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간도특설대 선전 화보와 매일신보 관련 기사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동맹사진특보(同盟寫眞特報)』 1943년 1월 1일자의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선전 화보와 『매일신보』 1943월 1월 11일자의 「현지보고 – 반도징병제에 선구(先驅)하는 간도특설대의 활약」 기사이다. 1942년 12월말 일제의 국책통신사인 동맹통신사(同盟通信社)는 1943년 신년호 준비를 위해 나카무라(中村) 특파원을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로 파견했다. 나카무라 특파원은 북풍한설 속에서 간도 일대의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고 소만 국경의 수비를 위해 복무하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취재하고 이 부대의 위용과 공적을 칭송하는 화보와 기사를 작성해 『동맹사진특보』 1943년 신년 화보와 『매일신보』의 현지 보고 기사로 내보냈다. 이 화보와 기사에서는 “북변 진호에 철벽의 방비로 지키는 만주국군의 정예” “북변 진호의 중책을 맡아 황군과 협력, 빙설의 광야에서 활약하는 용사” “가혹한 한파에 맞서 철화(鐵火)의 맹훈련을 이어가는 용사” “일만공동방위에 민족협화의 꽃” “엄정한 군규, 충성과 유신의 대도를 매진하는 그들”이라고 간도특설대를 과대 포장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과연 간도특설대의 활약상을 선전하는 내용을 1943년 신년 화보와 기사로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개시로 일제는 전장 확대로 인한 병력 보충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와 괴뢰국 즉 조선, 대만, 만주국, 남양군도 등에서 징병제를 실시해 부족한 병력 수급을 해결하고자 했다. 만주국에서는 이미 1941년 징병제를 전면 시행했고, 조선에서는 1943년 3월 징병제를 공포, 8월에 시행했으며 아울러 10월에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했다. 이러한 징병제 시행 일정을 감안할 때 1943년 1월초에 간도특설대 선전 특집호를 발간한 것은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의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만주국 간도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연길현 특무기관장 겸 간도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연길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모두 108차례 공격했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
2020년 7월 15일, 간도특설대 중위로 복무한 육군대장 백선엽이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당시 친일 군인으로서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항일세력을 토벌한 백선엽이 과연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인 논란이 크게 일었다. 그의 국립묘지 안장으로 인해 항일독립운동의 역사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끝으로 서울과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힌 간도특설대 출신 인물들을 밝혀둔다(괄호는 안장 연 도) ― 편집자
서울현충원: 김백일(1951), 임충식(1974), 김용기(1983)
대전현충원: 윤수현(1994), 김석범(1998), 김대식(1999), 송석하(1999), 김묵(2003), 신현준(2007), 이용(2009), 백선엽(2020)
[화보1] 칼끝도 얼어붙은 가혹한 한파가 몰아쳐 빙점하 몇십 도의 한파에 맞서 북방 진호(鎭護. 수호)의 중책을 맡고있는 황군(일본군) 용사의 곁에서 묵묵히 공동의 결의를 굳게 하며 활약하는 만주국군 중에 조선 출신 용사만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잊어서는 안된다. 만주국의 중핵이면서 열렬 진지하고 ○○○○ ○○○○ 철화의 훈련을 계속하는 용사들은 실로 만주국군의 정예로서 인정받고 있다.

[화보2] 살이 에이듯한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북만의 황야에 몸을 던져, 엄연히 북방 수호의 중책을 맡은 우리 황군(일본군)의 옆에서 공동방위의 서약도 굳게 지키며 용맹하게 활약하는 만주국군 정예의 모습은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바이다. 그 정예 중의 정예라 일컬어지는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간도특설대는 지금 빙설이 휘몰아치는 북만에서 비적 토벌(항일무장세력 탄압)과 북방 수호에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있다. ‘대군(천황)의 곁에서’라는 그들의 뜨거운 피는 대동아 보위의 중책 아래 열화와 같이 타오른다!!


현지보고 – 반도징병제에 선구(先驅)하는 간도특설대의 활약
일만공동방위에 민족협화의 꽃
[명월구에서 중촌(中村) 특파원 10일발 동맹(同盟)] 신동아 건설의 지도적인 지보(地步) 위에 엄연히 서서 반도동포는 드디어 명년(내년)을 기하여 대동아전쟁 아래 빛나는 황군의 신병으로서 징병의 광영을 걸머지고자 연성을 쌓고있는 이때, 여기 간도성 일각에는 벌써 5년 전부터 반도징병제 실시에 선구하여 민족협화의 결의도 굳게 일만공동방위의 제일선에서 만주국군의 정예부대로 끊임없는 철화(鐵火)의 연성을 계속하고 있는 반도부락이 있다.
영봉(靈峰) 장백산의 지맥인 합이파영 속 명월구 안에 있는 국군 간도특설대가 그것이다. “간도성 안에 거주하는 반도청년으로 국군부대를 편성하여 왕도정신을 주입하고 민족협화의 급선봉이 되게 함과 아울러 일만공동방위의 일익에 참가하게 한다”는 취지로 간도특설대가 창설된 것은 강덕(康德) 5년(소화 13년, 1938년) 12월 1일이었다. 지나사변이 발발하여 만 1년 그때부터 대동아전쟁의 암운은 떠돌고 미영(米英)의 책모는 날이 갈수록 치열하여 갈 때 반도에 지원병제도가 시행됨을 보고 광영의 기회를 기다리던 간도성 50만의 반도동포는 이제야말로 복합 민족국가의 구성분자로서 일사 제은(帝恩. 만주국 황제의 은택)에 보답할 때라고 두 손을 들어 이것을 맞이하여 반도인의 명예를 위하여 우수한 인재를 뽑아 영문(營門)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창설된 특설대 앞에 나타난 최초의 시금석은 당시 통화 길림 간도의 3성에 걸쳐 넘나들고 있는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안창길(安昌吉. 安相吉의 오기) 등 군소 비적단(匪賊團)의 횡행이었다. 이때 반도인의 특설부대는 아직 제1기의 교육도 다 받지 않고 사격교육도 끝마치지 않았지만 그들은 용약(勇躍) 산악과 밀림 속으로 돌진하여 토벌하였다. 이리하여 동변도(東邊道), 간도 일대에 완전히 비적의 자취조차 없는 현재에 이르기까지에는 병사 이하 18명의 존귀한 전사자를 내었고 그중에도 안도현성 북쪽 36킬로미터의 대사하에서 위극민(魏極民) 김일성 최현 김광(金光-全光의 오기) 박득범(朴得範) 들이 합류한 비적을 만나 싸우고 홀로 살아남은 현학춘(玄鶴春) 상병(왕청현협화회 청년훈련소 출신)은 150발의 탄환을 다 쏘아버리고 총검을 휘두르고 산꼭대기에 돌격하여 연달아 습격해오는 비적을 격퇴하고 후원부대가 오기까지 4시간 반 동안 요지를 지켜 당시의 치안부대신으로부터 무공장(武功章)까지 받은 일이 있다.
엄정한 군규(軍規)가 특색, 충성과 유신(惟神)의 대도를 매진하는 그들
그들의 일과는 어떠한가. 아침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병대(兵隊)들은 아직 밝지도 않은 영정(營庭)에 정렬하여 우선 건국신묘(建國神廟)와 황거제궁(皇居帝宮)을 요배한 다음 고향을 향하여 오늘 하루의 각오를 고한다. 그리고 후루하도 시내의 꽝꽝 얼어붙은 얼음을 깨뜨리고 세 수한 다음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군규가 엄정한 것은 특설대의 제일 큰 자랑거리이다. 병대들은 경례할 때마다 ‘충성’을 부르짖고 활발한 동작을 한다. 내무반은 깨끗하고 청결하게 정돈한다. 몸과 주거의 깨끗한 점으로부터 마음의 청정과 건군정신, 유신(惟神)의 길은 여러 곳에 구현되어있다. 더욱이 내무반에서 눈에 띈 것은 책장에 책이 많이 들어있고 거의 누구나 『명치대제(明治大帝)』를 한 권씩 귀중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3대째 대장(隊長)인 사사기(佐々木五郞) 소교(小校)는 “명치대제의 어유훈을 실천하기에는 무엇보다 나은 만주국민이 되어 황제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무반에는 ‘건군상(建軍箱)’이라는 상자가 걸려있다. 이것은 병대들이 저녁 점호 후 반성의 시간에 하루를 돌이켜보아 자기를 중심으로 한 반성을 기입해서 투서하는 것이다. 그 내용 가운데에는 봉급을 받았는데 1원 한 장이 더 들어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가졌더니 양심이 허락지 않는 바가 있어 ‘건군상’에 그 뜻을 써서 투서하고 바로 상관을 찾았더니 상관으로부터 뉘우침을 칭찬하고 상금을 주었으니 병대는 그것을 다시 국방헌금으로 냈다. 대단치 않은 것 같으나 하나하나가 피가 통하는 반성을 하고 있다. 제6군관구에서도 유신의 길을 가르치는 건군 근무의 실시방법으로서 성적이 좋음으로 머지않아 이 ‘건군상’을 전 군관구에 다 두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찬과 감사, 각 방면의 기대 집중
무기 우수와 곤고결핍(困苦缺乏)에 대한 내구가 센 것도 이 부대의 자랑이다. 총검술대회에서는 전만(全滿)에서도 극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밤낮의 토벌로 문자 그대로 불면불휴(不眠不休), 노루 고기와 잣을 먹으면서 연속 22시간의 강행군에도 끄떡없이 해치운다. 대동아전쟁의 발발, 조선징병제도의 실시 등 신변에 가까워지는 시국의 중대성에 대한 책임감은 한층 더 이 부대의 병정들에게 저축보국의 열의를 부채질하였다.
3년병이 최고 170원, 평균 70원, 2년병이 평균 30원, 초년병이 10원 이와 같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부대이므로 간도성내는 물론 조선 안에 이르기까지 이 부대에 대한 기대와 감사는 한층 더 크고 격려위문의 편지는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비적을 토벌할 때는 만계(滿系) 농민이 스스로 숙사를 제공하고 또는 명월구 재만국민학교 5년생 10명의 아동들은 매일 새벽 6시부터 7시 반까지 고철을 모아서 헌납하는 등 참으로 민족협화의 대의에 입각한 힘찬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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