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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오열사(殉國五烈士) 인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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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73]

순국오열사(殉國五烈士) 인쇄물

이번 호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한국광복청년회(韓國光復靑年會)에서 제작한 순국오열사 인쇄물이다. 이준(李儁)을 중심으로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의 사진이 있고, 왼쪽에는 각 인물들의 약력이 간략히 적혀있다. 상단 중앙에 태극기가 위치하고 각 사진 주변에는 무궁화 문양이 감싸고 있다. 다만 제작일자는 기재되어있지 않다.
먼저 순국오열사의 이력을 전재한다.

이준(1859~1907) 선생
서기 1907년, 전 평리원 검사로 관계를 떠난 선생은 우국단심에 불타는 동지 이상설(李相卨)선생과 동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여 침략자 왜적의 비행을 봉쇄하려고 고종황제의 밀칙(密勅)을 받들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대기중인 동지 이위종(李瑋鍾) 선생과 마침내 동년 4월에 국경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약소국 평화를 유지하려는 회의는 아니었으니 그들은 세 선생을 한국의 정식 대표임을 끝끝내 거부하다가 최종일인 7월 5일에야 겨우 이선생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우국지성에 불타는 선생의 일언일구는 왜적 대표에 폐부를 찔러 당황케 하였으나 선생의 정의를 인식치 못한 열국 대표는 도리어 왜국의 비행을 지지하려 하나 통분한 선생은 그들 면전에서 할복하여 정의를 절규하시어 열국 사신의 간담을 서늘케 하시고 순국의 충혼이 되시었다.

안중근(1880~1910) 의사
1880년 황해도 출생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열렬한 애국지사이었다. 침략자 왜적에게 소위 5개조약(을사늑약), 7개조약(정미조약) 등으로 국운은 날로 기울어짐에 통분한 의사는 조약의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세 발의 총탄으로 즉사시키고 조선만세를 고창하며 분연히 포박되어 1910년 3월 26일 의사는 교수형의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윤봉길(1908~1932) 열사
충남 예산 출생으로 일찍이 교편을 잡았고 23세 때에 장지(壯志)를 품고 중국에 건너가 활약하였으며 25세 되던 해 4월 26일에 상해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동월 29일 일왕 천장절 축하식장에 잠입하여 왜장 시라카와 대장 이하 십수 명의 고관에게 폭탄의 세례를 주어 폭사시키고 포박되어 동년 12월 19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사형을 받아 광복의 초석이 되니 열사의 방년(芳年)이 25세였다.

이봉창(1900~1932) 열사
경기 수원 출생이며 유년에 상경하여 용산 문창학교를 졸업하고 전기회사 견습공으로 종사하다가 뜻한 바 있어 일본으로 갔다가 1931년 상해로 건너가서 활약하였으며 동년 12월에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입단하고 무기를 휴대하고 재차 도일하여 1932년 1월 8일 도쿄 궁성 사쿠라다문 밖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져 습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포박되어 동년 10월에 32세의 열사는 조국광복을 빌며 원한을 품은 채 처형당하고 말았다.

백정기(1896~1934) 열사
1896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기미독립운동 직후 동지들과 애국운동에 진력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무정부주의로 사상이 전환되어 중국에서 농민운동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28년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한 무정부주의연맹대회에 참석하고 1932년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천진 일본총영사관과 군사령부를 습격하고 다음해 이강훈(李康勳), 원훈(元勳) 등 동지들과 합심하여 아리요시 주중일본공사를 암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잡혀 1934년 41세를 일기로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8·15 해방 직후 조국광복을 위해 해외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독립운동가의 선양사업이 시작되었고 아울러 이분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자는 여론이 높아갔다. 그런 가운데 첫 사례로 백범 김구의 지시에 따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열사의 유해봉환이 이루어졌다. 1946년 5월 3열사의 유해봉환과 그해 7월 효창원에의 안장 경위가 『백범일지』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한편 효창원 3열사 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도 조성되었는데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해 지금까지도 가묘로 남아있다.

이후 1948년 9월 이동녕, 차리석 선생, 1948년 10월 조성환 선생의 유해가 차례로 봉환되어 효창원의 임정요인묘역에 안장되었다.

순국오열사 중 남은 한 분인 이준 열사에 대한 선양사업은 그분의 기일인 1946년 7월 14일을 기하여 열사의 뜻을 기념하고자 이준열사추념준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일 천도교회관에서 이준 열사 추도식이 성대하게 열렸고 1947년 7월에는 41주년 추도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우표를 발매하였다.

순국 후 네덜란드 헤이그 시립묘지에 안장되어있던 이준 열사의 유해는 1963년 9월 30일에 봉환되었다. 10월 4일 유해봉환식이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고 같은날 수유리 순국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일제의 철저한 정보 통제로 인해 해방 직후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공적이 일반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분들에 대한 공적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순국오열사 인쇄물이 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946년 효창원의 3의사 묘역 조성(안중근 의사 가묘 포함)과 이준 열사 순국 40주년 추도식 거행이라는 사회적 이벤트 속에서 이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5열사의 구체적인 공적을 선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 인쇄물을 제작한 한국광복청년회(약칭 光靑)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한국광복청년회는 1946년 5월 미군정청에 등록 수속을 완료하고 본부 사무소를 서울시 한미호텔 내에 두었다. 조소앙(趙素昻) 외 4인을 고문으로 두고 위원장에 오광선(吳光鮮), 부위원장에 조각산(趙覺山), 총무부장 최관용(崔寬用)이 선임되었다. 1946년 11월 다른 청년단체와 함께 좌우합작과 입법의원선거에 관한 공동성명을, 1947년 1월 35개 우익단체와 함께 신탁통치문제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47년 5월 다른 우익청년단체와 함께 “보통선거 실시 전에 친일파 숙청하라”라고 남조선과도정부입법의원에 건의했다. 같은해 8월 지청천 장군이 귀국 후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해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였다.

*호칭은 인쇄물에 기록된 그대로 차용

• 박광종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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