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26]
살아남은 이름 ‘상명’, 사라진 이름들을 외면하다 :
교육자 배상명과 제국의 수사학
강은정 선임연구원
1. 교정에 새겨진 이름과 지워진 목소리

우리는 말과 글이 목소리로 발현되는 순간,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 목소리가 권력과 결탁할 때,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을 넘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그 목소리가 ‘교육’이라는 현장에서 스승의 권위를 입고 터져 나올 때는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갖게 되는 것일까?
5월의 교정에서 넘실거리는 ‘스승’이라는 단어의 숭고함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에 올바른 이정표를 세워준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그 이정표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묻는다. 스승의 가르침이 학생들의 삶을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전쟁터를 향한 독려였다면, 우리는 그 이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식민지 시기에 학교 설립과 교육을 통해 여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들 가운데 배상명(裵祥明, 1906.5.17.~1986.2.17.)은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동시대의 여성 교육가들에 비해 개인적 인지도는 낮지만, 자신의 이름을 교명(校名)으로 내건 덕분에 그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각인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상명(祥明)’이라는 이름에는 교육을 통해 세상을 상서롭게 밝히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서 마주하는 그녀의 행적은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자신이 세운 교정에서 제자들에게 죽음을 종용했던 스승, 그녀가 세운 이정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배상명은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교육계의 원로로 추앙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굳건히 지켜냈다. 그리고 2026년 5월,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교정에 남아 있지만, 그 이름 아래에서 사라진 수많은 목소리들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2. 단순한 복종을 넘어선 ‘수사학적 과잉’
지식인의 친일을 정당화하는 가장 흔한 변명은 강요된 선택, 즉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1937년 12월 상명여자고등기예학원을 창립한 배상명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설립자의 전기를 다룬 『천년수(千年樹)-계당 배상명선생의 교육과 생애-』에 따르면, 그녀는 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수 차례 찾아가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5시간 가까이 졸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그녀는 “학교를 위하여 나는 내 생명을 몇 번이라도 바꾸어야 한다. 죽음 같은 것은 조금도 무섭지 않다”고 할 정도로 강한 집념을 보였고, 결국 총독부 경무부장과의 담판 끝에 인가를 받아낸다. 이 일화는 학교 설립에 대한 그녀의 열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후 자신의 이름이 걸린 학교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내린 선택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전시체제가 강화되자 총독부의 감시와 통제는 학교 담장 안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천년수-계당 배상명선생의 교육과 생애-』는 당시 배상명이 총독부의 압박 속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실천하느라 큰 애로를 겪었으며, 인가 당시 약속했던 실업교육에 치중하라는 위협과 공갈을 받은 것처럼 서술한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통치에도 그 전보다 더 심한 방해와 교육제도에서도 감독이 심했다. 이러한 때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한 내용의 발언이나 교육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선생[배상명]은 이러한 상황 속에 뜻하는 교육을 실시하기에는 애로가 많았다.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선생에게 여러 번 출두를 명(命)하였다. 처음과는 빗나가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인가할 때 약속한 대로 실업교육에 치중하라는 것이었다. 위험과 공갈 같은 언질을 받았다.(『千年樹-桂堂 배상명선생의 교육과 생애-』, 배상명선생화갑기념사업위원회, 1966, 89쪽)
기록대로만 읽는다면, 배상명은 소중한 교육현장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교육자로 비춰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어디까지가 ‘강요된 것’이었을까. 1942년, 징병제 실시를 전후로 드러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타협의 범주를 따지는 것조차 무색할 만큼 노골적이다.
19년도[1944년]부터 징병령이 조선에도 실시되게 된 것은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아직까지 지원병에 부치던 반도인에게 이제는 떳떳한 제국의 군인으로서 국방의 중책을 지게 된 것은 크나큰 광영이며 더구나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선 교육자인 입장에서 반도의 여성을 어떻게 교육하며 더구나 군인의 아내요 어머니인 중책을 담당하여 나갈 군국 여성을 연성하는데 종래보다 더 한층 결의를 새로이 하며 교양과 지식을 길러나갈지 다시 한번 느끼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 『매일신보』 1942.5.13.2면)

그녀는 징병령 실시를 ‘더할 수 없는 기쁨’이자 “크나큰 영광”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죽음을 전제한 제도를 감격과 영광의 언어로 치환하는 고도의 기술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스스로를 ‘교육자’라는 공적 위치에 세운 채 가르침의 형태로 그 영향력을 제국의 전쟁 동원에 투여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복종을 넘어 교육의 권위를 동원한 적극적인 전쟁 협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42년 5월 23일, 조광사 주최 좌담회 「징병령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에서 그녀가 내뱉은 발언은 더욱 직접적이다. 반도 어머니의 결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식이나 남편을 출전시킬 때는 살아서는 돌아오지 마라, 죽어서도 냄새가 나지 말게 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좌담회-징병령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 『조광』 제8권 6호, 1942.6, 38~44쪽)
이 발언은 단순한 정책 전달이나 체제 순응의 수준을 넘어선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인 ‘모성’을 자극하여 죽음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의도된 심리전이자, 자발적인 선동에 가깝다. 스승이라 믿었던 이의 입에서 나온 “살아서는 돌아오지 마라”는 말은 학생들에게 교육이 아닌 압박이자 폭력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44년에는 징용을 군 입대와 같은 ‘명예로운 의무’라고 규정하며 전쟁 동원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더욱 공고히 한다.
징용은 전선과 총후가 다를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즉 말하자면 징용된다는 것은 군인이 부르심을 받고 영문으로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 명예스러운 의무인 것이다.…응소된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징용의 본뜻을 이해하고 명예스러운 총후의 산업전사로서의 임무를 다할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징용은 영광스런 일, 장병의 의기로 나서기를」, 『매일신보』 1944.5.26. 4면)
강제 동원을 ‘영광’으로, 개인의 희생을 ‘국가적 의무’로 바꿔버린 그녀의 발언을 과연 강요에 의한 복종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신의 지적 능력과 감수성을 총동원해 제국의 논리와 적극적으로 결합시킨 ‘자발적인 창작물’에 가까워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녀는 일제의 강요 앞에서 침묵하는 대신 스스로 말하기를 택했고, 그 말은 타인의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으며, 때로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이 되었다. 여성을 ‘예비 전사’이자 ‘전사의 조력자’로 길러내려 했던 그녀의 정교한 궤변, 그 수사학적 과잉에 휩쓸려 수많은 청춘들이 스러져갔다.
3. 시대적 한계를 무대로 삼은 ‘전략적 실천’
그녀의 선동적인 말은 행동으로도 이어졌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 교육자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언론과 강연을 통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개인의 역량으로 일궈낸 성공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제국이 필요로 하는 범위 안에서 허용된 활동이었으며,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전시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제국의 최하단 단위인 ‘가정’ 깊숙이 확산시키고자 했던 통치 전략과 맞닿아 있었다. 당시 여성교육은 그 목적을 달성할 가장 효율적인 통로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던 1937년 11월에 배상명이 학교 인가를 받아낼 수 있었던 배경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녀의 교육열이 일제가 필요로 했던 ‘실업교육’과 ‘순종적 현모양처 양성’이라는 식민권력의 요구와 절묘한 타협점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실제로 그녀의 행보는 점차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전쟁협력’으로 치달았다. 그녀는 총동원 체제의 선전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애국반’의 반장을 맡아 이 제도를 적극 옹호하고, 애국반을 ‘원만한 큰 가족’처럼 운영할 것을 독려했다.
총후를 지키는 우리 가정에서도 빈부와 지위를 가리지 말고 일치단결해서 일선에서 싸우는 황군장병의 마음과 매한가지가 되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좋은 단체인 이 애국반을 늘 원만한 큰 가족처럼 살려가시기 바랍니다.(「온 국민이 한가족, 기쁨과 고난을 같이 하자」, 『매일신보』 1941.11.10. 4면)
애국반을 중심으로 한 결속을 촉구한 그녀의 목소리는, 가정을 전쟁의 후방 기지로 만들려고 했던 제국의 논리에 완벽히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같은 시기인 1941년 10월, 배상명은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부인층의 ‘총후보국’을 목적으로 조선임전보국단 내에 결성된 부인대 지도위원이 되어 전시재정경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저축 장려 강연과 군복 수리 작업 등 전시 동원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1943년에는 임시특별지원병제도를 위한 종로익찬위원회의 실행위원으로서 효자정(孝子町) 방면의 가정을 방문하여 지원병 참여를 선전했고, ‘전위여성격려대(前衛女性激勵隊)’의 일원으로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젊은이들에게 사지(死地)로 향할 것을 종용했다.
그녀의 전쟁협력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교육 현장을 통한 조직적 동원으로 확장된다.

상명실천여학교에서는 방촌(芳村祥明, 배상명) 교장의 주도 아래, “학원이 곧 직장이다”라며 전 교생에게 호소하여 졸업 후의 유휴(遊休) 능력을 국가에 보답하는 데 이바지하게 되었으며, … 나아가 3학기 수업을 시작한 동교 졸업반 일동은 “수업도 중요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방촌 교장에게 청원을 올렸다. 학생들의 성의에 감동하여 즉시 이사카(伊坂) 종로경찰서장에게 학생들의 뜻을 전하며 기다리고 있던바, “그렇다면 하나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상담이 성사되었다. 그리하여 25일부터 매일 5명씩 3일간 교대로 매일 아침 해당 경찰서원과 함께 출근하여, 바쁜 경찰 사무를 거드는 일을 수행하며 서원(경찰관)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學園から職場へ, 祥明女實生が鍾路署で奉仕」, 『경성일보』 1944.1.26. 4면)
배상명의 상명실천여학교는 “학원이 곧 직장이다”라는 구호 아래 학생들을 전시 동원 체제 속으로 편입시키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취업 장려나 진로 지도의 차원을 넘어, 학업과 노동, 나아가 전쟁협력을 동일선상에 놓는 인식의 전환을 강요한 것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흐름이 자발적 선택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에서는 졸업반 학생들이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스스로 청원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기사 자체가 “방촌 교장의 주도 아래”라는 표현을 명시하고 있듯, 학생들의 선택은 배상명의 지도와 방향 설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학생들은 종로경찰서에 동원되어 경찰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는 단순한 봉사나 실습이 아니라, 식민 통치 기구의 일상적 운영을 보조하 는 행위로서 전시 동원 체제의 말단을 직접 떠받치는 것이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이 운영하는 학교를 매개로 학생들까지 전쟁 체제에 편입시킨 것으로, 교육자의 영향력이 개인의 신념 표명을 넘어, 타인의 삶을 전쟁 체제 속으로 끌어들이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동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그녀의 선택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협력이나 순응에 머물지 않았음을, 단순히 언론과 강연을 통해 전쟁 협력 담론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제국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확대하려는 능동적이고 치밀한 ‘전략적 실천’에 가까웠다. 그녀는 제국이 자신에게 부여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체제의 논리를 조직하고 확산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그녀에게 식민지라는 ‘시대적 한계’는 극복해야 할 제약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확장할 수 있는 무대였던 셈이다.
4. ‘이름’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삶’을 내놓다
배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의 이름을 학교의 이름으로 내걸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녀에게 학교가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반드시 지켜내야 할 자신의 업적이자 소유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는 것이다.
각종 운동경기를 장려하여 체력의 증강을 힘쓰며 방공훈련, 혹은 기회 있는 대로 사회명사나 교직원에 의탁하여 시국강화(時局講話) 등을 하여 정확히 시국인식을 파악하여 모든 곤란과 능히 싸울만한 열과 힘의 소유자가 되도록 힘쓰고 있다 … 엄격하고 규율적인 군사교련이 절대 필요하다.(「我校의 여학생 군사교련안-시국강화와 교련실시」, 『삼천리』 제14권 1호, 1942년 1월, 102~103쪽)
1942년 상명실천여학교 교장이었던 배상명은 「아교(我校)의 여학생 군사교련안-시국강화와 교련실시」라는 설문조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체력단련과 함께 방공훈련, 시국강화를 병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녀는 매주 토요일 전교생에게 교외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전쟁을 견딜 정신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교육의 현장이 지식의 전달을 넘어, 제국의 전쟁을 뒷받침하는 정신적·육체적 연병장으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선동은 교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1944년 1월 「시국의 재인식」을 통해 시국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조선의 어머니들을 ‘어두운 존재’로 규정하며, 자식들을 전장으로 떠나보낼 ‘군국(軍國)의 어머니’가 될 것을 요구했다. 이 또한 가정을 전쟁 수행의 기반으로 재편하려는 제국의 논리를 대신 펼쳐준 것이었다.
지금은 비상시라는 비상이란 말을 더 한층 초월한 국가에 있어 어려운 때입니다. 그럼으로 나라의 존망을 두 어깨에 짊어질 젊은이들이 떨치고 일어서야 할 터인데 이러심에 있어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이는 그 뒤에 있는 어머니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스스로 그 직책을 깨달아야 할 것인데 아직도 어두운 조선 부인에게 어찌하여야 잘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훌륭한 어떠한 나라에게라도 지지 않을 군국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시국의 재인식」, 『춘추』 제5권 1호, 1944년 1월, 조선춘추사, 73~74쪽)
또한 「오직 승리 하나뿐, 우리는 총칼 대신 ‘근로’」에서는 여성들 역시 군수공장과 농촌에서 근로를 통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여성들도 묵묵히 당국의 지도에 따라 군수품 공장에서나 논밭에서나 근로분함으로써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바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오직 승리 하나뿐, 우리는 총칼대신 「근로」」, 『매일신보』 1944.8.27. 4면)
그녀가 주장한 논리를 종합해 보면, “어머니는 아들을 천황에게 바칠 전사로 키워야 하고, 아내는 남편이 걱정 없이 전장에서 죽을 수 있도록 후방인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가르친 것은 삶을 지키는 지식이 아니라 제국을 향한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이토록 정교한 수사학과 왕성한 활동 뒤에는 자신의 이름이 걸린 학교, ‘상명’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지극히 사적인 집착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교육 공간인 ‘상명’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귀한 자식들에게는 “죽어서 돌아오라”고 가르친 셈이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숭고한 명분 아래 이루어진 가장 비겁한 거래였다. 자신의 학교를 지키기 위해 지식인의 공적 양심과 책임을 내려놓은 선택, 그 대가로 챙긴 ‘교육 공로자’, ‘교육계의 지도자’라는 명예는 이름 없는 수많은 제자들의 희생과 맞바꾼 전리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리품은 지금까지도 교정에 세워진 동상과 흉상의 모습으로 남아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상징물이 되어 있다.
5. 남겨진 이름, 기억의 책임
배상명의 말과 행동은 분리되지 않았다. 말과 글로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했고, 행동으로는 친일단체에 가담해 전쟁을 선동했다. 교육자로서의 명망을 전쟁협력에 쏟아부은 그녀의 언행일치, 이 명백한 기록 앞에서 우리는 그녀의 행적이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닌, ‘자발적인 친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승의 날,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화려하게 칭송받는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 뒤에 가려져 사라져간 수많은 삶과 끝내 말해지지 못한 진실이다. 5월의 햇살 아래 우뚝 선 ‘상명’이라는 이름 뒤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서는 돌아오지 마라”던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그 이름은 명예로운 설립자로만 남는 것이 아닌, 제국의 언어로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가해자의 기록과 함께 남아야 할 것이다. 살아남은 이름이 사라진 목소리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몫이다.
[참고문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인명사전』 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裵祥明先生華甲紀念事業委員會, 1966, 『千年樹-桂堂 裵祥明先生의 敎育과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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