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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1987)

2025년 6월 30일 59

[소장자료 톺아보기 71]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1987)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심정섭 연구소 지도위원의 기증자료의 하나로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 8점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이다. 최근 무사히 끝난 6·3 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소개할 가치가 있는, 시의적절한 기증자료라 생각된다. 1971년은 대선과 총선이 한 달 남짓 간격으로 치러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다. 1969년 3선개헌 이후 장기 집권을 꾀하는 박정희 정권·민주공화당과 이를 견제하려는 신민당이 대선과 총선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 94만 표 차이로 근소하게 승리했지만 야당과 시민사회의 민주화 열기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총선에서도 그 여세를 몰아 신민당이 89명(지역구 65명, 전국구 24명)을 당선시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113명(지역구 86명, 전국구 27명)에 비해 24명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좁혔다. 또한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뚜렷해 도시와 농촌 간의 정치 성향 괴리가 극명했으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야당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면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열었고 민주화 세력의 역량이 한층 강화되어 갔다. 전북 제5지역 선거구(진안군)와 전남 제7지역 선거구(담양·장성군)에서도 여촌야도 현상이 반영되어 두 선거구 모두 민주공화당 후보인 전휴상, 고재필이 당선되었다. 두 선거구의 득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농촌지역이었던 진안과 담양·장성에서 여당이 각각 60%, 53%로 과반을 넘겼다. 하지만 담양·장성 선거구에서 나타나듯이 전라도에서 양당 대결로 가면 53% 대 47%로 차이가 좁혀짐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담양·장성

백강 조경한 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와 사진, 유묵

2025년 5월 26일 210

[소장자료 톺아보기 70] 백강 조경한 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와 사진, 유묵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 선생이 2012년 5월 제1차 기증을 필두로 하여 14년간 82차에 걸쳐 7천여 점의 자료를 기증했다. 이러한 심위원의 기증자료 중 중요한 것을 간추려 두 차례에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것은 심위원의 외조부인 백강 조경한 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와 사진, 유묵이다. 심정섭 위원은 초등학교 시절 “내가 잃어버린 자료를 모아 독립운동 연구를 해보라”는 외조부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1956년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광주리 속에서 대동신문사에서 발간한 잡지 『대동평론(大東評論)』 창간호(1946.3)를 발견하고서 집어들었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김구 선생과 외조부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18명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이때부터 심위원의 역사 사료 수집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1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했는데 본인이 가장 아끼는 자료로 역시 백강 선생의 임정 시절 자료와 유묵을 꼽고 있다. 지난해 12월 심위원이 우리 연구소에 연락해서 백강 선생의 임정 시절 자료와 사진, 유목 등을 포함한 111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서 조세열 상임이사와 강동민 자료실장 등이 심위원 댁을 방문해 위 자료들을 수령했다. 다음에서 백강 조경한 선생의 독립운동 이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경한(趙擎韓, 1900~1993) 선생의 호는 백강(白岡), 본명은 종현(鍾鉉)이고 이명으로 안훈(安勳)·안일청(安一靑)·조경한을 썼다.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단에 가입하고 국내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계명학원(北京啓明學園)에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庚戌國賊)

2025년 4월 25일 301

[소장자료 톺아보기 69]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庚戌國賊) 1910년 7월 23일 서울에 부임한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강제병합 조약 초안의 대강과 병합 후의 통치방침까지 지시받았다. 데라우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의 저항 언로를 막기 위해 『대한민보』와 『대한매일신보』 등을 발행금지시켰다. 7월 29일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을 내부대신으로 한 이완용 내각을 새로 조각하였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강제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논의한 뒤, 8월 18일 대신들을 모아놓고 내각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경술국적’이라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장 이병무,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황족대표 이재면(이희), 그리고 3·1운동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작위를 박탈당한 중추원의장 김윤식이 조약에 찬성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 내각이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해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통과시켰다. 곧바로 양국의 전권위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강제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민의 격렬한 반항을 염려하여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가둬놓은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이른바 강제병합조약의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善策)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2025년 3월 28일 539

[소장자료 톺아보기 6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하고 1907년 7월 20일 순종을 즉위시켰다. 일제는 한국의 내정을 철저히 지배하기 위해 정미 7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완용 친일내각은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해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및 조인하였다. 이 조약을 정미 7조약, 한일 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등으로 다양하게 일컫는다. 그 조문은 다음과 같다. 한일협약 일본정부 및 한국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다음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사무와 구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시행할 것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할 것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을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은 이를 폐지할 것 한편 정미 7조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한일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함께 체결되었으나, 공포되지는 않았다. 이 각서에는 재판소와 감옥의 설치를 강제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실행사항을 담고 있었다. 정미 7조약과 실행 각서의 체결로 국가를 보위하는 군사력을 빼앗기고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

2025년 2월 26일 1231

[소장자료 톺아보기 67]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 을사늑약 체결 120주년을 맞아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한 대표적인 친일 대신들인 을사오적(乙巳五賊), 정미칠적(丁未七賊), 경술국적(庚戌國賊) 15인의 이력과 그들에 대한 소장자료를 세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을사늑약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날 수옥헌(현재의 중명전)에서 고종에게 일왕의 국서를 전달했다. 11월 15일에 하야시 일본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제시하고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이토는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회유하여 조약 조인에 찬성하게 하고 반대하는 국민들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고종에게 ‘보호조약안’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 보호국이나 사실상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침략의 원흉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설치되어 식민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완용(1858~1926)은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각각 학부대신, 총리대신, 총리대신으로서 모두 관여한 대표적인 매국노(賣國奴)이다. 경기도 광주 태생으로 생부는 이호석이고 양부는 판중추부사 이호준이다. 24세에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서서 승승장구했다. 1896년 2월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했고 그해 7월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을 맡기도 하는

『소년세계』 제11권 제1호(1905년 1월) 신년대부록

2025년 1월 24일 281

[소장자료 톺아보기 66] 러일전쟁 참전 육군 무장 이름 알아맞히기 현상 공모 『소년세계』 제11권 제1호(1905년 1월) 신년대부록 초·중등생을 대상으로 하는 아동잡지 『소년세계』는 러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1905년 1월, 신년호 부록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 육군 지휘관의 사진 88장을 실은 대형 화보를 제공하였다. 한가운데는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육군총사령관을 배치하고 다음 동심원에는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 총참모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구로키 다메모토(黒木爲楨) 오쿠 야스카타(奥保鞏)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육군대장 등등 11명을 두었으며 나머지 76명의 육군 군인 사진은 16개의 줄에 맞추어 방사형으로 펼쳐놓았다. 전체적인 사진 배치를 볼 때 흰 바탕에 붉은 태양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욱일기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들 사진 안에는 1번에서 88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사진 주위에는 빙 둘러서 글이 빽빽이 인쇄되어 있는데 이것은 메이지 일왕이 1904년 2월 10일 공포한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露國に對する宣戦の詔勅) 전문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왕좌에 앉은 일본 천황인 본인은 이에 나의 충직하고 용감한 모든 신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라고 시작하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의 요지는 러시아의 만주 병합이 한국의 독립유지와 극동평화를 침해하기에 일본이 러시아에 화평안을 여러 차례 제시했으나 러시아가 번번이 거절하자 항구적인 평화 회복을 위해 무력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부록의 해답법에 관하여>(111쪽)에는 신년 대부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부록의 연대기(聯隊旗)에는 현재 유명한 육군 무장이 모두 88명이 나오는데 이들 무장은 여러분이 이상적인 인물로 평소에 쉽게 알 수 있기에 시험삼아 그가 누구인지 맞춰보기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3)

2024년 12월 27일 282

[소장자료 톺아보기 65] 통계 수치를 활용해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를 선전하는 시정기념엽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3)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발전상을 홍보할 목적으로 시정기념엽서 도안에 산업과 교육, 운송과 관련한 통계 수치와 관련 막대 그래프를 이용해 그 추이를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 대표적인 시정기념엽서는 위에 제시된 시정5주년(1915), 시정6주년(1916), 시정25주년(1935), 시정30주년(1940) 기념엽서이다. 먼저 시정5주년기념엽서에서는 쌀과 면화의 수확량과 유출량을 1912년부터 1914년까지 3년간 비교했다. 이를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쌀과 면화의 경작면적과 수확량, 그리고 어획량이 해마다 증가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쌀과 면화의 경우 해마다 생산량 대비 일본으로의 유출량이 증가하고 있다. 즉 쌀의 경우 1912년에 6.4% 1913년에 8.6% 1914년에 10.8%로 늘어나고 면화도 1912년에 8.2% 1913년에 10% 1914년에 12.2%로 증가하여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쌀과 면화가 일본으로 유출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출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물자 수탈 양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시정6주념기념엽서에는 축우(畜牛)와 소가죽, 엽연초 경작면적과 생산량의 증가 추이를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통계표로 보여준다. 시정25주년기념엽서에는 ‘성장해가는 조선(伸び行く朝鮮)’이란 제목으로 한반도 지도 위에 농공산품 생산량, 우편·전신·전화, 철도 길이, 무역량을 1910년과 1933년의 수치로 비교하였다. 농공산업, 우편산업, 철도와 무역 부문에서 조선총독부 시정 25년간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선전하는 것이다. 1940년 10월 1일 시정30주년기념엽서가 발행되었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해 이후 시정기념엽서의 발행이 중단되고 말았다. 시정30주년기념엽서 봉투의 앞면에는 “국위선양 견인지구(國威宣揚 堅引持久)”라는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2)

2024년 11월 27일 346

[소장자료 톺아보기 64] 근대화 이미지로 포장한 식민지 조선의 자원 수탈의 실상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2) 일반적으로 식민지 수탈 구조는 식민지의 농수산물과 각종 지하자원을 헐값으로 매수하고, 식민 본국에서 만든 제품을 들여와 비싼 값으로 팔아 이중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수탈 구조를 공고화하여 일본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우선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 소유권과 사용권을 빼앗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이외에도 공업, 임업, 어업, 광업 전반에 걸쳐 철저한 수탈정책을 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자본가 기업을 규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여 조선인의 기업활동을 억압하고 민족산업의 성장을 막았다. 철도, 항만, 통신, 항공, 도로 대규모 기반시설 등은 일본의 대기업에 의해 독점되었고, 인삼, 소금, 담배 등을 조선총독부가 전매하여 조선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막히게 되었다. 임업 부문에서 산림령에 따른 임야조사사업이 실시되어, 막대한 국·공유림과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았던 임야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에게 넘어가 전체 임야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어업 부문에서 총독부는 어업령을 공포하여 일본 어민의 성장을 지원하고 조선 어민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 제2위를 기록할 정도로 조선의 주요 어장을 독점 지배하였다. 끝으로 광업에서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광산 자원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한민족의 광업활동을 제약하는 광업령을 제정, 공포한 후 일본인 재벌에게 많은 광산을 넘겼고 지하자원의 대부분은 이들을 통해 일본으로 헐값에 반출되었다. 위에서 열거한, 시정기념엽서에서 보이는 근대화 이미지는 자원 수탈을 위한 기초산업과 이를 위한 가공산업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2024년 10월 30일 485

[소장자료 톺아보기 63] 시정기념일과 시정기념엽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1910년 8월 22일 일제에 의해 ‘한국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 발효되면서 대한제국은 식민지 조선이 되었다. 그해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관제」에 의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기능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10월 1일을 시정기념일(始政紀念日)이라 명명하고 국가기념일의 하나로 삼았다. 하지만 일제가 실제로 기념축하행사를 벌인 것은 병합기념일인 8월 29일이었다. 이날 경성신사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은행 등은 임시휴업일로 지정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15년에 이르러서 시정기념일이 공식화되고, 이날을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휴무일로 지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취지는 조선총독부 고시(告示) 제151호(1915.6.26) 「시정기념일의 건」에서 잘 드러난다. 명치 43년(1910년) 10월 1일은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신정(新政)을 개시했던 날이다. 병합조약의 체결 및 그 실시에 있어서 추호(秋毫)의 분요(紛擾)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정의 방침 및 계획에 따라 전부 원활히 제반의 정무(政務)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명(聖名)의 위덕(威德)과 시운(時運)의 추세에서 기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총독부 개시 이래 자(玆)에 5주년 질서의 회복, 제도의 정리는 물론 식산흥업(殖産興業)에 관한 백반(百般)의 시설 경영도 또한 점차 그 서(緖)에 들었으며, 홍택(洪澤)의 점윤(漸潤)하는 바 상하만상 각기 안도하고 치평(治平)의 경(慶)에 욕(浴)하여 조선통치의 기초는 이미 확립되어 시정의 방침은 오래도록 넘쳐나는 것이 될 것인즉, 이제 자금(自今) 매년 10월 1일로써 ‘시정기념일’로 정하여 영구히 이러한 성사(盛事)를 명심하고 일층 여정노력(勵精努力)하여 제국의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1942)

2024년 10월 8일 1701

[소장자료 톺아보기 62] 대표적인 관제 여성단체의 10년간 총후활동 기록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1942) 이번 호에 소개하는 소장자료는 1942년 6월 대일본국방부인회총본부(大日本國防婦人會總本部)가 동회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간행한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大日本國防婦人會記念寫眞帖)』이다. 이 사진첩은 총 142쪽이며, 앞부분에 국방부인회를 지원하는 일본 황족, 육해군 장성, 국방부인회 임원 사진을 게재하고 본문에서 일본 도쿄사단관구(東京師團管區)부터 조선, 대만, 만주, 중국 관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설치된 지방본부들의 총후활동 사진을 각 지방본부마다 한두 페이지씩 실었다. 맨 뒤에 대일본국방부인회 회세표(會勢表) 즉, 75개의 국방부인회 지방본부와 900만에 달하는 회원 수의 통계표를 첨부하여 1942년 2월 당시 국방부인회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참고로 조선 지역본부 수는 6개, 회원 수는 약 204,000명). 조선지역 국방부인회의 총후활동 사진은 10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으며 조선군 제19사단이 관할한 나남사단관구(함북·함남)와 제20사단이 관할한 경성사단관구(경성·대구·광주·평양)의 지방본부 임원 사진과 주요 총후활동을 소개한다. 평양지방본부의 사례를 살펴보면 평양지방본부장 등 임원 사진을 싣고, 평양제조소분회의 탄환 도장(塗裝) 작업, 순천분회의 헌납 면화의 제1회 풀베기작업, 은율분회의 폐품회수, 평양지부의 모포 헌납(1938.8), 순안분회의 순안신사 조영공사, 성천분회의 헌납 목화 파종(1941.5.4), 평양지방본부대회 기념촬영 등 다양한 총후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국방부인회는 1932년 10월 24일, 일본 군부의 총력전 체제 및 국방국가 체제 구축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취지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군국주의적 여성단체이다. 전신은 오사카 국방부인회였다. 이 단체는 군사 원호 사업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일본 부덕(婦德)의 고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중여성의 정신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군부를 배경으로 가정주부와 노동여성을 주된 구성원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