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 녹취 소설 형식으로 옮겨
100년 전 조선공산당 6·10투쟁특별위원회 책임자 권오설 후손 등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6년 6월 10일, 이른 아침부터 순종의 장의행렬이 지나가는 길은 추모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일제는 시민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단단히 준비했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을지로 2가, 을지로 4가까지 도로 양쪽앞 열에 ‘의장대’ 명목으로 무장한 기마경찰과 헌병을 도열시켰다. 그 다음 열에는 고등보통학교생과 전문학교생 2만1천명을 배치했다. 일반시민 추모객들은 그 뒤편에 자리 잡았다. 오전 8시, 추모객들의 호곡 속에 상여가 돈화문 앞을 출발해 장지인 금곡을 향해 종로3가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8시30분 장의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통과할 무렵 동양루 쪽에서 이선호가 도로 중앙으로 뛰어나오면서 한 뭉치의 ‘격문’을 뿌렸다. 그리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외쳤다. “조선독립만세!”
6·10만세운동은 일제의 철통같은 사전·사후 탄압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하지만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실천적으로 연대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1927년 2월 신간회가 성립할 수 있게 한 디딤돌이었다. 분열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세력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국민 주권을 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6·10만세운동은 순수한 학생운동으로만 기억돼 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를 두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온 우리 사회 분위기 탓에 만세운동의 계획과 준비, 진행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주도적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회주의 이념을 발판으로 항일투쟁,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외면하고, 나아가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 바깥으로 밀어내 왔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펴낸 ‘결국, 뿌리로 산다-후손의 기억으로 본 독립운동가와 가족의 삶’은 이 문제를 후손들의 육성으로 고스란히 짚어낸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사회의 외면은 그 후손들에게 삶의 질곡으로 이어졌다. 조선공산당의 ‘6·10투쟁특별위원회’ 책임자 권오설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도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북쪽에 남았다.
권오설의 형 권오기와 가족들은 6·25전쟁 와중에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알지 못하게 됐다. 권오기의 아들 권대용은 권오설의 양자가 됐다. 권대용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집안에 남은 유일한 남자 후손이던 권대용은 작은 문방구를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펴낸 ‘결국, 뿌리로 산다-후손의 기억으로 본 독립운동가와 가족의 삶’은 이 문제를 후손들의 육성으로 고스란히 짚어낸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사회의 외면은 그 후손들에게 삶의 질곡으로 이어졌다. 조선공산당의 ‘6·10투쟁특별위원회’ 책임자 권오설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도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북쪽에 남았다.
권오설의 형 권오기와 가족들은 6·25전쟁 와중에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알지 못하게 됐다. 권오기의 아들 권대용은 권오설의 양자가 됐다. 권대용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집안에 남은 유일한 남자 후손이던 권대용은 작은 문방구를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정자연 기자
<2026-06-10>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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