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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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3)

이순우 특임연구원

(9) ‘신사리공동묘지 수인묘역’으로만 장지의 사용이 강요된 까닭

강우규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이 불가피한 상태에 이르자 당장의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장례절차와 묘지선정에 관한 문제였다. 이에 따라 아들 강중건은 진주강씨의 본향인 진주 쪽 일가 친족의 협력을 받아 ‘진주 선산’에 안장하는 동시에 비석도 마련할 계획(『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 관련기사)을 세우기도 하고, 미리 “세간의 동정금을 모집하여 왕십리(往十里) 부근에 부지를 사들여 묘지를 정하였다”(마츠모토 테루카의 글, 『조선공론』 1924년 9월호, 102쪽)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정작 강우규 의사 본인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내용이 『매일신보』 1920년 11월 20일자에 수록된 「강우규 부자 면회(姜宇奎 父子 面會), 오래간만에 부자상면해 건강하고 좋은 기색으로 아들 중건을 쳐다보며」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채록되어 있다.

…… 그리고 내가 신문에 났던 것을 말씀하니까 나의 사형이 속히 집행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라 하시면서 내가 죽거든 나의 육신은 고향에 안장케 하여 주고 아무쪼록 나 죽은 후일지라도 조심조심하여 망동을 하지 말며 (하략)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나 바람에도 불구하고 강 의사의 장지는 총독부 당국이 미리 정해놓은 ‘신사리공동묘지 수인(囚人)묘역’ 외에 일체가 불허되었다. 일제가 이에 관해 노골적으로 발목을 잡은 것은 1920년 10월 28일에 공포한 조선총독부령 제160호 「형사자(刑死者)의 분묘(墳墓) 제사(祭祀) 초상(肖像) 등의 취체(取締)에 관한 건(件)」을 통해 사전에 이러한 통제장치를 설정해두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 ‘형사자 취체규정’은 해방 이후 시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다가 1961년 7월 15일에 공포된 법률 제659호 「구법령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정한 ‘1962년 1월 20일’이라는 구법령 폐지 정리시한에 쫓겨 1962년 1월 15일자로 법률 제970호 「형사자의 분묘 제사 초상 등의 단속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통해 대체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해를 넘겨 1963년 9월 30일의 법률 제1411호 「형사자의 분묘 제사 초상 등의 단속에 관한 폐지 법률」에 따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일찍이 일본 쪽에서는 1891년 7월 27일에 이것의 모본(模本)이 되는 내무성령 제11호 「형사자의 묘표 제사 사진 등에 관한 취체방(刑死者の墓標祭祀寫眞等に關する取締方)」을 제정해놓은 상태특별기고였지만, 식민통치가 10년이나 지나도록 전혀 도입할 낌새도 없다가 느닷없이 이러한 ‘형사자 취체규정’을 들고 나온 것은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불을 보듯 뻔했던 것이다. 실제로 『개벽』 제7호(1921년 1월 1일)에 게재된 「경신년(庚申年)의 거둠(하)」라는 글(98쪽 부분)에는 이러한 조치가 강우규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책이라는 점을 드러내어 질타한 구절이 나온다.

[형사자 신취체법(刑死者 新取締法)] [11월] 4일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부터 사형자(死刑者)와 분묘(墳墓)와 제사 급 초상취체(祭祀 及 肖像取締)에 관(關)한 신법령(新法令)을 발포(發布)하였다. 그 내용(內容)은 사형(死刑)의 집행(執行)을 수(受)한 자(者) 우(又)는 무기징역(無期懲役), 금고(禁錮)의 형(刑)을 수(受)한 자(者)로 복역중 사망(服役中 死亡)한 자(者)에 대(對)하여는 공공연(公公然)히 장송(葬送) 또는 제사(祭祀)를 못하게 하였고 또는 형사자(刑死者)의 사진(寫眞), 필적(筆蹟), 초상(肖像)을 공공연(公公然)히 상양(賞揚)하며 또 추도회(追悼會)를 행(行)치 못하게 한 것이었는데 시(是)는 위선(爲先) 강우규(姜宇奎)의 사형집행(死刑執行)을 위(爲)할 일종 준비(一種 準備)이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에 항거를 하다가 숨진 독립운동 관련 사형수들의 경우에는 ─ 조선인들이 드러내놓고 추앙하거나 추도할 것을 염려하여 ─ 총독부 당국이 특별히 허락하지 않는 한 ‘신사리공동묘지 수인묘역’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가령, 강 의사에 뒤이어 1921년 8월 25일에 서대문감옥 사형대에 오른 ‘간도 용정 조선은행 15만 원 탈취사건’의 주역 한상호(韓相浩, 1900~1921), 임국정(林國楨, 1896~1921), 윤준희(尹俊熙, 1895~1921) 등 3의사(三義士)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유해는 1966년 11월 24일에 이르러서야 신사리 수인묘역에서 수습되어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겨질 수 있었다.

(10) 일제경찰이 묘사한 강우규 의사의 장례식 광경

『조선공론』 1924년 9월호에 수록된 마츠모토 테루카의 글(102~103쪽)을 보면, 강우규 의사의 장례 과정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다른 자료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거나 언급된 바가 없는 장면들이 많으므로, 여기에 해당 내용을 참고삼아 옮겨두기로 한다.

…… 강(姜)의 장식(葬式)에 있어서도 또한 흥미로운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 장식은 주로 취조에 관계했던 치바 경찰부장(千葉 警察部長)과 모리 서장(森 署長) 2인이 마지막까지 관계하여 면도(面倒, 보살핌)를 주었던 것이다. 중건(重健)은 아버지가 사형(死刑)에 처해진다고 하니까 서둘러 세간(世間)으로부터 동정금(同情金)을 모집하여 왕십리(往十里) 부근에 부지를 매구(買求)하여 묘지(墓地)를 정하였고, 장식(葬式)은 인병(人並, 보통) 이상으로 훌륭하게 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있었는데, 모리 서장은 “형사인(刑死人)은 공식적인 장식 등은 절대로 할 수 없고, 묘지도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엄하게 타이르며, 그 방법에까지 관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중건은 그때는 빈핍(貧乏)에 빠져 있었으므로 장의비(葬儀費)가 1문(一文, 한 푼)도 없다고 하는 형편이었으며, 중건도 몹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때 2명의 전사자(田舍者, 시골 촌뜨기)라고 칭하는 불가해(不可解)한 인물이 나타나서 “우리는 귀하를 깊이 동정하는 사람이며, 우리는 카네모치(金持ち, 부자)라서 귀하의 부친 장의비는 전부 우리 두 사람이 담당하겠다”고 모리 서장을 통해 제의하였다. 덕분에 중건은 매우 기뻐하여 법(法)의 범위 내에서 본인(本人)의 희망대로 하여 장식이 꾸려지기로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명의 부호(富豪)라고 칭하는 불가해한 전사자야말로 유명무실한 것이었으며, 실제는 경찰관 모모(警察官 某某) 두 씨(二氏)가 의협(義俠)을 발휘하여 출금(出金)했던 것이다. 그들이 누구누구인지는 독자(讀者)의 추찰(推察)에 맡긴다.

이리하여 마침내 매장(埋葬)의 당일이 되었던 것인데, 장의(葬衣) 등은 가능한 대로 화미(華美)하고 훌륭한 것을 사용했고, 곧 양반(兩班)의 장례식 정도의 성대한 장렬(葬列)은 독립문(獨立門) 밖으로 1리반(里半, 일본식 거리단위) 가량의 길을 정정(靜靜)하게 진행하였다. 장례행렬에는 물론 모리 서장도 참가하고 있었다. 고양군 온평면(高陽郡 溫平面; 은평면의 착오) 밖의 구지(丘地)에 도착하여 식을 완료하고 매장을 마칠 무렵, 중건의 낭(娘, 딸)이 어디에서 어떻게 공면(工面, 변통)한 건지, 4, 5백 원이나 들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고운 착물(着物, 의복)을 안고 달려왔다. 그리고 나서 “꼭 사인(死人, 망자)에게 입혀 주오”라며 말하는데, 지금 다시 굴반(掘返, 파내는 것)하는 것도 비정상이라며 어르고 달랬으나, 손(孫, 손자)까지 강(姜)의 기질(氣質)을 나타내어 좀체 납득(納得)하지는 않았다. 거기에서 어쩔 수 없이 땅을 다시 파내어 결국 사체(死體, 시신)를 인출하고 위의 의복을 착장(着裝)시켜서 다시 매장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치바 료(千葉了)가 『조선독립운동비화』(1925), 18쪽에 남겨놓은 기록을 보면, “(강우규의) 유해(遺骸)에 견포(絹布)를 감싸는 것을 허락했고 또 노부(老父)의 사진(寫眞)을 복사하는 것을 인정하여 …… 운운” 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지방행정』 1933년 11월호에 실린 「조선통치비화 좌담회(9) 폭탄범인과 학생소요사건」이란 글(85쪽)에 좀 더 세밀하게 서술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치바 료] …… 사형에 처했던 때에는 조선식(朝鮮式)을 좇아서 유해를 포(布, 베)로 감아서 관(棺)에 넣어 공동묘지에서 매장했던 것인데, 그 후에 자식 되는 강중건(姜重建)이라는 자가 경성 내에 나타나서 아버지의 유해를 베로 감싸는 것은 조선의 옛 방식이긴 하지만, 견(絹, 명주)으로 감싸지 않으면 자기는 어버이에 대한 효도(孝道)로서 죄송한 일이라 하며 궤격(詭激)한 언론(言論)을 퍼뜨리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도연설(大道演說, 거리연설)을 시작하려고 하는 듯한 불온(不穩)한 행동이 있어서 대단히 애를 먹었으나, 결국 경찰서에서 본인(本人)을 위무(慰撫)한 결과, 본인의 말대로 명주를 감싸는 것으로 하게 했고, 그러고 나서 어버이 강우규의 사진(寫眞)을 본인에게 건네주었더니 그때부터 본인이 납득하고 무사하게 넘어갔던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덧붙여 두자면, 손녀딸 강영재의 회고기록(『신동아』 1969년 5월호, 198쪽)을 보면, 강우규 의사의 시신을 인수할 때 “사각형 궤짝에 할아버님 시신을 앉혀놓은 채 입관해놓은 ─ 『독립운동사』 제7권, 287쪽에서는 ‘이렇게 입관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행습이었다’고 하는 설명을 추가 ─ 상태였기에 아버지(강중근)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고 적어놓았고, 그 이후의 여러 전기나 평전에도 이 얘기를 거듭 인용한 사례들이 곧잘 보이는데, 이것이 애당초 어떠한 기록에 따른 것인지는 자세히 확인되지 않는다.

(11) 강우규 묘소의 이장 및 최남선 찬술 묘비석의 건립 과정

일제가 패망하고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신사리공동묘지에 그대로 남아 있던 강우규 의사의 유해는 1954년 4월 4일(청명일 전날)에 이르러 마침내 수유리 쪽(통칭 ‘우이동’)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그곳으로 옮겨졌다. 이 당시의 흔적을 뒤져보니 『서울신문』 1954년 4월 2일자의 1면 하단에 덕천군민회장(德川郡民會長) 명의로 낸 ‘고(故) 왈우 강우규 선생 이장식’ 행사 안내광고가 수록된 사실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날에 거행된 행사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1954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고이 잠든 강우규 의사(姜宇奎 義士), 4일, 예정(豫定)대로 우이동(牛耳洞)에 이장(移葬)」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채록된 내용이 남아 있다.

65세의 고령으로 일본 총독 사이토(齋藤)에게 폭탄을 던지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高陽郡 恩平面 新寺里) 공동묘지에 묻힌 강우규 의사의 유골은 예정대로 덕천군민들의 주선으로 이장하게 되어 4일 아침 가족의 품에 안긴 그 유해는 서울 교외 우이동(牛耳洞) 못 미쳐 있는 수유동(水踰洞) 산 109에 호송되었다. 그리하여 이날 이장식에 참석한 각계 인사들이 그 정신을 추모하는 가운데 12시 50분 하관식이 거행되어 34년간 공동묘지에 묻혔던 고 강 의사의 유해는 비로소 안정된 장소를 찾게 되었다. (사진은 동 이장식 광경)

이와 함께 이곳에는 묘비석도 함께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비문을 짓기로 했던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병석에 있기도 하였거니와 필요경비를 제때 마련하지 못하였고(『평화신문』 1954년 11월 7일자에 관련내용이 서술), 그리하여 이 일은 두 해를 넘긴 1956년 가을에 와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이에 관한 사항은 『경향신문』 1956년 10월 13일자에 수록된 「강우규 의사(姜宇奎 義士) 건비(建碑), 18일에 제막식(除幕式)」 제하에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강 의사 건비 제막식이 18일 오전 10시 30분 우이동(牛耳洞) 입구 상록에 있는 의사 묘전에서 거행된다고 한다. 강 의사는 남대문 역두에서 당시의 소위 총독 사이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져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그 후 피체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서거하였었다. 강 의사의 유해는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新寺里)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었는데 지난 해[지지난 해의 잘못] 4월 4일 덕천(德川)군민회와 유지들의 힘으로 우이동에 이장되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묘지 이장 및 비석 건립과정에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李承晩 大統領)이 14만 환(圜)에 달하는 금액을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몇 군데에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59년 11월 26일자에 게재된 「열사의 후예들(4) 강우규 의사 맏며느리」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현 묘소는 강 의사의 고향인 덕천군의 사람들이 옮겨놓은 것이며 이 대통령이 낸 14만 환으로 만든 비석이 서 있다”고 설명한 구절이 나오고, 또한 손녀딸 강영재의 증언(『주간조선』 1973년 7월 29일자, 「명가의 현장(37) 왈우 강우규」, 13쪽)에도 “그 후 할아버지 묘소를 수유리로 이장할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보태 쓰라고 14만 원[환]을 보내오시기도 했어요 …… 운운” 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강우규 묘비문(1956년 제막)의 말미에도 “동교(東郊) 우이동(牛耳洞) 일천(一阡)에 복조면봉(卜兆緬奉)하고 정민(貞珉)을 수(樹)하여 공사(工事)를 기(記)하려 한대 대통령(大統領) 이공각하(李公閣下) 거관(巨款)을 기사(寄捨)하여써 치영(侈榮)을 가(加)케 하시다.”라는 구절이 포함된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의 묘소가 수유리로 옮겨진 이후에 불과 10년이 되지 못하여 이곳은 또 다른 분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당초 김태선(金泰善) 서울시장의 허락으로 사용하고 있던 묘터 일대(수유동 산 108-1번지, 690평 포함)의 1만여 평 귀속임야가 1961년 8월 10일에 서울시 관재국에 의하여 불하처분이 이뤄지면서 이곳은 졸지에 더 이상의 점용이 불가능한 곳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강우규기념사업회 측에서는 불하임야의 매매무효청구소송까지 일으켜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1966년 6월 29일에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끝내 이러한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고자 멸실 위기에 처한 강우규 묘소는 서둘러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로 옮겨 모시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1967년 6월 26일에는 애국지사묘역에서 유해를 재안장하는 행사가 거행된 바 있다. 이때 수유리 묘역에 있는 묘비석은 ─ 국립묘지에는 관리주체 측에서 규격이 일정한 묘비를 일괄 설치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종전의 묘비를 옮겨세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 원래 묘터가 있던 자리에 땅속 깊이 매몰처리(『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1975, 288쪽에 관련 내용이 서술)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최남선이 지은 ‘강우규 의사 묘비문’(작성일은 1956년 3‧1절로 표기)은 별도의 사진 자료 등은 전해지지 않는 듯하나, 그 대신에 진주강씨중앙종회에서 펴낸 『순국선열 강우규』(1982)의 95~97쪽에 걸쳐 원문을 채록하여 수록한 자료가 있으므로 이것 역시 그 내용 전부를 소개하여 두고자 한다.

강의사 우규선생 비문(姜義士 宇奎先生 碑文)
[주(註)] 이 글은 강의사(姜義士)의 묘지(墓地)에 세웠던 비석(碑石)의 비문(碑文)이다. 현재(現在) 이 비석(碑石)은 강의사(姜義士)의 묘(墓)를 국립묘지(國立墓地)로 이전함에 따라 같이 옮겨지지 못하고 본래 묘역(우이동)에 그대로 남아서 매장(埋藏) 보관되어 있다. 이 비문(碑文)은 육당 최남선 선생(六堂 崔南善 先生)께서 지으셨다. 이 비문(碑文)이 국립묘지(國立墓地)로 옮겨지지 못한 것은 애국선열(愛國先烈)들의 비석(碑石)은 모두 동일(同一) 규격으로 정부(政府)가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미(己未) 삼월(三月) 일일(一日)에 독립만세(獨立萬歲)의 고함(高喊)이 근역(槿域)의 천지(天地)를 흔동(掀動)하니 이는 인류(人類)의 양심(良心)에 경종(警鍾)을 맹타(猛打)하여 약소민족(弱小民族)의 부활(復活)을 촉구(促求)한 세기(世紀)의 천뢰(天籟)라, 세계(世界)의 제국주의(帝國主義)가 일률진표(一律震慓)하고 특(特)히 당면(當面)의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가 근본(根本)으로부터 동요(動搖)하여 창황(蒼黃)히 관리(官吏)의 금장(金章)과패검(佩劍)을 폐기(廢棄)하고 이른바 문화정책(文化政策)을 개양(改揚)하여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이하(以下) 일군(一群)의 신관료(新官僚)가 임명파래(任命派來)되여 시세(是歲) 구월(九月) 이일(二日) 하오(下午) 오시(五時)에 그들을 실은 기차(汽車)가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한성입래(漢城入來)하는 여부(與否)는 곧 한국민(韓國民) 독립심(獨立心)의 열도계(熱度計)였다.
적(敵) 일본(日本)은 주도삼엄(周到森嚴)한 경계망(警戒網)을 펴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함을 가장(假裝)하고 사이토(齋藤) 이하(以下) 제인(諸人)이 기차(汽車)에 내려 마차(馬車)로 환승(換乘)하고 바야흐로 인린(轔轔)히 발인(發軔)하려는 찰나(刹那)에 춘뢰일성(春雷一聲)이 굉연(轟然)히 폭발하여 만인(萬人)의 심단(心胆)을 차열(扯裂)하니 이에 다수(多數)한 의장병(儀仗兵)이 이서(移序)는 잃고 산란(散亂)하고 전옹후위(前擁後衛)한 도중(徒衆)이 경혼사산(驚魂四散)하였다. 이는 곧 삼월(三月) 이래(以來)의 독립만세(獨立萬歲)가 성(聲)을 개(改)하여 발(發)한 것으로서 한국인인(韓國人人)의 흉중(胸中)에 울결(鬱結)하여 있는 일본(日本)의 신관리(新官吏)와 신정책(新政策)을 전면적(全面的)으로 거척(拒斥)하는 열렬(熱烈)한 정신(精神)이 폭탄(爆彈)의 작렬(炸裂)을 빌어 표현(表現)된 것이었다. 한국인(韓國人)으로부터 보면 응유(應有)할 것이 실유(實有)한 것이요 일본측(日本側)으로 보면필무(必無)하리라 한 것이 홀유(忽有)한 것이다. 그러면 대저 이 쾌사의거(快事義擧)를 판출(辦出)한 것은 한국(韓國)의 하인(何人)인가. 사발현장(事發現場)에서는 은율심황(殷慄心慌)하여 염(念)이 급(及)할 겨를이 없고 겨우 정신(精神)을 수습(收拾)하여 다일(多日) 대색(大索)한 끝에 비로서 유연(悠然)히 임운(任運)하고 태연(泰然)히 대명(待命)하는 하수인(下手人)을 사득(查得)하니 그는 청년 혈기인(靑年 血氣人)이 아니라 백수용종(白首龍鍾)한 노인(老人)임이 거듭 사람을 경악(驚愕)케 하였다. 이 노의사(老義士)의 원위(源委)는 사문(查問)을 따라 명백(明白)해지니 그 성(姓)은 강(姜)이요 명(名)은 우규(宇奎)요 본관(本貫)은 진주(晋州)로서 사일구이년(四一九二年) 기미(己未) 유월(六月) 이일(二日)에 평안남도(平安南道) 덕천군(德川郡) 제남리(濟南里)의 시례고가(詩禮故家)에 출생(出生)하여 유소(幼少)로부터 강개숭의(慷慨崇義)하다가 구한말(舊韓末) 국세(國勢)의 급업(岌嶪)함을 보고 향리(鄕里)를 이탈(離脫)하여 함경남도(咸鏡南道) 홍원군(洪原郡)과 북간도(北間島) 요하현(饒河縣) 등지(等地)에서 학교설립(學校設立), 인재양성(人才養成)에 다년(多年) 종사(從事)하더니 및 삼일운동(三一運動)이 일어나매 더욱 지기(志氣)를 쉬려(淬勵)하여 인소불감(人所不敢)을 감위(敢爲)할 시기(時期)를 고사(苦竢)하다가 시년(是年) 팔월(八月)에 사이토(齋藤) 등(等)의 내(來)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무사연(無事然)히 허입(許入)함은 삼월 이래(三月 以來)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본의(本意)를 몰각(沒却)함이니 이천만(二千萬) 의혼(義魂)이 엄존(儼存)한 바에 가인(可忍)하랴 하고 가만히 노령지방(露領地方)에 이르러 폭탄(爆彈)을 입수(入手)하고 수륙(水陸) 수천리(數千里)를 간관발사(間關跋徙)하여 팔월말(八月末)에 원산항(元山港)에 이르러 가신(可信)할 동지(同志)를 구(求)할새 안주인(安州人) 허형(許炯)과 항인(港人) 한흥건(韓興乾)의 개연원종(慨然願從)함을 얻어 부서(部署)를 안정(安定)하고 한성(漢城)으로 사도(駛到)하여 시일(是日) 시각(是刻)에 시사(是事)를 주출(做出)하여 교적(狡敵)으로 하여금 일족(一足)을 한토(韓土)에 인(印)하기 전(前)에 그 심단(心胆)이 먼저 파쇄(破碎)되게 하고 한국민족(韓國民族)의 독립정신(獨立精神)이 유구유열(愈久愈烈)함을 거듭 세계(世界)에 표명(表明)하였다. 비록 부거(副車) 오중(誤中)으로 전지(前志)를 쾌수(快遂)치 못한 감(憾)이 없지 아니하나 민족정기(民族正氣)의 현양(顯揚)은 또한 이로서 족(足)하였다.
거사(擧事)한 후(後) 의사(義士)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꾀하더니 다수(多數)한 인물(人物)이 무고(無辜)히 수계수곤(囚繫受困)함을 보고 분연(奮然)히 취포(就捕)하여 재판(裁判)의 끝에 사형(死刑)에 선고(宣告)되어 경신(庚申) 십일월(十一月) 이십구일(二十九日)에 서대문 형장(西大門 刑場)에서 후사(後事)를 전민족(全民族)에게 탁(託)하고 종용(從容)히 성인(成仁)하니 향년(享年) 육십이(六十二)였다.
이자(二子)가 있어 장(長)을 중건(重建)이라 하고 그에게 일녀(一女) 영재(英才)가 있어 금(今) 농업기술원장(農業技術院長) 채병석(蔡丙錫)에게 적(適)하였다. 처음 신사리묘지(新寺里墓地)에 권조(權厝)하였더니 경인춘(庚寅春)에 덕천군(德川郡) 인사(人士) 제성분의(齊聲奮義)하여 동교(東郊) 우이동(牛耳洞) 일천(一阡)에 복조면봉(卜兆緬奉)하고 정민(貞珉)을 수(樹)하여 공사(工事)를 기(記)하려 한대 대통령(大統領) 이공각하(李公閣下) 거관(巨款)을 기사(寄捨)하여써 치영(侈榮)을 가(加)케 하시다.
사이팔구년(四二八九年) 삼일절(三一節)에 동주후인(東洲後人) 최남선(崔南善) 근지(謹識).

(※ 옮긴이 주 : 밑줄 친 부분은 ‘1859년’이라는 시점에 맞추기 위해 임의로 편집 수정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이는 구절이다.)

자료출처 : 진주강씨중앙종회, 『순국선열 강우규』(1982), 95~97쪽

이상에서 여러 항목에 걸쳐 살펴보았듯이, 강우규 의사의 생애 및 항일의거와 관련한 부분은 여느 전기 또는 평전 등을 통해 제법 알려져 있는 듯도 하지만, 세부항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보면 여전히 정리가 미흡하거나, 잘못 알려졌거나, 잘 모르고 있거나 하는 부분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관련자료의 보완은 좀 더 꼼꼼하고 치밀하고, 그것도 가급적이면 서둘러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보며,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강우규 의사가 일으킨 저항과 독립의 정신을 올바르게 기리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송상도의 『기려수필』(1955), 「강우규(4) 기미 사이토 총독 저격」 항목의 말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물론(物論, 세상 사람들의 평판 따위)을 살피건대, 강우규는 그 공(功)이 안중근에만 못하다 한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적을 쏘아 맞췄느냐 못 맞췄느냐의 차이이다. 비록 10여 년이 적막강산이었을지라도 이 같은 커다란 폭발 소리를 일으켜 다른 세상 사람들의 농수(聾睡, 귀머거리와 장님 신세)를 깨부수게 하였다. 이 역시 하나의 쾌거였으니, 어찌 실수한 것으로써 우열을 삼겠는가. 진실로 삼장(三長, 재지와 학문과 식견)을 갖춘 병자(秉者, 붓을 쥔 사람)가 있다면, 오늘날 반드시 사기(史記)에 적고 실어서 천추에 이르도록 밝게 빛나도록 할 것이지만, 단지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없고 공연히 순문(脣吻, 입술)에 올려 누가 낫다, 누가 못하다고들 하는 것에 그치니, 슬프도다. 대개 충신과 열사가 병인양요 이후로 늠름외외(凜凜巍巍)하게 일월(日月,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툴만한 이들 역시 많지 않다고 여기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토장복수(討戕復讎, 적을 무찔러 원수를 갚는 것)에 이르러서는 병춘추(秉春秋; 춘추의 필법을 쥐었다는 말)를 천하에 드러낸 이는 안중근, 장인환, 이재명, 강우규 등 몇 사람밖에 없으니, 도대체 그 까닭은 무엇이던가? 대저 의(義)는 사시(四時)에서 추(秋, 가을)에 속하고 오행(五行, 다섯 기운)에 있어서 금(金)에 속하며 사방(四方)으로는 서(西)에 속하는데, 황평(黃平, 황해도와 평안도)의 두 지방은 우리나라의 서방에 있으니 추(秋)와 금(金)의 고을이라 하겠도다. 이러므로 이들 네 사람이 모두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나서 의열(義烈)로써 천하에 알려진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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