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선농단(先農壇) 자리의 ‘청량대’ 비석은 경성여자사범학교 시절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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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1]

선농단(先農壇) 자리의 ‘청량대’ 비석은 경성여자사범학교 시절의 유산
‘청량대(淸凉臺)’라는 명칭은 『채근담(菜根譚)』에서 따온 표현

이순우 특임연구원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역(祭基驛)’에서 내려 1번 출구 쪽으로 나오면 곧장 선농단역사공원(선농단역사문화관)과 서울종암초등학교 방향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왕산로19길)이 길게 이어진다. 이곳으로 접어드는 초입에는 ‘느티나무어린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숲을 이룬 공간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표지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터(1954년 12월~1975년 2월)
여기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6천여 명이 넘는 교육계의 동량을 길러내던 곳이다. 이제 지난날의 웅지를 기리고 겨레와 함께 교육의 미래를 열고자 하는 뜻을 담아 기념표석을 세운다.
2006년 10월 25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서울대학교 사범대학동창회.

여기에 표시된 내용처럼 이 일대는 서울대학교가 새로 조성한 관악캠퍼스로 1975년에 통합이전을 완료한 때까지 ─ 경성여자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대학 시절까지 합치면 ─ 3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사범대학(1968년 12월에는 ‘가정대학’ 분리신설)이 터를 잡고 있던 구역이었다. 그에 앞서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원잠종제조소(京畿道原蠶種製造所, 1916년 12월 이전), 경기도농사시험장(京畿道農事試驗場, 1917년 4월 개설), 경기도잠업취체소(京畿道蠶業取締所, 1929년 9월 이전) 등의 조선총독부 산하 농잠실무기관이 순차적으로 들어섰다가 1938년 3월 1일에 이르러 일괄하여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벌응절리의 신축청사로 옮겨갔고, 다시 그 자리는 1939년 9월 이후 경성여자사범학교(京城女子師範學校)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이래로 이 일대는 선농단(先農壇, 제기동 274번지)과 아울러 그 아래쪽으로 동적전(東籍田, 용두동 138번지)이라는 너른 벌판이 펼쳐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역대 국왕이 친히 선농단에 제사를 올리고, 동적전에서 친경(親耕)과 관예(觀刈)를 거행하는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임금이 친경을 하고 왕비가 친잠(親蠶)을 하는 것은 종묘에 올릴 자성(粢盛; 그릇에 담아 제물로 바치는 곡식)을 마련하고 이곳의 제례를 위한 제복(祭服)을 바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서는 순종황제가 1909년 4월과 1910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친경례(親耕禮)를 올린 것이 이에 관한 마지막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와는 별도로 1909년 7월에는 이곳에서 친예(親刈, 보리베기) 의식이 거행된 바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1908년 7월 23일에 공포된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關)한 건(件)」에 의해 선농단과 선잠단은 함께 폐지되고, 이때 여기에 있던 신위(神位)는 모두 사직단(社稷壇)에 배향(配享)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제례가 벌어지지 않는 상태로 바뀌고 말았다. 곧이어 일제의 국권침탈과 경술국치의 과정을 겪으면서 선농단과 동적전 일대는 완전한 공간해체와 훼손의 과정을 겪게 되었는데, 이에 관한 전반적인 경위와 내력은 경성부(京城府)에서 편찬 발행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3권(1941), 838~840쪽에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채록 정리되어 있다.

…… 그 후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설립 때 동적전 가운데 동방부(東方部)에 속하는 대부분은 한국측의 출자지(出資地)로서 동사(同社)로 인속(引續, 인계)되었다. 따라서 선농단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이곳에 인접한 동적전의 일부는 국유지(國有地) 그대로 은사수산경기도원잠종제조소(恩賜授産京畿道原蠶種製造所)와 다음에 나오는 두 기관(機關; 경기도농사시험장과 잠업취체소)에서 이를 사용했다.
…… 그런데 종래(從來) 경운정(慶雲町, 경운동)과 수송정(壽松町, 수송동)에 있던 경성여자사범학교 및 동(同) 부속소학교(附屬小學校)를 이곳에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되자마자 원잠종제조소와 농사시험장은 경인간(京仁間)의 부천군 소사면(富川郡 素砂面)으로 이전하였고, 소화 9년(1934년) 5월 29일 국유재산(國有財産)이던 우(右) 부지 21,583평(坪)은 경성여자사범학교 부지(京城女子師範學校 敷地)로서 소속이 바뀌면서 13년(1938년) 4월부터 지균공사(地均工事)에 착수하여 6월 3일 준공(竣工)했다. 해(該) 학교 본교사(本校舍)의 건축은 동년(同年) 10월 16일에, 부속소학교 및 기숙사(寄宿 舍)의 건축은 익(翌) 14년(1939년) 7월 1일에 착수하여, 본교사는 동 14년(1939년) 8월에, 다른 것은 동년 12월말에 낙성(落成)하였다. 당시의 건물평수(建物坪數)는 본교가 1,523평 남짓, 기타 1,530평 남짓, 계(計) 3,054평 남짓이었다.
그리고 원잠종제조소 및 그 외 2기관은 모두 선농단(先農壇)의 남린(南隣)한 평지(平地)에 설치되었던 탓에 단(壇)은 다행히 철폐(撤廢)의 재난만은 면하였으나 그대로 방치(放置)되었으므로 자연 황폐(自然 荒廢)하였다. 대정 12년(1923년) 9월, 제3대 조선총독(朝鮮總督)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단(壇)을 시찰(視察)하였고, 그 황폐함을 보고 크게 탄식하며 사금(私金)을 던져 그 수단(修壇)을 명(命)했다.
나중에 경성여자사범학교의 기숙사(寄宿舍)를 남향(南向)으로 건축하는 설계상(設計上) 고장(故障, 지장)이 생김으로써 단은 전폐(全廢)할 예정으로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학교장(學校長) 타카하시 하마키치(高橋濱吉)의 의견(意見)에 따라 단 중심부(壇 中心部)의 규모와 위치는 그대로 두고 단과 기숙사의 위치를 서로 조금씩 변경하여 쌍자병행(双者並行)의 위치로 개축(改築)하여 보존(保存)하는 것으로 했고, 단 중심부의 전석원(全石垣) 및 3개소의 석문(石門)이 정비되면서 구태(舊態)를 떠올리기에 족(足)한 것이 되었다. 다만, 단의 외곽(外廓)은 부지 내의 도로와 기숙사 건축 때문에 자연 철폐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현재 경성부 행정구역 내에서 단(壇)의 구태를 떠올릴 수 있는 유물(遺物)은 사직단(社稷壇) 밖에 그 단이 있을 뿐이고 다른 대부분은 겨우 그 위치를 추지(推知,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전혀 그 흔적(痕跡)조차 없는 것도 있다.

해방 이후 시기에 있어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차지하고 있던 ─ 일찍이 경성여자사범학교가 점유하고 있던 구역이기도 했던 ─ 부지 일체(20,189평 규모)는 대한주택공사(大韓住宅公社)로 넘겨졌다가 일반인에게 단독주택용지로 분할매각되는 절차가 진행되었고, 이때 새로운 주택지 조성을 위해 주변지형이 잔뜩 깎여나가는 바람에 ─ 그나마 경성여자사범학교의 기숙사 건립과 관련하여 이미 한 차례 방향을 비틀어야 했던 ─ 선농단의 유구가 있던 곳은 그 흔적이 완전히 허공으로 사라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선농단 주변이랬자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향나무’ 한 그루를 포함하여 그 북쪽의 인접지(지금은 ‘선농단역사공원’이라고 부르는 구역)만 간신히 남겨진 상태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15년 4월 30일에 이르러 어린이놀이터가 있던 이 구역의 맨 북쪽 끝에는 선농단역사문화관(先農壇歷史文化館)이 신축 개관하였고, 이와 함께 진즉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를 거쳐 사적(史蹟, 제436호) 지정이 이뤄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폐허나 다를 바 없이 방치되어 있던 선농단 유구에 대해서도 복원재단장 공사가 진행되면서 주변 일대가 말끔히 정리된 상태로 변모하였다. 이로써 선농단 일대는 ─ 비록 원위치는 아닐지라도 ─ 얼추 옛 모습의 일부라도 회복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가끔 이곳 ‘선농단역사공원’을 찾아갈 때마다 그곳에서 뜻밖의 유적 하나를 구경할 수 있는데, ‘선농단 향나무’ 바로 옆쪽으로 바닥에 눕혀놓은 ‘청량대’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비석의 바로 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놓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청량대(淸凉臺)
일제는 조선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선농단이 위치한 이곳에 청량대공원을 조성하고 청량대 표석을 세워 선농단의 의미를 퇴색시키려 했으며, 선농제를 올리던 제기(놋그릇)마저 태평양전쟁 때 군비물자로 수탈하여 제사도 못 지내게 했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던 날 제기동, 용두동 주민들이 선농단에 몰려와 일제가 세운 청량대 표석을 쓰러트려 울분을 달랬다.

하지만 이 내용들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썩 잘 정리된 안내문안 같지는 않아 보인다.

우선은 ‘청량대공원’이라는 것의 실체가 분명하게 확인되질 않는다. 가령,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3월 12일자에 게재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京城市街地計畫公園) 결정」이라는 내용을 보면 ‘청량공원(淸涼公園)’이란 곳이 등장하긴 하지만, 위치 ─ 청량리정(淸涼里町), 제기정(祭基町) ─ 나 면적 ─ 855,000평방미터(㎡) ─ 에 비춰볼 때 이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아무리 살펴봐도 ‘청량대’라는 곳은 필시 경성여자사범학교의 뒷동산 또는 학생휴게처로 사용했던 공간을 말하는 것일 텐데, 안내문안에 이 학교의 존재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은 상당한 결함이 아닐 수 없겠다.

그리고 “광복이 되던 날 주민들이 청량대 표석을 쓰러트려 ……”라고 적은 부분도 사실관계가 미심쩍은 대목이다. 해방 당시 이곳은 경성여자사범학교에 포함된 구역이었고, 그 이후에도 이 학교는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전환하여 계속 존속했으므로 이웃 주민들이 ‘청량대’ 표석을 쓰러트렸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맞지 않는 표현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학보인 『대학신문』 1961년 4월 27일자를 보면, 「사대(師大)의 ‘멕카’, 청량대(淸凉臺)」 제하의 탐방기사에 청량대 비석이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담은 삽화(揷畫)가 수록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시절에 이 비석을 따로 눕혀놓았다거나 파묻었다거나 하는 다른 기록이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청량대’라는 표지비석에는 도대체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것을 조성한 경위는 과연 어떠했던 것일까?

‘청량대’ 표지비석의 비문 판독 및 내용 풀이

먼저 이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쪽에 새겨진 “熱不必除(더위를 꼭 없앨 수는 없으나) …… 운운”하는 구절은 그 출처가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 「후집(後集) 28」이다. 그리고 좌측 상단에 보이는 “澁柿の澁味 そのまゝ甘味かな(떫은 감의 떫은맛이 그대로 단맛이려나?)”라는 글귀는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유명한 하이진(俳人)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8)가 읊은 하이쿠(俳句)이다.

경성여자사범학교 교유(敎諭) 출신인 마츠무라 하루오(松村春尾, 1909~1994)가 남긴 『나의 일생, 속(私の一生, 続)』(1991)에는 청량대의 글씨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

…… 여기를 ‘청량대(淸凉台)’라고 이름 붙인 것은 초대 교장 타카하시 하마키치(高橋濱吉, 재임 1935.4.1~1941.3.31) 선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대(台) 위에는 타카하시 교장이 쓴 「…… (글귀 생략) ……」이라고 하는 『채근담』의 말이 한문(漢文)으로 적혀 있습니다. “밖에 있는 더운 열기는 없앨 수 없지만, 안에 있는 덥다고 하는 마음의 고뇌를 없앤다면, 봄도 마음도 늘 상쾌하여 시원하다”고 하는 정신주의(精神主義)를 가르치는 말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澁柿の澁味 そのまゝ甘味かな”라고 써 있었습니다. “인간은 그 가지고 태어난 천성(天性)과 개성(個性)을 죽이지 말고 그대로 연마해나가면 참된 인간성이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교육원리(敎育原理)가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 비석을 건립한 유래에 대해서는 딱히 뚜렷한 자료가 눈에 띄질 않는다. 하지만 『기원이천육백년축전기록(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錄)』(1940)이라는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연찮게도 제10책의 468쪽 부분에서 이른바 ‘기원 2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교정의 앞뜰에 ‘팔굉원(八紘苑)’이라는 정원을 조성하는 한편 뒷동산 ‘선농단 터’ 언덕에 ‘청량대광장(淸凉臺廣場)’과 ‘명경신사(明鏡神祠)’를 설치했다는 기록을 확인한 바 있다. 경성여자사범학교가 옛 동적전 터에 새로 지은 신축교사로 옮겨온 것이 1939년 9월 1일의 일이었고, 때마침 다가오는 1940년이 바로 일본의 초대 천황이 즉위한 지 26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라고 하여 이를 기념하고자 이러한 시설들을 새로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성여자사범학교의 ‘기원 2600년 기념사업’ 추진 내용

사업의 명칭 관련 내용
‘팔굉원’ 설치 기원 2600년(1940년)을 봉축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 현현(顯現)에 애쓰는 데 일조하고자 교사(校舍)의 전정(前庭) 630평(坪)의 땅을 구획하여 전교 직원생도의 근로작업에 의해 정원(庭園)을 설치함. 또 한쪽 구석에 ‘황풍흡팔굉 성덕반태양(皇風洽八紘 聖德伴太陽)’의 비(碑)를 건립하고, 이 정원을 ‘팔굉원(八紘苑, 핫코엔)’이라고 호칭(呼稱)했음. (사업연도는1940년도~1942년도, 소요경비는 없음)
‘명경신사’의 조영 교사의 뒤쪽 구릉지(丘陵地)의 일각(一角)에 직원생도의 근로작업에 의해 약 9백 평(坪)의 청량대광장(淸凉臺廣場)을 설치하고, 그 주변을 본교의 정신수양(精神修養)의 중심도량으로 삼아 명경신사(明鏡神祠)의 조영(造營)을 비롯하여 궁도장(弓道場)의 시설, 혹은 신목(神木)의 식수를 함. 재원(財源)은 본교 동창회(同窓會)의 갹출에 의함. (사업연도는 1940년도, 소요경비는 3,809원)
(*) 자료출처 : 『기원이천육백년축전기록(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錄)』 제10책, 468쪽.

이를 단서로 하여 살펴본다면 ‘청량대’ 비석 역시 ─ 타카하시 하마키치 초대 교장의 재임시기와도 고스란히 겹치는 ─ ‘청량대광장’의 조성공사에 맞물려 함께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는 것이다. 요컨대 ‘청량대’의 어원은 『채근담』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그 명명자이자 비석 휘호자(揮毫者)는 경성여자사범학교의 첫 교장이던 타카하시 하마키치였던 것으로, 결국 이 모든 것은 이른바 ‘기원 2600년 기념사업’이 남겨놓은 잔존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어쨌거나 이곳은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1942)의 작시(作詩)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筰, 1886~1965)의 작곡(作曲)으로 만들어진 경성여자사범학교 교가(校歌) 제2절에 “松風 冴ゆる 淸涼台(솔바람 맑게 이는 청량대) ……”라는 구절로 등장할 만큼 존재감이 뚜렷한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위상은 해방 이후 서울대 사범대학 시절에도 그대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대학신문』 1973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캠퍼스 이전(移轉)을 앞두고 대학가 명소순례(大學街 名所巡禮)(10)] 사대 청량대(師大 淸凉臺), 맑은 공기, 맑은 바람을 상징」 제하의 연재물에도 ‘사대의 명소 제1호’라거니 ‘사대의 대명사’라거니 하는 표현들이 거듭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사대 뒷동산’으로 불리워지며 ‘맑은 공기 맑은 바람’을 상징하는 청량대는 사대 명소(名所) 제1호. 그렇기 때문에 ‘청량’은 곧 사대의 대명사(代名詞). 교지(校誌)에도, 축제에도 ‘청량’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뜻을 살리고 있다.
합동연구실(合同硏究室) 뒤편 동산 한가운데에 이곳의 ‘청량함’을 알리는 바위 비석이 서 있지만 실은 동산 전체가 청량대(淸凉臺). 그 안에는 이조[조선] 때에 임금이 씨를 부리고 밭을 갈았다는 ‘선농단(先農壇)’의 유적도 있어 역사적 운치까지 지니고 있다.
그런 역사적 운치와 맑은 공기, 맑은 바람 때문에 가끔 이곳에선 시화전(詩畵展) 같은 행사도 열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이는 것은 ‘팔굉원(八紘苑)’에 세웠다는 ‘황풍흡팔굉 성덕반태양(皇風洽八紘 聖德伴太陽; 황풍은 팔굉에 두루 미치고, 성덕은 태양과 짝을 이루네 )’ 비석의 행방이다. 모르긴 해도 어느 시점엔가 파괴되거나 매몰 처리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것 역시 언젠가는 홀연히 우리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시절 군국주의의 악몽과 광기를 상기시켜 줄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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