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마당]
‘제주4‧3의 의인, 쉰들러’ 문형순
주동욱 경희대 민주동문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문형순
문형순(文亨淳:1898~1966)은 제주4‧3 당시 무고한 민간인을 살려 ‘제주의 의인(義人)’ ‘제주판 쉰들러’라고 불린다. 1898년 평안남도 안주군 태생으로 1919년 3월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인 만주 신흥무관학교(경희대학교 전신)를 졸업했다. 이후 문형순은 문시영(文時映), 이도일(李道日)이라는 가명으로 시베리아에서 한국의용군(1920), 고려혁명군(1921)으로 활동했다. 1929년 국민부(만주 한인사회 준자치정부)에서는 중앙호위대장과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을 겸임했다. 1935년부터 북지(중국 북부) 허베이성에서 광복군 지하공작대 요원으로 활약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당시 문형순 나이 47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기를 독립운동에 바쳤다.
‘의인(義人)’ 경찰 문형순

문형순은 1947년 5월 경찰에 투신했다. 그가 홀로 남쪽으로 내려왔는지 광복군 신분으로 직접 서울에 왔는지 알 수 없다. 경찰 간부로 특채된 문형순은 그해 7월 제주경찰관 교습소 교두 겸 기동경비대장(경위)으로 제주에 첫발을 디뎠다. 1947년 제주시 3‧1절 기념행사 때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숨지고 제주인들의 저항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또 냉전 시기 한반도는 통일국가로 갈 것인지 분단국가로 갈 것인지 기로에 서있었다.
이듬해 1948년 제주4‧3항쟁이 일어나자 군과 경찰 그리고 서청(서북청년회) 단원이 ‘산(山)사람’과 연루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 학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0월 17일 송요찬(2연대장)이 “해안에서 5km 이외 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하고 사살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려지자, 군경의 ‘토벌’은 대량 학살로 바뀌었다. 특히 한라산과 가까운 중산간 마을은 무장대에 식량을 올려보냈다는 이유로 초토화되었다.
광풍은 문형순이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모슬포에도 찾아왔다. 1948년 12월, 군경이 대정읍 하모리에서 좌익총책을 검거하며 관련자 100여 명의 명단을 압수했다. 군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이들은 부모이자 형제이자 이웃이었다. 그들에게 쌀 한 줌, 옷 한 벌 안 준 사람이 없었다. 토벌대는 “과거에 조금이라도 무장대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고,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주민들을 협박했다. 하지만 자수하면 모두 처형될 분위기였다.
문형순 서장이 사태 해결에 적극 나섰다. 마침내 문형순과 마을 지도자(조남수, 김남원)의 설득으로 주민 100여 명이 자수했다. 당장 총살하겠다고 을러대는 서청 단원들에게 문형순은 엄명했다. “자수한 주민들이다. 강요하지 말라. 때리지도 말라.” 그리고 서청 단원들이 조서를 날조할 것을 염려해 마을 서기가 먼저 조서를 쓰도록 조치하고 자수자 전원을 돌려보냈다. 며칠 후 이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 갔으나 자수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이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자수자 모두를 풀어주었다. 이를 ‘자수사건’이라고 부른다.
문형순의 자수 권유는 제주도민의 항쟁을 막은 것이 아니라, 학살 위기에 처한 주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시 계엄하에서 일개 경위 지서장의 이같은 결단은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독립군 출신이 아니었다면 감히 군이나 서청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료 김호겸(서귀포 경찰서장)은 훗날 문형순을 이렇게 회고했다.
문형순은 배운 게 없어 경찰 법규조차 몰랐다. 그때 그의 별명이 ‘문 도깨비’였다. 그 까닭은 그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일자무식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경찰 중에서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형순 씨는 나보다 20살은 위로 당시 이미 50대의 중년이었다. 그는 기운이 장사였고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제주지구 토벌대 사령관이던 송요찬‧함병선 연대장 그리고 나 역시 일제 때 모두 일본군이나 그 앞잡이인 만주군에 있었지만 그때 문형순 씨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었다. 그런 경력 때문에 군대에서도 문 서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제민일보』 1999.1.20)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
제주4‧3 항쟁이 잦아지고 더 이상 비극은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국토가 분단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4‧3의 상처는 다시 덧났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은 불가능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정권 연장을 위해 6월 27일경 헌병사령부에 ‘대통령 특명’, 곧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라며 무전 지시를 직접 내렸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했다. 제주도에서는 과거 한번이라도 군‧경에 끌려갔다 온 적이 있거나 무장대에 동조할 가능성 있다고 판단된 이들을 대거 구금하고 학살했다. 모슬포 ‘백조일손(百祖一孫)’ 사건은 제주에서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학살사건이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에 예비검속된 민간인들이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옛 일본군 탄약터)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1956년이 되어서야 유족들이 시신 132구를 수습할 수 있었다. 후손들이 공동묘지를 만들고 “100명이 넘는 조상들이 한날 한시에 죽어 그 자손들이 모두 한 자손과 같다”는 의미를 담아 ‘백조일손지지’라는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파괴되었다가 다시 건립했다.

제주도 모슬포 예비검속자 총살집행은 당시 해병대 사령부 소속 모슬포부대(제3대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제주시에서도 군 트럭 약 13대에 실려 있던 예비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 소속 부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하지만 5‧16군사쿠데타 이후 관련 경찰기록 비밀문서는 거의 모두 파기되었다. 또 수많은 유해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 때 활주로 밑에 깔려 증거가 인멸되었다.
문형순은 한국전쟁 당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중령)이 성산포경찰서장 앞으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 중에서 현재까지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 귀 경찰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방첩대) 대장에게 보고하라”는 내용이다. 제4경찰서(성산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이 예비검속자에 대한 처형을 계속 지연하자 군이 총살을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문형순은 공문서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옆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 쓰며 집행을 거부하고 예비검속자 278명의 목숨을 살렸다.
1950년 8~9월 제주도에서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주시 400~500명 이상, 서귀포 250명, 모슬포 250명, 성산포에서 6명이 예비검속으로 처형되었다. 성산포경찰서 관할 희생자 6명은 문 서장이 ‘불가피’하게 내놓을 수밖2026년 3월 결산에 없던 이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음을 당했던 제주 다른 지역에 비해 성산포 주민들의 희생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문형순은 1951년 경남 함안경찰서로 전출되었다. 1952년 4월 다시 제주로 돌아와 경찰국 보안과 방호계장을 끝으로 1953년 9월 퇴임했다. 이후 문형순은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다. 제주에서 쌀배급소 직원, 제주의 첫 영화극장인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했다. 1966년 6월 20일 세상을 떠나 평안도민 공동묘지(제주 오등동)에 묻혔다. 유족은 없었다.
문형순은 독립운동가로 서훈받지 못했다. 경찰청이 문 서장의 독립운동 사료를 찾아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자’ 심사를 여섯 차례나 요청했으나 입증 자료 미비 등의 이유로 반려되었다. 그 대신 문 서장의 함안경찰서 재직시 지리산전투사령부에 복무한 이력을 인정받아 뒤늦게 ‘참전유공자’로 서훈받았다. 2024년 5월 10일 문형순은 국립묘지 제주호국원에 안장되었다.
제주4‧3 시기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경찰을 제주도민의 탄압 도구로 악용했다. 하지만 문형순 서장은 친위쿠데타나 내란 같은 국가의 폭력과 명령을 ‘불이행’하고 많은 제주인의 목숨을 구했다. 곧 신흥무관학교 출신 문형순은 해방 후 ‘참경찰’의 길을 걸으며 일찍이 ‘국민을 위한 경찰’, ‘민주경찰’ 상(像)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 <민주경희> 2026.4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history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