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69]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庚戌國賊)
1910년 7월 23일 서울에 부임한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강제병합 조약 초안의 대강과 병합 후의 통치방침까지 지시받았다. 데라우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의 저항 언로를 막기 위해 『대한민보』와 『대한매일신보』 등을 발행금지시켰다. 7월 29일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을 내부대신으로 한 이완용 내각을 새로 조각하였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강제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논의한 뒤, 8월 18일 대신들을 모아놓고 내각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경술국적’이라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장 이병무,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황족대표 이재면(이희), 그리고 3·1운동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작위를 박탈당한 중추원의장 김윤식이 조약에 찬성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 내각이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해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통과시켰다. 곧바로 양국의 전권위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강제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민의 격렬한 반항을 염려하여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가둬놓은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이른바 강제병합조약의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善策)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 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 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 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 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 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같은 뜻의 취지로 시행하는 법규 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 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국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 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조에 기명 조인한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해 강제병합조약 제4조와 제5조, 그리고 8월 29일 공포된 22개조의 「조선귀족령」(일본 황실령 제14호)을 근거로 하여 조선귀족을 선정해 9월 30일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76명의 명단을 확정했다. 지난 호에 소개한 을사오적, 정미칠적과 경술국적 등에 해당하는 조선 고위 관료들은 대부분 ‘한일병합의 공(功)’에 따라 귀족 작위를 차등있게 수여받았다. 이들에게는 일본 화족(華族)과 같은 예우를 향유할 권리, 작위 세습의 권리 등이 보장되었다. 그 실례로 그 자녀들이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일본 가쿠슈인(學習院)에 입학할 수 있고, 결원(缺員)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제국대, 교토제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5만엔~15만원(10억~30억 상당)의 은사공채 증권을 교부받았으며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매각 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증여도 받아 크나큰 경제적 수혜를 누렸다.
하지만 76명의 수작자 중 여덟 명이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했는데, 강제병합 직후 음독 자결한 김석진, 자결을 시도해 작위를 반납한 조정구 그리고 작위를 거절한 유길준, 민영달,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유길준이 그해 10월 조선총독에게 남작 작위를 반납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일제가 남작 중 최고 액수의 은사공채를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유길준은 끝까지 이를 거부했다.
아래에서 경술국적 8인 중 전 호에서 다루지 않은 민병석, 윤덕영, 이재면의 이력을 서술하는 것을 끝으로 하여 을사늑약 체결 120주년과 관련한 소장자료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민병석(1858~1940)은 여흥 민씨 집안으로 1879년 문과 식년시에 급제한 후 규장각·홍문관·성균관 등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898년 궁내부대신에 올랐고 군부대신, 농상공부대신, 학부대신 등을 두루 거쳤다. 1904년 3월 궁내부대신으로서 일본 정부의 특파대사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 영접행사를 지휘했고, 1907년 일본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봉영위원장을 맡았다. 1909년 11월 도쿄에서 치러진 이토의 장례식에 순종의 칙사로서 왕실을 대표해 조문했다. 1910년 10월 자작을 수작하고 은사공채 증권 10만원(현재의 20억 상당)을 수령했다. 1925년부터 수차례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다.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기에 들어서자 조선총후보국회 발기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고문, 조선사편수회 고문, 조선귀족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민병석의 사후 자작 작위는 장남 민홍기가 이어받았다. 차남 민복기는 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지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윤덕영(1873~1940)은 해평 윤씨 집안으로 순종 왕비의 부친인 윤택영의 형이다. 1894년 과거에 급제해 시종원 비서랑, 내각 참서관, 규장각 직각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러일전쟁 시기인 1904년 11월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시종원경을 맡아 순종을 보필했다. 1909년 1월 순종의 남부지방 순행을 호종했다. 그해 10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의 조문사로 대련을 방문했고 11월에 이토에 대한 관민추도회에 궁내부대표로 참석해 추도제문을 낭독했다. 1910년 10월 자작을 수작하고 은사공채 증권 5만원(현재의 10억 상당)을 수령했다. 1911년부터 이왕가의 사무 일체를 담당하는 이왕직 찬시가 되었고 1925년부터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을 연임했으며 1939년 12월부터 이듬해 사망시까지 박영효의 후임으로 일본귀족원 의원에 올랐다. 한편 그의 아내 김복수가 1937년 8월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의 전쟁수행을 지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애국금차회 회장을 맡아 부부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사후 자작 작위는 손자 윤강로가 이어받았다.
이재면(1845~1912)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 고종의 친형이다. 1910년 순종의 명으로 이희(李熹)로 개명하였다. 1864년 규장각 대교에 임명된 후 성균관 대사성, 규장각 직제학,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85년 5월 청국에 끌려갔다가 귀국하는 흥선대원군을 배종했고 이후 10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했다. 1894년 7월부터 1895년 5월까지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대신을 지냈고, 1895년 8월부터 1896년 2월까지 두 번째 궁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총호사를 겸했다. 1907년 11월부터 1908년 1월까지 일본특파보빙대사로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에 간 직후 육군 부장에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왕의 조칙으로 이희공(李熹公)에 봉해졌다. 1911년 1월에 83만원(현재의 166억 상당)의 은사공채 증권을 수령하였는데 당시 공족과 귀족이 받은 은사공채로는 최고액이었다. 그해 2월 일본 육군 중장의 예우를 받으면서 제복을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그의 사후 그의 공위(公位: 일본 황족의 예우를 받고 전하의 경칭이 붙여짐)는 아들 이준용이 세습하였다.
• 박광종 특임연구원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민족문제연구소, 2010)
강동민, 「‘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병합기념조선사진첩』」, 『민족사랑』 2016.8.
강동민, 「『병합기념조선사진첩』 속 이미지(3)―강제병합의 주역들, 침략자와 친일파」, 『민족사랑』 2023.2.
강동민, 「‘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한국병합기념화보」」, 『민족사랑』 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