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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202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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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소개] 『역사와 책임』 제17호
『역사와 책임』 17호 표지, 여는글, 차례(PDF) <다운로드> 바로가기 >>>☞ [도서구매] 여는글 11월 말 ‘민주화운동기념관’이 개관한 후 ‘폭력과 치유’ 수강생들과 함께 다녀왔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념관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거친 내용들이 권력에 의해 부정되는 등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생겼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견학을 결정하기까지 불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불편한 마음은 견학을 하고나서 풀리기보다는 오히려 더 커져버렸다. 불편함의 정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기념관을 대표하는 이름 때문이었다. 기념관의 원래 이름, 아니 유족과 시민단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문가들이 모여 합의한 이름은 ‘민주인권기념관’이었다. 매우 당연한 이름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폭력을 노골적이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공간이다. 여기서 수많은 활동가와 시민들이 간첩으로 빨갱이로 ‘조작’되었다. ‘조작’은 벌거벗은 폭력과 고문의 힘이었다. 그 어떤 강인한 육체와 정신도 이 폭력 앞에서 허물어졌다. 이 공간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못했다. 인간의 권리란 법전 속에나 있을법한 저 너머 세계의 사치였다. 말 그대로 인권이 완전히 부정된 공간이었다. 그것도 국가의 이름으로. 따라서 새로운 공간은 마땅히 인권을 전면에 내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 취임한 이재오 이사장은 이름을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바꾸고 공동운영위원회를 폐기했다. 권력의 힘으로 공간의 상징성을 거세하고 민주적 절차와 숙의를 거쳐 만든 민관 공동기구를 폐지한 것이다. 독재정권의 어두운 역사와 이를 극복한 민주주의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식의 논리를 동원해 개명을 합리화했다. 인권 침해의 현장과 이를 극복한 영광스런 운동의
[항일혁명가기념단체연합] 이관술 무죄 확정 이후의 언론보도 모음
[무죄확정 언론보도] https://actnow.do/이관술무죄 시사인 79년 만의 무죄, ‘이관술과 정판사 사건’의 진실 (1.22.) 한국일보 [지평선] 조선정판사 위폐사건과 검사 (12.23.) 울산제일일보 79년만에 벗겨진 이관술의 누명 (12.25.) 인천일보 [비전 동서남북] 75년 만에 벗는 누명 )12.25.) 오마이뉴스 누명 벗은 이관술 고향 울산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목소리 (12.26.) 울산제일일보 “‘통화위조혐의 재심 무죄’ 이관술 선생 명예회복 신속 나서야” (12.28.) 금강일보 [금강칼럼] 79년 만의 신원(伸冤) (12.30.) 프레시안 정의당 “정판사 위폐 사건, 故이관술 ‘재심 무죄’ 환영” (12.31.) 한겨레 역사정의 바로 세운 이관술 선생 무죄 선고 [왜냐면] (1.2.) 중앙일보 한순간에 위폐범 몰린 독립운동가…79년 만의 명예회복 (1.3.) 충청매일 [최상명의 제민지산(制民之産)]이관술 선생 79년 만의 무죄, ‘진실이 곧 국익이다’ (1.5.) 오마이뉴스 12만 장 위조? 79년 만에 드러난 ‘위폐사건’의 진실 (1.18.)
[서울&] 식민지역사박물관 대학생 인턴 작은박물관 스탬프투어 참여
식민지역사박물관(용산구 청파로 47)은 지난 1월13일 박물관에서 활동 중인 대학생 인턴 5명이 작은박물관 스탬프투어 일정에 참여해 근현대사기념관에 이어 전태일기념관까지 둘러봤다고 밝혔다. 작은박물관 스탬프투어는 근현대사기념관 △김근태기념도서관 △문익환 통일의 집 △박종철센터 △식민지역사박물관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이한열기념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등 8개 기관을 방문해 스탬프 인증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국세현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 부팀장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역사정의 실현을 위한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역사박물관으로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단체, 독립운동계, 학계가 중심이 되어 2011년부터 건립을 추진해 왔고 해외동포를 포함한 수많은 시민의 모금과 자료 기증에 힘입어 2018년 8월 용산구 청파동에 개관했다”며 “매년 여름과 겨울 학생인턴을 운영하는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에 와서 배우고 일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고 배움 중 하나가 작은박물관 스탬프투어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전태일기념관에서 만난 한 학생은 “전태일 열사가 남긴 사랑과 연대의 실천이 우리 노동권의 토대가 됐다. 그가 꿈꿨던 세상을 위해 내가 선 자리에서 작은 연대를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한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은 “전태일기념관의 비정규 노동자 기획전시를 보고 나 역시 현재 플랫폼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서 깊은 공감과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은 “버스 파업으로 이동이 어려웠다. 이는 단순한 이동의 불편을 넘어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 조건을 둘러싼 현실을 체감했다. 노동이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기반임에도 노동자의 권리는 여전히 투쟁을 통해서만 가시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했다. 이동구 기자 donggu@hani.co.kr <2026-01-22> 서울& ☞기사원문: 식민지역사박물관 대학생 인턴
[경향신문] ⑩순종 경호에서 김원봉 군자금 전달까지···3·1절 세상 떠난 독립운동가 배만두
“고성의 만세운동은 처음 이주현·박진택·배만두·이상은·김상옥에 의해 (1919년) 3월 17일 단행하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비밀이 누설되고 배만두가 붙잡히면서 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사연구소의 ‘배만두’에 관한 공식 기록은 이게 다다. 국가보훈처에서도 배만두는 ‘열거 인물 중 한 명’으로만 나온다. 경남 고성 이외 지역에선 무명에 가까운 이 독립운동가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10대 초반 고성교회(1908년 설립)를 다녔고, 10대 중반 고종, 순종을 경호했고, 10대 후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생애엔 신흥무관학교,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독립당 같은 단체가 나온다. 3·1만세운동에서 자유시참변, 제헌의회 선거 같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도 관련됐다. 김구, 김원봉, 이범석, 지청천(이청천)도 배만두의 삶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여러 기록을 모아 정리한 ‘로정 배만두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하기호, 경남향토사총서 제20집, 2010) 등을 참고했다. 큰손자인 배원열을 인터뷰해 보완했다. 배만두는 1896년 고성 하이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다. 1908년 설립된 고성 교회에도 다녔다. “큰 세상을 보러 가겠다”며 1914년쯤 서울로 가 YMCA 야학에서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 들어간 곳이 조선보병대(창덕궁수비대)다. 순종 호위 업무를 맡았다. 배원열은 “할아버지는 거기서 3년을 보냈다. (축소, 해산 과정에서 대원들이) 일제 헌병대나 경찰, 교도관 등으로 재취업했다. 출세하고 싶은 사람은 헌병대로 갔다. 할아버지는 ‘아이고, 나는 안 하련다’ 하고 고향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1919년 배만두는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과 전국 각지의 3·1만세운동 소식을 듣게 된다. 3월 15일 고성읍 덕선리 선동마을의 철성의숙 교장 박진완
[아시아경제] 정부, 조세이탄광 후속 조치… 매몰 위치 등 확인 추진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현장 분석 등 추진 한일정상, 수습 유골 신원 확인 협력 의지 “현장 안전 여부 등 확인하기 위한 조치” 일각선 공동조사 요구… “조속 협의 필요” 한일 정상의 일본 조세이탄광 유골 수습 합의 직후 정부가 후속 조치에 돌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지만 양국 DNA 감정을 비롯한 추가 실무 협의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19일 정부부처 등에 따르면 정부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최근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현장과 희생자의 매몰 위치 등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조세이탄광은 일본 혼슈 서부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해저 탄광이다. 1942년 2월 3일 갱도 누수로 시작된 수몰 사고로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 등 183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수습은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진행했다. 이 단체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유골 수습을 위한 잠수 조사를 추진했고 지난해 8월 두개골을 포함한 인골 4점을 해저에서 발견했다. 유해 신원 확인은 더뎠지만 지난 13일 한일 두 정상은 회담을 통해 이 유골의 DNA 감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유골 DNA가 한국 유족과 연관성이 있는지 전문 업체에 감정을 의뢰하고 일부는 한국 업체에 위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도 후속 조치에 나섰다. 희생자의 매몰 위치와 해저 갱도 내부 구조 등을 별도
[오마이뉴스] 독립기념관 이사회, 김형석 관장 해임결의안 의결
감사 결과, 14건의 비위 사실 적발… 독립기념관 이사 10명 김형석 해임안 찬성 역사 인식 왜곡 논란으로 비판 받아온 김형석 독립기념관 관장에 대한 해임안이 의결됐다. 독립기념관 이사회는 19일 오후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누리관에서 이사회를 열고 김형석 관장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의결했다. 12명의 이사가 참석해 10명이 해임안에 찬성했다. 이로써 보훈부 장관의 제청으로 이재명 대통령이 김 관장을 해임하는 절차가 남게 됐다. 앞서 보훈부는 지난해 착수한 감사를 통해 김형석 관장의 독립기념관 사적 유용과 법인 카드 사적 결제 문제 등 14개 비위 사실을 적발했다. 지난 12일 김형석 관장이 제기한 감사 결과에 대한 이의 신청이 기각됐다. 이날 독립기념관 이사회의 해임 결의안 의결은 보훈부 감사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독립기념관 이사회에 더불어민주당 국회 추천 몫으로 참여한 김용만·문진석·송옥주 의원은 이날 독립기념관 이사회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문진석 의원은 “지난 2024년 8월 김형석 관장이 임면된지 1년 5개월 만에 해임이 결정됐다. 왜곡된 역사 인식을 가진 독립기념관장으로부터 독립기념관을 국민들에게 돌려 드린 날”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독립기념관장에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김용만 의원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행정 절차를 점검하도록 하겠다. 보훈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해임 제청을 하는 과정이 남았다. (김형석 관장 해임까지는) 2~3주 정도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독립지사 후손들의 ‘김형석 관장 퇴진 농성’도 당분간 계속될
[민들레]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
아직도 바로 잡지 못한 우리 국군의 역사 80주년 맞은 국방경비대, 국군 모체 아니야 명칭부터 정체성 논란, 업무 한계도 불명확해 누리집 의하면 육군이 해·공군보다 늦게 출발 부승찬 “국군조직법에 광복군 계승 명시해야” 대한민국 육군은 누리집(인터넷 홈페이지) 연혁의 첫머리에 “해방 후 미 군정하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칭되어 국군에 편입되었다”고 밝혀 놓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국방경비대’를 표제어로 올려 “1946년 1월 창설한 우리나라의 군대. 오늘날의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설명을 달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육군박물관 앞과 종합경기장 입구에는 각각 ‘육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창설지’ 표석과 ‘국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1연대 창설기념비’가 서 있다. 이에 따르면 이틀 전 15일이 육군, 혹은 국군의 모체의 탄생 80주년 기념일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렇다 할 행사를 치르지 않았다. 국방부 산하 국방홍보원이 발행하는 국방일보가 남조선국방경비대와 함께 출범한 제1연대의 후신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의 창설 80년 역사를 1월13일 소개한 것이 고작이었다. 국방경비대가 육군(국군)의 모체라면 그 창설일은 창군일이나 다름없을 만큼 중요할 텐데 왜 군은 이날을 기념하지 않는 것일까. 국방경비대는 과연 어떤 조직이기에 국군의 모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미 군정 들어서자마자 광복군 등 모든 군사단체 해산 명령 1945년 8월 15일에 맞은 우리 민족의 해방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 군정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오마이뉴스] “박진경 대령 을지무공훈장 회수 및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 촉구”
4.3유족 및 시민단체, 가해자가 국가 영웅되는 왜곡된 역사 청산 답사 병오년 새해 1월 14일(수) 평일에 전국에서 100여 명의 시민들이 남해군 앵강공원(이동면, 군민동산)에 모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제주지부, 제주4.3범국민위원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하고, 4.9평화통일재단,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서울지부,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천안민주단체연대회의 등 8개 단체가 후원하는 ‘숨겨진 역사 톺아보기’ 답사 참가자들이 남해로 모인 것이다. 앵강공원에는 지난 해 11월에 국가보훈부가 이재명 대통령 명의로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박진경 대령의 동상이 5연대창설동지와 창군동우회 명의로 세워져 있다. 군복 차림에 철모를 쓰고, 지휘봉과 망원경을 들고 있는 박진경 동상 뒷면 추모문에는 “공비 잔당 소탕 작전 중 적의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전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답사단들은 박진경 대령의 을지무공훈장 서훈 취소와 국가유공자 지정 철회, 그리고 박진경 동상 철거를 외쳤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도지사 시절인 2021년 4월 10일 경기아트센터에서 진행된 4.3 제73주기 추념 ‘봄이 왐수다’ 행사에서 “국가 폭력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국가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라고 밝힌 바 있음에도 학살 책임자를 국가유공자로 지정 한 것이다. 남해에 설치된 박진경 동상을 철거 운동하는 남해촛불행동 박옥섭 대표는 “박진경 대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미군정 시기인 1948년 6월 18일에 죽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대한민국 군인이 아님에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한 것은 공적서를 조작할 가능성이 있기에 국방부는 서훈을 회수하여야 하며, 제주도민 학살을 지휘한 박진경 동상은 철거
[오마이뉴스] 죽산박씨 두 형제의 ‘한시대 다른삶’
경학원 사성을 지낸 친일파 박제봉과 부천을 빛낸 박제환 부천시청 1층 로비 한켠에는 ‘부천을 빛낸 분’이라는 코너가 있다. 부천의 근현대사에서 사회에 이바지한 업적이 뚜렷하고 시민들의 모범이 되는 6인을 부천시 차원에서 알리고 있다.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부천대학교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한항길 지사, 민족시인 변영로 선생, 풀무원 공동체 창시자인 원경선 선생, 사회봉사에 이바지한 최희섭 선생과 함께 박제환 선생이 소개되어 있다. 박제환 선생은 해방이 된 이듬해 소유하고 있던 땅을 매각하여 부천농업중학교 설립하여 부천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박제환 선생은 부천 역곡안동네로 불리는 ‘벌응절리(伐應節里) 출신으로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죽산박씨가 뿌리를 내려 대대로 살던 곳이다. 시민들은 박제환 선생을 국회의원(2대, 5대)과 농림부장관을 했던 고위관료로 알고 있지만, 경학원 사성을 지냈던 박제봉과 형제라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2016년 홍종욱(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발행한 논문 <교토 유학생 박제환의 삶과 실천 -문학청년, 사회주의자, 식민지관료>엔 “박제환의 삶에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피해갈 수 없었던 근원적인 문제인 친일과 반일, 혹은 저항과 타협의 문제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총독부 관료이자 친일 지식인이었던 형 박제봉의 존재에 유의하였다”라고 두 사람이 형제지간이었음이 언급돼 있다. 이외에도 부천 춘덕산(역곡동)에 두 사람의 무덤이 나란히 위치해 있기도 하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이지만 둘의 인생과 사후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삶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박제봉 박제봉(1892~1964)의 인생은 교육자와 촉탁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