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요강을 바칩시다!” 강연꾼 이동화
[연구소 글방 25] “요강을 바칩시다!” 강연꾼 이동화 권시용 선임연구원 1937년 2월 16일 일본 도쿄시의회 선거가 있었다. 이때 도쿄시 후카가와구에서 입후보한 이동화는 ‘반도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시의원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큰 뜻을 품고 도쿄에 건너가 분투하기를 20년, 일본 제국의 심장부에서 일본인 유력자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시의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언론은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이 된 박춘금이 노동계급의 추대로 당선된 것이라면, 이동화는 인텔리 계급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했다. 영예의 자리에 선 이동화에게 지난 20년의 기억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강연꾼의 등장 이동화에게는 ‘강연꾼’, ‘선전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동화는 인기 있는 강연가였고, 강연은 그의 삶을 이끌어 간 기관차였다. 이동화가 강연을 삶의 동력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1920년의 일본 대학생단 순회강연이었다. 이동화는 1893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장식은 교장과 면장을 역임한 ‘엄청난 일본 우호가’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일본에 친밀감을 가지고 일본을 동경하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사립 진명학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동화는 191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배운 후 니혼대학에 입학했다. 1920년 7월 29일 일본 도쿄 각 대학 학생들로 조직된 순회강연단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들은 ‘일선융화를 목적으로 하는 학생단’을 표방했다. 와세다 대학 설립자이자 총리대신을 지낸 오쿠마 시게노부, 대아시아주의 주창자이며 일본 우익의 대부 도야마 미쓰루, 정치가 시마다 사부로의 후원을 받은 이들은 조선을 시찰하며 동시에 일선융화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려는 목적을 가진 강연단이었다.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2)
[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2) 이순우 특임연구원 (4) 강우규 의사가 직접 그렸다는 수류폭탄의 모양 스케치 『매일신보』 1920년 1월 30일자에 게재된 예심결정문을 보면 강 의사가 남대문역두에서 사용한 수류폭탄의 정체와 입수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 내용이 나온다. …… 수월 전에 동부 시베리아 ‘우수리’철도의 어떠한 역[청룡역]에서 어떠한 노국사람[러시아인]에게 사용법을 배워가지고 사두었던 주석으로 만든 예화수류폭탄(曳火手榴爆彈, 그 형상과 구조로부터 미국제 영국식의 예화수류탄이라고 추정하는 것) 1개를 가지고 그것으로써 총독을 살해할 목적을 달하고자 다시 포렴사덕[블라디보스톡]에 가서 그 폭발탄은 헝겊조각에 싸서 허리에 차고 교묘히 숨어서 동년 6월 11일 동지를 출항하는 기선 월후환(越後丸, 에치고마루)을 타고 동월 14일 아침에 조선 원산부에 상륙하여 …(중략) … 오른손으로 폭탄을 끄집어내어 장치한 안전전(安全栓. 안전핀)을 빼어들고 총독을 목격하여 폭탄을 던졌는데 그 폭탄은 총독이 탈 마차 앞 약 7보(步)의 거리 되는 곳에서 큰 소리를 내이며 폭발되고 폭탄의 조각은 사방으로 비산하여 그중 두어 개의 폭탄조각은 총독의 탑승한 마차에 맞고 한 개는 마차 뒤를 뚫어 사이토 총독의 허리에 띤 혁대를 손상케 하였을 뿐이므로 총독은 다행히 무사하였으나 사면으로 헤어지는 탄환 조각으로 그 주위에 있던 (하략) 『조선공론』 1924년 9월호에 수록된 강우규 폭탄사건 회고록 관련 기사에는 “강우규가 몸소 그려 보여준 폭탄의 그림”이라는 스케치 한 장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전범기업 일본제철, 미쓰비시로부터 반드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자 힘써 – 대법원 판결 이행 촉구를 위한 방일행동 보고
[초점] 전범기업 일본제철, 미쓰비시로부터 반드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자 힘써 – 대법원 판결 이행 촉구를 위한 방일행동 보고 이번 방일행동은 2018년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는 전범기업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에 판결 이행을 강력히 촉구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96세의 고령인 강제동원 피해자 정신영 할머니와 유족인 이창환, 정종오 씨, 그리고 한일 시민단체들이 함께 도쿄를 방문하여 가해 기업의 본사를 직접 항의 방문하고 사죄를 요구했다. 방일단은 매달 전범 기업 본사 앞에서 열리는 ‘마루노우치 행동’ 집회에 합류했다. 정신영 할머니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81년 만에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방문하여 사죄와 배상을 담은 요청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기업 측은 “담당자가 없다”거나 “예약이 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면담을 거부하고 이들을 문전박대했다. 일본제철 역시 책임 회피와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비겁한 태도를 보였다. 정신영 할머니(피해자 원고)는 “일본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14살에 나고야로 끌려갔지만, 현실은 배고픔과 강제노역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사죄 대신 ‘탈퇴 수당’ 명목으로 99엔(약 931원)을 보낸 일본의 행태에 대해 “과잣값도 안 되는 돈을 왜 보냈느냐”며 격분했다. “100세가 되더라도 죽기 전에는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창환 씨(유족)는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고 이춘식 씨의 장남으로서, “일본제철은 뒤로 숨지 말고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며 배상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결의했다. 정종오 씨(유족)도 미쓰비시 히로시마조선소로
4.4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주권자 승리의 날, 시민행동 부스 참여
[초점] 4.4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주권자 승리의 날, 시민행동 부스 참여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4월 4일 〈4.4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주권자 승리의 날 시민행동〉 부스에 함께했다.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록합니다〉를 주제로 끝나지 않은 내란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을 기억하고, ‘전쟁 반대! 야스쿠니 반대!’ 활동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부스에서는 지난해 박물관에서 개최한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기록집 발간 안내와 기록집 배부 사전 신청을 받았다. 전시 개막 1주년에 맞춰 발간 예정인 기록집에는 윤석열 탄핵과 내란 청산을 위해 12월 3일부터 4월 4일까지 123일간 시민들의 투쟁과 연대의 흔적이 담길 예정이다. 이날 기록집 발간 홍보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무단 합사의 문제점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활동도 함께 진행했다. 시민들은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실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NO WAR! NO YASUKUNI! YES PEACE!”라는 문구의 피켓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다. 완성된 피켓은 8월 도쿄에서 열릴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참가자들이 직접 들고 행진할 예정이다. 2006년부터 이어온 촛불행동은 올해로 21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시민행동 부스 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아쉽다면, 현재 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세상을 바꾼 시민, 함께 만든 역사〉 전시에서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사용될 현수막 함께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다. 연구소와 박물관은 지난 2025년 12월 시작된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지원 등 앞으로도 관련 활동을 활발히 펼칠 계획이다. 다음 달 예정된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기록집
탄핵 1년, 우리가 지켜낸 것과 우리에게 남은 과제
[초점] 탄핵 1년, 우리가 지켜낸 것과 우리에게 남은 과제 – 현장 보고 탄핵에서 내란 재판 1년 기념 강연과 대담 ‘다시 민주주의를 묻다’ 지난 4월 3일, 윤석열 탄핵 1년을 맞아 열린 강연과 대담 ‘다시 민주주의를 묻다’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진행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포럼 진실과 정의가 공동 주관한 이번 행사는 전 헌법재판관 이석태 변호사의 강연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임재성 변호사, 박선경 고려대 교수의 대담으로 진행되었다. 강연과 대담에서는 윤석열 탄핵 재판부터 내란 관련 재판에 이르기까지 판결의 의미를 법적 판단을 넘어 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확장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의 첫 순서로 이석태 변호사는 ‘윤석열 탄핵과 내란 판결의 의미’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 변호사는 탄핵이 대통령 개인에게 내려지는 결정이지만, 실제 문제의 해결은 형법 적용과 관련된 고위직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내란 사건을 다루는 재판의 중대성을 언급하며, 재판부의 높은 책임감과 사명 의식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나아가 두 건의 내란 관련 사건 모두에서 유죄가 인정된 점의 의미를 짚으며,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시민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함을 당부했다. 이어 김민철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대담에서는 이석태 변호사, 임재성 변호사, 박선경 교수가 내란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갔다. 박선경 교수는 민주주의 다양성 지수를 언급하며,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흐름 속에서도 한국이 상당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민족사랑 202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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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1)
[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1) 이순우 특임연구원 거족적인 3·1만세의거 당시 독립선언사건 관련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무죄선고로 방면)를 치렀던 임규(林圭, 1867~1948) 선생이 남긴 『북산산고(北山散稿)』(1959년 필사영인본)라는 책이 있다. 여기를 보면 그 당시 감옥창살 안에서 전해 들었던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폭탄투척의거에 대한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 구절이 나온다. 1919년 9월 2일 바로 그날 오후 5시, 가혹했던 무단통치의 원흉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전임 총독이 경질된 자리를 물려받은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남대문정거장에 막 당도했을 때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사이토 내외가 탄 마차(馬車)에서 7보(步) 떨어진 자리에서 터졌다. 그 바람에 총독 저격에는 실패하였고, 주변에 있던 영접 인파 속에서 37명의 부상자(중상자 5인 포함; 전체명단은 『매일신보』 1920년 1월 30일자에 게재된 ‘예심결정문’에 서술)가 발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경기도 순시(巡視; ‘순사’와는 다른 별개의 직급) 스에히로 마타지로(末弘又二郞)가 좌편 대퇴부를 뚫은 탄환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8일 뒤인 9월 11일에 숨졌고,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경성특파원 타치바나 코키츠(橘香橘, 1881~1919)도 복부 손상에 따른 복막염과 폐렴 증세로 그해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경성특파원 야마구치 이사오(山口諫男, 1880~1924) 역시 흉부에 파편을 맞아 여러 해에 걸쳐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도져 그 또한 1924년 4월 11일에 이르러 끝내 세상을 떠났다. 거사 이후 강 의사는 여러 동지의 주선으로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 개최
[초점]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 개최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2월 27일(금)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특별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동농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고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가 주관하였다. 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동농문화재단 김선현 이사장, (사)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권영관 회장,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수옥 회장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조선민족대동단이 창설된 지 107년 만의 첫 전시로, 조선민족대동단의 독립정신과 대동 정신을 재조명하고 있다. 조선민족대동단은 직업과 신분, 성별, 종교를 초월하여 황실 인사부터, 관료, 유림, 종교인, 교사, 학생, 상인, 보부상, 백정, 기생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을 포용하였다. 이들은 대동 정신을 실천하여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 이번 전시는 여러 역사적 기록과 자료들을 통해 조선민족대동단이 지향했던 가치와 그 의미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관람객들은 전시를 통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조선민족대동단의 무차별의 절대평등 정신과 실천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전시를 통해 직접 확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꼭 실천해야 할 덕목임에 큰 공감을 표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제2차 3·1혁명선언’으로 불리는 ‘대동단선언’과 총재 김가진이 작성한 ‘시국강연회’, ‘일제 본토 침공계획을 의논한 편지’ 등 30여 점의 희귀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그중에서도 ‘일제 본토 침공계획을 의논한 편지’는 총재 김가진(1846~1922)이 무정부장(武政部長) 박용만(1881~1928)에게 보낸 비밀편지로, 10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편지는 조선민족대동단이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 너머 전쟁을
연구소가 발굴한 김한동 지사에 애국장 추서
[초점] 연구소가 발굴한 김한동 지사에 애국장 추서 제107주년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신청한 김한동 지사가 포함됐다. 지사에게는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한동 지사는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항일투쟁에 나섰던 분이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전남노농협의회에 참여했으며, 1932년 10월에는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고, 1935년에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비밀결사 독서회에 가입했다. 1937년에 서울에서 적색노동조합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결국 1939년 일제 경찰에 체포된 지사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김한동 지사는 미군정 법령 위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갇혔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좌익계열 수감자 등을 적법 절차 없이 학살했는데, 지사도 1950년 7월 진주에서 총살당했다. 김한동 지사는 이미 국가보훈부로부터 서훈이 거부당한 이력이 있는 분이다.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유였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역위원회(위원장 김순흥)는 2019년부터 윤윤기·김범수 선생을 시작으로, 2020년 이기홍·장재성 선생 그리고 2021년에는 김한동 지사에게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를 시민의 이름으로 수여했다. 국가는 외면하지만 시민은 독립유공자로 기리겠다는 의미였다. 드디어 이번에 국가보훈부가 김한동 지사에게 애국장을 추서했다. 지사의 후손과 지역 시민사회의 노력이 쌓이고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결과이다. 연구소도 일정 정도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진다. 연구소는 2025년 6월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를 토대로 전남지역 독립운동가 37명의 포상을 신청했다. 자료 발굴과 간행을 계기로 잊힌 독립운동가를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김한동 지사가 서훈된 것이다. 다른 분들에 대한 포상 여부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5주년 기념식 열어
[초점]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5주년 기념식 열어 지난 2월 28일(토) 오후 3시,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한국순교복자수녀원 강당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연구소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사전 행사부터 새로운 5년을 설계하는 비전 선포, 그리고 소장 이취임식으로 진행되었다. 오후 1시부터는 사전행사로 회원들이 효창원에 방문해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을 참배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창립 35주년 기획전’을 관람하며 연구소가 걸어온 고난과 투쟁의 역사를 다시금 확인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나 본격적인 기념식이 시작됐다. 함세웅 이사장의 기념사가 있었고, 연구소 초창기 이사를 지낸 송기인 신부가 격려사를 하였다. 송기인 신부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초대 위원장 재직시 받은 급여 전액인 2억원을 연구소에 기부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초석을 놓았다. 격려사에서 연구소와의 오랜 인연을 회고하며 시민단체의 재정 자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서 지난 35년을 돌아보는 기념 영상을 상영한 후, 연구소의 향후 5개년 주요 사업계획이 발표되었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개정증보판 및 디지털 통합 플랫폼 구축 ▲‘신흥무관학교인물사전’ 발간 및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한일 과거청산 아카이브 네트워크 구축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며, 디지털 시대에 발맞춘 역사정의 실천의 청사진을 공개했다. 뒤이어 소리꾼 백금렬 회원이 민요 뱃노래 반주에 맞춰 연구소의 35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개사곡을 열창해 큰 호응을 받았다. 3대와 4대 소장의 이취임식이 거행되었다. 23년간 연구소를 이끌며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등 큰 업적을 세운 임헌영 소장께 연구소는 감사패를 드리며 종신 명예소장으로 추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