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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2022년 5월 9일 55

[소장자료 톺아보기 36]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전시체제기에는 병역법 실시와 배급통제를 위한 인구조사도 빈발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본제국은 때때로 일반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내는 수단의 하나로 국가적인 축전이나 큰 행정사업을 치른 다음에는 이와 관련된 기념장(記念章)을 제정하여 이를 수행했거나 관여했던 모든 이들에게 수여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기념장 발행 연혁표를 살피다 보면, 이른바 ‘국세조사(國勢調査; 인구총조사, 詮察斯, census)’라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1921년 6월 16일에 제정된 ‘제1회 국세조사기념장(대정 9년 10월 1일)’과 1932년 7월 16일에 제정된 ‘조선 소화 5년 국세조사기념장(소화 5년 10월 1일)’,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거의 10년의 격차를 두고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기념장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도 식민지 조선(朝鮮)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기념장은 왜 만들어졌던 것일까? 1885년에 설립된 국제통계협회(國際統計協會, ISI)는 일찍이 구미 각국에서 근대적인 인구총조사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여 이에 대한 국제표준화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00년의 같은 날을 정하여 일제히 총조사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부분의 ‘문명국(文明國)’에서는 끝자리가 ‘0’인 해에 10년 주기로 국세조사를 벌이는 방식이 서서히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일본제국에서도 1902년 12월 1일에 법률 제49호 「국세조사(國勢調査)에 관(關)한 법률(法律)」을 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10개년에 매1회 국세조사를 시행하며, 제1회 국세조사는 1905년에 실시하고, 다만 제2회에 한하여 만 5개년에 해당하는 때에, 다시 그 이후에는 10년마다 시행”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 국세조사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2022년 4월 28일 79

[소장자료 톺아보기]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 강동민 자료팀장 일본 황태자 한국방문기념엽서 東宮殿下御渡韓紀念 1907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일본 황태자(후일다이쇼)가 한국 ‘시찰’을 목적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하자이를 기념해 발행한 엽서. 이 ‘시찰’은 통감 이토가 한국내의 반일 정서를 완화시키고 황태자 이은李垠의 일본유학을 성사시켜 볼모로 데려가기 위해 기획되었다. 일장기와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진이 대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을사늑약’, ‘정미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위세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이완용과 역대 통감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발행한 사진엽서. ‘욱일旭日’을 상징하는 배경 그림에 역대 한국통감과 ‘병합’의 일등 공신인 이완용의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부터 ‘병합조약’ 체결까지 적극 가담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특히 ‘병합조약’은 총리대신 이완용이 조약안을 순종에게 보이고 각 조항을 설명한 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이 가결되는 형식이었는데, 이 조약안은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미 7월 말부터 이완용을 앞세워 내각 전원의 동의를 얻도록 공작을 벌인 결과물이었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송병준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송병준은 친일단체 일진회가 조직될 때 핵심 인물로 총재를 지냈다. 일진회는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적극 지지하고 친일 여론을 환기시키며 나아가 친일정부를 구성하여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 수행에 협조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을 지내면서 헤이그특사 사건과 관련하여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또한 1907년 정미조약에

청년훈련소가 된 학교

2022년 2월 22일 246

[소장자료 톺아보기 34] 청년훈련소가 된 학교 • 강동민 자료팀장   1. 교육강령 3대 목표 앞에서 졸업기념 사진 촬영, <전주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 1941년 ‘내선일체를 통한 황국신민의 육성’을 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일제는 교육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국체명징國體明徵(‘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명확히 하는 것)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은 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인고단련忍苦鍛鍊(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도록 수양하는 것) 2. 나무로 만든 총을 들고 군사교육훈련을 하는 국민학생들, <싸우는 조선戰ふ朝鮮>, 1945 유사시 조선 학생들을 최후 3. <월간 소국민>, 1945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발행한 국민학생용 잡지. 1943년 12월에 창간되었으며 일본어로 제작하였다. 전시국가총동원체제에 따라 전시상황에 관련된 글, 사진,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4. 군복 차림인 교련 교사의 모습, <예산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 1938년 현역 장교가 학생들의 교련 수업을 담당하여 군대식 실전 훈련을 진행하였다. 5. <학교교련교과서>, 육군성 병무과, 1943년 각종 제식 훈련의 모습을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천황’을 위한 삶을 강요시켰던 일제는 학생들에게 이른바 ‘결전교육 실시’라는 명목으로 군사훈련을 강제하는데 이르렀다.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무조건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게 한 것이었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는                          轟く轟く足音は       나라를 위해 상처 입은                         お国の為に傷ついた 용사를 지키고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단행본으로 출판됩니다.

2022년 2월 3일 304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단행본으로 출판됩니다. • 김종욱 기획위원 용산보병연대 전경(연구소 소장자료) 군기수여식 당시 용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군기(욱일기) 조선사진화보(조선사단창설기념호)1916.11 효창원(스키장시험 사진) <매일신보> 1929.1.10 효창원 골프장과 조선인 소년 캐디, <조선> 조선총독부 1925 용산정거장(용산역) 전경(개인소장자료)   한강가교공사(1899년), <조선철도사> 제1권 1929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017년 12월 용산청파동으로 이전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용산 일대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이 대규모 병영을 조성하고 각종 군사시설을 세우면서 침략전쟁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그후 100여 년 간 이방인의 땅이자 외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연구소와 박물관은 일제침략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용산의 어두운 역사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주요사업의 하나로 추진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고 전파하기 위해 현장답사와 청소년·시민강좌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침략사에 대한 현장답사는 일본 시민사회에도 입소문이 나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다수 참여하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정착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된 상태이지만 상황이 호전되는 대로 재개할 예정이며, 우선 그간의 성과를 정리하여 용산의 옛 모습을 책으로 만날 수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일본군 병영지 일대의 변천사, 용산연병장과 남영동의 지명 유래, 용산역의 설치 연혁,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시기 효창원의 수난사 등 용산에 얽힌 다양한 일화를 담은 <용산,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두 권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답사와 강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각종 문헌자료를 섭렵하여 꼼꼼하게 분석하고 연구소가 소장한 희귀자료를 활용하여 용산의 근현대사를

‘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2021년 12월 28일 366

[소장자료 톺아보기 33] ‘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 강동민 자료팀장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동력 확보는 당연한 수순이다. 일제는 이렇게 필요한 노동력을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해 전쟁을 뒷받침하려 했다. 강제동원의 형태는 여러 방식이 존재했는데 ‘근로보국대’도 그중 하나다. ‘근로보국’이란 ‘힘써 일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일제는 성별·계층·나이를 가릴 것 없이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동원 대상은 14~50세 남자와 14~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주 임무는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는 공출이나 군사상 필요한 토목 건축·운반 작업에 대한 부역, 지역 단위의 공공 이익과 필요에 의한 작업에 대한 부역, 관 알선이나 징용 등 노무 인적 자원 보급이었다. 일제는 1938년 6월 ‘학생생도의 근로봉사작업 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발표하고 학생들을 근로보국대에 편입시켰다. 학생들의 경우 학기 중에는 학업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근로보국’ 활동은 주로 방학에 이루어졌지만, 중학교나 전문학교에는 방학을 ‘심신단련’ 기간으로 부르고 방학이라는 관념을 아예 없애 버렸다. 방학은 전쟁을 치루기 위해 후방에서 ‘땀을 바치는’ 시간이 되었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근로보국 활동을 학기 중에도 실시하게 되고 아예 ‘근로보국’을 정식과목으로 편입하여 성적까지 매겼다. 1941년 이후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을 시행하여 모집, 관알선 등 단계적으로 확대 편성하였다. 특히 1943년부터는 공장·사업장의 손쉬운 작업은 근로보국대의 노무로 충당할 것이 지시되면서 그 동원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는 조선 내의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

2021년 12월 7일 340

[소장자료 톺아보기32]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 • 강동민 자료팀장   1. 금1원, 2. 금5원 애국채권 1943 / 1944 가난한 조선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쌈짓돈마저 끌어모으기 위해 1엔이 나 5엔짜리 소액채권을 발매했다. 1엔짜리 애국채권은 할증금이 많 고 당첨률도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행심을 이용한 채권 판매 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 데에는 저명한 친일파들의 대대적인 가두 판매도 일조했다. 3. 할증금부 전시보국채권, 1942 채권 하단에 ‘부표 25조 087813’이라고 써있는 부분을 추첨 할증금을 지불할 때 잘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전시보국채권은 추첨, 할증금 이 10엔권 1등에 1만 엔이나 된다. 이러한 방식은 정기예금에도 도입 되어 강제저축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4. 필승국민저축표, 1944 애국반 반장에게 저축을 했다는 확인도장을 받아야 했다.   5. 채권 판매를 벌이는 친일파들, <매일신보>, 1941년 9월 8일자 1941년 9월 7일 친일파들이 모여 총후보국을 통한 ‘성전완수’를 위해 ‘채권가두유격대’ 를 조직하여 경성 시내 여러 곳에서 채권 판매에 앞장섰다.   6. 채권가두유격대, <신시대>, 1941년 10월 현재덕이 그린 이 그림은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윤치호, 이숙종 등이 전시애국채권 을 가두판매하는 장면이다. 일본은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전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다. 따라서 침략전쟁의 지속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계속된 전쟁으로 자금의 여력이 없던 일본은 결국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황금물결 출렁이는 빼앗긴 들

2021년 10월 29일 269

황금빛 들판으로 변해가는 수확의 계절 10월. 농촌은 한 해 농사의 결실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여념이 없을 시기다. 그러나 풍성한 들판을 보고도 웃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일제가 강제 병합한 1910년 이후 조선의 쌀 가격은 일본의 시장과 연동되어 일본이 쌀가격을 마음대로 책정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전쟁 속에 일본 국내에서 쌀 수요가 폭증하자, 일제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인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산미증식계획의 명분으로 조선농촌의 경제적 향상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일본 국내의 쌀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을 식량기지화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역점을 둔 사업이 토지개량사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사업이 수리조합사업이었다. 쌀 증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리시설의 안정화와 경작지의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 생산량이 증가하게 되면서 싼 가격에 일본으로 쌀 이출(移出)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조선은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부 지주들은 배를 불리는 반면 대부분의 농민은 초근목피로 근근이 생활하였다. 부족한 조선인의 식량은 만주산 잡곡으로 보충하였지만,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식량문제가 점점 악화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수요를 억제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식량 절약 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올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삶을 살았다. 불과 80여 년 전의 일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2021년 10월 6일 334

[소장자료 톺아보기 30]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 강동민 자료팀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한여름의 땡볕을 이겨내고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 달이 유난히도 밝은날에 우리는 풍요를 기리면서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이때는 오곡이 익는 계절로 모든 것이 풍성하고 즐거운 놀이로 밤낮을 보냈기 때문에 늘 이날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서 수확한 곡식으로는 풍성한 추석을 보내기 어려웠다. 1943년 9월 3일자 <경고문>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이 어떻게 추석을 보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경고문>은 1943년 추석을 맞이해 상주군 유도회와 상주군, 국민총력상주군연맹, 상주경찰서가 침략전쟁시기 전시생활 지침을 내린 문서이다. 5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고문>은 1. 매일아침 궁성요배와 정오 묵도를 할 것, 2. 8월 15일 추석제사에는 절대로 떡을 장만하지 말 것, 3. 비용을 극도로 절약하고 관혼상제시 새 옷을 만들거나 떡을 절대 만들지 말 것, 4. 8월 15일, 기타 명절에는 새 옷을 절대로 만들어 입지 말 것, 5. 국민개로운동에 순응하여 부녀자의 옥외운동을 힘쓸 것(단, 몸뻬를 착용할 것) 등이 적혀 있다. ‘절미운동, 추석에 떡하지 맙시다’, <매일신보> 1939.9.25.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시국의 급박함’을 내세워 쌀을 아끼기 위해 추석에 떡을 하지 말 것을 선전하고 있다. 또한 경성부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등 각계 인사들의

국치國恥 식민지조선 방방곡곡에 펄럭이는 일장기

2021년 8월 26일 769

소장자료 톺아보기 39 국치國恥 식민지조선 방방곡곡에 펄럭이는 일장기 • 강동민 자료팀장 조선군사령부 정문에 걸려 있는 일장기,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1 제19사단사령부 정문, <조선사진화보>, 1916 1880년 일본공사관이 개설되자 공사관 수비를 위해 한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했다. 1910 년 강제병합 후 조선주차군으로 재편한 후 독립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하였으며 1918년 한반도에 상주하는 병력을 배치하여 제19, 20사단을 통할 하는 조선군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기원 2600년 기념일에 겸이포에서 열린 축하행사에 동원되어 일장기를 흔들고 있는 수많은 조선인들, <광영록>, 1941 조선총독부에서 진행된 기원 2600년 기념식에 걸린 일장기, <광영록>, 1941     일장기가 새겨진 국기함 전라남도 함평남공립소학교에서 교내에 봉안전 (奉安殿)을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 작한 것이다.   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양반유생에 대한 은사금 수여식이 이뤄 지고 있는 광경, <애뉴얼리포트>, 1911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역사사진> 33호, 1915 경술국치의 상징처럼 사용되는 ‘근정전 일장기’ 사진은 1915년 물산공진회 당시 촬영된 것이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2021년 8월, 도쿄 상공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2020 도쿄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린 보상이었다. 100여 년 전 일본의 힘에 짓눌려 굴욕적인 강제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하늘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다색판화로 보는 청일전쟁

2021년 7월 27일 573

더위가 한창이던 1894년 7월, 한반도는 무더위를 집어 삼키는 화염에 휩싸였다. 국토의 곳곳이 불타고 무너지고 시체가 뒹구는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던,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가 한창이던 2018년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가즈히꼬(高橋和彦) 씨가 족자 2점을 기증했다. 바로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형태의 다색판화(錦繪, 니시키에) 33점을 2개의 족자로 분할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이번 자료는 바로 다카하시 씨가 기증한 청일전쟁 판화 중 몇 점을 소개한다.  니시키에는 당대의 풍속을 서민 감각으로 그려낸 근세 일본의 회화로 목판화 방식을 채용한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제로 전쟁 상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화가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일반 민중은 청일전쟁의 동향을 니시키에를 통해 사실처럼 알게 되었다. 특히 시중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청일전쟁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니시키에 속에 조선인을 소재로 한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이미 니시키에 화가들의 상상력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멸시의 대상은 일본군에게 패주하는 오합지졸 청국 병사들에게 옮겨갔다. 꽁무니 빼는 청나라 병사들을 멸시적인 비속어로 매도하고 조롱하며 청일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거의 모든 그림이 근대적인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하는 늠름하고 용감한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했다. 반면 청국 병사는 재래식 무기인 창과 칼을 지닌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저작권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