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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해방 전, 옛 음악이 얼마나 힙한지 아시나요” [.txt]

2025년 8월 4일 174

여기, 이 사람 ㅣ ‘동아시아 팝, 소실의 자취’ 저자 신현준·이준희 1945년 이전의 축음기 음반 공동연구 ‘아시아 팝’은 경계 넘나든 교류의 산물 “팝은 영미의 것”이라는 편견을 넘어 “음악으로 본 역사입니다. 정치는 이념의 이항 대립, 경제는 발전 논리가 중심이라면 음악에서는 인간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한된 조건에서 부족한 자원을 갖고 옛사람들이 음악으로 치열하게 놀았다는 거죠. 악기도, 공부할 책도 부족한 그때 음악인들은 노래를 만들고 대중은 재미를 위해 투쟁했다는 것, 의미를 위한 투쟁도 절박했지만 재미를 위한 투쟁도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 절박했다는 얘기죠.” (신현준 성공회대학교 사회융합학부 교수) 191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동아시아 대중음악 교류는 지금 못잖게 국제적이고 활발했다. 당시 대중가요를 일컬어 일본과 조선은 ‘유행가’, 중국·홍콩은 ‘시대곡’이라고 불렀다. 다수의 음악인들이 조선, 일본, 중국, 대만을 오가며 경계를 넘어 가로질렀다. 낮에는 불편하게 상충하던 각국의 사람들이 밤에는 ‘같은 음악인’으로 화음을 쌓아 올리며 교류했다. 최근 ‘동아시아 팝, 소실의 자취’(아시아의 미 시리즈 24, 서해문집)를 펴낸 공동 저자 신현준·이준희를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옛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의기투합해 1945년 이전 에스피 음반(SP·축음기 음반)에 기록된 소리를 공동연구했다. 그 결과 1914년부터 1945년까지 탄생하고 잊힌 음악의 자취를 발굴하면서 동아시아 사람들의 감각과 시대적 풍경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힘들었던 시대, 나라 잃은 백성들을 위로했던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서사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시사IN] 탄핵 광장의 그 깃발, 우리가 기증한 민주주의

2025년 8월 1일 343

[사람IN] 〈시사IN〉이 주목한 이 주의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 이야기에서 여운을 음미해보세요. 깃발이 차가운 공기를 가른다. 응원봉은 새카만 밤을 밝힌다. 누군가는 플루트로 혁명의 노래를 연주하고, 누군가는 열 번째 멜로디언을 분다. 그 사이를 분주히 헤치고 다니는 몇몇 사람들. 가슴팍에 ‘민주주의 기록단’이라는 명찰을 단 채 불쑥 내민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54)과 동료들은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시민들이 윤석열 탄핵 집회에 가져온 ‘시위 용품’을 모집했다. “1월부터 이 명함을 들고 나가기 시작했어요.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 시위 용품을 기증해주세요. 깃발, 응원봉, 손팻말 어떤 것이든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어요. ‘전국 눈사람 안아주기 운동본부’ 이런 깃발을 보면 저희도 궁금하잖아요(웃음).” 5월16일부터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긴급 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의 비하인드 스토리다. 과연 얼마나 들어올까, 처음의 반신반의가 무색하게 시민 518명이 2300여 개에 이르는 시위 물품을 기증했다. 현장에서 바로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기증 신청서를 쓴 시민들이 4월4일 윤석열 탄핵 선고 이후 우편으로 보내준 것이다. “파면된 날 밤에만 150명이 신청하더니, 며칠 동안 택배 박스가 우르르 쏟아졌다”라고 김 실장은 회상했다. 직접 박물관을 방문해 기증품을 전달한 이도 70명가량 된다.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는 박물관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기증받은 깃발 367개를 똑같이 본떠 만든 프린트로 건물 외벽을 감쌌다. 윤퇴청(윤석열 퇴진을 위해 행동하는 청년일동)에서 집회 포스터를 만든 ‘금손’ 활동가가

[보도자료]〈광복 80주년 기념 학술회의〉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2025년 7월 31일 303

[보도자료]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회의〉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주최 : 민족문제연구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주관 : 근현대사기념관 후원 : 재단법인 ‘역사와 책임’ 때 : 2025년 8월 8일(금) 오후 1시~6시 곳 : 강북구청 4층 대강당 광복 80주년을 맞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열들은 어떤 나라를 꿈꾸었는지를 조명해보고, 대한민국의 미래상에 대한 지혜를 모아보는 학술회의가 8월 8일 강북구청 대강당에서 열린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라는 주제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제 세력의 이념적 지향과 건국방략 그리고 국가 구상을 분석 정리하고, 나아가 이들이 해방 이후 정국 전개와 정부 수립에 미친 영향까지 가늠해본다. 불법적인 비상계엄과 극우세력의 내란 사태를 시민의 힘으로 극복한 지금, 우리는 한층 성숙한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정착을 소망하고 있다. 이때야말로 대한민국이 지향하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독립국가 건설의 이상과 지향’이라는 제목으로 기조발제를 맡았으며, 독립기념관 김은지 연구위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가보훈부 류동연 학예연구관이 조선민족혁명당,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사회주의 계열,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장이 조선건국동맹의 국가구상에 대해 발표한다. 토론에는 김민철 경희대 교수,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윤덕영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조형열 동아대 교수 등이 참여한다.

[오마이뉴스] ‘명성황후 시해 가담’… 친일파 단죄비는 왜 훼손되었을까

2025년 7월 31일 809

[김종성의 히,스토리] 일제에 충성한 ‘이두황’의 삶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1895년 10월 8일(음력 8.20), 경복궁 입구를 지킨 인물이 37세의 이두황이다. 그는 중전을 지키는 쪽이 아니라 시해하는 쪽의 경비 책임자였다. 그런 이두황을 단죄하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의 친일 단죄비와 안내판이 훼손됐다는 보도가 29일에 나왔다. 단죄비와 안내판이 찌그러져 있고 그 옆의 교통신호 제어기 받침대가 긁혀 있는 사진이 보도되고 있다. 훼손 사실이 민족문제연구소에 제보된 것은 24일이라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피 고종 임금의 전임자인 철종 때 한양에서 태어난 이두황은 24세 때인 1882년에 무과 급제를 하고 훈련원 주부 등을 지낸 뒤 31세 때인 1889년 9월에 흥해군수직을 받았다. 무과 급제 8년 만에 지금의 포항시장이 됐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왕조의 녹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벌인 일이 왕조의 중전 시해에 가담하는 만행이다. 1929년에 발행된 <고(故) 설악 이두황옹 추회록>에 실린 구라타 이츠지로의 ‘추회록(追懷錄)’이 그 상황을 증언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 이두황 편에 인용된 ‘추회록’은 “이두황은 제2대대장으로서 광화문을 경위”했다고 말한다. 이두황이 속한 곳은 훈련대였다. 이 부대에 관해 최문형(1935~2022) 한양대 명예교수의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는 “훈련대란 미국의 다이 장군이 육성한 왕실 직속 부대인 시위대와는 달리 일본군 장교가 육성한 군대”라고 설명한다. 을미사변 그날 새벽, 일본군과 조선 훈련대의 광화문 진입은 수월치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중전 민씨를 탈출시킨 일로 유명한 홍계훈이 그곳에

[KBS]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두황 단죄비 파손…경찰 수사

2025년 7월 30일 282

[KBS 전주]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두황의 친일 행각을 알리기 위해 지난 2016년 전주 기린봉 입구에 세운 단죄비가 부서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에 따르면, 일주일 전 쯤 누군가 차량으로 단죄비를 들이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찰은, 인근 CCTV 등을 통해 사고 차량을 추적 중입니다. 이두황은, 구한말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했고, 경술국치 이후 초대 전북도장관을 지냈습니다. 오중호 기자 (ozoz@kbs.co.kr) <2025-07-29>KBS ☞기사원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두황 단죄비 파손…경찰 수사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명성황후 시해 등에 가담한 이두황의 친일 행각을 알리기 위한 단죄비가 부서졌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오늘(29일) “전북 전주시 기린봉 입구에 세워진 이두황 단죄비가 파손됐다”고 밝혔습니다. 김재호 지부장은 “지난 24일 시민이 이야기해 파손된 사실을 알았다”며, “지난 22일~23일쯤 교통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고의든 과실이든 단죄비가 부서진 만큼 경찰에 신고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두황은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구한말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했습니다. 이 단죄비는 이두황 사후 100년 만인 2016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돈을 모아 이두황 묘로 올라가는 길목에 세웠습니다. 이두황의 묘를 포함한 임야 4만㎡가 아직 후손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묘소에는 설치하지 못했습니다. [사진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서윤덕 기자 <2025-07-29>KBS ☞기사원문: ‘친일 행각’ 이두황 단죄비 파손…“경찰에 신고” ※관련 기사 ☞연합뉴스: 광복 80주년 앞두고 ‘친일파 이두황’ 단죄비는 누가 파손했나 ☞연합뉴스TV: 광복절 앞두고 ‘친일파 이두황 단죄비’ 파손…”수사 의뢰” ☞노컷뉴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두황

[오마이뉴스] 이종찬 광복회장의 ‘이승만 공칠과삼’ 인식, 무엇이 문제인가

2025년 7월 29일 357

[김종성의 히,스토리]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드러내… ‘광복회장’ 직과 어울리지 않는 발언 이종찬 광복회장은 김민석 국무총리와 함께 ‘광복 8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책임을 맡고 있다. 이 위원회는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1차 회의를 열고 출범을 선언했다. 직무의 성격상, 광복 80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19일 광복회 학술강연회는 이종찬 회장이 어떤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광복회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탄신 150주년 서거 60주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바로보기 학술강연회’를 개최한 19일은 이승만이 하와이 망명 중에 사망한 1965년 7월 19일로부터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이종찬 회장이 개최한 행사는 이승만 ‘추모’ 학술대회다. 그것이 ‘이승만 추모’를 위한 행사였다는 점은 환영사 형식을 띤 이종찬 회장의 기조강연에서 나타난다. 이 회장은 약 15분간의 환영사 서두에서 “공교롭게도 오늘 마침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날”이라고 한 뒤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추모식을 한다는 것, 추모 강연회를 한다는 것이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승만 공칠과삼? 헌법에도 배치되는 말 그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는 뉴라이트 세력을 비판했다. 이승만을 국부로 신격화하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모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을 올바로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승만의 ‘공’과 ‘과’를 언급했다. 공은 7이고 과는 3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공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비록 4·19 이후에 3·15 부정선거 등

[연합뉴스] 광복 80주년 기념 ‘이상룡과 임청각’ 특별전 내달 서울서 개최

2025년 7월 29일 192

서울시-안동시 공동 주최…독립운동 발자취, 유품·’독립운동가 산실’ 생가 자료 재조명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신흥무관학교 세워 무장독립투쟁 기틀 마련 ‘노블레스 오블리주’ (서울=연합뉴스) 윤보람 기자 =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임정 2차 개헌 때 국가수반)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특별전시가 서울에서 열린다. 29일 서울시와 경북 안동시에 따르면 오는 8월 5일부터 31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811㎡)에서 광복 80주년 기념 ‘초대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 나라 위한 얼과 글’ 특별전이 개최된다. ———— <중략> ———— 올해 국무령 취임 100주년을 맞아, 안동 명문가 출신으로 사회 계몽운동과 만주 무장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이상룡 선생 관련 자료 90여점을 통해 그의 애국애족 정신과 독립투쟁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몸소 실천한 인물로 꼽힌다. 고성 이씨 장손으로 태어나 유학자로서 성장한 이상룡 선생은 의병 활동에 관여하다 좌절을 겪었다. 이후 서구 열강의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여 당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국을 위해 근대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노구임에도 가산을 정리, 일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민족 자강을 위한 자치 조직을 건설했다. 민주 서간도 지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 무장독립투쟁을 조직하고 독려했다. 1920년대엔 분열된 독립운동을 통합하고자 했던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독립을 보지

[경인일보] 가장 뜨거웠던 투쟁, 중심에 선 경기도 독립운동가들

2025년 7월 29일 225

[항일의 기억, 광복의 기쁨·(9)] 80번째의 8·15는 특별하다. 경기도는 광복 80주년인 올해 초부터 경기도 곳곳에 남은 항일의 기억들을 모으고, 광복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헌신한 80인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시대의 어둠 속 독립 빛 밝힌 ‘경기도 영웅’ 조문기·김익상 道, 80번째 8·15에 광복 헌신 80人 순차적 공개 조문기 지사, 수원 출생… 친일인명사전 편찬 만 18세 청년 부민관 폭탄 설치 행사 중 터뜨려 고양 출신 의열단원 김익상, 총독부 폭파 결심 상하이서 오성륜·이종암 등과 日육군대장 저격 80번째의 8·15는 특별하다. 경기도는 광복 80주년인 올해 초부터 경기도 곳곳에 남은 항일의 기억들을 모으고, 광복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헌신한 80인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28일 현재,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77명 소개됐다. 나라 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해 만세를 외치고 기꺼이 총칼을 들었던 평범한 민초들, 오롯이 독립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타지의 혹독함을 견뎠던 인사들이었다. 봄이 오기 직전에도 겨울 바람은 매서워, 항일의 불꽃은 광복의 기쁨을 맞기 직전까지 타올랐다. 도는 마지막 의열 투쟁으로 기록된 ‘부민관 의거’를 기념, 지난 24일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 34명을 공개한 바 있다. 의거에 나섰던 인사 중 애국지사 조문기는 경기도 수원 출생이다. 대일항쟁기, 주요 의열 투쟁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 역시 고양 출생의 의열단원 김익상이 주도한 것이다. ■ 부민관 의거와 조문기 현재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쓰이고 있는 부민관은 대일항쟁기 당시 경기도

민족사랑 2025년 7월호

2025년 7월 29일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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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은 테러가 아냐”

2025년 7월 28일 638

[짬] ‘국내 유일 의열단 전문 연구자’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 “테러리즘은 원래 권력자나 국가 같은 강자가 누군가를 발밑에 두고 지배하려고 공포심을 불어넣는 전략입니다. 테러란 말의 본래 뜻이 공포심이잖아요. 테러는 약자의 전략이 될 수 없어요.” 1980년대부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한 갈래인 의열투쟁을 연구해온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말이다. 의열투쟁은 일제 식민 통치에 맞서 개인이나 소집단 비밀결사가 뜻을 모아 일제 관공서에 폭탄을 던지거나 일제 고관을 암살하는 방식의 독립운동을 말한다. 약산 김원봉(1898~1958) 등이 1919년 11월 만주에서 결성한 ‘의열단’이 대표적인 의열투쟁 단체이다. 1994년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의열단의 민족운동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국내 유일의 의열단 전문 학자’이다. 의열단의 처음과 끝을 정리한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1997)을 비롯해 ‘의열투쟁 1-1920년대’(2009), ‘혁명과 의열: 한국독립운동의 내면’(2010) 등 의열단 관련 여러 저서를 냈다. “2001년 알카에다가 저지른 9·11 이후 우리 사회에 테러란 말이 일상화하면서 모든 폭력을 다 테러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저항운동 세력의 폭력도요. 9·11 이후 학계에서도 의열투쟁 대신 테러투쟁, 테러활동이라는 용어로 기술하는 논저가 보입니다. 연구자들도 자기 세대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을 테러리즘과 등치시킬 수 없다고 했다.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도 아니고요. 의열투쟁은 약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면서 항의하고 분노를 표출한 행위이죠.” 최근 ‘독립운동의 역사사회학’(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