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2)
이순우 특임연구원
(4) 강우규 의사가 직접 그렸다는 수류폭탄의 모양 스케치
『매일신보』 1920년 1월 30일자에 게재된 예심결정문을 보면 강 의사가 남대문역두에서 사용한 수류폭탄의 정체와 입수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 내용이 나온다.

…… 수월 전에 동부 시베리아 ‘우수리’철도의 어떠한 역[청룡역]에서 어떠한 노국사람[러시아인]에게 사용법을 배워가지고 사두었던 주석으로 만든 예화수류폭탄(曳火手榴爆彈, 그 형상과 구조로부터 미국제 영국식의 예화수류탄이라고 추정하는 것) 1개를 가지고 그것으로써 총독을 살해할 목적을 달하고자 다시 포렴사덕[블라디보스톡]에 가서 그 폭발탄은 헝겊조각에 싸서 허리에 차고 교묘히 숨어서 동년 6월 11일 동지를 출항하는 기선 월후환(越後丸, 에치고마루)을 타고 동월 14일 아침에 조선 원산부에 상륙하여 …(중략) … 오른손으로 폭탄을 끄집어내어 장치한 안전전(安全栓. 안전핀)을 빼어들고 총독을 목격하여 폭탄을 던졌는데 그 폭탄은 총독이 탈 마차 앞 약 7보(步)의 거리 되는 곳에서 큰 소리를 내이며 폭발되고 폭탄의 조각은 사방으로 비산하여 그중 두어 개의 폭탄조각은 총독의 탑승한 마차에 맞고 한 개는 마차 뒤를 뚫어 사이토 총독의 허리에 띤 혁대를 손상케 하였을 뿐이므로 총독은 다행히 무사하였으나 사면으로 헤어지는 탄환 조각으로 그 주위에 있던 (하략)
『조선공론』 1924년 9월호에 수록된 강우규 폭탄사건 회고록 관련 기사에는 “강우규가 몸소 그려 보여준 폭탄의 그림”이라는 스케치 한 장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강 의사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필적이니만큼 매우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조선공론』 1924년 9월호에는 마츠모토 테루카(松本輝華, 조선신문사 기자)가 쓴 「그로부터 벌써 5주년, 폭탄사건회고록(あれから 早くも 五周年 爆彈事件懷古錄), 모리 종로서장과 범인 강우규(森鍾路署長と犯人姜宇奎)」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를 보면 특이하게도 “강우규가 스스로 써서 보여준 폭탄의 그림”이라는 스케치 하나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강우규 의거와 관련한 그 어떤 자료에도 소개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매우 참고할 만한 사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곳에 그러한 내용을 함께 덧붙여 기록하여두고자 한다.
(5)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된 곳은 ‘사직동’이 아닌 ‘누하동’
1919년 9월 2일의 폭탄투척의거 이후에 강우규 의사는 거사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장소를 옮겨가며 여러 날을 피신하였으나 끝내 일제경찰에게 행방이 탐지되어 9월 17일에 이르러 당시 경기도 제3부 고등경찰과 소속이던 조선인 경부(警部) 김태석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체포된 장소에 대해서는 경찰조직의 보고서라든가 공판기록 등에 ─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인 탁명숙(卓明淑, 1900~1972)의 주선으로 들어가게 된 ─ ‘누하동(樓下洞) 임재화(林在和)의 집’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해방 이후에 이르러서는 ‘사직동(社稷洞)’으로 적어놓은 자료들이 ─ 가령, 허형 회고담(『조선일보』 1948년 12월 31일자), 문명호 기고문(『평화신문』 1954년 11월 7일자), 김승학, 『한국독립사』(1965), 강영재 회고기록(『신동아』 1969년 5월호) 등 ─ 몇 군데 등장하더니, 이 집 주인의 이름조차 ‘임승화(林承華)’라고 적었거나 심지어 ‘박승화(朴承華)’라고 완전히 둔갑하여 채록된 사례들도 눈에 띈다.
이러한 탓인지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강우규 의사의 묘비석 후면에도 “9월 17일 서울 사직동(社稷洞)에서 적구(敵狗) 김태석(金泰錫)에게 피체(被逮)”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중간에 ‘필운동’을 끼고 있기는 하지만 ‘누하동’과 ‘사직동’이 사실상 이웃 동네나 다름없이 인식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실관계로만 보자면 강우규 의사가 체포된 장소는 ‘사직동(간혹 가회동으로 표기된 사례도 포함)’이 아닌 ‘누하동’으로 바로 잡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약간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것은 “누하동 임재화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지번(地番)으로 볼 때 ─ 「총독에 대한 흉행범인 체포의 건(1919.10.6)」에 따르면 ─ ‘누하동 17번지’와 ‘누하동 136번지’, 이렇게 두 가지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 한쪽이 분명히 오기(誤記)인 듯한데,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펴낸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1930), 8쪽에 “범인 강(姜)은 현장에서 도주하여 경성부 누하동(京城府 樓下洞) 17 임재화 방(林在和 方)에 잠복중 동월(同月) 17일 아침에 체포(逮捕)”라고 적어놓은 걸로 보아 이쪽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6) 강 의사 체포 당사자로 ‘김태석’을 적시하고 있는 일제 측의 자료들
김영진 편, 『반민자 대공판기(反民者 大公判記)』 제1집(1949)과 고원섭 편,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1949)에 자세히 채록되어 있듯이 친일경찰 출신 김태석(金泰錫, 1882~?)은 반민특위 재판에서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 사실 자체를 극력 부인하거나 강 의사가 자수(自首)하였다는 식의 진술을 거듭 강변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그에 의해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여러 독립지사들의 증언이 잇달았고, 결국 그는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무기징역과 50만 원의 재산몰수형으로 감형선고가 내려졌으며,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석방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언론인 출신이자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동성(金東成)이 남긴 「내가 본 사이토 마코토 저격사건(강우규 의사와 김상옥 의사)」(『신세계』 제2권 제3호, 1963년 3월, 210쪽)이라는 글을 보아하니, 참으로 엉뚱하게도 이러한 구절을 싣고 있었다.
어떤 기록에 강 의사는 9월 17일 체포되었다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형사과장이던 김태석(金泰錫)을 부산 피란 중에 내가 만나서 직접 물었다. 김의 말에 의하면 폭탄사건이 발생한 지 2주 간에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고 혐의자 2백여 명을 고문하고 있었다. 강 의사는 안전히 은닉했던 장소에서 자발적으로 김태석을 찾아와서 “내가 정범인이다. 나는 나이도 많아 죽을 날이 멀지 않고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톡]에서 들어왔다. 나 때문에 애매한 동포 2백여 명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 하니 나는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어 자현했다” 하고 비장히 자백했다.

그런데 실상은 이러한 증언이 아니더라도 일제시기의 자료들을 통틀어, 일본경찰 스스로가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 당사자가 김태석이었다고 적시해놓은 흔적들은 차고 넘친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기록 몇 가지를 눈에 띄는 대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① 『매일신보』 1920년 2월 16일자, 「제1회 개정된 폭탄범인 공판, 대담부적(大膽不敵)의 강우규, 14일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리었다」 제하의 기사 :
“세브란스병원의 탁명숙, 한기동이가 주선하여서 누하동 임재화 집으로 가서 묵었지?” 네 ─ 사실이올시다./ “그런데 9월 17일 조선인 경부[김태석을 가리키는 표현] 하나와 내지인 순사 두 명이 가서 너를 잡았지?” 네 ─ 그렇습니다./ “그때 너를 잡던 김경부에게 네가 아무쪼록 놓아달라고 하였지? 곧 더 하나 일을 하여야 하겠슨즉 하고.” 네 ─ 그 말은 아주 거짓말이올시다./ “또 네가 경찰서로 잡혀올 때에 가도중에서 김경부에게 향하여 더 하나 할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하였지?” 그런 말을 한 일은 없습니다. 이는 참 거짓말이올시다. (하략)
② 마츠모토 테루카(松本輝華), 「그로부터 벌써 5주년, 폭탄사건회고록, 모리 종로서장과 범인 강우규」, 『조선공론』 1924년 9월호, 99쪽 :
새삼 치바 료(千葉了, 당시 경기도 제3부장) 씨가 수사방침을 세워 다시 일을 결정하였으며, 경기 도 경찰부의 간부는 일실(一室)에서 구수응의(鳩首凝議)를 한 결과, 방침이 대체로 정해졌다. 그로 부터 형사(刑事)의 거듭 피를 쏟는 듯한 대활동(大活動)이 이뤄졌던 것인데, 저간의 사정은 일체 비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범인은 현(現) 경기도 김 형사과장(金 刑事課長; 김태석)의 손에 의해 체포되기에 이르렀으므로, 지금까지의 경찰(警察)의 고심(苦心)도 마침내 보상받는 날이 도래했던 것이다.
③ 『경성일보』 1931년 3월 29일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말한다(6) 인심흉흉(人心恟恟)한 가운데 입성(入城), 폭탄범인체포를 말하는 원(元) 감찰관(監察官), 치바 료 씨(千葉了 氏)」 제하의 기사 :
“어쩐지 부키미(不氣味; 불안한 것)한 공기가 떠돌았는데 2주간 후에 이 범인으로 추정되는 피의자(被疑者)를 지금은 부평군수(富平郡守)로 있는 당시 도 고등과(道高等課)의 민완형사(敏腕刑事) 김태석(金泰錫)이 붙잡았다. 그리하여 본정서(本町署)에 유치(留置)하여 취조(取調)하였는데 (하략)”
④ 『조선지방행정』 1933년 11월호, 「조선통치비화 좌담회(9) 폭탄범인과 학생소요사건」, 83~84쪽 :
“[치바 료] …… 그래서 그 단서(端緖)를 손에 넣은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김태석(金泰錫)이라고 하는 당시 고등경찰과(高等警察課)의 선인경부(鮮人警部)가 9월 14, 5일경부터 단서를 얻어, 9월 17일에는 어느 혐의자(嫌疑者)를 체포하여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에 구인(拘引)했던 것입니다.
⑤ 조선행정 편집총국 편, 『조선통치비화』(제국지방행정학회 조선본부, 1937), 215쪽 :
※ 여기에는 『조선지방행정』 1933년 11월호에 실린 것과 동일한 내용이 재수록되어 있다.
(7) 강우규 의사가 옥고를 치른 곳은 ‘서대문감옥’이 아닌 ‘종로구치감’
지난 1987년 8월 15일에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이 처음 개관할 당시, 항일독립전쟁관의 주요 전시유물 가운데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 10동 지하 19호실’에서 가져왔다는 마룻바닥 판자 하나가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姜宇奎 四二五三(一九二○).十一.二九”라는 글자(이 유물의 존재는 『동아일보』 1986년 2월 28일자에 처음 소개)가 남아 있었는데, 이것이 강우규 의사가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 직접 손톱으로 새긴 글씨 흔적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내 가짜 논란에 휩싸였고, 알고 보니 1978년 2월말에 당시 학생운동으로 수감중이던 김거성(金巨星)이란 연세대 학생이 못으로 새겼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결국 강우규 의사의 친필흔적 진위논쟁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런데 실상 강우규 의사는 한번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적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사실만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더라도 불필요한 오인(誤認)은 애당초 발생하지 않았을 듯싶다.
실제로 강우규 의사는 일제에 의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줄곧 ‘미결수(未決囚, 수형번호 171호)’의 신분이었고, 고등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된 이후에는 ‘사형수(死刑囚)’가 되었으므로 서대문감옥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종로구치감(鍾路拘置監, 서린동 42번지)’에 갇혀 있었다.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이래로 전옥서(典獄署)였고, 1909년 1월 이후로 ‘미결수’를 수용하는 종로구치감으로 사용되다가 1921년 4월말에 이르러 영구 폐쇄되는 공간이었다.


근대시기 옛 전옥서 터의 공간 변천 연혁

이러한 사실은 아오야기 츠나타로(靑柳綱太郞)가 저술한 『조선독립소요사론(朝鮮獨立騷擾史論)』(1921), 173쪽에 “대정 9년(1920년) 11월 29일 오전 9시 반, 종로구치감으로부터 의기초연(意氣悄然), 척쇠(瘠衰)한 노구(老軀)를 마차(馬車)에 실어, 서대문감옥의 형장으로 끌려가, 검사(檢事), 전옥(典獄), 교회사(敎誨師), 간수장(看守長) 등의 입회를 받아 교수대상(絞首臺上)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적은 대목으로도 잘 확인된다. 그리고 강우규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소식을 전한 『매일신보』 1920년 12월 1일자의 관련기사에도 이러한 구절이 등장한다.
…… 재작 29일까지 180여 일 동안을 종로구치감 차고찬 철창 아래에서 여름이 겨울에 이르도록 66의 노령이나마 슬픈 기풍은 조금도 띄지 아니하고 …… 재작일 아침에 갑자기 본부의 협찬을 지나서 경성복심법원 검사로부터 강우규에 대한 사형집행명령이 내리었는데 실상은 며칠 동안 유예하려고 하였으나 거처를 또 새로이 정하기도 어렵고 명령 있는 바이므로 필경은 오전 9시 30분에 종로유치감으로부터 본감(本監, 서대문감옥)으로 옮겨다가 10시 30분에 본감내 사형대에서 오카모토(岡本) 검사가 입회한 후 필경은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차입한 두루막을 입었던 강우규는 13분 만에 절명하였으매 새로[밤 12시를 넘긴 시각을 나타내는 표현] 1시에 그 아들 강중건을 불러서 시체를 내어줄까 한즉 역시 내어달라고 하기에 인도수속을 마치고 3시 25분에 사형이 마치었으매 5시에 고양군 신사리(高陽郡 新寺里)에 있는 본감옥의 전속공동묘지에 갖다가 매장하였는데 (하략).
(8) 아버지의 옥바라지에 전심전력을 다했던 큰아들 강중건의 처지

강우규 의사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감옥 철창에 갇혀 지내는 사이에 그의 옥바라지는 고스란히 큰아들 강중건의 몫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 교남동 59번지 강봉영(姜鳳永)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가 나중에는 서대문감옥과 종로구치감 앞에서 사식차입소(私食差入所, 밥 파는 집)를 운영하는 윤홍식(尹宖植, 현저동 29번지)의 집에 터를 잡았는데, 이때 그의 사촌누이(과부)도 함께 머물며(강영재 회고기록, 『신동아』 1969년 5월호, 197쪽) 옥바라지에 일조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매일신보』 1921년 1월 21일자에 수록된 「사형집행 된 부친(父親)의 묘(墓)를 근시(近侍), 자기 생전엔 묘를 떠나지 않겠다고, 강우규(姜宇奎)의 장녀(長女)」 제하의 기사를 보면, 강덕영(당시 38세)이라는 이름의 딸이 오빠 강중건과 함께 옥바라지를 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지난 12월에 사형집행 받은 강우규의 장녀 강덕영(姜德榮, 38)은 수년 전에 과부가 되어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에서 거주하고 있던바 자기 부친이 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작년 5월에 상경하여 자기 오라버니 중건(重健)과 함께 생활이 곤란한 중에 여러 가지 신산을 맛보면서 자기 부친을 위하여 의복과 음식을 들여보내느라고 곤란함을 겪던 중 자기 부친이 사형집행을 당한 후는 단독히 부친의 묘지 부근에 거주하면서 시묘(侍墓)를 정성껏 행하여 오는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그 묘지를 모시어서 떠나지 아니한다고 말하더라.
이처럼 그와 그의 누이는 힘껏 아버지를 봉양하려고 애를 썼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고충과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탓인지 여러 신문기사에서 곤궁에 빠진 그의 상태를 전하는 내용들이 잇달아 수록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20년 8월 11일자에 수록된 「아 암흑(暗黑)한 사(死)의 수(手)! 아 참혹(慘酷)한 기(飢)의 귀(鬼)! 강우규(姜宇奎)의 말로(末路), 찌는 여름 철창 아래에 사형 위에 주림까지는」 제하의 기사에는 그의 힘든 처지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 마침 그 맏아들 되는 강중건(姜重建) 씨는 볕에 그을러 검었고 마음을 상하여 바짝 마른 얼굴에 수심 있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혈색 있는 눈에 눈물을 글썽글썽하면서 옥중소식을 말하되, 그동안에 해주의 일가에게 갔다 왔는데 오나가나 경찰당국의 취체가 너무 심하여 행동의 자유를 잃었습니다. 나는 본래에 어려서부터 ‘아라사’에서 크다시피 하였으므로 별로 친한 사람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오도가도 못하게 거의 교통을 막아 누구 한 사람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이번에 해주에 가기는 아버지의 사식 차입을 하기에 너무 곤란하므로 경성에서는 어찌할 수 없고 낡은 양복 몇 가지 있는 것까지 팔아버려 속수무책이므로 그곳에 있는 일가들에게 사식 차입하는 보조나 얻을까 함이었는데 그렇게 사지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고로 거의 쫓겨온 셈이 되었나이다. 사식 차입하는 주인에게 밥값 진 것이 삼백여 원이나 되어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빠져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중이로소이다.
경성에 있는 것이 제 동생과 누이를 합하여 세 사람이 서대문감옥 앞 현저동 29번지 윤홍식의 차입집에 간신히 방 2칸을 빌려서 웅거하여 있는데 아무리 조밥 먹더라도 한 달에 3, 40원은 있어야 하겠으며, 사식 차입하는 데에 적어도 8, 90원가량은 있어야 하겠는데 덕천 큰집에서도 그동안에 적지 아니한 돈을 가져왔으므로 지금에는 더 가져오려 하여도 가져올 돈이 없어 밭뙈기와 논마지기 있는 것을 팔아 오려 하여도 가지도 못하게 하려니와 금융이 핍박하여 실로 어려웁습니다. 자식이 세상에 나서 부모평생에 배 주리지 않게 봉양치는 못할망정 늙은 부모를 옥중에 모시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실지 모레 저녁에 돌아가실지 모를 부모에게 이제는 좁쌀밥 한 덩이 사드리지 못하겠으니 참 가슴이 터지고 심장이 뒤끓어 환상이 될 듯싶습니다 …… 옥중에 무사하신 줄은 그그저께 면회하였을 때에 보고 알았습니다. 그 손목을 잔뜩 동여매고 있는 모양을 볼 때에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 하며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이더라.
이와 관련하여 조금은 특이한 기록 하나를 소개하자면, 마츠모토 테루카(松本輝華)가 남긴 글(『조선공론』 1924년 9월호, 103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눈물 나게 하는 인류애(人類愛)의 현현(顯現)에 다했던 최종(最終)의 에피소드를 적으며 이 원고를 마치는 것으로 한다.
그 이유는 이와 같다. 과반(過般) 폭탄사건의 고귀한 희생자(犧牲者)로서 끝내 돌아오지 못할 여로(旅路)에 들었던 야마구치 이사오(山口諫男) 씨가, 자기는 강(姜)이 투척한 폭탄의 파편(破片)에 의해 한 팔을 삐었고, 더욱이 또한 영구히 치료가 불가능한 심상(深傷)을 가슴에 입었으면서 그 한(恨)을 잊고 괴로움을 던져, 강의 유족(遺族)에 대해 금일봉(金一封)을 주었던 것이 그 가운데 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감격하지 않는 자는 아마도 없을 것 같은데, 강의 유족들이 소리를 세워 감읍(感泣)했던 것은 무리(無理)도 아닌 일이었다. (하략)
여기에 나오는 야마구치 기자는 폭탄투척의거 당시에 부상을 입어 여러 해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도지면서 1924년 4월에 결국 숨졌으며, 1928년 4월 14일에는 용산 서룡사(龍山 瑞龍寺) 경내에 그의 묘비 제막식이 거행된 일도 있었다. 참고로, 『동아일보』 1921년 2월 27일자에 게재된 「휴지통」 코너에도 야마구치 이사오 기자가 강중건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여 돈 10원을 종로경찰서 미와 경부를 통해 전달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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