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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정판사위폐사건 재심(2023재고합12) 최종선고 결과에 대한 입장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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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회장 손문호)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고 학암 이관술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7월, 위조지폐 주동자로 누명을 쓴 소위 “정판사위폐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에 맞춰 공식입장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관술의 외손녀로 재심을 신청한 손옥희가 선고 결과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자 합니다.

학암 이관술은 울산 범서 입암마을이 고향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 한 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다 1930년 경성학생독립운동에 나선 제자들을 보호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33년 경성반제국주의 동맹사건으로 옥고를 겪었고, 1934년 이후 경성트로이카에서 지도부를 맡았고 1939년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해방 직전까지 일제에 항거했다.

이관술은 고문왕 노덕술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불사조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해방 후 첫 정치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위에 오를 만큼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46년 누명을 뒤집어쓴 후 무기형을 받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대전 골령골에서 학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법원은 2015년 이관술이 불법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한 바 있습니다.

이번 정판사위폐사건 재심(2023재고합12)은 재심의 피고인 이관술 뿐 아니라 항일혁명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지난 12월 15일 검찰이 무죄를 구형했고 재심 재판부(제21형사부)가 무죄를 선고해 확정이 된 것과 같습니다.

별첨 1) 정판사위폐사건 재심선고 공식입장문과 유족소회

[입장문]
“역사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정판사위폐사건 무죄 선고를 뜨겁게 환영한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는 오늘 대한민국 사법부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데 대해 벅찬 마음으로 환영하며, 오랜 세월 억눌려 왔던 정의가 마침내 역사 앞에 바로 섰음을 온 국민과 함께 선언한다.

이번 무죄 선고는 단순히 1946년에 발생한 일개 형사 사건 재판을 바로잡은 판결이 아니다. 이는 해방 직후 국가 권력이 정치적 목적 아래 행정, 군대, 경찰, 사법 기구를 총동원하여 허구의 범죄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역사적 과오를 79년 만에 대한민국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끼운 역사적 판결이다.

늦었지만 반드시 내려졌어야 할 정의의 선언이며, 한국 현대사와 사법사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다. 우리는 이번 재심 과정에서 엄격한 증거재판주의 원칙과 법리에 따라 무죄를 구형한 검찰의 판단을 높이 평가한다. 이는 검찰이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역사와 진실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법리적으로 쉽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해 법과 양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결단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오늘의 판결은 사법부가 과거의 불의에 침묵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역사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오늘 무죄를 선고받은 이관술 선생은 일제강점기, 특히 일제가 민족말살통치와 전시총동원체제를 통해 우리 민족을 가장 가혹하게 탄압하던 1930~40년대에, 국내에서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몇 안 되는 항일혁명가이다.

그는 울산 지역 대지주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서울 및 동경에서 유학한 당대 최고 수준의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얼마든지 편안하고 유복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탄압받는 학생과 착취당하는 노동자, 수탈당하는 농민과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섰으며, 반복되는 체포, 가혹한 고문과 수감 생활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수차례 탈출을 감행하여 일제 경찰을 농락하면서 해방을 맞는 그날까지 전국을 돌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그 자체였다. 그 결과 이관술 선생은 해방 직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여운형,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새로 건국될 나라를 이끌 지도자’로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국민적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아무런 실체도 없는, 이른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경찰의 불법 구금 및 가혹한 고문에 따른 허위 자백과 판검사의 조작으로 날조된 이 사건에서 정치적 희생양으로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이관술 선생은 아무런 증거도 정당한 절차도 없이 치러진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로서의 명예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고, 국가 경제를 파괴한 파렴치범이라는 낙인과 함께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이관술 선생은 정판사 위폐 사건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재산을 기부해 반곡초등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해방된 조국으로부터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채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억울함보다 아이들의 교육과 공동체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던 그의 행동은 이관술 선생의 삶이 어떤 가치 위에 서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며, 오늘의 무죄 선고가 단지 법률적 판단을 넘어 도덕적·역사적 평가를 동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이관술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가 권력의 불법적인 처형 명령에 따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이 처형이 불법이었음은 이미 진실화해위원회와 대법원에 의해 확정되었다. 해방된 조국이 독립운동가의 명예와 자유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앗아갔던 것이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다. 오늘의 무죄 선고 판결은 광복 80년의 역사를 맞는 대한민국이 과거의 국가 폭력과 사법적 과오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이다. 이는 단지 불의한 과거와 단절하겠다는 ‘반성문’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의 토대를 다시 세워 정의로운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문’이다. 이에 이관술기념사업회는 정부에 강력히 촉구한다. 정부는 이관술 선생의 항일투쟁과 희생, 감옥 안에서도 이어진 교육과 공동체를 향한 헌신, 그리고 오늘 사법부가 선고한 무죄의 의미를 엄중히 받아들여, 이관술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와 학계는 오늘의 무죄 선언을 역사 교육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국가 폭력과 사법이 결합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면교사 사례이다. 이 사건의 진실은 역사 교과서에 온전히 기록되어야 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국가 폭력과 사법의 부역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의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관술 선생의 이름을 되찾는 일은 곧 대한민국이 잃어버린 정의의 한 조각을 되찾는 일이다. 이관술기념사업회는 광복 80주년의 역사적 순간에 내려진 이번 무죄 선고가, 대한민국이 인권을 보호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법치 국가’이자 독립운동가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2025년 12월 22일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이관술 유족(재심 신청인) 소회]
조선정판사사건 재심 – 이관술 할아버지의 무죄판결을 받고

저는 조선정판사사건의 피의자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 손옥희입니다. 흔히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사건 발생 80년이 지나서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 엄청 기쁘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이데올로기 전쟁의 생채기로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얹어두고 집안은 물론 영혼까지 풍비박산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을 말 한 마디 못하고 견디어 살아오신 어머니께, 저는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문민정부 이후 죄 없는 할아버지의 신원을 밝혀내야 한다고 30여년을 전국으로 다녔습니다.

뜻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15년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국제지역대학원에서 “미군정기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박사학위 받으신 임성욱 박사입니다. 저는 그 논문을 읽고 ‘참으로 완전범죄는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군정이 수사기록마저 없애버린 사건을 완벽하게 복원해놓았습니다. 논문 발표 후 10년이 지났지만 학계에서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어 참으로 놀랍고 힘겨운 작업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학계가 인정하는 논문의 내용을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먼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서훈을 신청하였지만 역시나 ‘해방 후의 행적’이라는 답변이 날아왔습니다. 제1기 과거사진실화해위원에서도 이렇다 할 답변조차 받지 못하였던 것이라, 제2기 진화위에 ‘조선정판사사건’과 ‘독립운동 건’을 나누어 조사신청을 했으나 2건 모두 ‘조사중지결정’을 통보받았습니다. 국가기관이 힘없는 서민에게 이렇게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서 화가 났습니다. 진화위의 결정에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담당조사관과 면담을 해보았으나,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2023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신청했던 재심이 진행되어 2년 5개월이 지난 오늘, ‘이관술은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한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던 수많은 선생님들과 지나간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은 이 사건이야말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최대의 모욕과 박해를 하고 경제파괴범으로 몰아부쳐도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정의를 구하고 과거의 역사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역사를 근간으로 하는 단체와 개개인의 노력 덕분입니다. 2023년 11월<정판사조작사건>을 출간하시고 고인이 되신 김상구 선생께도 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특히 바쁘신 가운데 쉽지 않은 사건을 흔쾌히 맡아주신 신윤경, 장경욱 변호사님께 존경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아울러 재심을 맡으신 재판부와 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미군정 기간 한국의 정치, 경제, 언론, 사법, 행정, 등등에 걸쳐 남긴 뼈아픈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내는 큰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주4.3항쟁, 여순항쟁, 대구10월 항쟁 등 관련된 또 다른 사건들의 진실을 밝히는데 등불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별첨 2)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경과
1. 재심을 신청한 이유
1) 독립운동가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하여

항일혁명가 이관술은 미군정 기간인 1946년 7월에 정판사위폐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체포됐고, 한국전쟁기간 국군 CIC(특임부대)에 의해 불법처형 당해 자신이 헌신했던 조국으로 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다행히 2004년-2005년 안재성이 쓴 『경성트로이카』와『이관술 평전』이 출판되면서 이관술의 독립운동이 세상에 알려졌고, 2015년 임성욱 박사의 학위논문『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와 대중서 발간으로 명예회복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관술의 유족들은 2010년 1차 과거사위원회 신청한 불법처형 진상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법정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이 이관술이 한국전쟁 초기 대전형무소에서 수감 중 끌려 나가 골령골에서 총살당한 것을 불법처형이라고 최종 판결했습니다. 이것이 명예회복을 위한 법정 투쟁의 첫 단추였습니다.
하지만 2019년 보훈부에 신청한 독립운동가 서훈신청은 심사에서 거절 통보를 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맞지만 해방 후 행적이 문제라는 답변이었습니다. 따라서 ‘정판사위폐사건’이 검경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판단,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 위폐범 누명을 벗기지 못하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재심

보훈부의 독립운동 유공자 심사결과에 실망한 유족은 2020년에 새롭게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두 가지 조사신청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관술의 독립운동을 확인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정판사사건의 조작된 재판을 조사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두 가지 모두 제대로 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정판사조작사건 조사는 개시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독립운동 조사도 2025년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미결로 마무리했습니다. 2기 출범 초기부터 위원회 위원 선임 등 각종 마찰이 있었던 영향 뿐 아니라 윤석열 정권으로 바뀐 후 진상조사의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법원에 재심을 신청해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을 받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심을 접수한 것은 2023년 7월 4일이었고, 동화 법무법인의 신윤경 변호사와 장경욱 변호가 신청인 유족 손옥희(이관술의 외손녀)를 대리했습니다.

2.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진행경과
❶ 1차 심문 – 2024.07.05 10:15

재심 결정을 위한 첫 번째 심문이 열린 것은 2024년 7월 5일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서울중앙지법 제21 형사부였고 허경무 판사가 주심이었습니다. 재심 신청 접수 후 1년 만에 열린 첫 심문에는 이관술의 유족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기념단체 대표와 회원들이 다수 방청하며 법정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날 재판장은 심문 취지를 설명하면서 “야만의 시대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라는 말로 신문을 시작했다. 청구인인 유족 뿐 아니라 방청한 이들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 말이었습니다. 이후 판사는 재심 사유 증명에 대해 추가 자료를 바탕으로 2차 심문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❷ 2차 심문 – 2024.08.13 10:20

2차 심문은 매우 짧게 끝났습니다. 2차 심문의 핵심은 미군정 기간 판결에 대해 재심청구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❸ 3차 심문 – 2024.09.10 10:30

3차 신문에서 재판부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재심을 하려면 과거 공판기록이 충분하게 있어야 하는데 판결문과 상고기각결정서를 빼면 상세한 공판자료(검찰조서 등)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심문을 종결하고 차기 심문일에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❹ 4차 심문 – 2025.08.26 10:00

3차 심문 이후 12월 3일 내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국회 탄핵과 헌법재판소 파면결정 후에도 심문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4차 심문이 11개월 말에 열렸고 이현복 판사를 중심으로 바뀐 재판부는 마지막 심문에서 지난 심문 과정 전체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10월 이전에 재심개시 여부를 확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❺ 재심개시 확정 – 2025.10.13

재심개시는 10월 13일에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정문을 송달받기 전 법률신문을 통해 재판부가 재심개시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핵심은 당시 사법경찰관들이 조선형사령이 정한 사법경찰관의 유치 기간 10일(제13조 제1항)을 초과해 이관술을 38일 동안 불법 구금했고, 다른 공동 피고인들도 각각 60일 이상 불법 구금했다는 범죄사실을 명확히 확인해줬습니다. 그리고 미군정기 판결을 대한민국 법원이 사법 심사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고, 검찰이 주장한 공소시효 말소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❻ 재심 1차 공판 – 2025.11.11 10:40

재심 1차 공판에서 검찰의 이관술의 유죄를 증명할 자료를 단 한 건도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인은 앞선 심문 때와 마찬가지로 각종 자료를 무죄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이후 재판부는 11월 26일에 최종변론 기일로 지정했습니다.

❼ 재심 2차 공판 – 2025.11.16 10:00

재심 2차 공판은 원래 검사 구형과 최후 변론이 진행되어야 했지만 검찰은 자료조사를 위해 한 차례 기일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 재판부는 고심을 전제로 12월 15일을 최종변론 기일로 재 지정하면서 12월 22일 선고기일을 함께 지정했습니다.

❽ 재심 3차 공판 – 2025.12.15 11:00

재심 3차 공판이자 최종 변론 기일에 검찰은 이관술에게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봤지만 이관술의 유죄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그리고 변호인은 최종 변론을 통해 형식적인 무죄가 아니라 정판사위폐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무죄 선고를 요청했습니다. 아울러 신청인 손옥희는 법정에서 여러차례 밝힌 바대로 외할아버지 이관술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유가족이 겪어왔던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정의롭게 역사를 바로 세워주길 바라는 최후진술을 했습니다.

3. 재심 재판부의 12월 22일 최종 선고
정판사위폐사건 재심에서 검찰이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이는 재심개시를 결정한 재판부역시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높으며, 사실상 항소 없이 재심 1심에서 끝이 날 것으로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신청인 손옥희를 비롯해 그동안 모든 심문과 공판에 방청했던 이들은 12월 22일 최종선고에서 무죄라는 뜻깊은 결과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1946년 재판 당시에도 검경이 조작한 증거와 불법고문으로 얻은 자백으로 큰 파문이 있었습니다. 이번 재심의 무죄선고는 79년에 벌어진 사법역사의 과오와 함께 해방 후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는 너무도 중요한 출발이 되었습니다.

별첨3) 학암 이관술 (1902-1950) 선생 연보(年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시절

1902년 4월 25일 출생 – 1950년 7월 3일 운명

부터 까지 활동지
(거주지)
학력, 경력, 독립운동사항
1909   1911   울산 범서면 입암마을 사립 입신학교
1916 5 1917 6 울산읍 울산공립간이농헙학교
1923 3 1926 2 경성부 종로 사립 중동학교
1926 3 1929 2 일본 동경 동경고등사범학교(문과반)
1929 3 1933 4 경성부 종로 동덕여자고등학교보통학교 교사
1932 4 1933 1 경성부 조선반제국주의동맹 경성지방준비위원회 활동
1933 1 1934 4 경성부 경성반제동맹 체포 서대문형무소 수감 후 가석방
(징역2년 집행유예 4년)
1934 10 1935 3 경성부 이재유와 첫만남, 경성트로이카 2기 지도부
1935 3 1936 12 경기 양주군 노해면 조선공산당경성준비그룹 지도부
이재유 체포 후 수배 상태에서 활동
1937 7     경성부, 여의도 수배상태에서 경성 잠입해 조직재건 중
여의도에서 체포당했지만 극적 탈출
1937 8 1938 12 경성부, 대전, 대구 등 전국을 돌며 항일혁명조직 재건활동
1938 12 1941 1 경성부, 함흥, 청진 등 경성콤그룹 결성.
이후 함경북도에서 노조, 무장세력 규합
1941 1 1943 12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경성콤그룹사건 대검거 때 수배 6년만에
체포당한 후 고문수사, 형무소 수감
1943 12 1944 2 울산 범서면 경보석 가출옥, 고향 범서면 입암마을에서 탈출
1944 2 1945 8 전국 변장을 한 후 전국을 돌며 지하 항일운동
1945 9       건국준비위원회 임시내각 선전부장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및 감사위원
1945 12       잡지 <선구> 정치지도자 여론조사 5위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순
1946 7     경성부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체포 후 무기징역
1947 4     경성부 대전형무소 대전형무소 이감 돼 복역
1950 7     대전 산내면 골령골 한국전쟁 발발 후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불법처형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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