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25]
“요강을 바칩시다!” 강연꾼 이동화
권시용 선임연구원

1937년 2월 16일 일본 도쿄시의회 선거가 있었다. 이때 도쿄시 후카가와구에서 입후보한 이동화는 ‘반도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시의원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큰 뜻을 품고 도쿄에 건너가 분투하기를 20년, 일본 제국의 심장부에서 일본인 유력자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시의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언론은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이 된 박춘금이 노동계급의 추대로 당선된 것이라면, 이동화는 인텔리 계급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했다. 영예의 자리에 선 이동화에게 지난 20년의 기억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강연꾼의 등장
이동화에게는 ‘강연꾼’, ‘선전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동화는 인기 있는 강연가였고, 강연은 그의 삶을 이끌어 간 기관차였다. 이동화가 강연을 삶의 동력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1920년의 일본 대학생단 순회강연이었다.
이동화는 1893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장식은 교장과 면장을 역임한 ‘엄청난 일본 우호가’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일본에 친밀감을 가지고 일본을 동경하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사립 진명학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동화는 191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배운 후 니혼대학에 입학했다.
1920년 7월 29일 일본 도쿄 각 대학 학생들로 조직된 순회강연단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들은 ‘일선융화를 목적으로 하는 학생단’을 표방했다. 와세다 대학 설립자이자 총리대신을 지낸 오쿠마 시게노부, 대아시아주의 주창자이며 일본 우익의 대부 도야마 미쓰루, 정치가 시마다 사부로의 후원을 받은 이들은 조선을 시찰하며 동시에 일선융화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려는 목적을 가진 강연단이었다. 일행은 모두 9명, 일본 제국대학, 게이오대학, 와세다대학, 니혼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가운데 이동화만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7월 31일 부산상업회의소에서 시작한 강연은 대구를 거쳐 경성으로 이어졌다. 경성 강연회 후원을 자처한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는 대대적으로 강연회를 선전했다. 1920년 8월 5일에는 경성 중심에 있는 히노데소학교 강당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와세다 대학생 아소 히사시는 ‘동아민족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백인 대 황인의 투쟁에 대한 동아민족의 대사명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이날 이동화는 ‘5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경성일보는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수긍할 논지로 내선융화를 역설하는 이동화의 강연에 청중들은 공명하고 한마디 한마디에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고 보도했다.

5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강연회는 흥행했다. 특히 일제 식민당국자들의 눈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강연 요청이 이어졌다. 이동화 스스로도 강연을 자신을 드러낼 기회로 삼고자 했다. 1920년 가을, 이동화는 전라북도로 향했다. 그해 여름의 ‘내선융화 강연회’의 성공을 등에 업고 이동화는 전북 지역 이곳저곳에 강연회를 타진했다. 결국 9월 25일 전북일일신문사와 전주 지역 일본인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전북공회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번에도 일본인 대학생들과 함께 스스로 강연자로 나섰다. 여름 강연 때처럼 ‘5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 이동화의 강연을 들어보자.
일본에 있다가 조선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일 눈에 깊게 들어온 것은 산이었습니다. 총독정치 아래 기왕의 붉은 산과 대머리 봉우리가 대부분 수목이 울창하게 바뀌었습니다. 조선의 비조라는 단군의 내력은 잘 모르지만 평양에 도읍하여 조선을 교화한 ‘기자’는 본래 중국인이오, 조선 민족 중 박, 김, 이 세 성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 후손들입니다. 예로부터 조선과 중국 두 민족의 혈연적 동화(同化)가 이러합니다. 명나라, 청나라 또는 그 이상의 수천 년 역사를 통해 조선이 중국에 마음으로 복종한 것은 모두 관대하고 포용하는 마음에 감복한 것입니다. 이에 비추어 일본이 조선을 통치함에도 마땅히 덕정(德政)으로 임한다면 조선인도 일본 국민의 근성을 가질 것입니다. 너그러운 아량과 성심을 다한 친절로 서로 접근하면 일선융화(日鮮融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조선인이 일본의 통치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품은 것은 총독정치에 대한 불평불만입니다. 총독정치의 단점을 공격하여 그 개선을 희망할지언정 일본인 전체를 적대시하며 적대행위를 하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하물며 조선인의 불평불만이란 것은 산림남벌을 금지하거나 순사·헌병이 공무를 수행하며 인민을 약간 구타하는 정도의 실로 사소한 감정에 기인한 것입니다. 돌이켜 보세요. 저 한국시대에 폭도가 사방에 횡행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어려웠던 때를, 산림 곳곳에 나무와 풀이 아주 없던 모습을.
조선인과 일본인의 융화를 강조하는 강연이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과 조선 민족이 혈연적으로 동화했다며, 그 근거로 조선인이 쓰는 성씨가 대부분 중국에서 왔다는 점을 든 데서 별 설득력은 없지만, 일본이 조선을 덕으로써 통치하고 조선인도 마음으로 복종한다면 일선융화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동화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얘기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민족일지라도 너그러운 아량과 성심을 다해 친절하게 통치하고 거기에 복종하자고 말한다. 그러면 두 민족의 융화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과 중국 두 민족이 혈연적으로 동화했듯이 이제 조선과 일본 두 민족도 혈연적 동화로 나아가자는 말이다. 그러니 총독정치에 대한 사소한 불평불만 때문에 일본인에게 적대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동화는 3·1운동 같은 조선 인들의 저항을 산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는 데 대한 불평불만이나 순사와 헌병이 공무 수행 중 행하는 약간의 구타행위에 대한 불평불만 정도로 가볍게 여겼다. 그런 사소한 불평불만 대신 일본의 통치 덕분에 달라진 세상을 보라고 말한다. 수목이 울창해진 산과 봉우리를 보라고, 순사와 헌병이 조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있다고. 이동화의 강연은 계속 이어진다.
화두를 돌려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소위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원래 미국과 같은 부와 지식을 가진 지위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사람들이 인정하며 그 말 한마디가 능히 천하의 법칙이 되어 동서양 모든 약소 국민에게 일대 문제와 파동을 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력의 축적이 있은 후에 해결되고 실천될 문제입니다. 하등 실력이 없는 우리 조선 민족과 같은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언사일 뿐이니 속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주의함이 옳습니다. (중략) 일본과 조선의 융화를 도모하는 것에는 두 민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입니다. 혈통적으로 혼혈잡종을 육성하면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는 반드시 나누고 싶어도 나누기 어려운 결정체가 되어 융화는 물론이오, 두 민족의 근본적 동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 민족 결혼이 꼭 필요합니다. 이번에 제가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조선 민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온 일입니다. 결코 총독부에서 파견한 일이 아닙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를 키웠고, 우리 민족의 기대는 3·1운동으로 표출됐다. 비록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운동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동화는 단언했다. 실력이 없는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주의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속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말라.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완용, 윤치호 같은 이들이 ‘물지 못할 거면 짖지도 말라’,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양성’이라고 한 것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 대신 이동화는 조선과 일본 두 민족의 융화를 도모하자며 가장 중요한 일이 두 민족의 결혼이라고 말한다. ‘결혼을 통해 혼혈잡종을 육성하자.’ 사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장려하자는 생각은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주로 나타났다. 일본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현지 일본인들에게 당하는 민족 차별을 극복하려는 생각에서 ‘내선인 결혼’을 주장하곤 했다. 상애회 같은 내선융화 단체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주로 활동한 이동화가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주장한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두 민족의 결혼을 통해 혈통이 섞이고 몇십 년, 몇백 년이 흐르면 근본적 동화가 되리라 전망하는 이동화에게 조선의 독립이란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봉변당한 강연꾼
전주에서 강연을 마친 이동화는 목포로 향했다. 이제 목포에서 ‘일선융화’를 강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다. 10월 14일 밤 목포 죽동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이동화는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사람들은 이동화의 얼굴과 뺨을 무수히 때려주었다. 집단 폭행을 당한 셈이다. 사건을 보도한 신문은 ‘모두 술에 취해 일어난 우연한 시비’라고 전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일어난 우발적 사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동화를 폭행한 목포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지형오, 김양수, 최양선, 정규식, 김진태, 이계주는 목포청년회의 중심인물들이었다. 폭행 사건이 일어난 건 10월 14일, 폭행한 사람들이 잡혀 들어간 건 10월 17일이었다. 목포경찰서는 열흘 간 사건을 조사한 뒤 ‘이동화의 품행이 좋지 못해 일어난 사건’으로 결론냈다. 이동화가 맞을 짓을 했다는 결론이다. 폭행당한 이동화가 선처를 호소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한 결론인 건 맞다. 10월 28일, 잡혀들어간 사람들이 무사히 풀려나던 날 목포경찰서 앞에는 수백 명의 목포청년회원들이 운집했고, 목포 영명여관에서는 환영회가 열렸다. 때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였다. 이 무렵 신문지상에는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48인’의 공판 소식,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 부근에서 독립군들에 의한 무장 충돌 사건, 국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의열투쟁과 그로 인해 잡혀 처벌받는 사람들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때 ‘조선인과 일본인의 융화’를 외치고 다니는 이동화란 존재가 어떻게 여겨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마도 그날 밤 술집에서 이동화는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소리를 했을 테고, 청년들은 목포에 나타난 그 괘씸한 놈을 혼내줬을 것이다. 그만큼 이동화는 별난 존재였다. 그래선지 이동화의 ‘일선융화’ 강연 소식은 매일신보, 경성일보 같은 조선총독부 관변 신문에만 보도됐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는 전혀 실리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이동화란 존재를 없는 셈 친 모양이다.
일본을 주무대로
조선에서 강연꾼으로 이름을 얻은 이동화는 일본에서 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사실 이동화의 주무대는 일본이었다. 1920년 한 해에만 일본 각지 150여 곳에서 강연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이동화는 ‘내선융화’ 운동을 조직적으로 해나갈 구상을 했다. ‘황인사’를 창립한 것이다. 처음에는 김창준과 함께 현정구락부를 만들었다가 의견 차이가 생기자 1922년 무렵 이동화는 독자적으로 황인사를 설립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사업단체’를 표방했다. 이동화는 황인사를 발판으로 삼아 학교를 비롯해 일본과 조선 각지에서 강연회, 출판물 간행을 통해 조선과 일본 두 민족의 이해를 촉진하고 황색인종의 문화 향상을 선전했다.
1923년 5월부터는 일본 동북 지방과 홋카이도 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했다. 그해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났다. 도쿄, 요코하마 일대에 유례없는 대재난이 벌어졌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불을 지른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에게 분노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동화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으로 일본 각지를 분주했다. 요네자와, 야마가타, 홋카이도 등 각지를 돌았다. 수백 곳의 학교에서 강연했다. 이동화는 학생들에게 내선인동일가(內鮮人同一家), 곧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제 한 집을 이루었음을 설명했다. 이동화의 강연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다. 이동화는 일본 여러 학교에서 보낸 수백 통의 감사장, 감상문을 받았다.
1924년 4월 7일 도쿄에 돌아온 이동화는 도쿄 시내 소학교를 찾아 강연한 후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 5월 3일 남대문소학교, 5월 6일 히노데소학교, 5월 8일 용산 원정소학교에서 강연했다. 이어 조선 각지에서 순회강연을 이어갔다. 이동화의 내선융화 강연은 일본을 주무대로 활력을 띄었고, 그 힘을 받아 조선에서도 그를 찾는 수요가 꾸준했다.

1928년 1월 도쿄 아카사카구 아오야마난초 5-94번지 황인사 사무실을 찾은 조선사상통신사 특파원 박상희는 이렇게 평론했다.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동기가 불순한 직업적 융화론자, 그리고 이들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일본인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이동화의 내선융화 강연이 누구를 향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평가다.
일본의 힘에 가슴이 뛴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 이동화의 내선융화 강연은 계속되고 있었다. 황인사 사업도 보폭을 넓혔다. 도쿄에는 조선인 학생들의 합숙소인 황인장을 열었다. 황인사의 기관지인 ????황인공론????을 발간했다. ????국방과 조선인????,????민족공동사회의 제창????,????일어나라조선인,가라만주국으로????와같은책을출판했다.이동화는만주사변에대해이렇게논평했다.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입니다. 또 우리 조선인의 생명선이기도 합니다. 만주 사건은 확실한 정의의 발로이자 자연의 귀결이며 또 동양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동양 평화를 바란다면 일본을 중심으로 우리 황인종이 일치단결할 때 그 목적이 달성될 것입니다. 만주국 확립은 그 제1보입니다.
이동화는 만주 침략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거기에 발맞춰 황인사의 사업에는 ‘조선과 만주에서 시정방침을 조사연구’하고 ‘일본 조선 만주의 융화에 관한 강연과 선전’을 하겠다는 항목이 추가됐다. 이동화가 황인사에서 간행한 ????국방과 조선인????(1933)에는일본의만주침략과만주국건설에 고무된 그의 흥분이 잘 드러난 글이 실렸다. 제목은 “일본을 예찬하라”다.
일본인의 이 힘
이 사실은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군림하는 상징이다.
일본 상품은 세계의 모든 상품을 축출하고 홍수처럼 세계시장에 흘러든다.
일본은 세계에 군림하려 한다.
예찬하라 일본을, 세계의 태양을
그리고 조선이여 비상하라. 그 태양을 향해서
사나운 수리는 눈을 부릅뜨고 태양을 향해서 돌진한다고 한다.
조선이여, 태양을 향하는 사나운 수리가 되어 비상하라.
일본은 세계의 태양이다.
세계의 태양 일본, 일본의 힘이 곧 세계에 군림할테니 조선인들은 그 일본을 향해, 일본을 위해 돌진하라고 한다. 이 정도면 일본 예찬의 절정이 아닐까. 대신 이동화는 일본 당국을 향해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원료의 공급지이자 상품의 시장이기도 한 조선은 이출입에서 반드시 무상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당국은 명확하게 조선을 천시하고 차별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애처로운 조선인들의 얼굴을 여러분은 보지 못했습니까? 그래도 나의 내선일가의 신념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동화의 생각은 분명했다. ‘조선과 일본이 한 집을 이루었으니 일본의 번영은 곧 조선의 번영이다, 일본의 자애로운 통치와 조선인의 마음 깊은 복종으로 융화를 이루자, 그러니 일본 위정자들도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시정하라.’ 이동화의 세상은 참으로 긍정적이었다.
요강도 헌납하자
이동화의 강연은 계속됐다.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을 본 후 이동화는 일본의 전쟁에 조선인이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강연 주제도 내선융화에서 내선일체로 넘어갔다. 1934년 1월 황인사 사장 이동화와 부사장 최상덕은 조선에서 국방좌담회를 열었다. 경성, 부산, 인천 등 20여 주요 지역을 돌며 그들이 주장한 것은 조선인에게도 병역 의무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동화는 국방좌담회를 열어 의견을 모은다는 형식을 갖춰 일본 의회에 ‘조선인 병역 필요 건의서’를 제출할 계획이었다. 이동화의 주장은 ????국방과 조선인????에서도확인할수 있다.그는‘왜우리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게 하지 않는가’ 반문한다. 그러면서 일본어를 못하는 조선 청년에게는 조선어로 특별 군대교육을 할 것, 그에 앞서 군대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일본어 교육을 실시할 것, 그래서 군대교육 실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자만 징집할 것 등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전쟁 협력 구상이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났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는 동안 드디어 이동화의 정성이 결실을 맺었는지, 1937년 2월 그는 일본 도쿄시의원에 당선돼 ‘반도 출신 최초 시의원’이란 타이틀을 얻었다.2 그해 7월 일제가 중국 침략에 나서자 이동화는 재빨리 중국 베이징과 텐진에 건너가 전쟁 상황을 둘러봤다. 도쿄시의원이란 지위에다 그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전쟁터를 둘러본 이동화는 조선으로 향했다. 조선총독부와 협력해 시국강연을 시작했다. 1937년 10월에는 강원도 울진, 통천, 고성, 양양, 강릉, 삼척 등을 돌았다. 11월에는 경기도, 12월에는 충청북도를 돌았다. 신문 보도를 더 찾지는 못했지만 그의 순회 강연은 다른 도에서도 계속됐을 것이다. 도쿄시의원이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시국강연을 하니 가는 곳마다 지방 관청에서는 청중 동원에 진심이었다. 이동화는 조선 곳곳을 누비며 일본의 전쟁 승리와 거기에 대한 조선인의 협력을 이야기했다.
해가 바뀌었다. 1938년 들어서도 이동화의 강연은 계속됐다. 이 무렵 이동화는 조선인의 전쟁 협력의 일환으로 ‘노동봉사제도’를 주장했다. 그해 7월에는 미나미 조선총독을 만나 ‘조선인 노동봉사’를 제안했다. 이동화의 구상은 계속됐다.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때 나온 것이 ‘요강헌납운동’이다.

1938년 8월 초였다. 미나미 총독을 만난 지 며칠 후다. “반도는 사변 이래 매우 긴장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이 기세를 철저히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놋쇠로 만든 기구를 헌납합시다. 놋쇠로 만든 식기를 바치는 대신 대용품을 마련해 생활하면 됩니다. 1가구 1품목의 놋쇠 식기를 헌납하는 것은 시국에 비춰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조선총독부도 매우 마음에 들어 하니 반드시 신속하게 실행에 옮깁시다.” 이렇게 이동화는 ‘유기 1가구 1품목 헌납운동’을 제안했다. 이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보는 ‘요강헌납운동 이동화가 제창’이란 제목을 붙였다. 요강헌납운동의 선구자로 이동화를 꼽는 이유다.

일본의 전쟁 승리를 확신하다
1941년 9월 이동화는 매일신보에 「근로이념과 반도인」이란 글을 연재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시작한 지 4주년을 맞은 때였다. 그에 앞서 1년 전인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합류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 침략에 이어 아시아 태평양으로 전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유럽, 대서양, 아시아, 태평양이 전쟁터가 된 제2차 세계대전이 그 끝을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근로이념과 반도인」이란 글에는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이동화의 생각이 담겼다. 이것은 강연꾼 이동화의 지상 강연이었다. ‘유럽에 독일을 맹주로 추축국이 연결돼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이 필연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을 맹주로 만주 몽골 중국 태국 인도차이나 등을 망라한 신질서가 성립되어야 한다. 이 또한 필연이다. 동아시아는 이제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과거 미국 영국에 의존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립해야 한다. 동아시아는 동아시아인의 손으로’. 동아시아인 이동화의 가슴속에 가득한 일본에 대한 자부심이 읽힌다.
그래서일까. 이동화는 루스벨트와 처칠의 공동선언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동화가 매일신보에 글을 싣기 한 달 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이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미국이 영국을 원조해 나치 독일에 공동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국제연합 헌장으로 이어진 대서양헌장(1941.8.14)이다. 그로선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미국의 힘, 미국의 자금과 물자 지원이 연합국의 생명줄이 되었고, 비록 늦게 참전했지만 곧 유럽 전선의 판도를 바꿔놓았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동화는 루스벨트와 처칠의 공동선언을 꼼꼼히 분석했다. 그 결과 내놓은 이 기고문에서 이동화는 루스벨트와 처칠의 공동선언이 얼마나 허위이며 사기적 발언이며 기만적인지를 이야기했다. 영국과 미국이 스스로 얼마나 세계 식민지를 점유하고 약소 민족을 정복해 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데, 그러면서 다른 나라에게는 영토확장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사기적인가. 이동화는 미국이 결코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영국이 독일을 이길 승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영국을 원조하려 군수품을 보내려 해도 선박이 부족한데다 독일 잠수함과 비행기의 공격이 무섭고, 영국 항만시설도 심각하게 파괴됐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미국이 직접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을 점령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며, 미국은 국내 파업 문제로 군수산업에 어려 움이 큰 점도 지적했다. 결국 루스벨트와 처칠의 공동선언이란 것은 국내용일 뿐이라고 이동화는 판단했다. 미국의 참전이 불가능할 것이란 분석은 이동화가 바라는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신질서 건설에 미국이 장애가 되어선 안된다는 기대의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먼저 기습작전을 벌일 줄은 이동화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동화의 생각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제 ‘우리 반도인의 임무는 무엇이냐’가 그의 논제였다. 이동화는 ‘반도인’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그에게 반도인은 일본인을 가리키는 ‘내지인’에 대응하는 지역적인 개념어다. 일본 제국의 우산 아래 일본 본토에 사는 사람과 한반도에 사는 사람 정도의 구별이다. 그의 생각이 내선융화에서 내선일체로 이미 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동화는 말한다. “내지인은 벌써 10만 6천의 ‘피’를 바쳤으니 반도인은 그 대신 백만의 ‘땀’을 바치자.” 일본인이 전쟁터에서 10만 6천 명의 목숨을 바쳤음에 비춰 조선인은 그 열 배의 노동력을 바치자는 말이다. 이동화가 강조하는 것은 조선인도 국민된 의무로서 농촌에서 공장에서 각자 국가를 위해 치열하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에게 근로사상의 의식을 앙양하고 근로봉사 운동을 전국적으로 펴나가자고 한다. 자유주의 노동관, 사회주의 노동관을 극복하고 노동은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며 비상시국에서 총후국민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특히 이동화는 1941년 9월 11일 가결된 ‘국민근로보국대 칙령안’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근로봉사 운동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근로보국대를 결성하자고 말했다. 그것은 단지 노동행정 관점에서의 운동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일관된 성격을 갖춘 운동일 때 현실적 추진력을 얻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연꾼의 미래
친일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해 일본에 유학한 이동화는 일본 대학생들과 시작한 ‘내선융화 강연’에서 삶의 방향을 정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일본의 식민지배에 순응하고 더 나아가 일본 제국의 영광을 위해 복무하자고 큰 소리로 외쳤다. 강연은 삶의 동력이었고 사회적 지위를 높여 준 사다리였다. 황인사 사장이란 직함을 얻었고, 도쿄시의원의 영예도 누렸다. 일본이 시작한 전쟁이 승승장구할수록 이동화는 자신의 투명하고 예측가능한 미래를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친일인명사전????을보면이동화는1942년4월중의원선거에, 6월 도쿄시의원 선거에, 그리고 1943년 9월에는 도쿄도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으며, 이후 이동화의 행적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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