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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황금물결 출렁이는 빼앗긴 들

2021년 10월 29일 928

황금빛 들판으로 변해가는 수확의 계절 10월. 농촌은 한 해 농사의 결실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여념이 없을 시기다. 그러나 풍성한 들판을 보고도 웃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일제가 강제 병합한 1910년 이후 조선의 쌀 가격은 일본의 시장과 연동되어 일본이 쌀가격을 마음대로 책정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전쟁 속에 일본 국내에서 쌀 수요가 폭증하자, 일제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인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산미증식계획의 명분으로 조선농촌의 경제적 향상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일본 국내의 쌀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을 식량기지화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역점을 둔 사업이 토지개량사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사업이 수리조합사업이었다. 쌀 증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리시설의 안정화와 경작지의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 생산량이 증가하게 되면서 싼 가격에 일본으로 쌀 이출(移出)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조선은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부 지주들은 배를 불리는 반면 대부분의 농민은 초근목피로 근근이 생활하였다. 부족한 조선인의 식량은 만주산 잡곡으로 보충하였지만,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식량문제가 점점 악화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수요를 억제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식량 절약 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올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삶을 살았다. 불과 80여 년 전의 일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2021년 10월 6일 1112

[소장자료 톺아보기 30]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 강동민 자료팀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한여름의 땡볕을 이겨내고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 달이 유난히도 밝은날에 우리는 풍요를 기리면서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이때는 오곡이 익는 계절로 모든 것이 풍성하고 즐거운 놀이로 밤낮을 보냈기 때문에 늘 이날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서 수확한 곡식으로는 풍성한 추석을 보내기 어려웠다. 1943년 9월 3일자 <경고문>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이 어떻게 추석을 보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경고문>은 1943년 추석을 맞이해 상주군 유도회와 상주군, 국민총력상주군연맹, 상주경찰서가 침략전쟁시기 전시생활 지침을 내린 문서이다. 5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고문>은 1. 매일아침 궁성요배와 정오 묵도를 할 것, 2. 8월 15일 추석제사에는 절대로 떡을 장만하지 말 것, 3. 비용을 극도로 절약하고 관혼상제시 새 옷을 만들거나 떡을 절대 만들지 말 것, 4. 8월 15일, 기타 명절에는 새 옷을 절대로 만들어 입지 말 것, 5. 국민개로운동에 순응하여 부녀자의 옥외운동을 힘쓸 것(단, 몸뻬를 착용할 것) 등이 적혀 있다. ‘절미운동, 추석에 떡하지 맙시다’, <매일신보> 1939.9.25.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시국의 급박함’을 내세워 쌀을 아끼기 위해 추석에 떡을 하지 말 것을 선전하고 있다. 또한 경성부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등 각계 인사들의

국치國恥 식민지조선 방방곡곡에 펄럭이는 일장기

2021년 8월 26일 2172

소장자료 톺아보기 39 국치國恥 식민지조선 방방곡곡에 펄럭이는 일장기 • 강동민 자료팀장 조선군사령부 정문에 걸려 있는 일장기,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1 제19사단사령부 정문, <조선사진화보>, 1916 1880년 일본공사관이 개설되자 공사관 수비를 위해 한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했다. 1910 년 강제병합 후 조선주차군으로 재편한 후 독립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하였으며 1918년 한반도에 상주하는 병력을 배치하여 제19, 20사단을 통할 하는 조선군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기원 2600년 기념일에 겸이포에서 열린 축하행사에 동원되어 일장기를 흔들고 있는 수많은 조선인들, <광영록>, 1941 조선총독부에서 진행된 기원 2600년 기념식에 걸린 일장기, <광영록>, 1941     일장기가 새겨진 국기함 전라남도 함평남공립소학교에서 교내에 봉안전 (奉安殿)을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 작한 것이다.   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양반유생에 대한 은사금 수여식이 이뤄 지고 있는 광경, <애뉴얼리포트>, 1911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역사사진> 33호, 1915 경술국치의 상징처럼 사용되는 ‘근정전 일장기’ 사진은 1915년 물산공진회 당시 촬영된 것이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2021년 8월, 도쿄 상공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2020 도쿄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린 보상이었다. 100여 년 전 일본의 힘에 짓눌려 굴욕적인 강제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하늘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다색판화로 보는 청일전쟁

2021년 7월 27일 2647

더위가 한창이던 1894년 7월, 한반도는 무더위를 집어 삼키는 화염에 휩싸였다. 국토의 곳곳이 불타고 무너지고 시체가 뒹구는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던,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가 한창이던 2018년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가즈히꼬(高橋和彦) 씨가 족자 2점을 기증했다. 바로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형태의 다색판화(錦繪, 니시키에) 33점을 2개의 족자로 분할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이번 자료는 바로 다카하시 씨가 기증한 청일전쟁 판화 중 몇 점을 소개한다.  니시키에는 당대의 풍속을 서민 감각으로 그려낸 근세 일본의 회화로 목판화 방식을 채용한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제로 전쟁 상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화가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일반 민중은 청일전쟁의 동향을 니시키에를 통해 사실처럼 알게 되었다. 특히 시중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청일전쟁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니시키에 속에 조선인을 소재로 한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이미 니시키에 화가들의 상상력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멸시의 대상은 일본군에게 패주하는 오합지졸 청국 병사들에게 옮겨갔다. 꽁무니 빼는 청나라 병사들을 멸시적인 비속어로 매도하고 조롱하며 청일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거의 모든 그림이 근대적인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하는 늠름하고 용감한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했다. 반면 청국 병사는 재래식 무기인 창과 칼을 지닌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저작권자 ⓒ

청춘만장靑春輓章

2021년 6월 25일 1761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모든 자원의 효과적 동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조선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무기’를 쥐어주게 된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게 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소한 청년, 이은휘가 남긴 유품인 장행기다. 장행기는 지원병으로 차출되어 가는 청년들을 환송하기 위해 면에서 만들어 준 깃발이다. ⇐ 장행기壯行旗, 170X56 “축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입소 궁본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촌면 제남부락연맹” 지원병 출정 깃발인 장행기는 ‘장렬하게 떠난다’는 뜻이지만 조선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깃발과 같다고 해서 ‘청춘만장靑春輓章’이라고 불렀다. 깃발 상단에는 금치훈장金鵄勳章을 중심으로 뒤에 일장기와 일군기를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깃봉에 금치金鵄가 앉았는데 마치 훈장 위에 앉은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넣었다.   ⇐ 금치훈장이 새겨진 엽서, 9.1X14.1 1890년에 제정된 일본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일본제국의 육군과 해군을 대상으로 수여하였다. 금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건국의 상징새로 전쟁 승리의 대명사로 표현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다양한 디자인으로 활용되었다.         이은휘는 1921년 9월 9일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입석리 606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옆마을인 월촌면 복죽리의 처녀 정복례(당시 19세)와 결혼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이은휘는 부인과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림을 꾸리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리농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지원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하필

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2021년 6월 2일 2602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될수록 식민지조선은 더욱 황폐해갔다. 강제병합 후 식민지조선의 ‘땅’과 함께 ‘쌀’의 수탈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중일전쟁 이후에는 한반도 곳곳의 지하자원과 해양자원 그리고 삼림까지 통제해 전쟁자원으로 동원했다. 흔히 ‘공출’이라고 하면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곡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쟁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쌀 이외의 전시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기생산을 위해 전쟁 직전인 1941년 9월 <금속류회수령>을 공포하여 조선에 남아 있는 온갖 쇠붙이를 약탈해 갔다. 식기, 제기와 같은 그릇은 물론이고 농기구를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절의 불상까지 빼앗아 무기로 만들었다. 특히 구리는 해군함정 중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재료로 막대한 수량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놋그릇을 식기로 사용하고 청동화로를 난방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그냥 두고 보고있을 침략자들이 아니다.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의 각 가정에 엄청나게 사용되는 놋그릇과 청동화로 같은 구리제품 공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인 애국반 등에 의해 금속류의 공출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에서 수입하던 설철(屑鐵:쇠 부스러기)마저 단절되자 무기생산에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전국에서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긁어모았다. 구리로 제작한 동상(銅像)이나 쇠 난간, 철제 가로등을 비롯해 가마솥까지 공출됐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 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던 식민지조선의 민중은 이제 일제가 나누어주는 소량의 배급품으로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저작권자 ⓒ 민족문제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동민 자료팀장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2021년 4월 28일 2738

[소장자료 톺아보기 25]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여러분의 적성으로 된 애국 제10호기 조선호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 <매일신보>, 1932년 4월 15일자 2면 1932년 4월 14일 정오 무렵, 경성 하늘에 이와 같은 오색(五色) 선전문을 뿌리는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헌납기’ 조선호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호는 경성 상공을 한 번 돌더니 조선군사령부 수뇌부와 체신국 간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도 비행장에 곧 착륙을 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한편, 부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헌납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국기 헌납’이다. ‘애국기’는 지역민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를 일컫는데 육군용은 애국기(愛國機),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불렀다. ‘애국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종에 따라 1대에 최저 6만 원(현재 약 6억 원)에서 2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필요했다. 따라서 부호 몇 명의 힘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 조직과 단체를 동원한 모금운동이 조선 전 지역에 벌어졌다. 일본인 유력자와 행정기관장이 나서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시작한 후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한 문명기를 필두로 조선인 헌납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후에는 애국기 헌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연수, 문명기, 최창학, 김용주 등 조선인 부호들을 비롯해 부·도·군민 등의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조선총독부의 모범생

2021년 3월 25일 1410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조선총독부의 모범생 – 김성수(金性洙) 장례식 풍경 해방공간을 거세게 휘몰아치던 ‘친일파 청산’ 구호는 친일세력과 손잡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자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친일파는 오히려 ‘건국의 주역’, ‘반공투사’로 둔갑하여 한국 사회의 지배층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제 부역언론인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다. 김성수는 중일전쟁(1937년) 직후 전국시국강연회의 강사로 나선 것을 시작으로,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전쟁협력을 독려하는 수많은 기고문과 연설을 남겼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다’면서 ‘천황’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라고 몰아세웠다. 그의 친일활동은 전시체제기 내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후,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과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하고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51년 6월에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었다. 김성수는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에 사망했다(①). 빈소는 서울시 계동 132번지 김성수자택에 마련되었는데(②) 김성수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꾸기 위한 ‘금속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등 약 2백관(750kg)을 떼어 해군무관부에 헌납한 바로 그 집이다(③). 김성수 사망 바로 다음 날인 2월 19일 오전, 빈소에 이승만이 방문(④)하고 이날 국무회의에서 김성수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동아일보는 2월 20일자 지면을 통해 ‘일생을 국가, 민족을 위해 바친 인촌 선생이 「펭끼」(페인트)조차 벗겨진 초라한 자택에서 만민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고 김성수의 사망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육당 최남선은 김성수를 애도하는 시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⑤). 2월 24일 오전 8시에 명동성당에서

남산 기슭 군경유자녀원의 앞뜰에 남겨진 러시아제 대포의 정체

2021년 1월 25일 2298

[소장자료 톺아보기•23] 남산 기슭 군경유자녀원의 앞뜰에 남겨진 러시아제 대포의 정체 어느 특정한 주제에 관심이 꽂혀 이에 관한 흔적이나 단서를 찾기 위해 해묵은 신문자료를 맹렬히 뒤질 때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정작 찾고자 하는 내용은 아니 나오고 이것과는 전혀 무관한 별스럽고 흥미로운 자료들을 우연하게 마주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금 소개하려는 <동아일보> 1962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6.25의 유산(遺産) ③ 전쟁고아(戰爭孤兒)」라는 제목의 연재기사가 바로 그러했다.  여기에는 서울 남산에 있는 ‘군경유자녀원’(軍警遺子女院, 예장동 8-6번지; 지금의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에서 양육하고 있는 전쟁고아들의 실상을 알리는 가운데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곁들여진 것이 퍼뜩 눈에 들어온다.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것이 처음에는 무슨 나무기둥이나 놀이기구인줄 알았더니 기사의 말미에 “무심히 뛰어노는 전쟁고아들 … 그들이 장난감으로 삼고 있는 대포는 일로전쟁 당시의 유물이다”라고 설명한 구 절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 대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는 낱장 사진 묶음 속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십여 명의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함께 촬영한 이 단체사진에는 대포의 모습이 훨씬 더 또렷이 드러나 있다. 사진의 뒷면에는 “1962, 남산예식장 안, 졸업앨범”이라고 쓴 메모가 남아 있으므로 두 사진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아원의 앞뜰에 남아 있는 대포라니, 이건 어찌 된 연유일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는 일제강점기에 이곳이 바로 노기신사(乃木神社)가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2020년 12월 30일 2468

[소장자료 톺아보기•22]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경술국치와 관련한 전시도록에 곧잘 등장하는 것으로 ‘경성 남대문’의 모습을 그려놓은 한장의 그림엽서가 있다. 여기에는 석축(石築)에 담쟁이덩굴이 제법 달라붙어 있는 남대문의 전경과 그 뒤로 흘러내리는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여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린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천황의 은덕이 가져다 준 평화를 기뻐하고 있는 양 거리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엽서의 위쪽에는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 벽화(明治神宮 外苑 聖德記念繪畫館壁畫)”라는 표시가 있고, 아래쪽에는 다시 “[77] 일한합방(日韓合邦), 츠지 히사시 필(辻永 筆), 조선각도 봉납(朝鮮各道 奉納), 명치(明治) 43년 8월 29일, 경성 남대문”이라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만 본다면 필시 1910년 8월 29일의 상황인 듯이 오해하기 십상이나 그 시절에는 담쟁이덩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야 맞고, 실제로 이 그림의 초안이 그려진 것은 1925년의 일로 확인된다. 성덕기념회화관(1919.3.5일 착공, 1926.10.22일 준공)은 1912년 명치천황의 장례가 치러진 일본 도쿄 아오야마연병장(靑山練兵場) 장장전(葬場殿)이 있던 자리에 건설된 미술관으로, 죽은 천황과 황후의 유덕(遺德)을 연대순으로 묘사한 그림 80점(일본화 40점, 서양화 40점)이 이곳에 전시되었다. 그림의 제작은 당시의 화족(華族), 국가기관, 지방공공단체, 민간기업 등이 봉납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이 가운데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 1882~1946)가 그린 ‘66번 서양화’ 「일영동맹(日英同盟, 1932년 완성)」은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츠지 히사시(辻永, 1884~1974)가 그린 ‘77번 서양화’ 「일한합방(日韓合邦, 1927년 완성)」은 조선총독부가 각각 헌납한 것이었다.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일한병합(日韓倂合)의 대벽화(大壁畫)를 그리다, 총독부(總督府)로부터의 위촉(委囑)으로 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