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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교육부, ‘역사왜곡’ 논란 학력평가원 교과서 “검정 취소”…감사원 ‘표지갈이’
교육부가 친일 등 역사왜곡 논란을 일으킨 한국학력평가원(이하 학력평가원)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 합격을 취소했다. 감사원 감사에서 학력평가원이 표지갈이로 허위 실적을 만든 사실이 확인된 데 따른 조치다. 교육부는 지난해 8월 검정에 합격한 학력평가원의 한국사1·한국사2 검정 합격 취소 처분을 확정했다고 14일 밝혔다. 교육부는 “지난 4월 감사원은 학력평가원의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고, 이에 따라 검정 취소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감사원은 학력평가원의 고교 역사교과서가 ‘검정 역사교과서 출판실적 기준을 위반했고 이는 검정취소 등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내용을 담은 감사보고서를 공개했다. 감사원은 학력평가원이 표지갈이를 한 문제집을 출간해 출판실적을 채운 점을 지적했다. 감사원은 “(학력평가원은) 최근 3년간 검정출원 교과 관련 도서를 출판한 실적이 없었다”며 “2007년에 출판한 문제집의 표지만 교체해 제작한 2023년 문제집으로 납본증명서를 발급받아 이를 출판실적 증빙으로 제출했다”고 봤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검정심사 기본계획 및 검정 실시 공고’를 보면 교과서 검정을 받으려면 검정출원 교과 관련 도서를 최근 3년간 1책 이상 출판해야 한다. 학력평가원은 2007년에 만든 ‘한국 근현대사 340제’를 표지만 바꿔 2023년 재출간했다. 교육부는 학력평가원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 교과용도서 검정처분심의회의 심의와 학력평가원 측의 청문 등을 거쳐 검정 합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교육부는 또 학력평가원의 한국사 교과서를 사용하는 경북 문명고와 경북교육청에 관련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는 지난해 교과서 내용, 필진 구성, 검정 과정 등에서 논란이
[중도일보] 대전교육청 리박스쿨 이어 이번엔 극우 교원단체 ‘대한교조’ 홍보 배정 논란
리박스쿨 ‘동고동락’ 뉴라이트 교원단체 대한교조 대전지부 이달 말 지역 교사연수서 단체 홍보 시간 부여받아 논란 대전인권행동 14일 성명 내고 “대리박스쿨 일당 부역” 비판 리박스쿨 관련 민간 자격증 보유 강사진이 대전에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준 가운데 이번엔 리박스쿨과 밀접한 극우 성향의 교원단체를 교사들에게 홍보하도록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대전교육청이 리박스쿨 일당의 부역 기관 노릇을 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대전인권행동은 14일 성명을 내고 교원단체인 대한교조(대한민국교원노조 대전지부)가 교사 자격연수 중 단체를 홍보하도록 시간을 배정한 것을 규탄했다. 대전교육청 직속기관인 대전교육연수원은 7월 4일부터 8월 7일까지 공주 본원과 대전 분원서 각각 열리는 교사연수 중 7월 29일과 30일 교원단체 홍보시간을 배정했다. 단체협약에 따라 해당 연수에선 교육청과 협약을 체결한 단체의 홍보 시간이 주어진다. 현재 대전교육청 단체협약 교원단체는 대전교총·대전교사노조·전교조 대전지부 3개 단체다. 그러나 이번 연수 기간 중 극우 성향의 교원단체인 대한교조 대전지부가 지역 교사를 대상으로 홍보 시간을 부여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교조는 뉴라이트교사연합을 전신으로 한 뉴라이트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단체로, 2023년 리박스쿨 등과 함께 국가교육개혁국민협의회(교협)을 출범시켰다. 2024년엔 ‘대한민국 사회 교과서’를 출판했다. 당시 출판기념회서 손효숙 리박스쿨 대표는 대한교조를 ‘찐우파’라고 소개하며 “동고동락하는 관계”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학부모단체 등은 대한교조의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와 독재 비호 등을 지탄하며 교육부를 향해 퇴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7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정치하는엄마들 등 8개 시민단체는 대통령실 앞에서
[오마이뉴스] 부천엔 일제에 부역한 적극조력자들이 있었다
소사면장(소사읍장) 원영상(元榮常)을 통해 알아본 그들의 친일행적 현재의 부천시 관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표적인 친일파로는 바로 역곡동 고택에 살았던 박제봉(朴濟鳳)이 있다. 박제봉은 벌응절리(伐應節里) 출신으로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을 지냈으며 일제가 만든 황도(皇道)유학을 실천하여 민족성을 말살하는데 앞장섰다. 유학자가 친일을 한 것이다. 이외에도 부천군의 행정을 책임지었던 군수들도 있다. 부천군수를 역임한 사람들은 총 10명으로 이들의 친일행위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부천에 친일행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친일파들만 있었을까?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공인된 친일파들도 있었지만 이외에도 일제에 적극 협력한 지역의 적극조력자들도 있었다. 직책으로 보면 박제봉과 부천군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행위로는 이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의 최말단으로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면장(面長)과 구장(區長)이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면장은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해 임명된 공적인 직책으로 직급이 낮을 뿐이지 자발적 친일없이는 임명될 수 없는 직책으로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에 관한 행위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일항쟁기 부천군은 총 15개면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소사면(1941년 소사읍으로 개칭)과 오정면이 현재의 부천시에 해당되므로 소사면장과 소사읍장을 했던 원영상의 친일행적을 통해 적극조력자들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 소사면장(소사읍장)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소사면에는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총5명의 면장이 있었다. 유대현은 1919년부터 1923년까지 5년간 면장을하였으며, 유희진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4년을 면장하였다. 박성엽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4년간을, 원영상은 1932년부터 1939년까지 8년간을 그리고 원촌임은 1940년부터 1941년까지 2년간 면장하였다. 여기에서
[오마이뉴스] ‘김구 암살범’ 안두희 격살… 버스기사 박기서를 기억합니다
시민들 마음 모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 “역사 무섭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던 그의 정신을 기리며 “신체의 자유와 바꾼 행동, 독립투사의 마음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를 격살한 박기서씨의 죽음에 대해 기자의 지인이 지난 11일 밤 남긴 말이다. 일부에서 “박기서씨의 정의봉이 세운 정의는 무엇이었냐. 안두희 같은 말단의 촉수들을 때려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라고 조롱할 때 수많은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아쉬워하고 있다. 실제 기자는 지난 11일 밤, 그의 빈소가 마련된 부천장례식장을 찾았을 때 밤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시민들의 걸음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그중에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있었다. 그는 조용히 빈소를 방문해 박씨의 영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추 의원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님의 명복을 빈다”며 자신의 SNS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독립된 나라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을 암살해 역사를 더럽힌 자를 스스로 역사의 청소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단했던 의인이 돌아가셨다. 역사의 정의와 민족의 정기를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오.” 박기서를 기억하려는 이유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변호인으로도 알려진 김광민 변호사 역시 박 선생이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빈소를 지난 10일 찾았다. 그는 박 선생에 대해 “영웅이었다”며 아래와 같은 소회를 남겼다. “중3 때로 기억한다. 내가 다니던 성당 신부님은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이었다. 어느 날 누군가 백범 선생님의 살인자 안두희를 처단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마이뉴스] 인형, 악기, 뜨개 피켓 들고 모인 사람들… 그렇게 ‘광장’이 됐다
[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의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을 기획한 사람들 2024년 12월 3일부터 123일의 광장은 ‘환대’와 ‘연대’의 공간이었다. 2016~17년 촛불광장보다 다양한 이들에게 마이크가 배분됐고 그동안 무대에서 쉽게 보기 어려웠던 평범한 이들이 각자의 ‘민주주의’를 말했다. 이번 광장에서 2030 여성들이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그 외에도 자신을 ‘백수’라고, ‘노래방 도우미’라고 밝힌 이들도 시민들 앞에 섰다.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환대’하는 청자들이 있었다. 기성 언론에서도 평소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로 뉴스를 만들었다. ‘환대’의 광장은 또 다른 현장과 ‘연대’했다. 정치가 정치인들만의 행위로 인식되지 않았고, 다양한 시민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문제를 떠들었다. 지난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되면서 널리 퍼졌던 광장이 축소됐고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다. 광장에서 우리가 떠들던 ‘민주주의’를 선택적으로 가져간 정치인들의 경쟁이 펼쳐졌다. 더 나은 대통령을 뽑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드는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 있다. 서울 용산에 위치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5월 16일부터 오는 8월 17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민주주의와 깃발’이란 전시를 연다. 지난 12월부터 4월까지 광장을 채운 518명이 기증한 2300여 개의 깃발, 응원봉, 손팻말, 시국선언문 등의 물품을 전시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이 광장 시민 140여 명을 인터뷰했다. 전시는 3부로 구성했다. 1부는 ’12월 3일, 어제와 다른 날들, 어제와 다른 나들’에선 시민들의 투쟁을 담았고 2부 ‘광장은 학교였고, 서로의 교과서였다’에선 광장
[오마이뉴스] ‘백범 암살범’ 안두희 격살했던 박기서 선생 별세
향년 78세… 빈소 부천장례식장, 12일 발인 백범 김구 선생 암살자인 안두희를 격살했던 박기서 선생이 별세했다. 향년 78세. 10일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 시대의 의인, 21세기 독립군인 고 박기서 선생께서 별세했다”라며 “임정 주석 김구 선생 곁으로 가시는 길, 깊은 애도와 명복을 빕니다”라고 했다. 운전기사였던 고인은 김구 선생을 암살했던 안두희 집으로 찾아가 1996년 10월 23일 손수 제작한 ‘정의봉’으로 살해했다. 고인은 구속 이후 1998년 3월 1일 대사면에 포함됐고 같은 해 3월 13일 수감된 지 1년 5개월 만에 출소했다. 고인의 빈소는 경기도 부천장례식장 7호실에 마련됐고, 장례기간은 12일까지이며 발인은 12일 오전 5시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이다. 윤성효 <2025-07-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백범 암살범’ 안두희 격살했던 박기서 선생 별세 ☞ 박기서 선생 온라인 부고장 ※관련기사 ☞한국일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한 박기서씨 별세 과거청산의 빌런들 Ep.1-2편을 통해 박기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한겨레] “민주주의 소중함 알리는 ‘현대사’ 교육에 학계 나서야”
[짬]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대중판 낸 서중석 교수 한국 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대선 때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가 얻은 득표율 41.15%를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단다. “앞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얼마나 또 위기에 부닥칠까, 걱정이 되더군요. 지난 12·3 계엄에 대한 태도가 의아해 보이고 또 박정희를 굉장히 찬양하고 지지하는 후보가 생각보다 많은 표를 얻었어요. 박정희 지지도 3공화국(1963~72년)을 주로 이야기하면 몰라도 그런 구분 없이 말하면 유신체제(1972~79) 지지로 들릴 수 있어요. 유신은 1인독재 파쇼체제로 전두환 신군부보다 더 강한 독재 체제였습니다. 유권자 중 일부라도 유신 체제를 지지하고 또 12·3 계엄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표를 던졌다면 참 두려운 일입니다.” 그는 이번 대선의 ‘20대 성별 투표’도 굉장히 두려운 현상이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심하게 성별 투표하는 예를 본 적이 없어요. 이 문제도 우리가 참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커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 교수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현대사처럼 잘 알려주는 것은 없다”며 “앞으로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교육과 20대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조사가 수행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학계와 종교계를 포함해 국민융합적 단체를 만들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살피고 또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사 문제를 폭넓고 깊게 인식시킬 수 있는 길을 찾으면 좋겠어요.” 24년 전 저술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역사비평사) 개정판을 최근 펴낸 서 교수를 지난 2일
[연재기사]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은 518명의 기증자와 140여명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전시 공간에서 소개하지 못한 기증자의 이야기를 연재 기사를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1화 깃발이 된 518명의 사람들, 민주주의를 향해 휘날리다 [보러가기] [현장]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 민주주의를 지켜온 깃발의 역사 2화 혁명을 ‘예술’하는 사람들 [보러가기] 긴급전시행동<민주주의와 깃발>에 모인 작품들의 사연 3화 ‘뭐라도 하자’는 마음이 만든 찬란한 연대 [보러가기] 긴급전시행동<민주주의와 깃발>에 모인 작품들의 사연 4화 TK의 딸이 제작한 피켓 앞에서 눈물 흘린 대구 시민 [보러가기] 긴급 전시 행동을 하는 이유 8월 17일까지 진행되는 긴급전시행동<민주주의와 깃발>과 기록집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온라인 전시 보러가기 기록집 제작 응원하기
[성명] 인권 침해의 현장, 메이지 산업유산의 강제노동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라!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를 향한 약속을 지켜라!
[성명] 250709_인권 침해의 현장, 메이지 산업유산의 강제노동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라 인권 침해의 현장, 메이지 산업유산의 강제노동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라!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를 향한 약속을 지켜라! 지난 7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47회 총회에서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 산업유산)과 관련하여 세계유산위원회 결정의 이행 상황에 대한 평가 안건의 정식 채택 여부가 논의되었다. 논의 끝에 이루어진 투표 결과(일본의 수정안에 대한 찬성 7, 반대 3, 기권 8, 무효 3) 이 사안은 세계유산위원회가 아니라 양자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는 일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인류가 공유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 인권과 평화를 상징하는 현장이어야 한다. 그러나 메이지 산업유산에서 강제노동을 은폐하려는 일본 정부의 이러한 행태는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고 보편적 정신의 함양을 지향하는 유네스코 정신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 정부의 끊임없는 강제노동 은폐 시도를 규탄하며, 일본 정부가 메이지 산업유산에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메이지 산업유산 시설 가운데 미쓰비시 다카시마·하시마(군함도) 탄광,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 미쓰이 미이케 탄광 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연합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당한 인권 침해의 현장들이다. 일본 정부는 2015년 세계유산 등록 당시에 조선인 강제노동을 비롯한 메이지 산업유산의 ‘전체 역사’를 설명하겠다고 국제사회에 분명히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를 통해
[한겨레] 강제동원 783만명…진상규명도 유해 발굴도 ‘80년째 미완’
광복 80돌 한일 국교정상화 60년 여름 눈부신 햇살 아래 에메랄드빛과 쪽빛이 어우러져 넘실거리는 일본 오키나와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40여분 거리 도카시키섬으로 가는 페리 안내문에는 ‘바다의 낙원 도카시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곳은 ‘지옥’이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지난달 22일 도카시키항에서 200여미터 떨어진 조용한 시골집들 사이의 ‘빨간 기와집’ 터는 평화로운 공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였던 고 배봉기 할머니에게 끔찍한 기억을 새겼다. 10평 남짓 터에 태평양 전쟁 말기이던 1944년 11월 도카시키에 일본군 위안소가 만들어졌고, 배 할머니는 위안부 삶을 강요당했다. 이날 만난 주민 요시카와 요시카쓰(87)는 “소학교 시절 마을에 위안소가 생겼는데 조선인 여성 7명이 살았고 그중 ‘배봉기’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빨간 기와집은 원래 ‘나카마조’라고 부르던 우리 삼촌 집이었는데 일본군이 가족들을 내쫓고 위안소로 만들었다”며 “한번은 우리 집에서 일본군 장교들이 위안부를 데리고 술자리를 가졌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적이었지만 내 또래들이 위안부를 ‘조센피구아’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센피’는 일본군 위안부를 뜻하던 속어이고, 오키나와에서 ‘구아’라는 말을 뒤에 붙이면 애칭처럼 들린다고 한다. 배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처음 밝힌 증언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여자 소개꾼’의 말에 속아 1944년 11월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정산소’에서 표를 산 군인들이 줄을 섰고, 끔찍한 일이 매일 이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미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