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팔라우의 조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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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20]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팔라우의 조선인들

김명환 연구실 학술팀장

대구 출신 ‘태구만’의 묘

1973년 10월 어업기지 업무파악을 위해 팔라우(Palau) 코로르(Koror)에 머물던 김찬구(金燦球)는 섬 동쪽 산기슭 우거진 잡초 속에 묻혀있던 쓸쓸한 묘지 하나를 발견했다. 기단 위에 세운 묘비에는 「고태구만지묘(故太具萬之墓)」라고 새겨져 있었다. 묘지의 주인인 태구만은 대구 출신으로 1939년 10월 11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망 당시 64세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 조선인들이 “파라오선인친목회(パラオ鮮人親睦會)” 명의로 비석을 세운 것이었다. 64세면 적지 않은 나이였을텐데, 그는 어찌하여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일까?

대구 출신 태구만의 사연을 전한 『조선일보』 1973년 12월 20일자 기사

김찬구는 섬사람들로부터 “2차대전 때 징용 와서 일본인들에게 강제노동을 당하면서 고생하던 조선인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였다. 그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러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조선인 20여 명이 끌려와 비행장을 닦기 시작했으며, 태구만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하던 태씨를 일본인 감독이 채찍으로 때려 기절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징용’되어 온 조선인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아이고’ 소리를 냈던 것을 모르는 현지 사람이 없다고 했다.

김찬구의 전언은 전시총동원체제기 강제동원 되었던 조선인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해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찬구가 원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온전히 사실일까? 이야기해준 원주민으로서는 30년 전의 일이고, 또 모르는 사람의 고난을 지켜본 것일 뿐이었다. 혹시 기억의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찬구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우리는 흘려들을 수만은 없다.

‘팔라우’라는 곳

팔라우는 낙원과 같은 곳이다. 따뜻한 기후, 아름다운 바다, 여유로운 사람들. 시간조차 느리게 흐를 것 같은 이곳을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에게 허락한 선물”이라고 표현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여행 고수들, 특히 다이버들에게는 천국으로 알려진 곳이다.

팔라우는 북위 7도 동경 134도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이다. 전체 면적은 대략 450㎢에 불과하여 서울(605㎢)보다도 작다. 가장 큰 섬인 바벨다옵(Babeldaob)의 면적은 약 330㎢로 서울의 강북 지역 정도이다. 인구도 약 2만 명에 불과한데, 그중 거의 70%가량이 코로르에 살고 있다. 산업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은 없으나,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관광업이 인구 2만의 소국을 유지하고 있다.

대항해시대 이후 팔라우는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아왔다. 가장 먼저 찾아온 서구국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중부태평양을 점유하고 광범위한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팔라우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1899년 스페인은 팔라우를 비롯한 중부태평양의 식민지 전체를 독일에 매각하였다. 당시 미국과 벌인 전쟁에서 패한 후 재정적으로 궁핍하였고, 본국과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지배자 독일은 트럭(Truk)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관리하였다. 팔라우에서는 환초 남쪽 앙가우르(Angaur) 섬에 채광소를 설치하고 인광(燐鑛)을 채굴하였다.

독일의 지배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 해군은 적도 이북의 ‘독일-뉴기니 식민지’를 점령하고 군정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전후 일본은 국제연맹으로부터 ‘남양군도’의 위임통치권을 수임받아 1921년 남양청(南洋廳)을 설치하였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및 호주 방면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하여 ‘남양군도’ 통치의 중심을 트럭으로부터 팔라우로 옮겼다. 그리하여 팔라우에 시정청인 남양청이 설치되었다. 즉 팔라우는 사이판과 더불어 일본제국의 남방정책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지역이었다.

팔라우로 온 조선인들

팔라우와 식민지 조선인이 언제 처음 인연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이판의 경우 1918년 초 처음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상륙한 정황이 확인된다. 이때 들어온 노동자들은 계약만료 후 귀국하거나 사이판 등에 잔류하였고, 그중 일부는 인근 섬으로 흩어졌다. 팔라우에 최초로 닿은 조선인은 이때 사이판으로부터 온 노동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안타깝게도 자료가 없어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남양청 설립 후 조선인의 ‘남양군도’ 이동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였고, 팔라우에도 소수의 조선인들이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에는 46명, 1938년에는 91명이 거주한 사실이 확인된다. 1938년 거주자 중 읍내인 코로르 거주자는 22명(남자 17, 여자 5)로 확인되는데, 나머지는 바벨다옵의 개척촌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수에 그치던 팔라우의 조선인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부터이다. 자연스러운 증가는 아니었다. 이전까지 남양군도에서 ‘노동자로서의 조선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였다. 1938년 당시 남양군도 거주 조선인은 704명에 불과하였다. 같은 시기 일본인 이민자가 약 7만 1천 명에 달한 것에 비추어보면 조선인 이동이 매우 미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39년 들어 갑자기 조선인 수요가 생겨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신문보도를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다. 

노동력의 태부족으로 생산진흥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은 내외 일반인 오늘 신춘 벽두에 남양청에서 직할공사를 위하여 조선 노동자 5백 명의 알선이 주문 왔으므로 총독부 내무국에서는 국외이주에 관계되므로 경무국과 협의한 결과, 최근 방침을 결정하고 대죽(大竹) 내무국장으로부터 정례 국장회의에 보고하였다. 공사장은 야자수 우거진 「파라오」島 소속 「코로島」 도로 기타의 확장 공사로 대우는 여기보다 좋을 것이라고 하며 연령은 20세~ 40세, 체력 강건하고 지도 견실한 자로 5백 명 중에 1할인 50명에게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을 용인하게 되었고, 이 가족 동반은 거기 토지에 관습되기까지 문제이므로 밥을 짓게 하려는 것이다.(『동아일보』 1939년1월18일자,「멀고먼 남쪽나라에서도노동자 5백명을 초빙」)

표면적인 이유는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원래 ‘남양군도’의 노동력은 일본에서 유치해왔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응소자들이 늘어나고 일본 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외지(外地)인 ‘남양군도’의 노동력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내지’가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력을 보충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이 남양청이 조선총독부에 노무자 알선을 의뢰한 이유였다.

노무자 알선에는 총독부 내무국과 경무국이 직접 관여하였고, 수송의 편의를 위해 철도국도 협조하였다. 항만개수 및 도로공사에 투입될 노무자를 데려가는 것이었으므로 젊은 남자들이 대상이 되었다. 일부는 가족도 대동할 수 있었다. 알선한 노무자들을 현지에 정착시킬 심산이었다.

남양청이 동원하고자 한 노무자는 모두 500명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남양행 선박에 승선한 인원은 약 370명이었다. 이 370명의 신병을 인수한 것은 남양청이 아니었다. 일본 모지(門司)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청부업체인 기무라구미(木村組)였다. 노무자들을 위탁관리한 것이었다. 토목노무자에 이어 농업노무자도 동원되었다.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농민 동원 소식을 전하고 있다.

멀리 남양으로부터 조선노동자를 초청하여 갔다 함은 기보하였거니와 금번 남양청에서는 남양군도 개발의 한 방책으로 동지의 관유지 개간 이민 계획을 세우고 우선 조선농민을 초치하겠다는 신청이 조선총독부에 왔으므로 총독부에서도 이에 응낙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대체로 8월 하순부터 9월 초순에 문사(門司)를 출발하는 배로 이민을 알선 수송하게 되었다. (중략) 이주시킬 곳은 ‘파라오’군도(群島)의 관유지로 정하고 이주방법은 동지 풍남산업주식회사(豊南産業株式會社)의 경영의 ‘카사바’ 기타 농작물 재배의 소작인으로 이주시키고, (중략) 이민자격은 농업자로 가족을 동반하고 주동자는 20세로부터 40세까지의 남자임을 요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39년7월30일자,「朝鮮農民 50戶를南洋 파라오島로 移住」)

위의 신문기사는 조선인 노무자의 ‘이민’에 관한 것으로, 종사할 직종이 농업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목노무자들과 동일하다. 노무자들이 배치될 회사인 풍남산업주식회사는 국책회사인 남양척식주식회사(南洋拓殖株式會社)의 자회사로 ‘팔라우 본도’(本島. 일본인들은 바벨다옵을 ‘본도’라고 불렀다) 중동부의 개척지인 시미즈촌(淸水村)에 농장을 개설하고 있었다. 전시체제기 남양군도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책회사의 자회사에 조선인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이 알선을 시작을 농업노무자들의 팔라우 이동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41년부터는 국책회사인 남양척식이 ‘광산 채굴’ 및 ‘군납용 채소재배’에 사용하기 위해 직접 조선인 노무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당시 앙가우르광업소에 491명, 팔라우 본도 농장에 63명(여자 19명 제외) 등이 일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동원되었던 총인원의 규모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더 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1942년부터는 남양청이 직접 노무자들을 동원하였고, 남양알루미늄광업주식회사도 백수십 명 규모의 조선인 노무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에 소수이기는 하나, 항구에서 상하역에 종사하던 남양무역주식회사(南洋貿易株式會社) 노무자들도 있었다.

팔라우에는 민간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군은 팔라우를 뉴기니(New Guinea)-솔로몬제도(Solomon Is.) 전선의 후방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많은 병력과 군속이 팔라우를 거쳐 라바울(Rabaul)로 수송되었으며, 일부는 팔라우에 주둔하였다. 이런 양상은 1943년 중반 이후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며 더욱 강화되었다.

이미 1941년 하반기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기지건설 목적으로 남방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해군 군속이 많았다. 태평양 방면에 배치된 조선인 해군 군속은 약 1만 6천 명에 달하였고, 이중 팔라우 지역에 1,227명이 배치되었다. 뉴기니-솔로몬제도 방면 배치 인원도 3,500명이 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팔라우를 거쳐 수송되었을 것이다. 이들 해군 군속들은 기지 설영(設營), 항만구축 및 활주로 건설 등에 투입되었다.

육군 군속도 동원되었다. 주로 수송과 관련된 일에 복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 군속으로 동원되었던 경북 영주 출신 김원기(金元基)는 1944년 5월 20일 아카쓰키(曉)부대의 군속으로 동원되어 약 800명과 함께 부산을 떠나 남양으로 왔다고 하였다. 주로 수송관계의 노동을 하다가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진지구축에 투입되었다고 했다.

팔라우 각지로 흩어진 조선인들

조선인 노무자들은 팔라우 각지로 흩어져 노역에 투입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에 동원된 남양청 알선 노무자들은 코로르 시내에 배치되어 각종 토목공사에 투입되었다. 신문에 보도된 바로는 주로 항만개수 및 도로공사에 투입될 것이라고 했는데, 1944년 동원 노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는 사실이었다. 말라칼(Malakal)의 항만개수를 위해 수중 암반을 제거하는 일에도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코로르와 아라카베산(Ngerkebesang)을 연결하는 도로개설에도 투입되었다고 한다.(현지인들이 이 연결도로를 ‘아이고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아라카베산에는 일본 해군의 수상비행장이 건설되었는데, 수상비행장과 말라칼 항만을 연결할 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남양척식의 노무자들은 두 방면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한 무리의 노무자들은 팔라우 환초 남쪽의 앙가우르광업소에 배치되었다. 주로 충청북도에서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팔라우 본도의 농장에는 주로 충청남도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본도의 농장 중에는 아이라이(Airai) 및 가스판(Ngatpang) 농장이 잘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작은 개척촌 농장이 몇 군데 더 있었다.

풍남산업의 농장은 시미즈촌에 있었는데, 현재 지명으로 에살(Ngchesar)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양알루미늄광업의 채광지는 본도 북서부인 가라스마오(Ngardmau)에 있었다.

군속들은 주로 팔라우 본도 남부 아이라이 및 코로르 인근 지역, 환초 남쪽의 펠렐리우(Peleliu) 등지에 배치되었다. 육군의 아카쓰키부대는 항만이 있던 말라칼에 집중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군 군속의 경우 아이라이 기지 및 아라카베산 수상비행장에 배치되었고, 1944년 중반 이후 펠렐리우 섬으로 일부 인원이 이송된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은 자, 돌아오지 못한 자전쟁 중 사망한 사람도 많았다. 해군 군속의 경우 태평양 방면에서 사망한 인원은 약 6,400명가량인데, 이중 699명이 팔라우에서 죽었다. 일본이 제공한 명부자료(『구해군군속신상조사표』)에서 확인되는 수치인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군속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의 해상봉쇄 이후 병사한 사람이 많았다는 증언과 1944년 9월부터 전개된 펠렐리우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추측된다.

해군 군속 이외에 육군이나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규모를 가늠해 볼 만한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일부 사례를 통해 얼마나 처참하였는지를 짐작할 뿐이다. 앞에서 소개한 육군 군속 김원기는 팔라우에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들은 일본의 수송이 두절된 후부터는 아무런 식량의 배급도 못 받고 약간의 고구마와 풀잎으로서 연명해 왔다. 영양부족에 공습시에는 정글 속에 숨어있어 심신이 쇠약할 대로 쇠약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군속 중에는 굶어서 죽은 자도 많고 또는 견물생심으로 군창고 속에 있는 식량을 훔쳐먹다가 헌병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많다. 이번 전쟁의 모습은 처절을 극하였다. 파라오에 집결되었던 수송선 30여 척이 운하같이 달려드는 미군기의 일격에 날아간 후는 일본의 전세가 급각도로 기울어졌다.(『서울신문』 1946년 1월 19일자, 「징용자 1,800여 명 남양 파라오에서 귀국」)

팔라우 바벨다옵 섬 멜레케옥에 조성된 「한국인 희생자 추념공원」

해방 후 팔라우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조선인은 미군측이 남긴 승선자명부(『남양군도귀환자명부』)를통해그규모를일부알수있다.이에따르면육군군속589명,민간인 2,763명 등 합계 3,352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앞에서 김원기는 약 800명의 동료들과 함께 팔라우로 왔다고 했다. 이 인원과 비교해보면 적어도 200명 이상의 육군 군속이 사망하였다는 말이 된다.

민간인으로서는 남양청이 1944년 동원한 노무자들의 사례를 살펴볼 만하다. 남양청 서부지청이 남긴 『조선인노무자관계철(朝鮮人勞務者關係綴)』에 의하면 1944년 동원 노무자는 총 334명이다. 원래 각 군에서 알선한 인원은 427명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회피하여 최종적으로 승선한 인원은 334명이었다. 이중 살아서 돌아온 인원은 183명으로, 생환율은 54.8%이다. 이 사례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때 팔라우의 참상이 어떠하였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남겨진 이야기들

팔라우 바벨다옵 중서부 낫팡(가스판의 현지인 발음)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팔라우 해외추적소가 들어서 있다. 팔라우 추적소는 외나로도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이 제대로 된 궤도로 날아가고 있는지를 추적·확인할 목적으로 2019년 11월에 설립되었다. 추적소가 설치된 장소는 놀랍게도 태평양전쟁시기 조선인 노무자들이 배치되었던 가스판농장이 있던 곳과 매우 가깝다.

가스판농장은 남양척식의 개척농장이었다. 가까운 곳에는 일본인 개척촌인 아사히촌(朝日村)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보방(Ibobang)이라고 하는 마을이다. 바다에 접한 평지로 상대적으로 살기 적당한 곳에 일본인촌이 자리잡았고, 그 내륙에 조선인촌(현지인들은 조선부락이라고 기억하였다)이 있었던 것이다. 즉 가스판농장은 이보방 동쪽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개척농장은 미군에 의해 팔라우가 봉쇄된 이후 자활지로 기능하였다. 미군의 공습으로 코로르가 파괴되자 그곳 주민들이 본도 내륙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 중 상당수가 가스판농장으로 모여들었다.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미군의 공격이 덜했고, 공습을 피해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들을 비추어보면 좋건 나쁘건 낫팡과 우리는 인연 이 참 깊다.

태구만이 언제 무슨 이유로 팔라우로 갔는지는 모호한 점들이 있다. 일단 그의 나이가 사망 당시 64세라는 점이 걸린다. ‘전쟁 2년 전’에 동원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그렇다고 김찬구가 들은 이야기가 마냥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 전쟁 2년 전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비행장을 건설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 시기에 아라카베산의 수상비행장이 건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호한 점이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사실을 담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적어 진실을 가리기 어렵다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앞으로 연구자들이 더욱 분발해야 하는 이유이고, 또 사회의 관심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추신) 지면의 한계로 이 글에서는 팔라우의 조선인들이 겪었던 참상의 실체를 드러내지는 못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南洋廳, 『昭和13年版 南洋群島人口動態年表』, 1939.
『동아일보』 1939년 1월 18일자, 「멀고 먼 남쪽 나라에서도 노동자 5백 명을 초빙」
『동아일보』 1939년 7월 30일자, 「朝鮮農民 50戶를 南洋 파라오島로 移住」
『서울신문』 1946년 1월 19일자, 「징용자 1,800여 명 남양 파라오에서 귀국」
『조선일보』 1973년 12월 20일자, 「故國의 後孫 찾는 코러島의 韓人 孤魂」
심재욱, 「전시체제기 조선인 해군군속의 일본 지역 동원 현황」, 『한국민족운동사연구』81,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4.
김명환, 『일제 말기 南洋群島 지역 한인 노무자 강제동원 연구』,건국대학교 박사논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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