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67]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
을사늑약 체결 120주년을 맞아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한 대표적인 친일 대신들인 을사오적(乙巳五賊), 정미칠적(丁未七賊), 경술국적(庚戌國賊) 15인의 이력과 그들에 대한 소장자료를 세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을사늑약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날 수옥헌(현재의 중명전)에서 고종에게 일왕의 국서를 전달했다. 11월 15일에 하야시 일본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제시하고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이토는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회유하여 조약 조인에 찬성하게 하고 반대하는 국민들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고종에게 ‘보호조약안’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 보호국이나 사실상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침략의 원흉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설치되어 식민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완용(1858~1926)은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각각 학부대신, 총리대신, 총리대신으로서 모두 관여한 대표적인 매국노(賣國奴)이다. 경기도 광주 태생으로 생부는 이호석이고 양부는 판중추부사 이호준이다. 24세에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서서 승승장구했다. 1896년 2월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했고 그해 7월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을 맡기도 하는 등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이완용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의 비수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으나 당시의 최신 의술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강제병합 직후 백작을 수작했고 10년 후 후작으로 승작했으며 은사공채 15만원(현재의 30억원 상당)을 받았다.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고문을 지내는 등 평생 부와 명예를 누렸다. 3·1운동 때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세 차례나‘경고문’을 기고해 경거망동하지 말고 실력양성에 힘쓰라고 강변했다. 이완용의 사후 작위는 손자 이병길이 승계했다. 한편 차남 이항구는 일본 황태자의 가례(嘉禮)에 참석했을 때의 공로로 1924년 2월 남작을 수작했다.
박제순(1858~1916)은 을사늑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각각 외부대신, 내부대신으로서 관여하여 매국노 2관왕에 오른 자이다. 박제순은 반남박씨 집안으로 강제병합 후 귀족 작위를 받은 박영효(후작), 박제빈(남작), 박기양(남작)과 친족관계다. 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부친은 박홍수이다. 일찍이 외교사무를 시작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1883), 외부협판(1895)을 지냈고 1899년 청국과의 한청통상조약 체결, 1901년 벨기에와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관여해 외교통으로 알려졌다. 1894년 7월 충청도 관찰사 재직시 일본군과 연합하여 공주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여 악명을 떨쳤다. 1910년 10월 자작을 수작하고 은사공채 10만원(현재의 20억원 상당)을 수령했다. 강제병합 직후부터 사망 때까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을 지냈다. 박제순의 사후 작위는 아들 박부양이 습작했고, 다시 손자 박승유가 이어받았다. 박부양은 임실군수, 안성군수, 중추원 서기관, 조선사편수회 간사 등을 역임했다. 반면에 손자 박승유는 “선대의 친일행각에 염증을 느끼고 경기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심취”했고,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어 그해 10월 절강성 주둔 일본군 제6군에 배속되었으나 11월 동지들과 함께 탈출하여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 합류하여 독립전쟁에 나섰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권중현(1854~1934)은 1905년 11월 농상공부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다. 충청북도 영동 태생으로 초명은 권재형이고 권중현으로 개명했다. 1883년 부산감리서 서기관으로 관계에 진출한 권중현은 외교, 군부, 사법, 행정 등 다방면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한편 1896년 7월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 독립협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06년 12월 군부대신에 임명되자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 진압을 위해 진위대 100명을 파견했다. 1907년 2월,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한 나인영·오기호 등에게 저격당했으나 오발로 목숨을 부지했다. 강제병합 직후 자작을 수작했고 은사공채 5만원(현재의 10억원 상당)을 받았다. 중추원 고문, 조선사편찬위원회·조선사편수회 고문을 지냈다. 그의 사후 작위는 양자 권태환에게 승계되었다.
이지용(1870~1928)은 1905년 11월 내부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다. 고종의 5촌 조카로 본적이 서울이다. 1887년 12월 정시문과에 급제, 규장각 대교로 관계에 진출해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 주요 요직을 섭렵했다. 1904년 1월에는 을미사변 당시 일본 망명자 처리를 빌미로 일본공사한테 운동비 1만원을 받았다. 그해 2월 일제의 시정개선조치 수용과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사거점 사용권을 골자로 한 ‘한일의정서’ 체결에 외부대신 임시서리로서 서명했다. 강제병합 직후 백작을 수작했고 은사공채 10만원(현재의 20억 상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913년 2월 도박죄로 태형 100대를 받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중추원 고문 해임과 백작 예우 정지를 당했다. 작위는 1915년 9월 회복되었으나 중추원 고문의 재임명은 13년이 지난 1925년에야 이루어졌다. 그의 사후 작위는 양손(養孫) 이영주에게 승계되었다.
이근택(1865~1919)은 1905년 11월 군부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다. 충주의 무관 출신으로 형 이근호(남작), 동생 이근상(남작) 등 3형제가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친일 집안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황후가 충주로 피신하자 매일같이 민황후에게 신선한 생선을 갖다 바친 이래 아부와 처세술로 출세가도를 달린 자이다. 1884년 5월 무과급제 이후 경무사, 육군참장 겸 헌병사령관, 군부대신 등을 거쳐 시종무관장,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등을 지냈다. 1906년 2월 을사오적 척살단의 일원인 기산도와 이근철의 공격을 받아 며칠 동안 치료를 받았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척살 대상자로 지목되어 여러 차례 공격당할 뻔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강제병합 직후 자작을 수작했고 은사공채 5만원(현재의 10억 상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사망시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 작위는 장남 이창훈이 이어받았다.
• 박광종 특임연구원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민족문제연구소, 2010).
강동민, 「‘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병합기념조선사진첩』」, 『민족사랑』 2016.8.
이용창, 「을사오적의 후손들, 친일과 항일로 갈라서다(1·2)」, 『민족사랑』 2016.8·9.
이순우, 「이른바 ‘을사조약기념사진’에 등장하는 일본인 면면의 정체」, 『민족사랑』 2017.11.
강동민,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민족사랑』 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