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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악의 유산, 군대와 전쟁의 폭력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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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 l 최우현 지음, 돌베개, 2만원

‘12·3 친위쿠데타’의 비선으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 사령관의 수첩 내용은 다시 봐도 놀랍다. 이 수첩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실행 후 싹을 제거해 근원을 없앤다.’ 실제로 그는 500여 명에 달하는 ‘싹’들의 명단을 70여 쪽에 달하는 수첩 곳곳에 적어넣었다. 카테고리별로는 ‘좌파 판사’, ‘좌파 언론’, ‘좌파 종교단체’, ‘좌파 연예인’, ‘좌파 정권 때 출세한 놈들·일당·일가’ … 등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러한 싹들을 D+50일까지 수거해 실미도 등 무인도와 지오피(GOP) 등에 수용한 뒤 자체 사고 처리하거나 연평도로 이송 중 위장 사고 등 여러 방법으로 ‘처리’하려 했다.

지은이는 묻는다. ‘왜 그런 식으로-폭파, 화재, 격침, 화학약품 등-죽이려 했을까. 왜 하필 그곳-실미도, 연평도, 제주도, 민통선 이북-이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왜 북한을 끌어들이려 했을까.’ 지은이는 말한다. ‘나는 의심한다. 1948년 제주 4·3으로부터 발화한 악의 유산이, 그 광기가, 2024년 서울의 12·3으로까지 이어져 온 게 아닐까 하고.’

전직 포병장교 출신의 독립연구자 최우현의 ‘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 어느 귀먹은 군인의 고백’은 전쟁과 그것이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 군대와 전쟁의 폭력을 정면으로 성찰한 ‘전쟁 인문학’이다. 어릴 적부터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 극우 성향의 군인이었던 그는 군 복무 중 포성으로 청력의 70%를 잃고 이후 이명과 공황발작에 시달렸다. 이 경험은 그가 전쟁의 본질과 국가의 위선, 군대의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책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 베트남전쟁의 증언, 제주 4·3과 2024년 12·3 쿠데타 등 역사적 폭력의 연속성을 탐구하며,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고통을 함께 짚는다. 지은이는 체험과 독서, 답사, 사색을 결합해 전쟁의 실재와 전쟁이 남긴 상흔을 탐문하며, ‘평화의 연대’를 모색한다. 한국의 전직 군인으로 전쟁과 군대, 국가의 폭력과 거짓말, 군인과 전쟁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아픔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새롭다.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2025-10-24> 한겨레

☞기사원문: 악의 유산, 군대와 전쟁의 폭력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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