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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2018년 7월 16일 493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3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❶ 조중응의 이토 히로부미 송별시 정미칠적 중 하나인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취운정 시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시 ❷ 취운아집翠雲雅集 취운정에서 창화했던 시를 모아 간행한 것으로, 시책인 <선린창화善隣唱和>제2집에 수록되어 있다. ❸ 경복궁후원원유회기념엽서 1909년 6월 15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직을 넘겨주고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이토가 일본으로 가기 전 7월 1일 경복궁 후원에서 열린 신구통감 송영회 기념엽서이다.   취운정翠雲亭.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북촌길 고갯마루에 있던 정자다.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내외정세를 토론한 장소로 유명하다. 특히 갑신정변 관련 혐의로 유폐된 유길준이 1887년 이후 이곳에 머물면서 1892년 11월 민영익의 주선으로 유폐가 풀릴 때까지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일·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많은 지사들이 우국의 심정을 토로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나철, 이기, 오기호 등은 1909년 2월 나라가 파괴되고 백성이 망하는 근본 원인을 사대주의에 기운 교육으로 민족의식이 가려진 데 있음을 통감하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했다. 독립을 꿈꾸던 이들이 비밀리에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며,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계획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09년 7월 13일 오전 10시, 취운정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임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전현직 통감과 각부 대신, 조선의 고위 관민들이 모인 시회詩會가 열린 것이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병합방침’을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2018년 7월 16일 727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2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 및 기술원 양성소 졸업생 사진,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자 행정·측량 분야의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전라남도 영암지역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 1911 1911년 작성된 전라남도 영암군 곤일종면 학송리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이다. 토지소유자는 대부분 목포와 해남에 거주하는 일본인 대지주들을 비롯한 부재지주였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 식민지 재정기반 확충과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에 착수했다. 그 핵심 사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지질 조사 등 사전준비를 해왔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일본인 기사를 초빙해 측량기술을 가르치면서 전면적인 지적조사에 대비했다. 한편 일본인 지주·자본가에 의한 토지매수는 통감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1908년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을 제정해 한국 내 일본인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어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개설했고 병합 후인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해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다. 1910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2,400여 만 원의 경비를 들여 전국적으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토지가격·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였다. 토지소유권 조사는 각 필지별 토지소유권 및 경계를 사정(査定)하여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기초 장부를 만드는 것이고, 토지가격조사는 전국의 땅값을 조사하여 지세(地稅)부과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것이며, 지형·지모조사는 전국적으로 지형도를 작성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신고 기간도 매우 짧았다. 방법을 몰라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한 농민이 많았고

조선신궁 도리이(鳥居) 앞에 서서

2018년 7월 16일 669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1 조선신궁 도리이(鳥居) 앞에 서서 목도공립국민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기념사진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수학여행’ 기념사진이다. 수학여행은 근대 학교제도에서 발생한 개념으로 일본에서 시행되던 것이 19세기 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조선에도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수학여행은 동경사범학교 학생들이 지바현으로 ‘장도원족長途遠足’을 간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수학여행은 행군의 변형된 형태로 견학 견문과는 거리가 먼, 신체 단련을 위한 도보여행에서 출발한 것으로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의 목표와 연결된 것이었다. 특히 1890년 교육칙어의 공포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의 결속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육지침이 각 학교로 하달되자, 수학여행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 만한滿韓을 경영할 인재양성을 목표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기록된 사례는 <황성신문> 1901년 7월 26일에 실린 러시아의 만주수학여행 보도 기사이다. 이 자료로 미루어보아 이미 이 시기에 수학여행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수학여행은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 철도의 개통에 따라 확대되었다.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이 방문한 장소는 주로 근대시설, 자연경관 및 고적, 농업시설, 성지 등이었다. 인천항에 정박 중인 일본의 거대한 군함, 수원의 농림시험장, 함흥의 상품진열관, 전주의 잠업취체소, 춘천의 저수지, 경주의 고적, 금강산 등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승지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대련 여순 평양 등지의 전투지역과 군 관련 기념품진열관 등을 탐방하였다. 수학여행 기간은 1일부터

격랑 속의 조선 公園の各國兒童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2018년 7월 16일 686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0 격랑 속의 조선 公園の各國兒童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아사히 타로朝日太郎(일본) “어이 로스케(露助)! 세이키치(清吉)가 방심한 틈을 이용해 ‘만 두’(만주)를 훔치려고 하다니 어찌 된 일이냐, 자 빨리 돌려줘라!” 로스케露助(러시아) “이러쿵 저러쿵 떠들지 마라, 건방진 놈이네. 내 큰 몸집이 안 보이냐!” 부쓰지仏次(프랑스) “로스케, 나한테도 나눠 줘” 도쿠이치独一(독일) “부쓰지, 네가 받으면 나한테도 나눠 줘” 베이조우米蔵(미국) “이거 재밌네. 로스케 놈 센 척 말해도, 아사히한테 당하지 않을까” 에이코英子(영국) “로스케 저 얄미운 얼굴. 아리오 씨, 그 배 타로한테 줘요” 아리오有夫(아르헨티나) “그래 빨리 주자”(아르헨티나에서 군함 닛신日進, 가스가春日를 구입) 칸보韓坊(한국) “타로 형, 무서워~~” 세이키치清吉(청국) “푸우~”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公園の各國兒童」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메이지 시기부터 만주사변까지 일제의 침략전쟁을 다룬 화첩<전역화첩어국지예戰役畫帖 御國之譽>에실려있는풍자화다. 도쿄의 성문사省文社에서 1936년(소화11년) 10월 30일 초판이 발행되었고 연구소 소장본은 1936년 11월 5일에 발행된 20판본이다. 이 화첩 서문에는 “메이지부터 쇼와시대까지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열강이 경이로워 했는데 이는 전쟁에서 황군의 대활약 때문”으로 “몸을 버리고 집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군국을 위한 나아간 귀중한 공적을 다시 음미하는 것”이 간행 목적이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침략 등 전쟁을 통한 일본제국의 ‘발전’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림의 소재 또한 육군성과 해군성의 제공 자료를 활용하였으며 일본이 벌인 전쟁을 한눈에 이해하기 쉽게 구성하였다. 총 60폭의 그림으로 구성된 <전역화첩어국지예>에서27번째그림으로등장하는「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은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2018년 7월 16일 2081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0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의 태화관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고 통고한 다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발적으로 체포당했다.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리던 학생과 시민들은 그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스스로 독립선언서를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번호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기미년 3월 1일에 낭독했던 독립선언서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는 왼쪽부터 세로쓰기로 내용을 서술하고 마지막에 ‘공약삼장(公約三章)’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선언문은 최남선이 기초하였는데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와 인류 평등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평화적인 시위를 운동의 원칙으로 제기했다. 원래 한국의 독립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독립 ‘건의서’ 혹은 ‘청원서’의 형태로 발의되었으나 ‘민족자결’의 의미를 담아 독립 ‘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특히 선언서 마지막에 실린 ‘공약 3장’은 한용운이 작성했는데, 독립 선언의 의미와 방향 그리고 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나열하여 독립선언서의 정수로 꼽힌다. 이 선언서를 토대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으며 동경, 길림, 용정, 미국, 하와이, 연해주, 대만, 상해 등 해외에서도 수십여 종의 또 다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 현재 발견된 것은 20여 종 정도이다. ‘선언서’는 당시 보성사와 신문관에서 21,000여 매가 인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수량이 적어 매우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성사가 인쇄한 선언서(일명보성사판)는

새해 놀이판이 된 조선, 조선인 日出新聞朝鮮雙六 일출신문조선쌍육

2018년 7월 16일 1442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19 새해 놀이판이 된 조선, 조선인 日出新聞朝鮮雙六 일출신문조선쌍육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처음 맞이한 새해 1911년 1월 1일, 교토히노데신문(京都日出新聞)은 부록으로 일출신문조선쌍육(日出新聞朝鮮雙六)을 발행했다.(쌍육은 원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로마제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후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놀이방법은 말판이 되는 쌍육판과 말, 2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일대일 또는 편을 나누어 승부를 가르는 놀이로, 지금의 보드게임과 유사하다.) 이 놀이는 장승으로 표현되는 ‘출발(ふりだし)’에서 시작하여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병합조칙’을 읽는 ‘오르기(上り)’에 도착하면 끝난다. 총 21장의 그림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뒷날 황실기예원(帝室技芸員, 제도 시행 이래 1944년까지 13차례 총 79명 임명)이 된 니시야마 스이쇼(西山翠 嶂), 기쿠치 케이게츠(菊池契月) 등 21명의 화가가 한 장면씩 나누어 그렸다. 좌측 상단의 신라의 ‘공선(貢船)’은 <일본서기>의 ‘신라가 왜에 조공선 80척을 보냈다’는 기사에서 연유한 그림이다. 고대로부터 한반도는 일본의 조공국이라는 뿌리깊은 식민사관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삼한, 즉 신라, 백제, 고구려는 번국(藩國)으로서 ‘천황’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허구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내용은 일본 메이지 정부가 발행한 <사범학교일본역사> 「제15대 신공황후」라는 항목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공선(貢船)’과 나란히 붙어있는 오른쪽 그림은 임진왜란에서 거둔 일본(倭)의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이총(耳塚)’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아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고 지시했고, 왜군들은 전리품으로 벤 코를 소금에 절여 교토로 보냈다.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2)

2018년 7월 16일 567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18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2) 박광종 선임연구원   1932년 3월 만주국 괴뢰정부가 성립되자, 중화민국의 정부기관인 중화우정中華郵政이 운영하던 동삼성東三省의 우편사업을 만주국이 인수하였다. 만주국은 교통부 산하에 우무사郵務司를 두고 만주국 우편사업을 총괄하였고 신경新京, 봉천奉天, 하얼빈 등 세 곳에 우정관리국을 두어 해당 지역의 우편사업을 관리토록 했다. 1938년 행정기구 개편에 의해 우무사 대신에 우정총국郵政總局이 들어서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우정업무를 맡았다. 우무사와 우정총국의 수장과 고위직에는 대체로 일본인이 임명되었고 만주족이나 한족은 하위직에 머물렀다. 만주국 우표에는 국화인 난 꽃 문양과 ‘만주국 우정’(1934년 3월 제정帝政 수립 이후에는 만주제국 우정)이란 글자를 새겨 국적을 표시했다. 1932년 만주국 성립 후 패망 때까지 만주국 우정당국은 14년간 159종이 넘는 우표를 발행했고 그 중 기념우표가 44종이었다. 이번 호에서는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만주국 발행 우표와 일본측이 제작한 만주 관련 사진엽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체로 기념우표와 기념엽서들인데, 양국의 ‘우의’를 다지고 만주국의 발전상을 널리 선전하고자 하는 만주국과 일제의 제작 의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들이다. 먼저 소개할 것은 1934년 3월 1일 만주국이 만주제국으로 바뀌고 집정執政 부의溥儀가 황제로 즉위한 것을 기념해서 만든 ‘등극기념登極紀念’ 우표 2장이다. 전자에는 부의가 거처하는 집희루緝熙樓가 새겨져 있고, 후자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봉황 두 마리가 도안되었다. 두 마리의 봉황은곧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만주국 황제 부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양국의 돈독한 우의를 형상화한 것이다. 1935년 4월 부의는 히로히토의 초청으로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1)

2018년 7월 16일 452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7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1) 박광종 선임연구원   일제는 일찍부터 간도지역을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상정, 1909년 9월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영사관 개설과 길림과 회령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손에 넣는다. 이후 일제는 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지역에 경제 진출을 꾀하고 국제적으로 배타적 이권을 승인받기 위해 힘썼다. 1931년 9월 일제는 관동군의 주도하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1932년 3월 동삼성(요동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를 관할하는 만주국을 세운다. 만주국은 청나라 계승을 명분으로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앉히고 ‘왕도낙토王道樂土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웠지만 관동군의 조종하에 움직이던 꼭두각시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키며 파국을 향해 치닫자 만주국 또한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1910~1940년대 간도와 만주국 상황을 담은 사진첩과 거기에서 가려 뽑은 사진들이다. 자료실에 소장된 사진첩을 시대순으로 나열하면 <남만주사진첩>(滿洲日日新聞社, 1917), <봉천명승사진첩奉天名勝寫眞帖>(奉天山陽堂書店, 1921), <간도사진첩>(간도 尾崎寫眞舘, 1927년 추정), <만주국승인기념사진첩>(大阪朝日新聞社, 1932.10.5), <간도임시파견대기념사진첩>(1933), <대만주국사진첩>(東京堂, 1936), <강덕8년 3월 제4회 졸업기념(앨범)>(國立新京 醫科大學, 1941.12)이다. 이 중 특기할 만한 사진첩은 먼저 <오사카아사히신문> 1932년 10월 5일자 특집호로 낸 <만주국승인기념사진첩>이다. 만주국이 수립된 것은 1932년 3월 1일이지만 그간 리튼보고서를 둘러싼 부정적인 국제여론과 일본 내부 사정으로 인해 만주국 승인이 미뤄지다가 그해 9월 15일 관동군 사령관이자 주만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가 신경新京(지금의 장춘)을 방문해 만주국 국무총리 정효서鄭孝胥와 「일만의정서」를 조인하고 만주국을 승인한다. 아사히신문사가 전

애국부인회

2018년 7월 16일 566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6 애국부인회 김혜영 연구원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국가총동원’과 ‘육군특별지원병령’ 등을 공포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일제의 수탈과 동원정책은 여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조선 민중의 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여러 여성단체들을 조직하였고, 조선여성들은 각종 관제 단체에 소속되어 ‘총후보국(銃後報國)’이란 명목으로 다양한 활동을 강요당했다.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는 1911년 2월 군사원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1906년 설립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가 이 단체의 전신으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의 설립목적은 “황실을 중심으로 전 일본 부인의 결속된 힘으로 군사후원을 하는 것”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일제 뿐 아니라 구 한국황실이나 왕족들의 금전적 후원도 있었다. 1910년 9월에는 애국부인회 조선위원본부로 개칭되었다가 1911년 2월 다시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로 고쳤다. 처음에는 일본 여성이 중심이었으나 조선인 여성 들도 가입시켰다.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군사후원활동(총후인식강화운동, 군인송영접대, 위문금품 갹출醵出 수집), 군인유가족 후원(애국료愛國寮 운영, 전병사자戰病死者 조위弔慰와 위문, 국경 경비 후원), 사회사업(유유아乳幼兒 보호, 임산부 보호, 영세민교화 보호), 사회교육산업(부인애국운동, 애국자녀단, 경신敬神시설 헌납), 수양시설 운영(애국부인회 조선본부회관 건축) 등으로 크게 구별되어 나뉜다. “미성년자녀에 대한 부인보국정신의 함양과 실천에 노력”하기 위해 애국자녀단을 만들기도 했다. 애국부인회 활동을 선전하는 봉함엽서. 방공연습, 전승기원, 병기헌납, 국기운동, 유가족위문, 농번기탁아소 등의 일을 독려하고 있다.   회원들은 지방행정단위인 부·읍에 설치된 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각 분회는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농산·축산·가공제조 판매,

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2018년 7월 16일 484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4 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래 매년 10월 1일이면 이른바 시정기념엽서(始政記念葉書, 1920년부터는 5주년 단위)를 발행했다. 조선총독부가 출범하여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를 처음 펼친 날이 바로 10월 1일이었으므로 이를 기념하려는 목적이었다.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디자인이 어우러진 이 고급 엽서들은 조선의 문화 유산이나 자연풍광을 비롯해 조선 각 지방의 산업 발달 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 등을 디자인 소재로 삼았다. ‘시정기념’이란 말에 걸맞게 이 엽서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넘어 총독부의 선정(善政)에 의해 미개한 조선이 비약적으로 문명개화했다고 내외에 선전하는 홍보수단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실제 매년 발행된 기념엽서는 대부분 조선 전 분야가 일제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처럼 묘사 하거나, 낙후된 과거 모습과 일제에 의해 ‘근대화된’ 모습의 사진을 나란히 배열하여 한눈에 비교하기 쉽게 디자인되었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을 한국인들이 기뻐하고 환영한 것처럼 디자인한 후안무치한 엽서들도 있다. 의도적인 상징 조작과 합성을 통해 그들은 조선인의 실상과 관련이 없는 허구의 ‘낙토(樂土) 식민지’를 이미지로 창출한 것이다. 통신우편수단으로 각광을 받던 이 엽서를 상용하면서 조선인들은 알게 모르게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정기념엽서는 통신수단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는 제국의 홍보수단이자 민족적 자각과 저항을 잠재우려는 ‘움직이는 마취제’로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1 조선총독부시정기념 : 삼한을 정벌했다고 주장하는 신공황후 그림 2 조선총독부시정기념 : 일장기를 든 소녀를 둘러싸고 일본인과 조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