 선생이 두 살 때인 1944년, 부친 이사현은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종내 소식이 없었다. 1989년에 이르러서야 부친이 1945년 6월 중국 광서성 병원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유족의 동의 없이 부친이 1959년 야스쿠니신사에 무단합사되었다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2만 1천여 명의 조선인 군인·군속(군무원) 희생자들이 합사되었다. 야스쿠니가 국립묘지와 같은 묘역이 아니라 사당과 유사한 것이므로 합사는 유해가 아닌 영혼을 봉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희자 선생을 비롯하여 한국인 유족들은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몇 차례 합사 취소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일관되게 청구를 기각하였다.

[헤럴드경제]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동농문화재단과 업무협약 체결

2026년 5월 4일 210

근현대사 역사문화 가치 확산 위한 협력 기반 마련… 전시·교육·학술 등 다양한 분야 교류 확대 기대 [헤럴드경제=박종일 선임기자]서울 강북구(구청장 이순희)는 구가 (사)민족문제연구소에 위탁해 운영 중인 근현대사기념관이 지난 4월 22일 동농문화재단과 근현대사 역사문화 가치 확산 및 문화·학술 협력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동농문화재단이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를 계기로 마련됐다. 이를 통해 양 기관은 상호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근현대사 관련 전시·교육·학술 분야에서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갈 계획이다. 협약에 따라 두 기관은 ▷근현대사 관련 전시 및 교육 프로그램 공동 추진 ▷학술 및 문화행사 교류 ▷역사 자료 및 정보 공유 ▷기관 간 홍보 및 대외협력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아울러 두 기관은 정기적인 협력과 교류를 바탕으로 근현대사 학술연구 기반을 강화, 역사문화 가치 확산을 위한 협력 사업을 지속적으로 발굴·추진할 방침이다.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은 “이번 협약을 통해 근현대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학술·문화 활동을 통해 역사문화 가치 확산에 힘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16년 5월 개관(강북구 4·19로 114)한 시설로, 동학농민운동부터 4·19혁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조명하는 역사문화 공간이다. 기념관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전시와 교육을 통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하고자 상설·기획전시와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seouldream01@heraldcorp.com <2026-05-04> 헤럴드경제 ☞기사원문: 근현대사 역사문화 가치 확산 위한 협력

[JIBS 뉴스] 제주 밖 4·3 교육 ② 4줄짜리 교과서와 홍보비 16만 원

2026년 4월 28일 192

교과서 속 4·3 ‘요약본’ 수준… 일부 “폭도” 설명까지 교육청 예산 ‘초라’… 4·3 전국화 ‘헛구호’ 전락 우려 [제주 4·3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등으로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의 역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를 벗어난 4·3 교육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며 ‘전국화’라는 슬로건을 무색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3회에 걸쳐 제주 밖 ‘육지 교실’에선 어떻게 4·3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 ‘공산폭동’ 굴레 벗었지만…분량도, 내용도 아쉬움 교과서 속 4·3은 어떤 모습일까. 과거 ‘공산 폭동’으로 묘사되던 때와 비교하면 최근 교과서는 양적, 질적 부분에서 크게 개선됐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4·3이 70주년을 맞을 즈음인 2019 개정 교육과정 이후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이라는 관점이 강화됐습니다. 그러나 일부 교과서는 여전히 ‘요약본’ 수준에 머무는 실정입니다. 해냄에듀 교과서는 본문 내용을 기준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2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다룬 반면, 4·3은 본문 기준 단 4줄로 요약했습니다. 동아출판은 6월 항쟁에 3페이지를 할애했지만 4·3은 7줄을 기술하는데 그쳤습니다. 국가교육 과정에서 4·3이 독립된 항목이 아닌 정부 수립 과정의 일어난 한 가지 사건으로 묶인 구조적 한계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교육부의 ‘교육과정 대강화(간소화)’ 기조도 4·3 교육의 설자리를 좁게 만듭니다. 이는 전체 역사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되 심화 세부 내용은 교사의 자율적 선택에 맡긴다는 교육 방향성으로, 해방과 분단, 정부 수립 등 전환기적 복잡성을 가진 4·3이 교사들의 선택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JIBS 뉴스] 제주 밖 4·3 교육 ① 수학여행과 빨갱이

2026년 4월 28일 222

수학여행지서 제주 학생에 “빨갱이” 타 지역 학교에서도… 여전한 ‘낙인’ [제주 4·3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등으로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의 역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를 벗어난 4·3 교육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며 ‘전국화’라는 슬로건을 무색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3회에 걸쳐 제주 밖 ‘육지 교실’에선 어떻게 4·3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과 함께 ‘4·3의 세계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지만, 제주 밖 ‘육지 교실’의 시계는 여전히 과거의 편견에 멈춰 서 있습니다. 최근 제주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지에서 겪은 일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주지부 등에 따르면, 올해 4·3 희생자 추념일을 전후해 육지부로 수학여행을 간 제주 지역 학생들이 타 지역 고등학생들로부터 “빨갱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제주 학생을 향해 뱉은 이 말은 곧 실랑이로 번졌고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주 학생들이 4·3이라는 아픈 역사가 있어 해당 발언에 민감하다고 대응했고, 실랑이가 이어지면서 격한 말들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학교 측은 “일부 학생에게 사실관계를 파악한 결과 ‘빨갱이’라는 표현이 나온 건 확인했지만, 그 외 구체적 발언 정황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 4·3 그림책 전시회 방명록에도 ‘빨갱이’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A 교사는 몇 년 전 학생들과 4·3 관련 그림책을 만들어서 교내 전시회를 열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방명록에 ‘빨갱이’, ‘언제까지 이럴 거냐’는 식의 부정적인 글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논란으로

[오마이뉴스] 일제강점기엔 군수, 해방 후엔 도지사와 장관 역임한 친일파

2026년 4월 27일 294

제10대 부천군수 김홍식의 친일행적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지만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을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친일청산에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친일파들을 관료로 등용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이승만은 오히려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친일파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다수의 대한제국 관료들이 저항 없이 일제의 관료가 되었듯이, 1945년 8월 15일 또한 자연스럽게 친일 관료들이 대한민국 정부의 관료가 되었다. 그 누구 하나 반성하거나 사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상을 잘 나타내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친일파 김홍식(金弘植, 1901~1974)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수를 하고, 해방 이후에는 장관까지 오른 김홍식의 행적과 지금까지 부천군수로서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 행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김홍식의 일생 김홍식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1927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1932년 9월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34년 11월에는 일본 고등문관시험인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 이듬해인 1935년 10월에는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행정관료가 된 김홍식은 1939년 7월 평남 양덕군수, 1941년 3월 평남 개천군수를 거쳐 그리고 1943년 3월 부천군수가 되었다. 양덕군수로 있으면서 친일잡지인 <내선일체>를 발간하는 내선일체실천사 평안남도지사의 고문을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김홍식의 관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김홍식의 삶만 보면 관운을 타고났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고위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월까지 경기도 광공부 광공부장을

[프레시안] “경찰의 날 4월 25일로 변경해야”…이성윤 민주 최고위원 ‘재점화’

2026년 4월 27일 157

24일 민족문제연구소 관련 자료 공유…현행 10월 21일에서 경무국 창설일로 바꿔야 전북 출신의 이성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24일 “임시정부 경무국 창설일인 4월 25일을 ‘경찰의 날’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행 10월 21일(미군정 경무국 창설일)로 되어 있는 ‘경찰의 날’을 임시정부 경무국 창설일인 4월 25일로 바꿔야 한다는 그간의 주장을 재점화한 것이다. 이성윤 최고위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경찰의 날 변경’을 언급하며 민족문제연구소의 관련 자료를 공유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은 10월 21일을 경찰의 날로 지정·기념하고 있다. 현재의 경찰의 날은 1945년 미군정청 경무국이 설치된 날로 대한민국 경찰의 출발을 미군정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친일경찰은 미군정 초대 경무국장 조병옥을 앞세워 한국 경찰의 주류가 되었다. 조병옥과 친일경찰들은 칼빈소총을 앞세워 10월 대구항쟁, 제주 4·3, 여수·순천 사건 당시 무수한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자 ‘민중의 몽둥이’라는 오명을 청산하기 위한 경찰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결과 경찰청은 2019년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 경무국을 한국 경찰의 뿌리로 인정하고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구 선생을 ‘민주경찰 1호’로 명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와 관련해 임시정부 경무국 직제가 규정된 4월 25일로 ‘경찰의 날’을 바꿔야 한다는 제안이다. 경찰의 날 변경은 국무회의 의결로 가능하다. 박기홍 기자 <2026-04-25> 프레시안 ☞기사원문: “경찰의 날 4월 25일로 변경해야”…이성윤 민주 최고위원 ‘재점화’  

민족사랑 2026년 4월호

2026년 4월 25일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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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잘못된 판결 백서’의 간행을 제안한다

2026년 4월 24일 257

오심, 재심 무죄 사건들 모아 공개해야 사법부 공격 아닌 과오 반복 막으려는 것 국가·사법부 아닌 시민이 나서는 게 바람직 ‘사법의 역사’ 에 대한 오랜 침묵 깨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국가는 그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해방 이후 64년,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60년이 지나도록 친일 부역의 역사는 공식 기록으로 정리된 적이 없었다. 연구자와 시민이 십수 년을 모아온 힘으로 사전은 완성되었고, 그것은 국가 기억을 대신하는 시민 기억이 되었다. 사법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지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조봉암은 1959년 사법 살인을 당했고, 2011년에야 무죄를 돌려받았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인은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에 처형되어 훗날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긴급조치 위반자들, 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들, 이름 없는 노동자들에게 쏟아진 유죄 판결들은 하나하나 뒤집혔다. 그러나 그 판결들을 기록한 백서는 없다. 그 판결들을 내린 법관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공식 기록되지 않았다. 잘못을 뒤집은 재심 법정에서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문에서도,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한 영수증 어디에도 그 이름들은 없다. 국가와 사법부는 스스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 그렇다면 시민이 먼저 나서야 한다. 독일 – 도구는 있었으나 칼날은 무뎠다 1947년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시대 법관과 검사 16명이 재판을 받았다. “법복을 입은 자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원칙을 국제법 차원에서 처음 확립한 재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군이 주도한 외부의 심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