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최근 조선정판사사건 재심 공판에서 무죄 선고 받은
이관술 선생과 관련한 해방 직후 신문기사
조공 이관술, 민족통일운동 현황 문답
조선공산당 이관술과의 문답은 다음과 같다.
(문) 귀당(貴黨)은 민족통일운동의 현황이 어느 정도로 진전되었다고 보는가?
(답) 대중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준비되었다. 다만 다른 당들의 수뇌에서 고집을 세우고 있으므로 지연되고 있는데 그들 중에서도 곧 고집을 버리리라고 믿는다.
(문) 귀당에서 민족통일의 영도권은 어느 세력이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또 그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답) 근로대중이 영도권을 잡아야 함은 말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과거 일본제국주의 반대투쟁에 있어서 가장 선두에서 싸웠으며 또 앞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와 싸우는 데 있어서도 가장 철저하고 용감한 층이 근로대중이므로 그들이 영도권을 잡아야 함은 당연하다.
(문) 귀당에서는 임시정부와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며 또 임시정부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답) 자본가 지주계급의 옹호를 받고 있다고 보는데 우리 민족통일원칙을 찬성한다면 다 같이 일할 수 있다고 본다.
(문) 귀당에서는 우익정당(右翼政黨)과 타협 내지 협조할 의사와 용의가 있는가?
(답) 물론 있다.
(문)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와는 다르다고 보는가? 다르다면 어떻게 보는가?
(답) 인민공화국은 국호요, 인민위원회는 정치의 기구이다.
(문) 일부에서는 인민공화국 또는 인민위원회와 귀당과의 관계가 투명치 않다고 하여 귀당이 즉 인민위원회라고도 보는 이가 있는데
(답) 이것을 같다고 보면 상식 부족이다. (문) 일부에서는 귀당의 정강이 급진적이고 귀당의 행동이 너무 편협 과격하다고 비난하는 편이 있는데.
(답) 우리 당의 당면 주장을 보고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당면 주장은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이것을 과격이니 편협이니 한다면 그는 반동적 부류에 소속된 인간들일 것이다.
(문) 민족통일에서 좌익을 제외하고 탄압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편도 있는 듯한데.
(답) 이것은 팟쇼주의자 이외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관찰할 때에 탄압으로서 성공시킨 예가 있는가?
(문) 38도로 양분된 조선에 통일정권을 수립하자면 어떠한 방법이라야 하겠고 또 38도선 철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해야 할 것인가?
(답) 민족통일전선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 정권이 아니면 아니 된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원칙적이어야 하며 밑으로부터의 민중을 토대로 하는 통일전선을 구성하여야 한다. 이와 반대되는 방법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위로부터 정치브로커적 친일분자들도 한데 포함하는 비원칙적인 통일방법이다. 38도선 철폐문제는 38도선만이 문제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원칙적인 밑으로부터의 통일 정권을 수립하는 데서만 가능하다.
(문) 일부에서는 귀당의 태도는 친미적이 아니라고 하여서 귀당이 국제적 현실을 정시(正視)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답) 우리 당은 친미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 있어서는 특별히 우리는 미국과만 친선하자고 하지는 않겠다.
(문) 일부에서는 아직도 조선의 모든 조건은 공산주의이론이 적용될 만치 성숙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답) 물론 그리하므로서 우리 당에서도 공산주의사회를 곧 조선에 실현시키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에서도 누차 말하였지만 민중적 토대 위에 원칙적으로 통일된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 수립이 우리 당의 당면과제라고 생각한다.
(문) 귀당의 실세는
(답) 현재 당원이 약 8만 명, 공산청년동맹이 약 7만 합해서 15만이니 전평(全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300만, 청총(靑總: 조선청년총동맹)의 80만, 전부(全婦: 전국부녀총동맹)의 10만이 우리 당을 지지한다고 보면 전부 합해 440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 최근 빈발하는 테러행동에 대하여
(답) 우리의 정치운동이 개인 중심의 테러행동으로서 통용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테러행동은 단연코 배격치 않으면 안된다.
(문) 일부에서는 인민공화국을 해체하여 임시 산하로 들어가라고 하고 또 인민공화국과 임정을 모두 해체하고 백지로 돌아가서 출발하라고 주장하는 편도 있는듯 한데
(답) 인민공화국은 대중의 요구이며 민족의 이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민 전체가 해체시키는 이외에는 어찌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원칙적인 대중적 민족통일전선의 구성으로서 해결되리라고 본다.
『서울신문』 1945.12.12
조공, 공보부의 정판사위조지폐사건 발표에 대해 성명 발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5월 15일 ‘군정청 공보부 발표’라는 제목 하에 조선경찰 제1관구 경찰청장 장택상 씨의 위조지폐사건에 대한 발표에 대하여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아래와 같이 성명함
1) 이 지폐위조사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이관술·권오직 양인이 관련되었다고 발표하였는데 이상 양인은 이 사건에 전연 관계없음을 단호 성명함
2) 이 사건은 관련되어 체포되었다는 14인을 모두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이라고 하였으나 발표가 사실과 상위(相違)가 있음을 지적함
3) 동 발표에 ‘해(該) 위조지폐 300만 원의 대부분은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위조한 것이다’라 하였으나, 근택빌딩 지하실에서는 인쇄기를 설치한 일이 일차도 없으므로 이 발표는 전연 부당한 것을 지적함
4) 동 발표에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명칭하에 당간부 및 당원이라는 칭호를 씌워 조선공산당이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나 있는 듯이 발표한 것은 더욱 기괴천만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은 단호히 이 사건과 호말(毫末: 털끝) 만한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러한 경제 혼란의 행위에 대하여는 가장 용감히 투쟁하였고 투쟁할 것을 다시 한번 천하에 공포함
5) 이 사건과 조선공산당 간부를 관련시킨 것은 어느 모략배의 고의적 날조와 중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휴회의 틈을 타서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국내 국외에 걸쳐 타락시키려는 계획적 행동임을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 당은 이 사건과 절대로 관계없으니만치 멀지 아니하여 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고 우리 당의 위신은 이러한 허위적 중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동요·미혹이 없을 것을 단언함
1946년 5월 15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 군정청 방문코 박헌영 질문
위조지폐사건에 관하여 공산당 대표 박헌영은 16일 오전 9시 군정청으로 러취 장관과 뉴맨 공보부장을 방문하였으나 마침 외출하였으므로 공보부의 크린 대좌와 경무부장 맥그린 대좌 등 양씨와 회견하고 15일 발표된 내용은 사실과 틀린다는 점을 들어 질문했는데 이에 대하여 맥그린 경무부장은 ‘이 사건에 당원이 관계되어 있는 것이지 공산당에서 한 일이라고 발표한 것은 아니다’고 답변하였다는데 박헌영은 공산당은 이 사건에 관계가 없다는 것, 체포된 사람 중에서 간부가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전연 객관적 사실과는 관계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점을 지적하여 이번 사건도 허구된 것으로 보니 장관의 재고려를 요청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군정장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회견을 끝냈다 한다.
『중앙신문』 1946.5.17
공산당 간부 이관술 씨 피체, 조국해방에 바친 그의 투쟁 반생
문제의 위폐사건의 혐의로 조선공산당 이관술 씨는 지난 7월 6일 오후 1시 종로 1정목 해방서점에서 경찰의 손에 체포되었다. 이씨는 일본제국주의의 탄압 아래 모든 사람이 공포 가운데 휘몰려 들어간 그 암흑의 시대에서도 감연히 일신을 민족독립과 삼천만 인민의 해방에 바쳐온 진정한 애국자인 만큼 이제 위폐사건의 혐의로 경찰의 손에 체포되매, 우리는 민족해방의 영웅이 가장 파렴치한 죄명으로 체포되었으니 그 사실 여부는 조사가 끝나는 대로 명백해질 것이지만 그의 과거 투쟁사를 들추어보아 그는 어떠한 인물인가를 알리기로 하겠다.
혁명투사가 되기까지
이관술 씨는 1902년 4월 25일 경남 울산 어느 농촌에서 빈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4세에 향리 소학교를 마치고 그 후는 일본 각지를 유랑하다가 24세에 동경사범대에 입학하여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 야마다 모리타로(山田盛太郞) 교수의 지도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연구하는 한편, 독서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실천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씨의 영민한 두뇌와 정열적인 천성은 학우들의 존경과 교수들의 찬사 가운데 1927년 봄 동경사범대를 졸업하고 즉시 귀국하여 동덕여고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본래 청렴 강직한 씨는 교직에 있으면서 항상 기회 있을 때마다 강렬한 투쟁터로 뛰어들기를 마음 깊이 맹서하였다. 그러자 1929년 때마침 광주학생사건이 돌발 하여 전국 학원이 물끓 듯 일제히 반일 봉기를 할 때 씨는 우선 보성중학과 동덕여고를 지반으로 강철의 조직체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씨는 일제의 혈(血)의 탄압을 문자 그대로 전신에 받아오면서 단 한 번도 소위 ‘전향’이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는 투사의 한 사람이다. 1932년 고 김도엽(金度燁) 씨와 함께 학생독서회를 조직하는 한편, 조정래(趙正來), 이순근(李舜根) 제씨와 함께 반제동맹을 조직하여 동경서 개최된 반제대회에 대표까지 보냈다. 1933년 불행히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만 1년간 감옥 안에서 신음하다가 보석 출옥되자 곧 혁명사업에 착수하였다. 1934년 9월에는 고 이재유(李載裕) 씨와 함께 완전히 지하투쟁생활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제 경찰이 사력을 기울여 씨의 행방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러나 씨의 신출귀몰한 지하생활은 세계에 이름 높은 일제 경찰진으로도 오히려 씨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이동안 씨의 피어린 고투와 눈물겨운 고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는 혁명운동
고투의 심연을 뚫고 한시라도 쉴새없이 혁명운동은 전개되었다. 씨의 손으로 만들어진 『적기(赤旗)』가 꾸준히 동지들 손에 들어올 때 동지들은 어디서인지 씨의 활동이 부단히 계속되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36년 12월 이재유 씨가 피검된 후로부터 일제의 이리떼는 한층 더 독아(毒牙)를 갈고 공산당의 전 조직을 파괴하려 하였다. 씨는 어느덧 이를 피해 강원도 산간으로 은신하여 엿장수, 머슴자리, 지게꾼 등으로 변장하여 적의 눈을 피해가며 드디어 다시 상경하여 이순금(李順今), 박진홍(朴鎭洪) 씨와 연락중에 또 다시 경찰의 추급한 바 되어 서울에 있지 못하고 이번에는 대구로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1938년 8월부터 경성지방과 연락해서 공장 가두의 조직을 확충하며 김삼룡(金三龍) 씨와 더불어 1939년의 메이데이 투쟁, 8월 1일의 반전투쟁에 관한 출판물을 작성, 배포하고 또 기관지 『콤뮤니스트』까지 발간하였다.
전쟁 말기로 들어가자 일제의 탄압은 절정에 달하고 혁명가의 투쟁 또한 더욱 맹렬하여갔다. 이관술 씨가 공산당 최고 지도자 박헌영(朴憲永) 씨는 만난 것은 이때였다. 1940년 씨는 박헌영 씨를 만나자 곧 그의 지도 아래 들어가서 출판 책임자로 활약하게 되었고 동년 5월에는 박씨의 지령으로 함경도 지방으로 내려가 함흥, 성진, 흥남, 주을, 청진, 회령, 아오지 등 가장 중요한 공업지대에 노동조합과 콤그룹을 조직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후 1941년 1월 연락차 상경하였다가 불행히 검속되어 1년 3개월의 언도를 받고 수감중에 병으로 1943년 12월 보석된 틈을 타서 다시 투쟁 와중으로 뛰어들었다. 씨는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려고 각방으로 헤매다녔다. 종로경찰서 앞에서 ‘구두수선자’로 변장하고 활동을 계속하였다는 일화는 이미 누구나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리하여 씨는 시골에서 ‘땜쟁이’ 영업을 하면서 투쟁을 전개하는 도중에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박진홍 여사 담: 시골 부인용의 잡화품을 진 이씨는 명랑한 혁명가
이 선생님의 한 제자로 또 동지로서 그분의 1931년부터 15년간의 지하운동생활을 말하자면, 너무나 많고 마음 아프나 그중 한두 가지 제일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말한다.
1차 출옥시 이재유 씨와 함께 의정부에서 만났는데 경남에서 온 수재민이라고 하여 중국인이 살던 집에서 돼지, 토끼를 치며 채소, 호박 장사를 하다가 이재유 씨가 검거당하여 그곳을 떠난 후의 생활은 전조선을 안 간 곳이 없도록 13도를 다니면서 동지들과 결합, 연락을 하다가 다시 검거당했다. 유치장에서 지낼 때 외부 동지들과 연락하는 편지를 쓰는 것을 감방에 있는 스파이가 밀고한 때문에 형사 수명이 달려온 것을 보고 그 편지를 씹어먹으려 했다. 형사들이 씨의 모가지를 꽉 쥐고 입을 억지로 벌려 편지를 빼냈으나 입에서 나왔을 때에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노량진에서 만났을 때, 그분은 고의바지와 등거리 적삼에 맥고모자를 쓴 농부로 등에 궤짝을 걸머지고 안에서 화장품, 실, 바늘, 빗 같은 시솔 부인용의 잡화품을 하나씩 꺼내더니 나에게 선물이라고 주는데 나도 출옥한 직전이고 그런 물건도 귀하였다. 길가에서 5전짜리 우동을 한 그릇씩 사먹고 이순금 동무와의 연락장소를 알려주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잊을 수 없는 것은 조그만 궤짝 밑에 기관지가 있었던 것이다.
『현대일보』 1946.7.10
참된 애국자 이관술 동지 – 조선의 참된 애국자는 누구인가?
정태식
양의 가죽을 둘러쓴 이리들이 군정부의 음험한 날개 아래서 제멋대로 난무하고 있는 오늘날의 남조선의 무정부 상태 속에서 고함쳐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누가 참된 애국자이냐?’ 하는 것일 것이다. 이완용, 송병준, 왕정위의 후계자 — 민족반역자 도배들이 정권을 휘둘러 현안과 독아를 벼리고 있다. 민족을 위하여 혈투하였고 혈투하고 있는 진정한 민주적 애국자들의 자유와 목숨을 노리고 있는 이 살풍경 가운데 참말로 지혜와 냉철한 판단과 용기로써 선과 악과 진리와 허위와 백과 흑을 — 또는 참된 애국자를 판단하여야 할 때는 이때이다. 조선의 장래는 의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관술 동지와 같은 애국자가 생존하는 한 그것은 광영할 것이다. 『독립』 편집인
오늘 조선에는 ‘애국자’가 많다. 물론 40년 동안 야수 같은 일본제국주의의 쇠발굽에 짓밟혔다가 해방된 만큼 인민대중의 솟아오르는 애국의 열정을 그 누가 금할 수 있으며 자유와 주권을 찾으려는 그 열망을 누가 능히 누를 수 있으랴? 과연 인민 속으로부터 터져 오르는 민주건국의 고함과 그 고함소리를 대표하는 참된 지도자들의 외침은 왜적에 짓밟혔던 우리 조선의 산하를 뒤흔들고 있다. 이 민족적 조류의 틈에 가짜 애국자도 또한 준동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시대에는 조선의 젊은 청년을 싸움터로 몰아넣었고 우리의 우방 미영중소의 같은 청년의 가슴에 피를 흘리게 하고 쓰러지게 하던 전쟁 선동자도 강도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영구화할 목적으로 조선민족 해방운동의 투사들을 피에 주린 원수의 뱃속에 장사질하던 주구도 약탈자 일본제국주의와 손을 맞잡고 같은 동포인 근로 인민 대중의 피를 빨아 사복(私腹)을 부르게 하던 반동적 자본가와 반동적 지주들도 오늘은 애국자로 가장하고 우국지사연하고 있다.
이들 민족의 적이 애국자인 체하고 역사의 조류에 반역하는 반동도배들이 민주주의자인 것 같이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삭풍한설에 비로소 송죽의 절개를 아는 바와 같이 탄압의 역경 가운데에 비로소 참된 애국자의 진가를 아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각도 쉬지 않고 오직 해방을 위하여 혈투를 전개해왔다. 동지에게는 이 붉은 일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실로 이를 위하여 그의 젊은 반생은 바쳐온 것이다. 동지는 부귀도 모르고 지위도 모르고 또한 명예도 모른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최고 인테리(지식인)가 엿장사, 땜쟁이 노릇을 하며 적의 눈을 피하면서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싸웠다. 나는 여기에서 동지의 곤란과 희생에 쌓인 피눈물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역사를 다 기록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였다.
다만 나에게 떠오르는 9년 전 이달 1937년 7월 28일 밤에 일어난 동지의 위대한 민족애에 끓어오르는 민족해방을 위한 희열을 기록하려 한다. 씨는 강도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조선을 철의 계엄하에 둔 때였다. 당시 일본 경찰은 혈안으로써 동지의 소재를 추구하던 때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동지는 그 계엄 하의 서울에 있어서 운동을 전개하면서 막 2일 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영애 이순금 동지와 사무에 대한 연락을 하기 위하여 여의도에서 상봉한 것이다. 연락을 끝마치고 가려 하니 벌써 해는 저물었고 한강의 배는 없어졌고 쏟아지는 폭풍우에 한강물은 불어 탁류는 흐르고 있다. 어찌 할까 하고 막상 가려던 차에 피에 주린 적은 벌써 알아차리고 비행장 근처를 경계하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여의도 비행장 일실에 갇힌 바 되었다.
혁명적 열정과 냉철한 과학적 이성에 빛나는 동지에게는 벌써 이 전쟁이 심상한 전쟁이 아니며 반드시 세계적 대변혁을 가져올, 따라서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절호의 시기인 것을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시기를 놓치고는 우리 민족의 해방 기회는 다시 언제 올지 모르며 이런 때야말로 혁명가의 모든 역량을 희생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동지는 순금 동지에게 도망할 뜻을 말하고 야반에 몰래 피하여 강가로 갔다. 풀은 우거지고 소낙비는 내리고 한강에는 탁류가 물굽이를 치고 있다. 도저히 보통의 상식으로는 건너갈 수 없었다. 이때에 동지에게는 조국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냐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냐? 이 두 길 중 한 가지밖에는 없었다. 그는 과감하게 탁류에 몸을 던졌다. 중류에서 사나운 물굽이에 기진맥진하여 떠내가던 중에 불행 중 다행으로 풀에 걸렸다. 혼수상태로 마포 언덕 위에 올라왔다. 새로운 더 힘찬 헌신적 투쟁이 전개되었다. 양심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감격 없이 이 사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절호의 기회에 조국 해방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이 일편단심이 아니고는 어찌 이 탁류에 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동지의 이 위대하고 숭고한 애국적 헌신적 정열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자 있을 것인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대고 고요히 생각해보라! 이러한 애국자 민족의 영웅이 해방된 오늘날 우리 동포에 의하여 갇히는 몸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인민의 벗, 민족의 참된 지도자가 민중생활을 파탄시키는 지폐를 위조하였을 것인가? 이런 동지야말로 그런 반인민적 범죄에 대하여 가장 불타오르는 증오를 갖는 것이다. 나는 동지의 피검 보도를 듣고 가슴을 가로막는 솟아오르는 커다란 무엇을 막을 수 없었다.
『독립』 1946.9.18
참된 애국자 이관술 동지 –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듣고서
이순금
나는 이 검거소식을 듣고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참말로 들을 수 없다. 해방조선에서 오빠와 같은 애국자를 다시 그 자유를 빼앗는다 함은 아무리 하여도 정말 같지 않다. 이것은 남매간이라는 사정에서가 아니요,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전민족 해방운동을 위하여 특히 근로인민의 이익과 생활향상을 위하여 잔인무쌍한 이 폭압 밑에서 20년간 개인의 성명과 지위와 가정을 희생하고 지하에서 토막 속에서 감옥 속에서 혈전 고투해온 진정한 애국자임을 구체적 투정 속에서 가장 잘 알며 확실히 인정하는 까닭이다.
오빠 이관술 동지는 1930년대부터 조선 민족 해방 투쟁에 그 몸을 바쳤으니 일제 경찰놈들의 혹독한 총칼이 그의 전신에 집중하였었으나 사회에서나 감옥에서는 놈들 앞에서나 민중 속에서나 장소를 불문하고 낮이나 밤이나 일심전력 전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여 투쟁하였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은 반생을 통하여 혁명적이었으며 과감하고 용감하였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말하였다. “정의를 위하여 전 민족을 위하여 죽음은 가장 옳은 죽음이며 죽음을 각오한 때에는 고난도 쓰라림도 무서운 총칼도 다 극복되는 것이며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행할 수 있다”고. 그는 과연 그렇게 투쟁하였으며 그 행동은 말과 조금치도 틀림없이 일치하였다.
그의 20년간 비합법적 지하투쟁생활에서 몇 가지를 말함으로써 이번 검거가 얼마나 해방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1935년 이재유 동지와 경성을 중심하여 당재건운동에 있어 학교와 가두를 책임지도 활동하다가 놈들에게 발각되었다. 오빠는 그때 지하생활로 들어가지 아니 할 수 없다. 눈은 산골에 쌓였고 삭풍은 사람의 뼛속까지 박히는 듯 추웠다. 남루한 외투를 유일한 방한구로 하여 이 눈쌓인 산골짜기에서 사흘 동안이나 절식하고 뒷일을 수습하기에 성공하였다. 의정부에서 ‘장골네 형제’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남선 이재민으로 가장하고 토끼와 닭을 기르며 호박 오이 고추 등의 밭농사를 지어가면서 『적기』라는 비밀 출판물을 발간하였다. 그때 쓰던 등사판은 두 동지의 창안이었다. 이 등사판 제작을 성공하기에 동지는 3개월 걸렸다. 과학자가 아닌 두 동지의 손으로 이 등사판의 제작이 성공된 것은 오빠의 애국심이 과학을 정복하였다는 증명임을 나는 단언한다. 이리 하여 경성을 중심으로 근로인민 속에서 반일 민족 해방을 힘있게 진전하였다. 때마침 이재유 동지가 가두 연락에서 놈들 손에 체포되자 오빠에 대한 놈들의 추적은 너무도 심하였다. 부득이 오빠는 경성지방을 떠나 남선 일대로 망명생활을 하게 되어 ‘방물장수’로 가장하였다. 그러나 오빠는 하루도 쉼없이 지방 동지들을 찾아 사업을 계속하였다.
1937년 7월 18일이었다. 내가 감옥에서 나온 지 2일 만에 여의도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삼베 고이적삼을 입은 시골농부로 가장하고 삽을 둘러매고 오는데 멀리서는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오빠의 위대한 혁명가의 면목을 일층 느꼈다. 오빠는 나에게 안부 한 마디 외에는 곧 투쟁을 계속하기를 명령하였다. 나는 위대한 혁명가를 오빠로서 동지로서 가졌다는 것을 무한히 감격하였다.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에 소낙비가 쏟아져 한강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밤 되기를 기다려서 배를 타고 올 계획이었으나 이것이 불성공되고 여의도 파출소에 검거되었다. 오빠는 나에게 일을 위하여 그곳을 탈출할 결심을 말하였다. 나는 물이 많아 귀신이라도 건너지 못할 것을 말하였다. 그때 그는 비장한 결심을 보이고 놈들이 잠든 틈을 타서 그곳을 탈출하였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그는 한강물에 몸을 던져 마포편을 향하여 헤엄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 창대 같은 소낙비! 산 같은 큰비가 흐르는 탁류 격랑에 그는 몇 번씩이나 기절하고 혼절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구사일생으로 강을 건너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이튿날 한병과 경찰은 제아무리 초인적 용기가 있다 할지라도 강물 속 귀신이 되고 말았으리라고 단정하였다. 수영 선수도 아닌 오빠가 특히 몸도 퍽 쇠약했던 오빠가 큰강의 탁류를 정복하고야 만 것은 오직 민족을 사랑하는 백절불굴의 투지가 기어코 성공하고야 만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후 그는 경성을 중심하여 노동자 속에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8년 12월부터 김삼룡, 김순룡 동무들을 비롯하여 공장 가두 학교 등에 힘있는 기반을 닦았다. 이것이 ‘콤그룹’의 기초조직이었다. 처음에는 프롤레타리아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콤뮤니스트』로 개칭하였다. 오빠는 이 출판물의 총 책임자였다. 1940년 박헌영 동지가 이 조직을 지도하게 되자 오빠는 이 월간 출판물의 책임자로서 이 비밀 출판물을 남선 일대와 청진, 성진, 함흥 등 북선 일대와 경성 인천 간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들에게 배부하였다. 이 당시 오빠는 기술 문제와 여비 관계로 고물장사로 가장하여 고물 속에 출판물을 넣어가지고 자전거로 각지에 배부한 일이 있었다. 한번 지방을 다녀오면 의복은 말 못할 만큼 누추하고 건강은 심히 약하였다. 참말로 오빠는 열과 성의 화신이라고 나는 항상 감복하였다. 나는 진실한 이 애국자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할 때 그 뒤치다꺼리가 확실히 우리 민족 해방 운동의 한 사업인 것을 항상 만족히 생각하고 항상 기쁨으로 처리하였다.
1941년 정월에 오빠는 드디어 놈들의 손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주지 않은 것은 그의 투쟁의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되었다. 그의 건강은 참으로 위독하였다. 누가 보든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주인공은 병마에 굴복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결심하였다. 어떻게 하든지 살려고. 조선 민족 해방 투쟁에 좀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지금 죽는다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살아야겠다.” 이 굳센 의지력 앞에는 병마도 드디어 항복하고야 말았다.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는 또다시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이때는 전시 계엄령 상태로서 지하생활이 가장 곤란한 어마어마한 때였다. 숯 굽는 직업, 솥 땜쟁이, 남의 집 심부름꾼 이런 가지가지 고생을 하면서 혁명운동을 여전히 계속하였다. 이러한 죽음의 투쟁 속에서 8.15 해방이 닥쳐온 것이다.
8.15 이후 오빠의 활동은 나는 아니 쓰려 한다. 그것은 조선 인민이 나보다 더 잘 아는 까닭이다. 다만 내가 힘있게 주장하는 것은 8.15 이후에 있어서도 진정한 애국자로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불면불휴 그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애국자를 민중으로부터 빼앗아 감은 무슨 이유인가? 더욱이 추악한 죄명까지 씌워 잡아간다 함이야 꿈엔들 상상할 일인가!
나는 주장한다. 위대한 애국자 이관술 동지를 즉시 석방하라고! 해방된 조선에 있어서 진정한 애국자인 우리 오빠의 몸에 아무도 결코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독립』 1946.9.18
위폐사건 피고들의 최후진술
피고의 사실심리도 전부 끝났고 증인심문과 검사 변호사의 보충심리 또 변호사의 변론도 끝난 위폐사건은 26일에 피고들이 최후의 진술을 전개시켰다.
먼저 이관술·박낙종 양 피고는 재판장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는(이관술) 어찌하여 여기에 아니 들어오면 안 되었는가라는 것을 몰랐는데 이 공판정에 와서 비로소 알았다. 나는 공산당을 대표하여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가족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정판사사건인데 공산당에 덮어씌웠다. 러취 장관이나 하지 중장도 좌익 탄압은 않겠다고 말하였으며 장택상 씨도 그런 말을 했는데 이것은 측면적으로 공산당을 공격 탄압한 것에 틀림없다. 즉 정치상 음모라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피고 이관술의 진술이 끝나자 같은 피고 박낙종이 일어서서
“이솝 얘기에서 어느 봄날 어린 양이 무서운 사자에게 위협을 받은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우리는 어린 양으로서 사자의 위협을 받았다. 그것이 즉 검사의 논고였다.”라는 등의 의미를 포함한 진술이 장시간에 걸쳐 있었다.
『서울신문』 194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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