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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시민역사관

군국주의에 짓밟힌 조선인 여학생들의 꿈 –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졸업앨범, 1944년

2018년 7월 12일 715

군국주의에 짓밟힌 조선인 여학생들의 꿈 –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졸업앨범, 1944년   이번 달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부산에 있는 경남여자고등학교의 전신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釜山港公立高等女學校) 졸업앨범이다. 표지에는 ‘추상(追想), 2604’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숫자는 ‘황기2604년(皇紀;초대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기점으로 계산)’을 일컫는 것으로 서기로 바꾸면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에 해당한다. 이 학교는 원래 1927년 4월에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부산여고보’로 줄임)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으나, 1938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개정에 따라 고등여학교로 편제되었다. 그 전까지는 국어(國語), 즉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느냐 아니냐의 구분에 따라 조선인은 보통학교(6년), 고등보통학교(5년), 여자고등보통학교(5년 또는 4년)에 다녔으나, 제3차 교육령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명분으로 내세워 일본인과 조선인 구분 없이 일본인 학교처럼 모두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꿔달도록 했다. 따라서 이름을 고등여학교로 바꾸자니 이미 부산에는 일본인 학교였던 부산고등여학교가 있었으므로 이를 피하다보니 ‘부산항고등여학교’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가령 서울에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성제일중학교가 아닌 ‘경기중학교’로,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복중학교’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경성고등여학교가 아닌 ‘경기고등여학교’로 각각 엉뚱한 이름을 갖게 된 연유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표지를 넘겨 본문으로 들어가면 첫머리에 봉안전(奉安殿)과 대마전(大麻殿, 대마봉사전) 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봉안전은 교육칙어나 ‘천황’의 ‘어진영(御眞影, 사진)’을 받들어 모시도록 했던 공간이며, 대마전은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발급하는 부적인 대마를 보관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의 학교라면 대개 이런 시설물을 갖춰놓고 학생들에게 일상적인 참배를 강요하곤 했다. 사진 아래에 팔굉일우(八紘一宇 ;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새긴 비석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것은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강원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에

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2018년 7월 12일 559

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영전한 것은 1909년 6월 14일이었다. 그의 자리는 1907년 10월 이래로 부통감(副統監)으로 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물려받았다. 통감교체에 따른 사무인계와 고별인사를 위해 일본에 있던 이토가 서울로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달인 7월 5일인데, 며칠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태황제의 자리로 물러난 고종황제가 베푸는 송별연이 열리게 되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고종황 제가 인(人), 신(新), 춘(春)의 석 자를 운(韻)으로 내려 시를 지어볼 것을 권하자 송별잔치는 느닷없이 시회(詩會)로 바뀌었다. 그 결과 이토와 이완용, 소네 등이 가세하여 다음과 같은 합작시가 탄생하였다.   甘雨初來霑萬人 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주니 [이토 히로부미 ; 춘묘(春畝)] 咸寧殿上露華新 함녕전 위에 이슬빛이 새롭구나 [모리 타이라이 ; 괴남(槐南)] 扶桑槿域何論態 부상과 근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소네 아라스케 ; 서호(西湖)] 兩地一家天下春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완용 ; 일당(一堂)]   위의 구절에 나오는 부상(扶桑, 후소)은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고, 근역(槿域)은 알다시피 한국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겉으로는 한일간 선린우호의 뜻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두 나라가 하나”라는 구절을 버젓이 읊조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토가 한국 땅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시문으로는 이 합작시말고도 제법 유명한 칠언절구(七言絶句)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 하여 ‘녹천정(綠泉亭)의 자작시’가 그것이었다.   南山脚下綠泉亭 남산 발 아래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

2014년 9월 12일 904

시민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는 3만여 점에 이르는 근현대사 실물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민지시기 문헌과 유물 보유에 있어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단속적으로 게재되던 소장자료소개를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희귀자료를 중심으로 해설을 실어 회원들이 근현대사의 구체적 실상을 생생하게 접하도록 하고 더불어 시민역사관 건립과 자료기증의 필요성을 널리 알려나가는 데 있다. – 엮은이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 –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의 교두보 첫번째로 소개하는 자료는 <사단대항연습기념사진첩>(1930)에 들어있는 ‘경성 및 용산 전경’이라는 제목의 항공사진이다. 최근 연구소로 용산에 관련된 자료 문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용산미군기지 반환에 따른 공원화계획이 추진되고 있어 이 지역의 공간 변천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자료는 2013년 서울시에서 개최한 ‘용산공원’ 사진전에 출품되었고, 이어 올해 전쟁기념관에서도 전시하고 있는 등 여러 기관에서 대여요청이 이어질 만큼 주목을 받고있는 자료의 하나이다.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상주했던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처음으로 전병력을 총동원하여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을 말한다. 1930년 10월 9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진행된 이 사단대항연습에는 제19사단과 제20사단은 물론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전차대와 전신대 등을 더하여 3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하였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하여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도시의 심장부를 점령한 일제의 침략신사

2018년 3월 26일 1037

“1678년 3월 왜관을 부산항에 설치할 때,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평방 4척(尺)의 석조 소사(小祠)를 세워 한일 상선(商船)의 안전을 기리기 위해 금도비라(金刀比羅) 대신을 봉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금도비라 신사로 칭하다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그 규모를 확장해 사전의 면목을 일신하자 용두산신사로 개칭했다. 이 신사는 부산을 대표하고 경남을 압도하는 조선 최고의 신사이자 대륙진출의 수호신으로 그 신위를 온 나라에 혁혁히 떨치고 있다.” <대륙신사대관>,1941 서울 남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 대구 달성공원, 전주 다가공원, 진해 제황산공원.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모두 일제의 침략신사가 자리했다. 신사神社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종교시설로, 왕실의 조상이나 민간 고유의 신앙 대상을 모신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집을 뜻하지만, 일본의 신사는 다양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수가 무려 800만에 달한다.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1876년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후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에는 서양식 공원이나 호텔, 교회 등과 같은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강제병합 이전 공원이나 묘지 등은 세금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고, 신사 설립도 적극 추진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천황’의 은혜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시설로 ‘신사’를 이용했다.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를 맞아 신사 관계 법규를 정비한 뒤인

민족의 수난에 분노하는 신여성의 일기

2018년 2월 22일 916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대구에 살았던 스무 살 여성의 일기다. 여자고등보통학교 5년생 이상으로 추측되는 주인공의 일기에는 주로 하루의 일과나 감상, 독서에 대한 소감과 자신의 습작 시나 소설이 담겨 있어 일기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일기를 통해 토로한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어 모두 기뻐할 때도 그녀는 전국이 엄청난 수해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시기에 같은 민족의 올림픽 1등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일장기를 가슴에 단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에 울분을 토한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일등을 했지만 수해로서 이재민이 막심한 이때 그렇게 떠들 것이 무엇이냐. 하지만 우리의 마라토너의 등 뒤에 일본기가 휘날린다 하니 망국 백성의 비애를 더욱 느끼게 하는구나. 일본의 식민지인 것을 세계 각국에 재인식시키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 이무리들아! 하늘을 우러러 목이 터지도록 호소라도 하여 볼까. 전날의 영광이 이 날의 치욕이 되니 억울함이여. 그리고 폭우로 생긴 수재로 고통 받는 조선인을 안타까워하며, “온갖 쓰라린 낙인을 약소민족의 가슴에 무수히 찍어놓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인제 통틀어 이무리들을 삼키려 하느냐”라며 무심한 하늘을 보며 비에다 호통을 친다. 이처럼 그녀의 민족적 감수성은 예리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입상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심훈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두 선수의 입상을 보도한 당시 조선중앙일보

일본공사관원의 눈에 비친 근대 조선의 모습, 『조선국진경』

2018년 1월 25일 1549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일제가 전세계를 대상으로 제작 배포한 영문판 식민통치보고서, 애뉴얼 리포트

2018년 1월 9일 783

강원도 삼척군(三陟郡)에서 상치(尙齒)의 은전(恩典)에 욕(浴)한 최동욱(崔東昱) 외 37명의 양반유생(兩班儒生)은 성은(聖恩)의 우악(優渥)하심을 감격하여 성덕(聖德)을 만세에 전하기로 거월(去月) 3일 천장가절(天長佳節)에 복(卜)하여 동군(同郡) 읍내 서단 죽서루(竹西樓)의 측(側)에 고(高) 8척(尺) 5촌(寸), 폭(幅) 2척 4촌, 후(厚) 8촌의 기념비를 건립하고 기(其) 기석(基石)은 융기한 천연의 대반석(大盤石)을 이용하였다는데, 전면에는 ‘天長地久’ 후면에는 ‘明治 四十四年 十一月 三日 立 天皇在上 葛人西蜀 命我總督 召化南國 恤窮褒節 耆老兩班 勸業省稅 臣民一體 江原道 三陟郡 兩班耆老 崔東昱 金炯國 外 三十六人’이라 서(書)하고, 건립위치는 풍광이 명미(明媚)하고 조망이 절가(絶佳)한 강원도 팔경(八景) 중 유명한 처(處)이라더라. 이것은 <매일신보>1911년12월6일자에수록된「천장지구(天長地久)」제하의기사이다.여기에는 삼척에 사는 ‘얼빠진’ 양반유생들이 천황의 은사금 하사에 감읍한 나머지 그 공덕을 길이 기리고자 삼척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이때 양반유생의 기로(耆老)로서 은사금을 받은 자가 12,115명이오, 효자절부(孝子節婦)로서 포상은사금의 대상자가 3,209명이며,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으로서 구휼은사금을 받은 이가 무려 70,902명에 달하였다. 위에 나오는 삼척지역의 양반유생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은사금 사령서(辭令書)를 수여받는 장면이 담긴 사진자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이들이 양쪽에 차례대로 도열한 광경이 포착된 이 사진의 출처는 조선총독부가 1911년 12월에 펴낸 <애뉴얼리포트(1910~11년판)>이다. 이 책자는 원래 1908년 12월에 통감부에 의해 ‘1907년판’이 처음 나온 이래로 글자 그대로 해마다 간행된 ‘연차보고서’이다. 이러한

이른바 ‘을사조약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일본인 면면의 정체

2017년 11월 16일 5063

러시아제국정부는 일본국이 한국에 있어서 정사상(政事上), 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절(卓絶: 견줄 데 없음)한 이익을 가진 것을 승인하며 일본제국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指導), 보호(保護) 및 감리(監理)의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이를 조애(阻礙: 저해)하거나 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 이것은 1905년 9월 5일에 체결된 포츠머스조약 제2조의 내용이다. 러일전쟁의 전승국인 일본이 패전국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목인 셈이다. 이로부터 두 달이 지난 1905년 11월 9일,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 겉으로는 한국황실을 위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로 왔다. 경부선을 타고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한 그는 첫날과 이튿날만 공식 숙소인 손탁호텔에 머문 것을 제외하고 그달 29일 서울을 떠날 때까지 줄곧 한국주차군사령관인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관저에 머물며 이곳에서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기 위한 배후공작을 벌였다. 이윽고 11월 17일 경운궁 수옥헌에서 억지 조약을 성사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1주일이 지난 그달 25일에 필동에 있는 주차군사령부의 구내 호도원(好道園)에서 성대한 야유회를 거행하였다. 이때 이곳에 있는 큰 바위에 ‘보조지륭여천양무궁(寶祚之隆與天壤無窮: 천황의 융성함이 하늘땅이 무궁한 것과 같아라)’이라는 기념휘호를 새겨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기 하루 전날, 그는 일제침탈사와 관련한 여러 책자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한 장의 기념사진을 남기게 된다. 이 사진의 촬영경위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국사편찬위원회, 1998)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1905년) 11월 28일 화요일, 대사는 여전히 하세가와 대장 관저에 머물렀다. 본일 오후 2시 하세가와대장 관저에서

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2017년 10월 19일 815

10월 9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 바로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세종 28년, 1446년) 지 571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국기’로, 그것도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한글’로 배우는 참담한 시대를 보여주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제1학년용 『보통학교조선어와한문독본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교과서이다.교과서는한사회의교육이념을반영할뿐아니라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알려져있다.이 시기한성사범학교령,소학교령을공포하고한성사범학교 규칙과 소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8년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긴 교과서들을 판매 금지시키는 한편,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고, 대부분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어’와 ‘한문’ 과목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편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제의 충성스러운 제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은 바로 이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조선총독이 모든 사항을 관할했다. 1911년 9월부터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우리말이 ‘조선어’로 일본어가 ‘국어’로 바뀌었으며, 일장기를 ‘국기’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이른바 ‘교육칙어’를 근거로 식민화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과 『국어[일어]독본』은 식민정책을 알리고 시행하는 교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철자, 어휘, 절과 문장 학습, 글 읽기’ 등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띠게 되나,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나 애국적인 내용은 모두

‘더위 사냥’은 전시총동원으로

2017년 9월 25일 1247

“찌는 듯이 무더운 남방에서는 아귀 같은 미국과 영국을 쳐물리기 위한 싸움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더위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3년 8월 1일, 국민 총력조선연맹에서 발간한 제32호 애국반 회보 다. 애국반 회보는 1941년 9월 인가를 받아 매 월 1일에 발행되던 간행물로 내용은 전시상황 에서 후방은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특히 32호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에 발행한 것으로 주요 기사의 내용도 여름 철 후방의 전시준비태세에 관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더위에 지지 말고 몸 을 튼튼히 해서 근로보국에 힘씁시다’에서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덥게 느껴지니 더위를 잊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며, 전투 중 인 병정들을 생각하면 덥다는 생각조차도 하 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몸이 약하면 더 위에 지게 되니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 으로 ‘신사나 절, 공원을 청소’, ‘개천이나 하수 도, 농촌이나 공장에 근로봉사’, ‘5리쯤 되는 데 는 걸어 다닐 것’ 등을 소개한다. ‘전시살림은 이러케!’에서는 전쟁은 제일선의 병사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 일터, 거리 등 싸움터가 아닌 곳이 없으며 특히 부엌에서 밥 지어 먹는 것도 ‘전쟁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생 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활전선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 어나고 지각과 결근하지 말라고 선동한다. 저금은 나라의 힘이며 시중에 돈이 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