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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시민역사관

학교에도 부활하는 군국주의 – 교육칙어

2019년 9월 19일 35

[소장자료 톺아보기 7 ] 학교에도 부활하는 군국주의 – 교육칙어 짐이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 천황들이 이 나라를 열어 크나큰 덕을 세움이 두텁다. 나의 신민들은 지극히 충효를 다하여 수많은 신민이 한마음으로 대대손손 아름다움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우리 국체의 정화이며 교육의 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신민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부부가 화합하고 친구는 서로 믿으며, 공손하고 검소함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이웃을 널리 사랑해야 한다. 배움을 닦고 기예를 익힘으로써 지능을 계발하고 착한 행실과 뛰어난 재능을 갖추어 나아가, 공익에 널리 이바지하고 국헌을 존중하며 국법을 준수해야 한다. 일단 위급할 때에는 충의와 용기로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천지와 더불어 무궁의 황운皇運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그대들은 짐의 충량한 신민이 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 선조의 유풍을 현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는 실로 우리 선조 천황들의 유훈遺訓으로 자손인 천황과 신민이 함께 준수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고금을 통해도 어긋남이 없으며, 이를 나라 안팎에 베풀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바가 없다. 짐은 그대들 신민과 더불어 이를 항상 잊지 않고 지켜서 모두 한결같이 덕을 닦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교육칙어’의 내용과 의미를 상세하게 풀어 쓴 해설서 「교육칙어봉석」이다. 1890년 10월 30일 일본의 ‘천황’ 메이지는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을 정한다는 취지로 「교육에 관한 칙어教育ニ関スル勅語」를 공포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교육칙어」라고 부른다. 국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원리로서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2019년 7월 23일 452

[소장자료 톺아보기 6]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조선징용문답>표지 와 <조선징용문답> 본장 상단에 일본어를, 하단에 조선어를 번역하여 구성하였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4년 2월 10일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조선징용문답>으로 조선인의 징용에 대한 문답식 해설서다. 저자는 조선총독부 기사(技師) 미야 코이치(宮孝一)이고, 친일논리를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일본정신의 구현과 내선일체의 생활화를 주장한 조선노무협회 촉탁 이영근(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창씨명:上田龍男)이 번역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이후 곧바로 1939년 ‘ 국민징용령’을 공포했다. 이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본 책자는 이러한 ‘국민징용령’의 실시에 따라 발행된 것이다. <조선징용문답>에서는 먼저 학도선등(學徒先登)이라 하여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징용에 임하고 생산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 글부터 시작한다. 다음 내용으로 징용의 정의, 실행이유, 징용대상자와 징용방식 그리고 징용된 자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징용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문답형식을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징용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요.”라는 첫 질문에 대해, “천황폐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나라에서 하라는 일을 하는 것이 징용의 근본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징용은 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닌 전시에 국민이 다해야 될 중요한 의무이니 “즐겁게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명령에 예외는 없으며 징용에 관련된 법규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하며 이에 대한 근거로 국민징용령관계법령을 부록으로 제시했다. “가정의 사정에 따라 징용을 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 대한

조선병합을 담소로 해결한 능력자들, 헌병경찰 –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2019년 6월 25일 366

[소장자료 톺아보기 5 ] 조선병합을 담소로 해결한 능력자들, 헌병경찰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사진첩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무단통치를 실행한 식민지 조선의 경무기관 현황과 헌병경찰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첩   식민지 조선 민중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단통치의 핵심은 칼 찬 제복 차림의 헌병경찰이었다.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주차군헌병대로 편성되어 있던 헌병을 증강하기 위해 병력과 조선인 4천여 명을 헌병보조원으로 모집해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되었다. 주차군 헌병사령관이 경찰 수장인 경무총장을 겸하도록 하여 전체 헌병과 경찰을 통합 지휘, 의병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탄압할 수 있었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이 제도는 그대로 이어져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지방의 각도에도 경무부와 경찰서가 설치되어 각도 헌병대장이 도 경무부장을 겸직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뒤에도 헌병경찰제는 존속하여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조선총독이 절대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순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경무총감부와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용산경찰서 헌병경찰   황해도경찰부의 이른바 ‘폭도토벌대’   이들은 항일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는데 1913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조선의병 1만 7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일제는 끔찍한 조선인 학살의 주역을 ‘조선병합의 공로자’로 기념하기 위해 사진첩을 발행한다. 그것이 바로 1911년 12월 30일 발행한

한국병합기념장을 끝까지 수령하지 않았던 사람들

2019년 5월 24일 436

[소장자료 톺아보기 4] 일본제국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적 경사가 발생하거나 잇따른 침략전쟁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확장할 때마다 이를 영구히 기리는 뜻에서 칙령(勅令)을 통해 각종 기념장이나 종군기장을 발급하였다. 이를 통해 전쟁참가자들과 기타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 내거나 이를 재확인하는 수단으로 삼곤 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이후에도 이러한 대업(大業)의 달성을 그냥 넘길 리는 없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12년 3월 28일에 제정된 칙령 제56호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제정의 건(件)’이다. 이에 따르면 ① 한국병합의 사업에 직접 관여했던 자 및 한국병합의 사업에 동반하여 요무(要務)에 관여했던 자, ② 한국병합 당시 조선에 재근(在勤)했던 관리 및 관리대우자 및 한국병합 당시 한국정부의 관리 및 관리대우자, ③ 종전 일한관계(日韓關係)에 공적이 있는 자가 이 기념장의 수여대상자로 정해졌다. 일본제국의 각종 기념장, 종군기장, 전첩기장, 잡종기장, 휘장 발행 연혁 <매일신보> 1912년 4월 7일자에 수록된 「한국병합기념장」 제하의 기사에는 이 병합기념장의 주조수(鑄造數)는 약 3만 개 가량에 이를 것이나 수여 인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 후 ????일본제국관보???? 1913년 4월 9일자(부록)를 통해, 기념장 수여자가 처음 공표되었는데, 1912년 8월 1일자로 소급하여 상훈국(賞勳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표시된 이 명단에는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전 내각총리대신은 물론이고 이른바 ‘창덕궁 이왕’과 ‘덕수궁 이태왕’의 신분으로 격하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관보>의 경우에는 이들 명단 가운데 ‘조선 관련 해당자’만 따로 추출하여 1913년 4월 10일자 이후 총 18회에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2019년 4월 29일 815

[소장자료 톺아보기•3]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한국풍속’ 교죄처분(絞罪處分)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오른쪽 아래에 ‘1909.8.8’로 표시된 소인이 남아 있어서 제작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 연구소 소장자료 ‘조선풍속’ 교죄(絞罪)라는 제목을 달고 반복 유통된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조선’이라는 표현은 이 엽서가 경술국치 이후의 시기에 제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연구소 소장자료   1994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이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참고도판은 집단처형지에서 포착된 또 다른 사진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사진아래에 남아있는 ‘글씨 흔적’은 이 사진의 정체를 밝혀줄 새로운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국가보훈처   여느 사람들이라면 똑바로 응시하기도 힘든 처참한 광경을 담아낸 두 장의 사진엽서가 여기에 있다. 열 명 남짓한 죄수들이 집단적으로 교수대에 걸려 최후를 맞이한 모습이 자못 섬뜩하면서도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개의 지게들이 주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교수형 집행을 위해 발판용 도구로 사용한 것인 듯하다. 이들 엽서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래쪽에 각각 ‘한국풍속’과 ‘조선풍속’이라고 시리즈명칭을 다르게 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한국’이냐 ‘조선’이냐 하는 표현은 해당엽서의 제작시점이 1910년 경술국치의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된다. 실제로 ‘한국풍속’으로 표시된 엽서에는 ‘SEOUL, COREA, 1909년 8월 8일자’의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이 붙어있는 것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도저히 풍속이라는 범주에 넣기 어려운 집단처형장면까지 거듭 사진엽서로 제작하여 버젓이 유통시키는

이토 특파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한국인의 항거 장면

2019년 2월 22일 971

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의거터 표석 자리에서 보이는 경부선 철길의 모습   안양 관악역 인접지(승강장 북단에서 25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의 모습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지원병’이란 미명 아래 침략전쟁에 내몰린 조선인 청년들의 운명

2018년 9월 6일 1301

조선인의 참정권 및 병역의무에 대하여는 당국자 간에 숙의한 결과로 약 10개년 간 후에 부여하기로 정하였는데 특히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인에게는 외무성의 주장으로 일본관민과 동일한 자격을 여(與)하기로 결(決)한 후 각국 정부에게 통첩하였다더라. 이것은 원래 <황성신문>이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제호 변경을 강요당한 <한성신문>1910년 9월 6일자에 수록된 「조선인 권리 의무」 제하의 기사 내용이다. 여길 보면 막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에 대해 병역의무의 부과를 10년간 유예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언어 차이로 지휘통솔이 쉽지 않은데다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년)을 거쳐 중일전쟁(1937년)에 이르러 소모적인 침략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1938년 4월 3일에 맞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은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였다. 겉으로는 ‘내지인(內地人)’과 신분취급상 아무런 차별이 없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본질은 역시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따라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가 양주 공덕리에 이어 평양 신양정과 시흥 독산리에 잇따라 설치되었고 1944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통해 배출된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입소자들은 현역병 또는 제1보충역의 신분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전선으로 끌려갔다. 이와 아울러 1943년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이 별도로 제정되어 해군병지원자훈련소(海軍兵志願者訓練所)가 경남 창원(진해)에 설치되었다. 육군에 이어 해군에까지 지원병제도가 확장된 것은 태평양전쟁(1941년)의 확전에 따라 해군병력의 조달이 시급한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2018년 8월 1일 1439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일제의 폭압정치를 상징하는 총독부 관리의 패검

2018년 7월 2일 1275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44 일제의 폭압정치를 상징하는 총독부 관리의 패검 총독부 시절의 관리들이 제복과 함께 착용한 패검. 칼자루와 칼집에 ‘오동 문양’이 한 개씩 새겨진 것으로 보아 ‘주임관(奏任官)’이 사용한 패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전체 길이는 84cm 정도) ‘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 복제’에 묘사된 패검의 손잡이 부분 세부 문양이다. 오동문양이 2개인 것은 친임관과 칙임관, 1개인 것은 주임관, 그리고 문양이 없는 것은 판임관 용도이다.   1910년 총독부 출범 당시 총독관저에서 촬영한 총독부 고위관료들의 기념촬영사진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들은 일제히 제복 차림에 칼 한 자루씩을 손에 쥐고 있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기를 언급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의 하나는 ‘칼 찬 제복 차림의 일본인 관리’ 모습이다. 이와 관련된 규정의 연원을 살펴보니, 통감부 출범 직후인 1906년 2월 2일에 제정된 ‘통감부 및 소속관서 직원 복제(服制)’에 이미 오동 문양이 새겨진 ‘패검(佩劍)’에 관한 규정이 포함된 사실이 눈에 띈다. 또 다른 일본의 식민지역에 해당하는 대만총독부와 관동도독부의 경우에는 각각 1899년 2월 17일과 1906년 8월 30일에 ‘문관복제’가 제정되는데, 여기에도 한결같이 관리의 제복에 패검을 함께 차는 규정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일본 본국에는 ‘문관대례복제(文官大禮服制)’에 의해 함께 칼을 차는 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일상적인 근무복에 패검을 착용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칼 찬 제복’은 그 자체가 매우 위압적이며 차별적인 규정이 아닐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 조선물산공진회

2018년 5월 28일 1841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몽매한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홍보영화나 가요, 라디오방송, 어용신문인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앞 다투어 홍보했는데, 박람회도 마찬가지로 조선의 발전상을 보여준다는 명목 아래 개최한 전시성 이벤트였다. 이러한 전시행사는 품평회, 물산회, 공진회, 박람회 등 다양한 명칭으로 수시로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1915), 조선부업품공진회(1923), 조선박람회(1929), 신흥만몽박람회(1932), 조선대박람회(1940)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최초의 공식 박람회로서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50일간 개최되었고, 전시장소는 조선왕조 통치의 핵심공간인 ‘경복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게 되니 공진회장을 경복궁으로 선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각도의 물산품을 전시하여 시정 이래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목적과 아울러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조선을 일본에 홍보하여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을 조선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이른바 ‘식민植民’의 선전장이었다. 주요 전시관은 제1진열관, 제2진열관, 미술관, 기계관, 근정전 회곽廻廓, 철도국 별관 등이며 전시물로는 각종 산업에 관한 물품을 망라하고 외국품도 조선의 산업상 필요하다 인정하는 물품을 출품하는데 각 부류를 통틀어 4,665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공진회장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무려 5,226평이며 경회루에 매점과 음식점을 만들고 야간에도 개장하여 관람객의 입장을 자유롭게 하여 ‘경복궁’을 유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