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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905년 7월 러일전쟁 일본측 육군 수뇌부 8인의 봉천 회동 사진

2025년 11월 26일 71

[소장자료 톺아보기 75] 1905년 7월 러일전쟁 일본측 육군 수뇌부 8인의 봉천 회동 사진 이번 달에 소개하는 자료는 류영철 회원(대구 지부)이 기증한 ‘러일전쟁 일본측 육군 수뇌부 8인의 회동 사진(1905.7.26)’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측 육군 수뇌부 전체가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한 사진이 희소하여 역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 또한 회동 장소, 일시와 참석자 이름이 뚜렷이 박혀 있다. 즉 사진 한켠에 “於奉天 明治三十八年(1905) 七月二十六日 黑木大將(구로키 다메모토) 野津元帥(노즈 미치즈라) 山縣元帥(야마가타 아리모토) 大山元帥(오야마 이와오) 奧大將(오쿠 야스카타) 乃木大將(노기 마레스케) 兒玉大將(고다마 겐타로) 川村大將(가와무라 가게아키)”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사진이 좋은 재질로 표구되어 있음을 비추어볼 때 이 사진의 위상이 당시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하게 한다. 1904년 1월 1일 일본군 제3사단이 러시아 제1태평양 함대의 근거지였던 여순항을 함락한 것을 필두로 육상과 해상 전투 양쪽에서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격퇴하였다. 1905년 2~3월에 전개된 격렬한 봉천(현재의 심양) 전투에서 일본군이 쿠로파트킨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을 선양 북쪽으로 밀어부쳤고 1905년 5월 쓰시마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침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1905년 7월 러시아군과의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자 일본군 참모총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①)가 봉천 일대의 전략 요충지를 시찰하였다. 1905년 7월 25일 봉천성에서 야마가타 참모총장을 영접하기 위해 중국에 진주해 있던 육군 수뇌부 대부분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야마 이와오 만주군 총사령관(④), 고다마 겐타로 만주군 총참모장, 구로키 다메모 제1군 사령관, 오쿠 야스카타 제2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키 제3군

태극기 또는 태극 문양이 새겨진 우리나라 우표

2025년 10월 1일 285

[소장자료 톺아보기 74] 태극기 또는 태극 문양이 새겨진 우리나라 우표 우리나라 근대적 우편제도의 시작은 1884년 갑신정변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개화파의 일원인 홍영식이 일본과 미국의 근대 우편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고종의 명을 받아 1884년 3월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창설했다. 이후 인천분국을 설치하고 우정국사무장정, 우정국직제장정 등을 제정해 체계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위탁해 그해 8월 최초 한국 우표 원판 5종을 완성했고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우정 업무를 개시하여 2만여 장의 우표를 제작, 유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2월 4일 우정총국 낙성식 축하연에 즈음해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의 개화파가 일본의 지원하에 정변을 일으켰으나 결국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우정총국 총판을 맡은 홍영식이 피살되어 우정총국은 개설 20일 만에 폐쇄되었다(1884.12.8).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5월 우체사(郵遞司)가 개설되면서 우편업무가 재개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부산, 원산 등 주요 항구에 우체사가 설치되었으며,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하며 국제적인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에 태극(太極)보통우표, 전위첨쇄(錢位添刷) 보통우표, 이화(李花)보통우표, 독수리보통우표 등 다양한 일반우표가 제작되었다. 대한제국의 우편업무가 정비되어갈 무렵 일제는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기에 앞서 한국의 통신권을 먼저 빼앗았다. 즉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韓日通信機關協定)을 강제 조인하여 대한제국의 통신권을 박탈한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우편 기구가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고 대한제국의 우표와 엽서도 6월까지만 이용하고 이후에는 일본 우표와 엽서만을 사용토록 강제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은 미군정청 통신부를 설립하여 우편 행정을 관리하였고

순국오열사(殉國五烈士) 인쇄물

2025년 8월 26일 323

[소장자료 톺아보기 73] 순국오열사(殉國五烈士) 인쇄물 이번 호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한국광복청년회(韓國光復靑年會)에서 제작한 순국오열사 인쇄물이다. 이준(李儁)을 중심으로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의 사진이 있고, 왼쪽에는 각 인물들의 약력이 간략히 적혀있다. 상단 중앙에 태극기가 위치하고 각 사진 주변에는 무궁화 문양이 감싸고 있다. 다만 제작일자는 기재되어있지 않다. 먼저 순국오열사의 이력을 전재한다. 이준(1859~1907) 선생 서기 1907년, 전 평리원 검사로 관계를 떠난 선생은 우국단심에 불타는 동지 이상설(李相卨)선생과 동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여 침략자 왜적의 비행을 봉쇄하려고 고종황제의 밀칙(密勅)을 받들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대기중인 동지 이위종(李瑋鍾) 선생과 마침내 동년 4월에 국경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약소국 평화를 유지하려는 회의는 아니었으니 그들은 세 선생을 한국의 정식 대표임을 끝끝내 거부하다가 최종일인 7월 5일에야 겨우 이선생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우국지성에 불타는 선생의 일언일구는 왜적 대표에 폐부를 찔러 당황케 하였으나 선생의 정의를 인식치 못한 열국 대표는 도리어 왜국의 비행을 지지하려 하나 통분한 선생은 그들 면전에서 할복하여 정의를 절규하시어 열국 사신의 간담을 서늘케 하시고 순국의 충혼이 되시었다. 안중근(1880~1910) 의사 1880년 황해도 출생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열렬한 애국지사이었다. 침략자 왜적에게 소위 5개조약(을사늑약), 7개조약(정미조약) 등으로 국운은 날로 기울어짐에 통분한 의사는 조약의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세 발의 총탄으로 즉사시키고 조선만세를 고창하며 분연히 포박되어 1910년 3월 26일 의사는 교수형의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김창숙, 오세창의 휘호와 김구 사진, 그리고 신익희의 서신

2025년 7월 30일 356

[소장자료 톺아보기 72] 김창숙, 오세창의 휘호와 김구 사진, 그리고 신익희의 서신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모두 심정섭 지도위원이 기증해준 소장품이다. 위 자료와 관련된 네 분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은 혁신유림으로 일제와 이승만 독재정권에 강력히 항거한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호는 심산(心山), 벽옹(躄翁)이며 자는 문좌(文佐)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 130여 명을 규합해 이들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한중호조회 결성에 힘썼고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천고(天鼓)』,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했다. 1927년 상해 조계에서 일본 영사관원에 체포되어 압송된 후 14년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두 다리가 마비 되어 출옥했다. 광복 후 일제강점기 일제에 협력한 유림계를 개혁하는데 진력하여 1946년 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했다.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김구와 함께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저항한 투쟁을 한평생 지속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했고, 1956년 이승만 정권이 효창공원의 삼의사묘역 이전을 추진하자 이를 적극 막았으며 1959년 보안법 반대운동을 펼치며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1987)

2025년 6월 30일 319

[소장자료 톺아보기 71]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1987)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심정섭 연구소 지도위원의 기증자료의 하나로 1971년 5·25 총선 선거 공보물 8점과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획책방지 전단지이다. 최근 무사히 끝난 6·3 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소개할 가치가 있는, 시의적절한 기증자료라 생각된다. 1971년은 대선과 총선이 한 달 남짓 간격으로 치러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다. 1969년 3선개헌 이후 장기 집권을 꾀하는 박정희 정권·민주공화당과 이를 견제하려는 신민당이 대선과 총선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 94만 표 차이로 근소하게 승리했지만 야당과 시민사회의 민주화 열기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총선에서도 그 여세를 몰아 신민당이 89명(지역구 65명, 전국구 24명)을 당선시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113명(지역구 86명, 전국구 27명)에 비해 24명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좁혔다. 또한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뚜렷해 도시와 농촌 간의 정치 성향 괴리가 극명했으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야당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면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열었고 민주화 세력의 역량이 한층 강화되어 갔다. 전북 제5지역 선거구(진안군)와 전남 제7지역 선거구(담양·장성군)에서도 여촌야도 현상이 반영되어 두 선거구 모두 민주공화당 후보인 전휴상, 고재필이 당선되었다. 두 선거구의 득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농촌지역이었던 진안과 담양·장성에서 여당이 각각 60%, 53%로 과반을 넘겼다. 하지만 담양·장성 선거구에서 나타나듯이 전라도에서 양당 대결로 가면 53% 대 47%로 차이가 좁혀짐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담양·장성

백강 조경한 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와 사진, 유묵

2025년 5월 26일 417

[소장자료 톺아보기 70] 백강 조경한 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와 사진, 유묵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 선생이 2012년 5월 제1차 기증을 필두로 하여 14년간 82차에 걸쳐 7천여 점의 자료를 기증했다. 이러한 심위원의 기증자료 중 중요한 것을 간추려 두 차례에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것은 심위원의 외조부인 백강 조경한 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와 사진, 유묵이다. 심정섭 위원은 초등학교 시절 “내가 잃어버린 자료를 모아 독립운동 연구를 해보라”는 외조부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1956년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광주리 속에서 대동신문사에서 발간한 잡지 『대동평론(大東評論)』 창간호(1946.3)를 발견하고서 집어들었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김구 선생과 외조부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18명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이때부터 심위원의 역사 사료 수집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1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했는데 본인이 가장 아끼는 자료로 역시 백강 선생의 임정 시절 자료와 유묵을 꼽고 있다. 지난해 12월 심위원이 우리 연구소에 연락해서 백강 선생의 임정 시절 자료와 사진, 유목 등을 포함한 111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서 조세열 상임이사와 강동민 자료실장 등이 심위원 댁을 방문해 위 자료들을 수령했다. 다음에서 백강 조경한 선생의 독립운동 이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경한(趙擎韓, 1900~1993) 선생의 호는 백강(白岡), 본명은 종현(鍾鉉)이고 이명으로 안훈(安勳)·안일청(安一靑)·조경한을 썼다.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단에 가입하고 국내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계명학원(北京啓明學園)에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庚戌國賊)

2025년 4월 25일 941

[소장자료 톺아보기 69]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庚戌國賊) 1910년 7월 23일 서울에 부임한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강제병합 조약 초안의 대강과 병합 후의 통치방침까지 지시받았다. 데라우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의 저항 언로를 막기 위해 『대한민보』와 『대한매일신보』 등을 발행금지시켰다. 7월 29일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을 내부대신으로 한 이완용 내각을 새로 조각하였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강제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논의한 뒤, 8월 18일 대신들을 모아놓고 내각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경술국적’이라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장 이병무,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황족대표 이재면(이희), 그리고 3·1운동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작위를 박탈당한 중추원의장 김윤식이 조약에 찬성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 내각이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해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통과시켰다. 곧바로 양국의 전권위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강제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민의 격렬한 반항을 염려하여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가둬놓은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이른바 강제병합조약의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善策)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2025년 3월 28일 1615

[소장자료 톺아보기 6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하고 1907년 7월 20일 순종을 즉위시켰다. 일제는 한국의 내정을 철저히 지배하기 위해 정미 7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완용 친일내각은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해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및 조인하였다. 이 조약을 정미 7조약, 한일 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등으로 다양하게 일컫는다. 그 조문은 다음과 같다. 한일협약 일본정부 및 한국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다음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사무와 구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시행할 것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할 것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을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은 이를 폐지할 것 한편 정미 7조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한일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함께 체결되었으나, 공포되지는 않았다. 이 각서에는 재판소와 감옥의 설치를 강제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실행사항을 담고 있었다. 정미 7조약과 실행 각서의 체결로 국가를 보위하는 군사력을 빼앗기고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

2025년 2월 26일 2908

[소장자료 톺아보기 67]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 을사늑약 체결 120주년을 맞아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한 대표적인 친일 대신들인 을사오적(乙巳五賊), 정미칠적(丁未七賊), 경술국적(庚戌國賊) 15인의 이력과 그들에 대한 소장자료를 세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을사늑약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날 수옥헌(현재의 중명전)에서 고종에게 일왕의 국서를 전달했다. 11월 15일에 하야시 일본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제시하고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이토는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회유하여 조약 조인에 찬성하게 하고 반대하는 국민들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고종에게 ‘보호조약안’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 보호국이나 사실상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침략의 원흉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설치되어 식민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완용(1858~1926)은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각각 학부대신, 총리대신, 총리대신으로서 모두 관여한 대표적인 매국노(賣國奴)이다. 경기도 광주 태생으로 생부는 이호석이고 양부는 판중추부사 이호준이다. 24세에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서서 승승장구했다. 1896년 2월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했고 그해 7월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을 맡기도 하는

『소년세계』 제11권 제1호(1905년 1월) 신년대부록

2025년 1월 24일 467

[소장자료 톺아보기 66] 러일전쟁 참전 육군 무장 이름 알아맞히기 현상 공모 『소년세계』 제11권 제1호(1905년 1월) 신년대부록 초·중등생을 대상으로 하는 아동잡지 『소년세계』는 러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1905년 1월, 신년호 부록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 육군 지휘관의 사진 88장을 실은 대형 화보를 제공하였다. 한가운데는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육군총사령관을 배치하고 다음 동심원에는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 총참모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구로키 다메모토(黒木爲楨) 오쿠 야스카타(奥保鞏)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육군대장 등등 11명을 두었으며 나머지 76명의 육군 군인 사진은 16개의 줄에 맞추어 방사형으로 펼쳐놓았다. 전체적인 사진 배치를 볼 때 흰 바탕에 붉은 태양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욱일기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들 사진 안에는 1번에서 88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사진 주위에는 빙 둘러서 글이 빽빽이 인쇄되어 있는데 이것은 메이지 일왕이 1904년 2월 10일 공포한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露國に對する宣戦の詔勅) 전문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왕좌에 앉은 일본 천황인 본인은 이에 나의 충직하고 용감한 모든 신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라고 시작하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의 요지는 러시아의 만주 병합이 한국의 독립유지와 극동평화를 침해하기에 일본이 러시아에 화평안을 여러 차례 제시했으나 러시아가 번번이 거절하자 항구적인 평화 회복을 위해 무력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부록의 해답법에 관하여>(111쪽)에는 신년 대부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부록의 연대기(聯隊旗)에는 현재 유명한 육군 무장이 모두 88명이 나오는데 이들 무장은 여러분이 이상적인 인물로 평소에 쉽게 알 수 있기에 시험삼아 그가 누구인지 맞춰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