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석주 이상룡
안동 임청각은 고성 이씨 종택으로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12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입니다. 일제는 1941년 임청각의 허리를 끊어 철길을 내었고 84년 만인 올해 드디어 철길을 걷어 내고 임청각을 복원합니다. “나는 오직 한 번 옳게 죽을 땅을 원할 뿐”이라면서 가족을 이끌고 안동을 떠나 서간도 망명길에 오른 이상룡은 1911년 6월,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합니다. 석주 이상룡은 우당 이회영 형제와 더불어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공동 주역입니다.
임시정부, 이승만 탄핵 후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무능과 독선이 문제였습니다. 1925년 3월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합니다. 이제 문제는 누구를 차기 지도자로 추대하느냐. “임시정부 이승만의 후임으로는 인애하는 덕이 있는 이상룡같은 이를 추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안창호)” 1911년 망명 이후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설립, 서로군정서 독판, 통의부 정의부 등 남만주 독립군단 지도자로 활동한 이상룡은 1925년 9월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합니다.
임시정부 파수꾼, 동암 차리석
평양숭실(현 숭실고교) 1회 졸업생인 동암 차리석(1881~1945)은 도산 안창호를 만나 열렬한 독립운동가가 되었습니다. 신민회를 시작으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기자, 임시의정원 의원과 부의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헌장(1942년) 초안 마련, 임시정부 비서장 등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었습니다. 정정화 여사는 광저우에서 출발한 후부터 임정의 전체 살림은 동암이 주로 맡았다고 회고했습니다. 해방을 맞았으나 환국준비에 여념이 없던 차리석은 그만 1945년 9월9일 충칭에서 과로로 사망합니다.
“차씨인데 신씨로 알고 살았습니다”
남북 분단정권 수립을 눈 앞에 두었던 1948년 6월, 김구는 차리석의 유해를 봉환해 효창원에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1년 후 친일파에 의해 김구마저 서거하자 차리석의 가족들은 신분을 숨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1949년 백범 선생이 흉한에게 시해당하시는 것을 본 어머니는 독립운동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화를 입을까 두려워 차를 버리고 한자의 두 획을 뺀 신씨로 바꿔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초등학교 친구들은 ‘신영조’로 알고 있습니다. (차리석의 아들 차영조의 증언)”
이상룡 국무령 취임 100주년, 차리석 서거 80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상룡을 통해 국군의 정통성을 바로잡고, 차리석을 통해 헌신하는 지도자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안동지역 단체, 이상룡기념사업회, 숭실고교, 서울시교육청 등과 협의하여 석주와 동암을 기념하는 문화콘텐츠 제작, 답사, 작은 음악회 등을 추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