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1)
이순우 특임연구원
거족적인 3·1만세의거 당시 독립선언사건 관련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무죄선고로 방면)를 치렀던 임규(林圭, 1867~1948) 선생이 남긴 『북산산고(北山散稿)』(1959년 필사영인본)라는 책이 있다. 여기를 보면 그 당시 감옥창살 안에서 전해 들었던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폭탄투척의거에 대한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 구절이 나온다.


1919년 9월 2일 바로 그날 오후 5시, 가혹했던 무단통치의 원흉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전임 총독이 경질된 자리를 물려받은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남대문정거장에 막 당도했을 때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사이토 내외가 탄 마차(馬車)에서 7보(步) 떨어진 자리에서 터졌다. 그 바람에 총독 저격에는 실패하였고, 주변에 있던 영접 인파 속에서 37명의 부상자(중상자 5인 포함; 전체명단은 『매일신보』 1920년 1월 30일자에 게재된 ‘예심결정문’에 서술)가 발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경기도 순시(巡視; ‘순사’와는 다른 별개의 직급) 스에히로 마타지로(末弘又二郞)가 좌편 대퇴부를 뚫은 탄환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8일 뒤인 9월 11일에 숨졌고,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경성특파원 타치바나 코키츠(橘香橘, 1881~1919)도 복부 손상에 따른 복막염과 폐렴 증세로 그해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경성특파원 야마구치 이사오(山口諫男, 1880~1924) 역시 흉부에 파편을 맞아 여러 해에 걸쳐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도져 그 또한 1924년 4월 11일에 이르러 끝내 세상을 떠났다.
거사 이후 강 의사는 여러 동지의 주선으로 몇 군데 장소를 옮겨가며 피신하였으나 그해 9월 17일에 누하동(樓下洞)에 있는 임재화(林在和)의 집에서 조선인 경부(警部) 김태석(金泰錫, 경기도 제3부 고등경찰과 소속)과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순사 2인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강우규 의거 당시에 사건현장의 부상자명단에는 공교롭게도 “경기도 제3부 경부 김태석, 경상”이라는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강 의사를 체포한 김태석 경부와 동일인이다.
한편, 1920년 2월 14일에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린 제1회 공판의 오후 신문과정을 담아낸 『매일신보』 1920년 2월 16일자의 관련기사를 보면, 재판장인 타치카와 지로(立川二郞) 판사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소리 높여 대답했다는 구절이 채록되어 있다.
재판장 : “네가 총독 하나를 죽이면 조선의 독립이 될 줄로 알았더냐?”
강우규 : “네,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주었으므로 이 기회에 나의 할일을 할 뿐이올시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하니까 나는 오직 마음이 명령하는 바 곧 하늘이 명령하는 바에 의지하여 나의 할일을 할 뿐이올시다. 곧 총독은 극악극흉한 죄인이므로 죽이고자 한 것이라.”
강우규 의사의 폭탄투척의거와 관련한 주요 유적지

그런데 강우규 의사의 폭탄투척의거와 관련한 여러 자료 ─ 가령, 사건보고자료, 판결문, 신문 기사, 일본경찰 회고록 또는 좌담회, 각종 전기와 평전 등 ─ 를 섭렵하다 보면, 한 가지 확연한 생각이 드는 점은 무엇보다도 기록의 혼선이 아주 심하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같은 자료이면서도 해당인물의 표기가 앞쪽과 뒤쪽이 달라지거나 주소지 지번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도 하고, 심지어 동네이름조차 다르게 표기된 사례가 비일비재하며, 항일의거와 관련한 현장이 어떤 곳에서는 ‘여기’라고 되어 있으나 또 다른 곳에서는 ‘저기’라고 달리 적어놓은 자료들 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 의사가 체포된 장소에 관해 동일한 자료(「총독에 대한 흉행범인 체포의 건(1919. 10.6)」) 안에서 ‘임재화(林在和), 누하동 17번지’와 ‘임재화(林在和), 누하동 136번지’로 달리 적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이것이 다시 ‘사직동’(허형 회고담, 『조선일보』 1948년 12월 31일자)으로 바뀌더니 결국 ‘사직동 임승화(林承華)의 집’(문명호 기고문, 『평화신문』 1954년 11월 7일자; 김승학, 『한국독립사』, 1965; 강영재 회고기록, 『신동아』 1969년 5월호)이라거나 ‘사직동 박승화(朴承華)의 집’(반민특위 관련 연재물, 『경향신문』 1977년 8월 18일자)으로 둔갑한 사례도 있다. 심지어 어떤 자료에는 ‘가회동’(강우규 「공적조서」, 1962년) 또는 ‘가회동 82번지 장익규(張翊奎) 하숙’(『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1975)으로 아예 다르게 적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원고에서는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 행적 및 활동지에 관하여 사실관계의 보완 또는 수정이 필요한 대목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하나씩 간추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강우규 의사의 출생연도는 ‘1855년’인가, ‘1859년’인가?

폭탄투척의거 이후 일제에 의해 작성된 모든 보고서 및 판결문 자료에는 강 의사가 당시 ‘65세’의 노인이었던 것으로 한결같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탓인지 일찍이 송상도(宋相燾, 1871~1946)의 『기려수필(騎驢隨筆)』(1955)에도 출생시기를 “철묘 을묘(哲廟 乙卯; 철종 을묘년, 1855년)”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강우규 의사의 손녀인 강영재(姜永才)가 직접 남긴 「남대문역두 강우규 의사의 투탄(3.1운동 50주년기념 시리즈 광복의 증언③)」, (『신동아』 1969년 5월호)에도 “1855년 음력 6월 1일(철종 6년 을묘)”라고 서술한 바 있으며, 각종 서훈자료에는 대개 생몰연대를 “1855.7.14 [음6.1을 양력으로 환산한 결과] ~ 1920.11.29”로 적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난 2011년 9월 2일에 서울역광장에서 제막식이 거행된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曰愚 姜宇奎 義士 銅像)’의 좌대 뒷면에는 그의 생몰연대를 “1859.6~1920.11”로 적어놓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강 의사 묘비석 후면에도 ─ 정확하게 언제 비문의 내용을 재정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 “1859년 6월 5일 평남 덕천에서 출생”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서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 제8권』(1990), 124쪽에는 “1859.6.5~1920.11.29”라고 적은 사례가 눈에 띄나, 그 대신에 이 책의 69쪽에 수록된 의열투쟁 참여자 명단에는 “당시 연령 1919(65세)”라고 달리 정리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강우규 의사의 출생연도가 ‘1855년’이 아닌 ‘1859년’이라는 논지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일찍이 진주강씨중앙종회에서 일종의 자료집 형식으로 묶어 펴낸 『순국선열 강우규』(1982)라는 책자가 등장한 때인 듯하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진주강씨 소감공파세보(晉州姜氏 少監公派世譜)』[태상(太上; 고종)의 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935년 간행본으로 추정]에 나오는 “철묘 십년(哲廟 十年) 기미(己未) 6월 2일생”이라는 구절을 인용 제시하면서 강의사의 출생시기를 “철종 10년 기미년, 1859년”으로 확정하고 있다. 다만, 이 책자가 지니는 자료이용상의 맹점 하나는 강우규 의사의 행적과 관련한 각종 신문기사, 증언구술자료, 기고문 등을 취합하여 편집하는 과정에서 개별자료에 등장하는 ‘1855년 출생 운운’하는 부분마다 ─ 원문 그대로 두지 않고 ─ 모조리 ‘1859년 6월 2일 출생’인 것으로 임의 변경하여 재수록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되짚어 볼 수 있는 장면은 일제의 법정에서 신문을 개시할 때마다 재판장이 피고의 이름, 나이, 주소(본적지) 등을 순차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기본절차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는 그때마다 강 의사 본인 스스로 당시 65세라는 사실 자체를 시인하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에 관한 사실관계의 정리가 우선 필요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재판과정이나 수감생활, 사형집행 소식과 관련한 신문보도에는 “실상 66세나 되는 노인이지마는 ……”, “도무지 66세나 된 노인의 기색은 보이지 ……”, “66의 노령이나마 ……” 하는 식이 구절이 거듭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강우규 의사의 큰며느리인 최짐손(崔朕孫) 부인이 해방 이후 시기에 자기딸 강영재(姜永才)와 사위 채병석(蔡丙錫)의 집에서 함께 살았으며, 적어도 1960년까지는 엄연히 생존했던 사실이 몇 가지 신문기사 등을 통해 확인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시아버지의 연세나 생신 등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을 까닭이 없었을 테고, 그러한 까닭에 강영재의 글(『신동아』 1969년 5월호)에 “1855년 음력 6월 1일(철종 6년 을묘)”라고 표기된 것을 일언지하에 잘못된 기록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강 의사의 출생연도가 1855년인지, 1859년인지에 대한 부분 ─ 그리고 생일이 (음)6월 1일, (음)6월 2일, (음)6월 5일로 다양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도 포함 ─ 은 좀 더 면밀하게 사실관계를 재규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단지, 이 대목에서는 참고할 만한 증언내용 한 토막을 덧붙여두고자 한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에는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상고(上告)를 기각당하여 강우규 의사에 대한 사형 언도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관련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강우규의 큰아들인 강중건[姜重建, 족보명은 ‘강건하(姜鍵夏)’]이 다음과 같이 언급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 네, 무엇이라고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인제는 꼼짝 변통할 수 없겠지요. 저는 자식이라고 그래도 젊은 놈이니까 어떻게든지 견딜 수가 있지마는 제일 구십(90)이 넘으신 조모님과 칠십(70)에 가까우신 어머님[강우규의 처]과 예순셋(63) 되신 고모님[강우규의 누님]과 팔십(80)에 가까우신 백부님[강우규의 두 형님 중 한 분]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면 생초상이 나실 터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저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여 지향할 수가 없습니다. (하략)

『진주강씨 소감공파세보』에 적혀 있는 내용에 따르면, 강우규의 아내 행주기씨(幸州奇氏)는 ‘철종 정사생(1857년)’으로 이 당시 ‘64세’로 환산되며, 큰형 강인규[姜寅奎; 재종조부(再從祖父)에게로 출계(出系)]는 ‘철종 원년 경술생(1850년; 원문에는 무술년으로 표시)’으로 ‘71세’, 작은형 강성규(姜宬奎)는 ‘철종 4년 계축생(1853년)’으로 ‘68세’가 되므로 강중건이 묘사한 집안 어른들의 연세와는 약간의 편차를 나타내고 있다. 그 대신에 강우규의 누나 되는 이는 배필이 이두병(李斗秉)이라고만 적혀 있고 태어난 때에 관한 기록은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누나가 ‘예순셋’이라고 한 이 구절만 두고만 본다면, 강우규 의사는 ─ 4남매의 막내이므로 ─ ‘1855년생(66세)’일 수는 없다는 얘기가 되고 최소한 ‘1859년생(62세)’이어야만 이 순서에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2) 조실부모한 강우규 의사에게 생존한 어머니가 계셨다?
강우규 의사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주로 누님댁에서 자라며 적막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 같다(강영재의 글, 『신동아』 1969년 5월호)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진주강씨 소감공파세보』의 기록으로는 부친 강원석(姜元錫, 1828~1862)과 모친 선산길씨(善山吉氏, 1824~1862)가 강 의사 나이 고작 8살 ─ 1859년생으로 계산하면 겨우 4살 ─ 때, 그것도 그해 8월 8일과 8월 7일로 딱 하루 상간으로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아오야기 츠나타로(靑柳綱太郞)의 『조선독립사론(朝鮮獨立史論)』(1921), 163쪽에 “약관(弱冠, 20세 전후)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 함남 홍원군 용원면 영덕리(咸南 洪原郡 龍源面 靈德里)로 이거(移居)하여 …… 운운”하는 구절이 있고 또 『기려수필』(1955)에도 역시 “약관(弱冠)에 아버지를 따라 함남의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야소(耶蘇, 예수)를 믿고 장로파(長老派)가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조실부모 운운’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더러 있는 듯하나, 정확한 고증에 따른 얘기는 아니라고 하겠다. 또한 위의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에서 강중건이 가족관계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구십(90)이 넘으신 조모님과 …… 운운”하는 구절을 근거로 하여 강우규 의사의 거사 당시에도 모친이 엄연히 생존해 있었다고 하는 지적도 간혹 제기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강중건이 말한 ‘조모님’의 정체는 실상 ‘친할머니’가 아니라 ‘수양할머니’이다. 이에 관해서는 강영재의 수기(『조선일보』 1954년 4월 5일자, 「왈우 강우규 의사의 추억(상), 손녀 강영재 여사의 수기」)에도 관련내용이 나오며, 특히 『신동아』 1969년 5월호에 수록된 강영재의 글에 강 의사가 “송방집 아망이(함경남도 홍원읍에 사는 과부부인)”를 양어머니로 모시고 평생 봉양하는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여도 좋겠다.
(3) 강 의사 최후의 사언절구(四言絶句)는 앞뒤 순서가 뒤바뀌었나?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진 강우규 의사의 묘역을 둘러보면, 묘비석 전면 하단에 “사형(死刑)을 받을 때 일인 검사(日人 檢事)가 감상(感想)을 물어볼 때 시 한 수(詩 一首)”라는 설명과 더불어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이라는 한시(漢詩) 한 구절이 큼직하게 새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독립기념관 개관 초기에 야외전시구역에 조성한 애국열사의 어록비(『독립기념관 애국시·어록비』, 1989)에도 새겨져 있고, 서울역광장에 자리한 강우규 의사 동상의 좌대 전면에도 등장한다.
이에 관한 흔적들을 추적하여 보니, 우선 김승학의 『한국독립사』(1965), 532쪽에 “斷頭台上 猶在春風 ……”이라는 글귀가 그대로 채록되어 있고, 다시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1975, 1979), 288쪽에도 “斷頭臺上 猶在春風 ……”이라는 내용이 잇달아 수록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강영재의 글(『신동아』 1969년 5월호, 198쪽)에는 “有身無國 豈無憾想 斷頭臺上 唯在春風(밑줄 친 곳은 글자가 다른 부분)”으로 글귀의 앞뒤 순서가 서로 바뀐 채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1919년 거사 당시의 동지이면서 함께 공판정에 섰던 허형(許炯, 1894~1963)이 『민국일보』 1948년 12월 25일자에 남겨놓은 「항일척탄사건진상(抗日擲彈事件眞相), 참(慘)! 사형대(死刑台)의 이슬로, 최후일각(最後一刻)까지 조국(祖國)을 구호(救護)」 제하의 기사를 통해 증언하길, “…… 옥중에서 한시 여러 수(漢詩 數首)를 남기었으나 전부 산일(全部 散逸)된 것은 아깝기 짝이 없다”고 얘기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실상 강우규 의사가 남긴 “斷頭台上 猶在春風 ……”이란 구절이 원래부터 어떤 구체적인 문헌 출처가 따로 있었던 것인지 하는 부분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의 행적과 관련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취합하여 시간순서대로 늘어놓고 보니까, 『평화신문』 1954년 11월 7일자에 문명호(文命浩, 일제시기 영원군수와 덕천군수를 지냈으며, 해방 이후 5대 민의원을 역임)라는 이가 「고(故) 강우규 선생 절사(姜宇奎先生 節史), 침략아성(侵略牙城)에 폭탄(爆彈)을 투척(投擲), ‘유재춘풍(猶在春風)’의 절구(絶句) 남기고 순의(殉義)」라는 글을 남겨놓은 사실이 포착된다. 여기에는 “주로 허형(許炯)으로부터 들은 바”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놓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 선생(先生)은 드디어 1920년(年) 5월(月; 시기오류) 모일(某日)에 사형집행(死刑執行)되었는데 전옥(典獄)으로부터 감상(感想)을 물으매 다음의 사세구(辭世句; 절명시)를 읊었다.
有身無國 豈無感想 유신무국 기무감상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斷頭臺上 猶在春風 단두대상 유재춘풍 [단두대에 올라서니 봄바람이 여전하도다.]
유해(遺骸)는 선생(先生)의 장녀(長女) 고(故) 강정란 여사(姜庭蘭 女史)가 인수(引受)하여 홍제원묘지(弘濟院墓地; 신사리묘지)에 안장(安葬)하였던 바 세상(世上)이 기구(岐嶇)하여 춘풍추우(春風秋雨) 35년(年)을 겪은 후(後) 금년(今年) 한식일(寒食日)에 덕천군민회(德川郡民會) 주최(主催)로 교외(郊外) 우이동(牛耳洞)에 이장(移葬)하였는데 필자(筆者)도 참례(參禮)하였었다.
여길 보면 ‘斷頭臺上 ……’의 순서가 아니라 ‘有身無國 ……’의 글귀가 먼저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이것이 강우규 의사의 사언절구에 관한 것으로는 가장 시기가 빠른 기록인 듯하다. 물론 이것 역시 명백한 인용출처가 표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 이보다 늦은 시기의 글들 또한 원출처를 적어놓은 사례는 전무하기 때문에 ─ 문명호가 채록해놓은 기록이 그나마 우선순위를 갖은 1차사료로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맥으로 살펴보더라도 감상을 묻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는 이쪽의 배치순서가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덧붙여 둘 사항은 『개벽』 제7호(1921년 1월 1일)에 게재된 「경신년(庚申年)의 거둠(하)」라는 글(100쪽 부분)에도 강우규 의사가 남긴 최후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하나가 더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강우규 사형집행(姜宇奎 死刑執行)] 거(去) 5월 27일 상고기각(上告棄却)과 공(共)히 사형확정(死刑確定)된 이래(以來) 180여일(餘日)의 지긋지긋한 시간(時間)을 종로구치감(鍾路拘置監) 철창하(鐵窓下)에서 지내던 그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감옥 사형대(西大門監獄 死刑臺)에서 최후(最後)의 숨을 짓고 말았다. 그는 형대(刑臺)에 오를 날이 금일 명일(今日 明日)에 박(迫)하였음에 불구(不拘)하고 의연(依然)히 성경(聖經)을 탐독(耽讀)하며 태연자약(泰然自若)하였으며 교수대(絞首臺)에 오를 그때에는 별반(別般) 유언(遺言)도 무(無)하고, 다만 「同胞莫期我容貌 天賜忠烈銘骨身 死生踪跡方更尋 樂園已開義士林」의 수구시(數句詩)를 남겼을 뿐이었다.

이와 함께 강 의사는 원래 거사에 성공하면 자신이 지은 시(詩)를 소리 높여 읊고 춤을 춘 후에 태연 쾌활하게 포박될 결심이었다는데,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이에 관한 내용은 1920년 2월 14일에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린 제1회 공판 관련 기사(『매일신보』 1920년 2월 16일자)에 다음과 같이 채록되어 있다. 다만, 원문 전체가 알려지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네가 총독을 죽였다면 어떠한 노래를 읊을 작정이었느냐?”
“네, 이러한 노래라”고 붓을 들고 써보였다. 그 요점만 들어 쓸진대,
‘남산(南山)의 송백(松柏)은 적설(積雪)을 견디어 서있고 중천(中天)의 명월(明月)은 흑운(黑雲)을 박차고 밝아있다. 십년의 풍파시험 나의 맺힌 일편단심 간특한 …… (중략) …… 천추에 이름을 전하고 세계의 이목을 경동케 하세. 이천만 동포여 나를 배워 …… (하략)’.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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