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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잠든 여성 일깨운 선각자 늘푸른 삶
잠든 여성 일깨운 선각자 늘푸른 삶(경인일보, 09.10.14)
‘독도의 날’ 섬도 못갔지만 ‘독도 라면’ 안방으로 달린다
‘독도의 날’ 섬도 못갔지만 ‘독도 라면’ 안방으로 달린다(한겨레신문, 09.10.18)
이봉창 의사 75주기 추모식 거행-연합뉴스(07.10.10)
이봉창 의사 75주기 추모식 거행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 일제 강점기 일왕의 행차에 폭탄을 투척,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했던 이봉창(李奉昌.1901∼1932) 의사의 순국 75주기 추모식이 10일 오전 11시 서울 효창공원 내 선생의 묘전(墓前)에서 열렸다.‘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문국진)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에는 이봉춘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해 김국주 광복회장과 광복회원, 독립운동 기념단체 대표 등 150여 명이 참석해 개식사와 약력보고, 추모사, 헌화.분향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서울 출생인 이 의사는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 백범 김 구 선생이 결성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선생은 이듬해 1월8일 일본 제국주의 심장인 도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육군 관병식에 참석하러 가던 히로히토(裕仁) 일왕 일행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 도쿄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0월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선생의 의거는 비록 일왕을 폭살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1930년대 의열투쟁의 선봉이 됐으며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전선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美,日 핵밀약 공문서 발견-cbs(07.10.08)
美,日 핵밀약 공문서 발견72년 오키나와 반환 때…日정부는 부인 미국이 지난 72년 오키나와를 반환하면서 일본에 핵무기를 들여오도록 한 것을 증명하는 비밀협상 문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969년 11월 당시 일본의 사토 총리와 닉슨 미국 대통령 사이의 핵밀약을 뒷받침하는 미국 정부의 공문서가 지난 6일 발견됐다고 보도했다.또 사토 총리의 밀사로서 대미교섭에 임한 고(故) 와카이즈미 다카시 교토산업대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핵밀약에 대해 밝혔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부정했다고 전했다.이번에 발견된 문서는 ‘오키나와 반환 후 미국의 핵반입과 섬유문제에 관한 비밀교섭’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닉슨 대통령에게 건네진 메모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이번 공문서는 지난 2005년 기밀 지정이 해제됐으며, 니혼대학의 노부노 다카시 교수가 미국립공문서관에서 입수했다고 밝혔다.한편 요미우리신문은 핵밀약 공문서가 발견된 데 대해 원폭금지 히로시마현 협의회와 원폭 피해자 단체협의회가 일본 정부가 밀약의 실체를 밝힐 것을 요구했던, 후쿠다 총리가 당시 작성했던 ‘나의 호소문’을 총리 관저에 보냈다고 전했다.
‘국립대한민국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 명칭확정
‘국립대한민국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 명칭확정(뉴시스, 09.10.19)
[안중근-이토 ‘100년만의 만남’]일본에서 만난 사람들
[안중근-이토 ‘100년만의 만남’]<10>일본에서 만난 사람들(매일신문, 09.10.17)
“‘오키나와 유사시 핵 반입’ 공문서 발견”-ytn(07.10.08)
“‘오키나와 유사시 핵 반입’ 공문서 발견” 미국의 오키나와 일본 반환을 합의한 1969년 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양측이 유사시 미군이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반입할 수 있도록 밀약을 맺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공문서가 발견됐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습니다.이 문서는 정상회담에 앞서 당시 헨리 키신저 대통령 보좌관이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2통의 각서로, 지난 2005년 기밀이 해제된 뒤 최근 공개됐습니다.키신저 당시 보좌관이 보낸 각서는 오키나와 반환 후 미국의 핵 반입과 관련된 비밀 합의라는 제목의 문서입니다.미 국립 공문서관에서 이 문서를 발견한 시노부 다카시 니혼대 교수는 문서에 비밀 합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돼 있지 않지만 밀약 합의문서가 존재함을 거듭 보여주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발견라고 말했습니다.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그 문서에 대해서는 논평할 입장이 아니라면서 지금까지 밝혀온 것처럼 밀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의 밀사로 활동했던 와카이즈미 게이 전 교토산업대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유사시 오키나와에 핵을 배치한다는 합의문은 1969년 11월 양국 정상이 서명했으나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독자칼럼] 오키나와 주민의 역사바로잡기-한겨레신문(07.10.11)
[독자칼럼] 오키나와 주민의 역사바로잡기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의 분노 앞에 강경으로 일관하던 일본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달 29일 11만명에 이르는 오키나와 주민의 대규모 집회에 놀란 일본 정부는 이틀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발짝 물러난 것이다. 오키나와 현지사와 현의회 의장 등은 문부과학상과 참의원 의장을 만나 오키나와 현민대회의 “집단자결이 군의 관여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무”라는 결의문을 읽고, “현민의 뜻을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하였다.이에 대해 문부성은 “관계자들과 지혜를 모아 여러분들의 뜻이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답변하였다. 2차 대전 끝무렵의 오키나와전투 때에 발생한 ‘집단자결’ 사건은 일본군에 의한 자국민 학살사건이다. 전투에 방해가 되거나 스파이 행위를 우려한 일본군은 주민에게 자결을 강요한 것이다. 미군 상륙 전에 마을의 병사주임을 통해 군으로부터 수류탄을 건너받아 유사시에 자결하도록 명령받았으나 불발탄이 많아 자결의 수단은 칼, 낫, 끈 등으로 가족 간, 주민 간에 서로 죽이는 참혹상이 발생했다.당시 일본에서는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국민도덕으로 추앙받는 철저한 황민화 교육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 황민화 교육은 천황의 군대가 관철시켜야 할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주민에게는 집단자결을 강요했지만, 당사자인 군인은 오히려 살아남았다.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받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전쟁 훈령이나 ‘군·관·민 공생공사의 일체화’도 무시된 채 무고한 주민만 희생양이 되었다.이번 역사교과서 검정은, 1990년대 이후의 일본의 우경화
“원주민란 동학 중심지 발전 토대”
“원주민란 동학 중심지 발전 토대”(강원도민일보, 09.10.17)
고당 조만식 선생 59주기 추모식 “민족화합정신 재조명해야”
고당 조만식 선생 59주기 추모식 “민족화합정신 재조명해야”(천지일보, 09.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