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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국인 영령 2만 1000명, 야스쿠니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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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강화도 약탈자를 태평양전쟁 희생자와 융합시키는 야스쿠니 신사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서 징용 피해자 유족,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제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야스쿠니 신사에서 신으로 추앙되는 약 246만 6000명 중에서 2만 1000명 정도는 한국인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유족에 대한 통지나 동의 요청도 없이 한국인 강제징병 희생자들을 자국 신사의 신으로 만들어놓고 합동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같은 합사(合祀) 조치를 취소하라는 소송이 지난 23일 한국인 유족들에 의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됐다. 일본 법원에는 2001년부터 합사 취소소송이 제기됐지만, 한국 법원에 제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2012년과 2018년에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한 일이 한일 양국에 미친 파장을 감안하면, 합사 피해자 유족들이 한국에서 승소할 경우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국면이 조성되리라 전망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1868년 이후에 발발한 각종 전쟁에서 일왕(천황)을 위해 전사한 영령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246만의 대부분인 약 213만 4000명은 이른바 대동아전쟁인 태평양전쟁에서 배출됐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전환된 것은 메이지유신(1868) 직후인 1870년대다. 이런 전환이 1874년 대만 출병을 계기로 본격화됐고, 야스쿠니 신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침략 과정에서 배출됐다. 그래서 이 신사의 신으로 추앙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에 헌신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일제 침략으로 수난을 겪다가 그곳의 신으로 억류된 한국인과 유족들에게 중대한 모욕이다.

67세 때인 1985년 8월 15일 현직 일본 총리 최초로 야스쿠니를 참배해 국제적 논란을 일으킨 나카소네 야스히로(1918~2019)는 86세 때인 2004년 2월 15일 아사히TV에 출연해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에서 떼어내 분리 제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2002년 10월 5일 이후의 제2차 북핵 위기와 2003년 8월 27일 이후의 6자회담(남북·미중러일) 국면으로 인해 한미일은 물론이고 한중일의 공조도 중요할 때였다. 나카소네의 A급 전범 분사론(分祀論)은 야스쿠니 참배로 인한 한중일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인 희생자와 후손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논리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분사를 단호히 반대했다. 신사 사무소는 2004년 3월 3일의 입장문에서 ‘246만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신격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중 일부를 떼어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46만에 대해 개별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 신사의 입장이다. 246만이 화학적으로 융합돼 하나의 신이 돼 있는 상태에서 합동 제사를 받는다는 관념이 이 신사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논리는 야스쿠니의 신으로 억류돼 있는 한국인 희생자와 그 후손들을 더욱 불명예스럽게 만든다.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은 한국을 상대로도 전개됐다. 야스쿠니신사는 한국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도 신으로 받들고 있다. 운요호사건(운양호사건)·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도 그곳의 신이 되어 있다.

1874년의 대만 출병과 1879년의 유구왕국(오키나와) 강점의 중간 시점인 1875년에 발생한 운요호사건은 강화도사건으로도 불린다. 이는 일본이 조선 시장을 개방시킬 목적으로 한강 입구인 강화도 앞바다에서 함포를 쏘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이는 일본이 대만섬과 오키나와섬을 연결하는 도련선(島鏈線)에 대한 영향력을 대(對)조선 영향력과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한일민족문제연구> 2013년 제24호에 실린 김광열 광운대 교수와 송경섭 대학원생의 논문인 ‘개항기 조선에서 사망한 일본군의 야스쿠니신사 합사’는 일본이 운요호사건 사망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여준다. 논문은 “일본 해군이 영종도를 상륙하여 동제포(銅製砲) 21문을 비롯한 약탈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등수부(一等水夫) 마츠무라가 부상을 입었다”고 한 뒤, 그 뒤에 일본 해군이 정부에 제출한 공문을 이렇게 소개한다.

야마구치현 사족(士族) 일등수부 마츠무라
위 사람은 올해 9월 중 운요함이 조선 강화도에서 포격을 받았을 때 분발하여 싸웠지만, 중상을 입고 함대로 돌아와 같은 달 22일 사망함. 실로 위로하기에 마땅함으로, 오는 1876년 1월 초혼사 예제(例祭) 시에 합사 준비할 것을 청함.

1869년 설립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한자명은 초혼사였다. 현재 명칭으로 바뀐 것은 1879년이다. 일본 정부는 운요호사건 가해자인 마츠무라를 위와 같이 피해자로 둔갑시켜 초혼사 정례제사 때 합사시켰다.

야스쿠니 합사자 246만 중의 1만 3000 이상은 청일전쟁 사망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주요 무대는 조선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주로 싸운 대상은 청나라 군대만이 아니었다. 한때 약 20만 병력을 기록했던 동학혁명군도 주요 상대였다.

그래서 1만 3000 이상이라는 숫자에는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사망한 사람들도 포함된다. 낫이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농민군과의 싸움에서 자국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일본의 위신에 유리하지 않다. 합사자 일부가 동학전쟁 사망자인 사실을 야스쿠니신사가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데는 그런 사정도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 논문에 따르면, 1894년 9월 24일~11월 22일에는 일본군 및 군속 9명(일본군 통계)이 동학군과의 대결 과정에서 사망했다. 11월부터 동학군과의 전투를 주도한 후비보병 제19대대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부대에서는 42명이 죽었다.

당시 일본군에서는 전사자뿐 아니라 병사자도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일본은 전사자만 야스쿠니에 합사하던 종래의 조치를 바꿨다. 위 논문은 “동학농민군을 토비·폭도로 취급하며 살육을 자행했던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전·병사자들도 (합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라며 “일본 군부는 조선에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청과 전투를 자행했던 일본군의 전·병사자들을 위해 야스쿠니신사 제25회 임시대제를 계기로 합사 기준을 바꾸었”다고 기술한다.

한국 정부의 의무도 명확히 밝힐 필요

▲태평양전쟁 전범을 모신 야스쿠니 신사에 조선인 2만 1000명이 합사돼 있다.ⓒ김종훈

일본은 조선 침략 과정에서 사망한 군인과 군속을 야스쿠니에 합사했다. 그런 뒤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됐다가 생명을 잃은 한국인 희생자들의 영령을 그 일본 영령들과 융합시켜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내는 관념적 조작을 벌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 희생자들은 강화도를 포격·약탈하고 동학군을 학살한 일본 가해자들과 함께 관념적으로 하나의 신을 구성하게 됐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미화할 뿐 아니라 향후 한일 관계도 어둡게 만든다. 한국을 침략하다가 전사 혹은 병사한 일본인들이 야스쿠니의 신으로 추앙되는 것은 일본 극우세력을 고무시킬 뿐 아니라 일본의 미래세대가 한국 침략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한국인 강제징병 희생자와 일제 침략전쟁 가담자들을 하나의 신으로 융합시키는 상징적 조치는 강제징병이 전쟁범죄가 아니라 애국행위였다는 잘못된 관념을 일본 사회에 퍼트린다. 이는 강제징병·강제징용·위안부를 포함한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전될 수 없는 한일 관계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인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명예를 심각히 훼손한다.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의 영령이 일본 가해자들의 영혼과 합체됐다는 논리는 이들에게 추가적인 가해가 된다.

한국 법원은 유족들이 신청한 이번 소송에서 일본 정부 및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합사 취소를 명령할 뿐 아니라 한국 정부의 의무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정부 차원의 노력이 없으면 설령 승소했다 해도 이 문제가 진전되기 힘들므로. 한국 정부의 의무가 무엇인가도 명쾌하게 밝혀줘야 한다. 일본만을 상대로 하는 판결은 공허한 외침이 되기 쉽다.

김종성 기자

<2025-12-2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한국인 영령 2만 1000명, 야스쿠니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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