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전국환과 친일파로 변신한 정운구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창립한 이래 지금까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삶을 직접 비교하는 ‘한 시대 다른 삶’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해 침략을 하였는데 많은 친일파들은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제에 부역하였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진행하였으며 국권을 잃은 후에는 독립을 되찾기 위해 개인의 목숨뿐만 아니라 재산을 내놓으며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또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상해 등 해외로 진출하여 독립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처럼 극과 극으로 살았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직접 비교는 친일파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공동체와 상식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준다. 나라와 민족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는 시대가 변하더라도 인류 보편적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대 다른 삶’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과 친일파 이응준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조선의 마지막 무관생도로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지청천 장군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이응준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서 일제를 위해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일본 천황에서 충성을 다하였다.
부평군의 마지막 군수를 했던 인물은 정운구였으며, 그 전임자는 전국환이었다. 두 사람 모두 풍전등화에 놓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관료로서 부평군 또한 이러한 위기를 직접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평군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위치하여 시대 변화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한 사람은 친일파가 되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독립 유공자가 되었다.
전국환(全國煥, 1876년 1월 1일 ~ 1927년 7월 11일)
전국환의 본명은 전협(全協)으로 1904년경 전국환으로 개명하였다. 부평군수를 1907년 7월 부임하여 1909년 3월까지 역임하였다. 1876년 서울 남대문 밖(현 이문동)에서 태어났으며 21세 때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다. 전국환의 삶도 역동적인 게 1907년 부평군수가 되기 전인 1904년에는 일진회(一進會) 회원이 되어 평의원을 하였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총무원을 거쳐 같은 해 말에는 전북시찰원(全北視察員)이 되었으며 1905년에는 일진회 전라북도 지회장까지 역임하였다. 한때 친일행위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군수를 사임한 후에는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3년간 살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일진회 활동으로 인해 독립운동가에게 많은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국환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의친왕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이 계획이 탄로 나며 전국환은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1927년까지 살게 되었다. 8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27년 7월 9일 전국환은 가출옥되었는데, 이미 위독하여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심장쇠약, 복막염, 신장염, 관절염 등 다양한 질병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이로 인해 이틀만인 7월 11일 새벽 1시경 사망하였다.


정운구(鄭雲衢, 1867년 3월 7일 ~ 1930년 1월 15일)
정운구는 부평군수를 1909년 4월 부임하여 1914년 2월 퇴직하였다. 한일합방이 1910년 8월 29일 이루어졌는데 그 사이 모두 부평군수를 한 것이다. 즉, 대한제국의 부평군수도 역임하고 일제의 부평군수도 역임한 것이다. 군수는 고위관료로서 일제시대에 군수를 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친일파에 해당이 된다. 군수는 본인의 자발적 의지가 없으면 오를 수 없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1910년 3월부터 경기도 관찰도 부평공립보통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운구는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았다. 일제는 한국병합의 사업에 관여한 자 및 병합의 사이에 조선에 근무한 관리 그리고 한국 정부 관리 등에게 수여하기 위해 기념장을 만들었는데 궁극적으로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고 일제에 복종시키기 위해 한 것이다. 정운구는 한국 정부 관리의 자격으로 받았다. 기념장은 국화 아래 오동나무와 이화(李花, 자두꽃) 가지를 교차하여 배치하였는데, 국화 문양은 일본 황실을 의미한다.

부평군수를 역임한 전국환과 정운구의 삶을 통해 고위관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를 갖을 수 있다. 관료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로서 혜택받은 사람들이다. 국가와 국민들에게 사랑과 봉급을 받은 만큼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솔선수범하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듯이 전국환과 정운구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박종선 시민 기자(pchseon) , 민족문제연구소 (前)부천지부장, (前)운영위원장
<2025-10-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부평군수 역임한 두 사람의 ‘한 시대 다른 삶’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시리즈: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부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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