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모든 구성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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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사]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모든 구성원 여러분

김민철 신임 소장

오늘 저는 민족문제연구소 제4대 소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연구소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이 1990년 겨울이니 벌써 3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책임연구원, 연구실장, 연구위원으로서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었던 저로서는 이 자리가 영광이자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동료 후배들이 저를 놀리는 말로 ‘무책임연구원’이라 부르곤 합니다. 주로 일은 벌여놓고 뒤처리는 떠맡기는 때문인지 일종의 경고성 놀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쓸모가 있을 때면 ‘무책임’의 ‘무’에 ‘한’을 붙여 ‘무한책임’으로 슬쩍 바꿔 놓기도 합니다. 이제 그게 현실이 된 것 같아 몸과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집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권력도, 자본도 아닌 시민의 자발적 결의와 연대가 모여 연구와 실천을 해 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단체입니다. 시민이 스스로 기억의 주권자가 되어 만든 독특한 지성과 실천의 공간이자 의지의 집합체입니다. 35년 동안 연구소를 지탱해 온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5년 전 연구소가 출범했을 때 한국 사회는 군사독재의 해체 이후 새로운 민주 질서를 모색하던 전환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과거를 바로 세우는 일은 곧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지는 일이었으며, 친일 문제 제기와 사전 편찬은 보수적인 지배 엘리트에게 지난날의 정치적 과오를 세상에 드러내는 기소장이자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가를 묻는 선언이었습니다. 친일파에게 법적·정치적·역사적 책임을 묻는 일은 특정 인물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정통성과 권위가 어떤 기억 위에 형성되어 왔는지를 묻고, 무엇이 정당한가를 공적 기록과 시민의 판단 위에서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역사정의는 과거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공동체가 앞으로 설 기준을 숙고하는 민주적 실천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차원에서 거대한 변화의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AI 출현으로 상징하는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지구적 규모의 기후 위기와 환경 문제, ‘신냉전 체제’라 부르기도 어려운 요동치는 국제질서와 남북 관계, 정치적 양극화와 계급 불평등의 악화, 지방 소멸과 인구 절벽 등등. 불안하고 어두운 이야기도 있지만 K-문화, K민주주의, 촛불혁명 등 위기를 극복해 낸 위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새로운 세계는 태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 모호함의 시대는 괴물들의 시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체제와 질서는 무너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와 규범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12.3 내란의 주범과 공범들이 그런 괴물들의 시대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누린 특권이 마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산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몰염치한 지배 엘리트의 병든 밑천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 저는 12.3 내란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난 1년 간 법정에서 내뱉었던 수많은 부인과 변명, 변호의 주장과 판결을 보면서 친일파와 변론가들이 말했던 논리를 다시 보는 듯했습니다.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자연스런 본능의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은 구차하기까지 합니다. 30년 전에 친일 문제를 제기하면서 던졌던 질문 가운데 하나는 친일파나 변론가들에게 ‘죄를 죄로서 인정한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죄를 죄로서 인정하는 것조차 하나의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반성과 성찰이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의 내란 세력에게 그걸 기대하는 건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바람이었던 건가요. ‘과거사’가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지금의 현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35년간 민족문제연구소 한국 과거청산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경구를 직접 실천에 옮겨 연대의 공간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오른 손이 몰라주는 경우도 많긴 했습니다. 심지어 회원분들도 그런 비판을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친일 문제를 비롯해서, 식민지기의 심대한 인권 침해인 강제동원 피해문제와 해방 후의 민간인학살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한일협정 문제, 독립운동가 발굴 등 역사와 인권 침해 문제 전반에 걸쳐 연구소 상근자와 회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2000년대 들어 국내적으로는 기존의 단순한 반일운동을 인권과 평화를 토대로 한 역사운동으로 바꾼 일에도 연구소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자랑삼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모든 문제연구소’라는 시기어린 농담이 달리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연구소가 큰 오류를 범하지 않은 것은 사실과 책임, 공적 기준에 대한 확신, 그리고 겸손이라는 태도가 밑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흔히 좌파들이 범하는 잘못 중 하나인 자신을 절대선의 위치에 놓고 반대파를 공격하는 오만함을 연구소는 끊임없이 경계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 경계심과 자각은 앞으로도 연구소를 지키고 또 확장시켜 나가는 힘이 될 것 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헌사의 시간이 왔습니다. 창립 정신을 세우고 연구소의 정체성을 확립한 김봉우 소장님의 결단, 어려운 시기에도 원칙을 지키며 연구소를 지켜낸 한상범 소장님의 리더십, 그리고 연구와 시민운동을 결합해 활동 영역을 넓혀 지금에 이르게 한 임헌영 소장님의 노력이 오늘의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돈명, 조문기, 김병상, 함세웅 이사장님과 동료들의 헌신과 노고, 그리고 회원 여러분의 한없는 사랑도 존경과 감사의 목록에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연구소는 전임 이사장과 소장, 그리고 수많은 회원들과 선배, 동료들의 헌신 위에 서 있습니다. 그 노고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 토대 위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합니다. 그 길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커다란 변화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목표와 방향을 찾고, 또 다른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업들은 보고를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만 추가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교육과 연대사업을 확대하는 방안의 하나로 연구소가 평생교육의 장으로서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개발해나가려 합니다. 역사와 인권, 민주주의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만드는 일입니다. 동시에 활동가 재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여, 변화의 시대에 조응하는 인식과 역량을 키우는 기반을 만들겠습니다. 이를 위해 다른 시민단체, 연구기관, 교육단체와 함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구축하려 합니다. 저는 이러한 연대의 장을 ‘시민대학’으로 발전시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특정 조직의 확장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성숙을 위한 공공적 배움의 공간입니다. ‘괴물들의 시대’를 넘어설 힘은 결국 시민의 성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해왔습니다. 혼란의 시대에도 기준을 세우는 일,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시민의 힘으로 기억을 지키고, 책임의 원칙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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