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주요기사
[특별기고]한나라, ‘식민지근대화論’ 수용하는가-경향신문(07.10.12)
[특별기고]한나라, ‘식민지근대화論’ 수용하는가 ▶안병직 여의도연 이사장의 논리를 반박함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이하 존칭 생략)는 현재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 산하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이다. 그는 한나라당의 이념과 정체성 확립에 깊이 관여하는 정치인의 한 사람이다. 그가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으로 발탁된 것은 그의 지론인 ‘식민지근대화론’을 한나라당 지도부가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의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에 가져다 준 시혜적 선물이라고 보는 매우 민족비하적 역사해석이다. 이 이론은 통계적 분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마치 ‘학문적’인 것으로 비치지만, 극히 반민족적 사관의 산물이다. -민족비하적 역사 해석- 안병직은 젊은 시절 소위 ‘박근채 사단’의 일원이었다. 진보학자로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의 주장자였다. 필자도 그와 거의 비슷한 학문적 인장이었기에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냈다. 필자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한국사회경제학회 창립멤버였다. 진보정당에도 몸담았다. 그러던 그가 인본의 나까무라 사또루(中村 哲) 일본 교또대학 교수와 일본재단 지원으로 연구회를 같이하면서 이론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는 박정희 치하의 고도성장을 소위 ‘캣치엎이론’ 즉 ‘따라잡기이론’으로 설명하면서, 한국의 고도성장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에 심어놓은 유산의 덕택이라는 이론(=식민지근대화론)을 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뉴라이트재단’을 이끌었다. 뉴라이트는 6·15 공동선언 파기를 주장하고 대북 교류협력과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김대중 노무현 전 현직 대통령을 ‘빨갱이’로 매도해 왔다. 뉴라이트는 한·미·일 안보체제를 극구 옹호하면서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김정일정권 타도 이외에 다른 어떤 대안도 없다는 주장을 편다. 이 이념은 반공주의와 탈민족적 사대주의와 실리추구제일주의의 혼합물이다.안병직은 일본 교수들과 연구회를 함께 하면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의 주역들과 역사인식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독립운동가 심홍택 현충원 안장-한국일보(07.10.10)
독립운동가 심홍택 현충원 안장 일제시대 항일 학생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고 심홍택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식이 11일 오전 11시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서 거행된다.고인은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광주학생사건에 관련해 검거된 자를 석방하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여하라’ 등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학교장과 총독부 학무국장에게 제출했다. 이어 교우들을 운동장에 집결시켜 ‘광주학생 만세’를 외치고 동맹휴교를 주동했다.고인은 1년여동안 옥고를 치른 뒤193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고인은 수감 시절 얻은 지병으로 1959년 타계했다. 정부는 2002년 고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테마 스토리 서울] (16) 등록문화재 11호 서울시의회
[테마 스토리 서울] (16) 등록문화재 11호 서울시의회(서울신문, 09.10.16)
박상돈 의원 ‘독립’을 ‘광복’으로 바꿔야
<국감>박상돈 의원 ‘독립’을 ‘광복’으로 바꿔야(뉴시스, 09.10.19)
‘한국 비하’ 오선화, 한때 입국 거부당해-경향닷컴(07.10.11)
‘한국 비하’ 오선화, 한때 입국 거부당해 일본에서 한국을 폄하하며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오선화씨(51·다쿠쇼쿠대 교수)가 이달 초 한국을 찾았다가 입국을 거부당한 것으로 확인됐다.11일 관계당국과 일본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오씨는 지난 1일 제주도의 고향집에서 치러지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공항으로 입국하려 했으나 출입국심사과정에서 입국이 거부됐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서의 반한(反韓)활동 때문에 오씨를 입국금지조치 대상자로 지정했기 때문이다.현재 일본으로 귀화해 국적이 일본인 오씨는 일본 제주 총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인도적 배려’라는 명목으로 입국 허가를 받았다.1998년 일본으로 귀화한 사실을 숨긴 채 한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써온 오씨는 2005년 3월 ‘일제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경제와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내용의 단행본을 출간해 파문을 일으켰다. 또한 강의중에 학생들에게 “한반도는 태풍도 거의 오지 않는다. 한반도는 일본이 다 막아준다.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 “기품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다케시마(독도) 문제나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생각에서 나온 발언이 있을 수 없다” 등의 망언을 일삼았다.아울러 오씨는 자신이 대구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했지만, ‘오선화’ 혹은 그의 본명인 ‘오승일’은 졸업생 명단뿐 아니라 입학, 편입생 명단에도 없었던 것으로 확인돼 파장을 일으켰다.
[한마당―조용래] 北광산 채굴권-국민일보(07.10.11)
[한마당―조용래] 北광산 채굴권 명성황후가 일본 정치깡패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을미사변(1895) 전후 조선 정국은 친일파와 친러파의 대립이 극에 이르렀다. 사실 을미사변 자체가 친러파 황후에 대한 일본의 치졸한 보복극이었다.국모가 시해되자 백성들은 당시의 친일 내각에 크게 반발했다. 이 틈을 놓칠세라 친러파들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바로 아관파천(1896)이다. 이어 친러 내각이 새로 구성되고 탁지부 고문으로 러시아인 알렉세예프가 등장한다.알렉세예프는 탁지부대신이라도 되는 양 행세했고, 온갖 채굴권 부설권 등을 열강들에게 넘기고 소개료를 착복했다. 경인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어스, 경의선은 프랑스인 그릴리, 함경도 광업권은 러시아인 니시첸키스, 압록강 유역 벌채권은 러시아인 푸리넬 등에게 넘어갔다.채굴권 수탈은 강릉광산이 1870년 미국에 넘어가면서 시작됐지만 알렉세예프 이후에 본격화됐다. 한 나라의 왕이 외국 공사관을 피신처로 삼는 사이 국권은 철저히 유린됐다. 불과 100여년 전 일이다.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경제난에 시달리던 북한은 2002년 7·1 경제조치를 단행하고 자원 개발의 대외 개방을 선언했다. 채굴권 등을 외국에 팔아 필요한 달러를 확보하고 개발 비용을 조달하겠다는 의도다. 이에 중국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아시아 최대의 노천광인 무산철광 50년 채굴권, 용등탄광 50년 채굴권 등은 중국 기업으로, 북한 내 철광 매장 규모 2위인 덕현철광은 홍콩 기업에 이미 넘어간 지 오래다. 지난해 말엔 북한 최대의 구리광산인 양강도 혜산동광 지분 51%가 중국의 민영 기업인 롼허실업에 팔렸다.산업자원부에 따르면 북한의 지하자원 매장 규모는 약 2160조원. 지하자원의 보고(寶庫)가 따로 없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광산물 수입
②
<서울 도심 속에서 유적지를 찾아 걷다>②(오마이뉴스, 09.10.18)
관심 가는 역사 현장을 골라 보라
관심 가는 역사 현장을 골라 보라(한겨레21, 09.10.16)
‘오선화 소동’-제주일보(07.10.12)
‘오선화 소동’ 일본서 한국 폄하 활동 공항서 한때 입국 거부일본에서 한국을 폄하하고 일본을 미화하는 저술활동을 해온 일본 귀화 한국인인 제주 출신 오선화(51·여) 일본 타쿠쇼쿠대 교수가 제주국제공항에서 한때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으로 확인됐다.10일 제주출입국관리사무소 등에 따르면 오씨는 지난 1일 모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낮 12시 20분 도착 도쿄∼제주 항공편으로 제주공항을 통해 입국하려 했으나 출입국 심사 과정에서 한국의 입국금지조치 대상자로 지정됐다는 이유로 일시적으로 입국을 거부당했다.이에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국적인 오씨는 재제주일본총영사관 등에 협조를 요청, ‘인도적 배려’라는 명목으로 입국 허가를 받은 뒤 장례식에 참석후 지난 4일 오후 일본으로 출국했다.오씨의 입국금지조치 대상자 지정은 노골적인 친일활동과 한국을 폄하하는 등 일본에서의 반한(反韓)활동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07.10.12)
<친일과 반일 넘나든 독립신문의 이중전략> ▲ 1897년 10월 12일자 ‘독립신문’ 론설(논설)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1896년 4월 창간한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전용신문이다. 독립신문은 모두 4면을 발간했는데 1-3면은 순한글로, 4면은 영문으로 기사를 보도했다.조선말-대한제국 초기 독립신문의 영향력은 오늘날 주요 일간지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특히 영문판의 경우 조선 내 외국인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구독했다.일본이나 상하이 지역의 신문은 독립신문 영문판 기사의 내용을 보도, 논평했으며 미국, 영국, 일본 공사관은 영문판의 사설을 인용해 한국 상황을 본국에 보고했다.그러나 거의 독점적 대외 언론창구의 위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신문의 대외인식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부정적 견해가 주를 이룬다.제국주의의 침략을 문명화 혹은 독립의 기회로 인식했고 일본과 미국은 옹호한 반면 러시아에 대해서는 감정적 적대에 가까운 편파성을 보였다는 것이 기존 학계의 분석이다.그러나 고려대 박사과정의 김지형 씨는 13일 한국근현대사학회가 개최하는 학술발표회에서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달리 독립신문이 한글판과 영문판에서 서로 상반된 보도태도를 보였음을 발표할 예정이다.김 씨는 미리 공개한 논문 ‘독립신문의 대외인식과 이중적 여론조성’에서 아관파천기(1896년 4월-1987년 2월)와 대한제국 초기(1897년 8월-1898년 5월)의 독립신문 한글판과 영문판을 비교했다.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정부의 단발령 강행은 각 지방에서 반일의병운동을 촉발하고 1896년 2월 아관파천의 계기가 됐다. 파천 직후 조선 사회의 반일 감정은 일시에 고조됐고 각지에서 일본인에 대한 투석과 구타, 살상사태가 벌어졌다.이런 상황에서 1896년 4월 일본 신임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특명전권공사로 승진했다.독립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