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소장자료 톺아보기 41] 식민통치의 시각적 선전 –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매년 사회 전 분야를 조사하여 <통계연보> 를 발행했다. 통치 주체인 일본은 식민지 지배로 조선에 도로, 전기, 철도 등 근대적 시설이 마련되었고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 등을 실시하여 근대적 등기제도를 통한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숫자로 작성한 통계는 이러한 근대화 정책에 힘입어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지표인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통계연보> 작성에 그치지 않고 성장지표를 그래프를 통해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 통계엽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시정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발행한 시정기념엽서 총 38매 중 7매가 농수산물의 증산과 기반시설 등의 통계를 비교한 근대화 관련 관제엽서로 조선의 산업화를 선전하고 있고, 이와 함께 ‘조선의 통계 朝鮮之統計’를 따로 제작하여 조선의 호구戶口, 무역, 재정, 농업, 광산, 수산, 교통, 교육, 토지의 증가를 그래프로 이미지화하여 발행하였다. 일제는 각종 시각 매체를 통해 통치정책을 홍보하였는데 식민지 정부인 조선총독부가 대량 생산한 엽서는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성상 선전 효과가 컸으며 엽서라는 실용적 용도에 힘입어 보다 은밀하게 제국의 정책을 선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엽서에 새겨진 성장지표는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논리였던 근대화 관련 이미지였다. 즉 근대화를 환상이 아닌 실제로서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일제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소장자료 톺아보기 40]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 대용식 빵 배급 홍보물 카페에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혹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하는 모습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오히려 빵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가정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밥’이라고 하면 주로 쌀과 국, 그리고 밑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연상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 ‘밥이 보약’이라는 말에서 보듯 쌀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약으로 여겨 제때 밥을 챙겨 먹는 생활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단지에 넣어 신神으로 모시기도 했고, 심지어 흩뿌려 점卜을 보기도 하는 등 쌀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귀한 식량이었다. 쌀이 이토록 중요한 식량이었지만, 봉건시대에는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은데다가 지배 계급의 수탈로 인하여 일반 백성들이 날마다 먹기는 힘든 양곡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많은 땅을 차지하였고, 그 땅을 일본인 지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했다. 일본의 쌀 공급 기지로 전락한 조선은 수확량에 비해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만주, 북중국 등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의 식량수탈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식민지조선의 백성에게 ‘쌀밥’은 그야말로 먹기 힘든 ‘귀한 식량’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증산과 함께 공출에 심혈을 기울이다 전황이 악화되자, 양곡뿐만 아니라 주요 식료품의 수급도 원활하지 못해 소비를
뜨겁고 의로운 이름, ‘미스터 션샤인’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오.” 어린 소년부터 장년까지 가지각색의 복장을 착용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어설프게 집총執銃했지만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한국의 독립운동 관련 도서에서는 어디서나 한 번쯤은 마주한 대표적인 의병 사진이다. 이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기자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가 남긴 것으로,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당한 직후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 의병을 인터뷰하면서 찍었다. 의병은 일제가 이 땅을 유린蹂躪하기 시작한 때부터 해방이 찾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였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일본 군경에 잡혀 일제의 ‘성과기념’으로 기록된 사진이다. ‘영롱한 눈과 자신만만한 미소’라고 표현한 결의에 찬 의병의 모습은 맥켄지가 촬영한 장면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박제되어 책으로만 접하던 이 사진 한 장이 201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방송사에서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무명의 의병들’이라는 기획으로 ‘의병 사진’을 소재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제작해 방영한 것이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고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볼거리 많은 연출로 인기리에 방영되었는데 몇 가지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기 직전의 암울한 대한제국 시기, ‘자유’를 위해 이름도 없이 싸우다 사라진 이들의 기록을 극화한 경우가 드물었고, 다양한 계층이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 보여주기
[소장자료 톺아보기 38]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 보여주기 • 강동민 자료팀장 변화된 경성시가, <반도의 취록半島の翠綠>, 1926년 1926년 조선총독부 조선산림회에서 발행한 <반도의 취록>에 삽입된 경성시가의 모습. 극도로 낙후하고 정체된 조선 사회가 식민지 지배를 통해 경제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지배의 정당성을 공간의 변화를 통해 홍보하였다. 서당과 보통학교, <조선총독부시정2주년기념엽서>, 1911년 ‘근대화’를 담당할 인력양성은 신식 교육의 보급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선전하는 모습. 상단의 사진은 서당의 풍경을 묘사했다. 갓을 쓴 훈장을 중심으로 툇마루에 책을 펼치고 앉은 댕기머리 아이들 뒤로 창호지가다 뜯어진 방문과 마루 아래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짚신이 눈에 띈다. 반면에 하단의 이미지는 양복을 입은 교사가 칠판 앞에 서 있고 학생들이 줄지은 책상에 책을 펼쳐 칠판을 보며 앉아 있다. 교실의 주변은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사진그림엽서가 정보전달 매체의 역할을 넘어 팽창하는 일본 제국주의를 선전하기 가장 좋은 매체로서 활용도가 높았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근대화’에 관한 사진엽서가 수없이 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백운동 일대 조림지 변화 모습, <사진첩조선>,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사진첩조선>에 삽입된 사방조림지 비교 사진. ‘조선총독부 시정1주년기념엽서’, <애뉴얼리포트>등 일제가 선전하는 홍보물에 자주 등장하는 사진으로 창의문 안에 있던 백운동(白雲洞)의 식림사업 초창기와 10여 년 후의 모습을 비교한 것이다. 황무지 같은 조선을 푸른 숲으로 가꾼 것은 식민지지배의 혜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러일전쟁 시기부터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소장자료 톺아보기 36]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전시체제기에는 병역법 실시와 배급통제를 위한 인구조사도 빈발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본제국은 때때로 일반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내는 수단의 하나로 국가적인 축전이나 큰 행정사업을 치른 다음에는 이와 관련된 기념장(記念章)을 제정하여 이를 수행했거나 관여했던 모든 이들에게 수여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기념장 발행 연혁표를 살피다 보면, 이른바 ‘국세조사(國勢調査; 인구총조사, 詮察斯, census)’라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1921년 6월 16일에 제정된 ‘제1회 국세조사기념장(대정 9년 10월 1일)’과 1932년 7월 16일에 제정된 ‘조선 소화 5년 국세조사기념장(소화 5년 10월 1일)’,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거의 10년의 격차를 두고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기념장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도 식민지 조선(朝鮮)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기념장은 왜 만들어졌던 것일까? 1885년에 설립된 국제통계협회(國際統計協會, ISI)는 일찍이 구미 각국에서 근대적인 인구총조사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여 이에 대한 국제표준화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00년의 같은 날을 정하여 일제히 총조사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부분의 ‘문명국(文明國)’에서는 끝자리가 ‘0’인 해에 10년 주기로 국세조사를 벌이는 방식이 서서히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일본제국에서도 1902년 12월 1일에 법률 제49호 「국세조사(國勢調査)에 관(關)한 법률(法律)」을 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10개년에 매1회 국세조사를 시행하며, 제1회 국세조사는 1905년에 실시하고, 다만 제2회에 한하여 만 5개년에 해당하는 때에, 다시 그 이후에는 10년마다 시행”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 국세조사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소장자료 톺아보기]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 강동민 자료팀장 일본 황태자 한국방문기념엽서 東宮殿下御渡韓紀念 1907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일본 황태자(후일다이쇼)가 한국 ‘시찰’을 목적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하자이를 기념해 발행한 엽서. 이 ‘시찰’은 통감 이토가 한국내의 반일 정서를 완화시키고 황태자 이은李垠의 일본유학을 성사시켜 볼모로 데려가기 위해 기획되었다. 일장기와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진이 대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을사늑약’, ‘정미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위세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이완용과 역대 통감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발행한 사진엽서. ‘욱일旭日’을 상징하는 배경 그림에 역대 한국통감과 ‘병합’의 일등 공신인 이완용의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부터 ‘병합조약’ 체결까지 적극 가담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특히 ‘병합조약’은 총리대신 이완용이 조약안을 순종에게 보이고 각 조항을 설명한 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이 가결되는 형식이었는데, 이 조약안은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미 7월 말부터 이완용을 앞세워 내각 전원의 동의를 얻도록 공작을 벌인 결과물이었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송병준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송병준은 친일단체 일진회가 조직될 때 핵심 인물로 총재를 지냈다. 일진회는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적극 지지하고 친일 여론을 환기시키며 나아가 친일정부를 구성하여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 수행에 협조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을 지내면서 헤이그특사 사건과 관련하여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또한 1907년 정미조약에
청년훈련소가 된 학교
[소장자료 톺아보기 34] 청년훈련소가 된 학교 • 강동민 자료팀장 1. 교육강령 3대 목표 앞에서 졸업기념 사진 촬영, <전주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 1941년 ‘내선일체를 통한 황국신민의 육성’을 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일제는 교육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국체명징國體明徵(‘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명확히 하는 것)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은 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인고단련忍苦鍛鍊(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도록 수양하는 것) 2. 나무로 만든 총을 들고 군사교육훈련을 하는 국민학생들, <싸우는 조선戰ふ朝鮮>, 1945 유사시 조선 학생들을 최후 3. <월간 소국민>, 1945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발행한 국민학생용 잡지. 1943년 12월에 창간되었으며 일본어로 제작하였다. 전시국가총동원체제에 따라 전시상황에 관련된 글, 사진,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4. 군복 차림인 교련 교사의 모습, <예산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 1938년 현역 장교가 학생들의 교련 수업을 담당하여 군대식 실전 훈련을 진행하였다. 5. <학교교련교과서>, 육군성 병무과, 1943년 각종 제식 훈련의 모습을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천황’을 위한 삶을 강요시켰던 일제는 학생들에게 이른바 ‘결전교육 실시’라는 명목으로 군사훈련을 강제하는데 이르렀다.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무조건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게 한 것이었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는 轟く轟く足音は 나라를 위해 상처 입은 お国の為に傷ついた 용사를 지키고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단행본으로 출판됩니다.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단행본으로 출판됩니다. • 김종욱 기획위원 용산보병연대 전경(연구소 소장자료) 군기수여식 당시 용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군기(욱일기) 조선사진화보(조선사단창설기념호)1916.11 효창원(스키장시험 사진) <매일신보> 1929.1.10 효창원 골프장과 조선인 소년 캐디, <조선> 조선총독부 1925 용산정거장(용산역) 전경(개인소장자료) 한강가교공사(1899년), <조선철도사> 제1권 1929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017년 12월 용산청파동으로 이전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용산 일대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이 대규모 병영을 조성하고 각종 군사시설을 세우면서 침략전쟁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그후 100여 년 간 이방인의 땅이자 외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연구소와 박물관은 일제침략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용산의 어두운 역사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주요사업의 하나로 추진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고 전파하기 위해 현장답사와 청소년·시민강좌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침략사에 대한 현장답사는 일본 시민사회에도 입소문이 나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다수 참여하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정착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된 상태이지만 상황이 호전되는 대로 재개할 예정이며, 우선 그간의 성과를 정리하여 용산의 옛 모습을 책으로 만날 수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일본군 병영지 일대의 변천사, 용산연병장과 남영동의 지명 유래, 용산역의 설치 연혁,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시기 효창원의 수난사 등 용산에 얽힌 다양한 일화를 담은 <용산,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 두 권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답사와 강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각종 문헌자료를 섭렵하여 꼼꼼하게 분석하고 연구소가 소장한 희귀자료를 활용하여 용산의 근현대사를
‘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소장자료 톺아보기 33] ‘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 강동민 자료팀장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동력 확보는 당연한 수순이다. 일제는 이렇게 필요한 노동력을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해 전쟁을 뒷받침하려 했다. 강제동원의 형태는 여러 방식이 존재했는데 ‘근로보국대’도 그중 하나다. ‘근로보국’이란 ‘힘써 일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일제는 성별·계층·나이를 가릴 것 없이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동원 대상은 14~50세 남자와 14~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주 임무는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는 공출이나 군사상 필요한 토목 건축·운반 작업에 대한 부역, 지역 단위의 공공 이익과 필요에 의한 작업에 대한 부역, 관 알선이나 징용 등 노무 인적 자원 보급이었다. 일제는 1938년 6월 ‘학생생도의 근로봉사작업 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발표하고 학생들을 근로보국대에 편입시켰다. 학생들의 경우 학기 중에는 학업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근로보국’ 활동은 주로 방학에 이루어졌지만, 중학교나 전문학교에는 방학을 ‘심신단련’ 기간으로 부르고 방학이라는 관념을 아예 없애 버렸다. 방학은 전쟁을 치루기 위해 후방에서 ‘땀을 바치는’ 시간이 되었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근로보국 활동을 학기 중에도 실시하게 되고 아예 ‘근로보국’을 정식과목으로 편입하여 성적까지 매겼다. 1941년 이후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을 시행하여 모집, 관알선 등 단계적으로 확대 편성하였다. 특히 1943년부터는 공장·사업장의 손쉬운 작업은 근로보국대의 노무로 충당할 것이 지시되면서 그 동원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는 조선 내의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
[소장자료 톺아보기32]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 • 강동민 자료팀장 1. 금1원, 2. 금5원 애국채권 1943 / 1944 가난한 조선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쌈짓돈마저 끌어모으기 위해 1엔이 나 5엔짜리 소액채권을 발매했다. 1엔짜리 애국채권은 할증금이 많 고 당첨률도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행심을 이용한 채권 판매 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 데에는 저명한 친일파들의 대대적인 가두 판매도 일조했다. 3. 할증금부 전시보국채권, 1942 채권 하단에 ‘부표 25조 087813’이라고 써있는 부분을 추첨 할증금을 지불할 때 잘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전시보국채권은 추첨, 할증금 이 10엔권 1등에 1만 엔이나 된다. 이러한 방식은 정기예금에도 도입 되어 강제저축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4. 필승국민저축표, 1944 애국반 반장에게 저축을 했다는 확인도장을 받아야 했다. 5. 채권 판매를 벌이는 친일파들, <매일신보>, 1941년 9월 8일자 1941년 9월 7일 친일파들이 모여 총후보국을 통한 ‘성전완수’를 위해 ‘채권가두유격대’ 를 조직하여 경성 시내 여러 곳에서 채권 판매에 앞장섰다. 6. 채권가두유격대, <신시대>, 1941년 10월 현재덕이 그린 이 그림은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윤치호, 이숙종 등이 전시애국채권 을 가두판매하는 장면이다. 일본은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전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다. 따라서 침략전쟁의 지속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계속된 전쟁으로 자금의 여력이 없던 일본은 결국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