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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미] ‘한일병합 역사적 부당성’ 인식 공유 큰걸음
[내용·의미] ‘한일병합 역사적 부당성’ 인식 공유 큰걸음(한겨레신문, 10.05.10)
한·일 지식인 214명, “한일병합 원천 무효” 선언
한·일 지식인 214명, “한일병합 원천 무효” 선언(sbs, 10.05.10)
日방위대학교장 “야스쿠니참배로 亞외교 마비”-연합뉴스(06.09.07)
日방위대학교장 “야스쿠니참배로 亞외교 마비” (도쿄=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 일본 방위청 산하 자위대 간부 양성기관인 방위대학교의 이오키베 마코토(五百旗頭眞) 교장이 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참배 하나로 얼마나 아시아 외교를 마비시키고, 일본이 부지런히 구축해온 건설적인 대외관계를 악화시켰는가”라고 비판했다.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이오키베 교장은 이날 배포된 고이즈미(小泉)내각의 대국민 홍보매체인 ‘e-메일 매거진’에 ‘고이즈미 내각을 이렇게 본다’는 제목으로 기고, “신용이라는 대외자산은 총리가 야스쿠니 참배를 고집함으로써 크게 손상됐다”며 “고이즈미 총리의 풍부한 매력과 국민적 인기가 아시아 외교에 대한 비판을 봉쇄했다”고 지적했다.그는 대미(對美) 관계와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 등을 평가한 뒤 “아시아 외교의 실점이 적지는 않지만 그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재부상(再浮上)의 기회를 후계자들에게 남긴 것으로 생각해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차기 정권이 한국.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줄 것을 기대했다.총 248회를 맞은 고이즈미 내각 e-메일 매거진에 이처럼 고이즈미 총리를 직접 비판한 글이 실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이다.
[사설/5월 11일]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환영한다
[사설/5월 11일]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환영한다(한국일보, 10.05.10)
“한일 역사적 화해의 출발점”
“한일 역사적 화해의 출발점”(세계일보, 10.05.10)
송영선-황우여, 조갑제와 日극우 돈으로 방일 파문-데일리서프(06.09.07)
송영선-황우여, 조갑제와 日극우 돈으로 방일 파문 ▲ 일본 극우 단체인 구조회의 경비로 방일을 해 논란이 되고 있는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왼쪽)과 송영선 의원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기사추가: 2006-9-7 09:38] 한나라당 사무총장인 황우여 의원과 같은 당 송영선 의원이 지난 5월 일본 방문 시 극우단체로부터 항공료와 숙박비 등 체재비용 일체를 지원받아 방문한 것으로 7일자 경향신문이 보도해 논란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특히 이들 의원들의 체재비용을 제공한 극우단체 ‘구조회’(납북 일본인 구출을 위한 전국협의회)의 니시오카 부회장은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이 한국의 날조라고 주장해온 ‘새로운 역사교과서 만들기 모임’(새역모)의 초창기 멤버로 알려졌다.황우여·송영선 의원뿐만 아니라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과 김철기 한나라당 경기도당부위원장도 함께 동행한 것으로 경향신문은 보도했다.경향신문은 “5월 28일 일본의 납북관련 단체들이 주최한 ‘납치자 송환을 위한 국민대집회’에 참석했으며, 일부 인사는 다음날 아베 신조 관방장관을 예방해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 아베 장관 지지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이에 대해 경향은 참석자들과 전화통화를 시도하고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황 사무총장은 “비용 부분은 보좌관이 처리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일본측에서도 일부를 부담했을 수도 있다”면서 “나는 순수한 시민단체의 초청인 줄 알고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황 사무총장은 전화를 걸어 “구조회는 처음 들어보는 단체이며 처음에는 항공료를 내가 부담했으나 귀국한 뒤 항공료를 정산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또한 송 의원은 “초청자측에서 경비를 부담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며
[진주시청] 9월의 독립운동가 현익철 선생 공적 기린다-연합뉴스(06.09.07)
[진주시청] 9월의 독립운동가 현익철 선생 공적 기린다 – 우리고장출신 독립운동가는 하치량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현익철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성장과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1912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을 위조하려다 피체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1918년 다시 중국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간도 한인동포들의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조직인 한족회에 가입하고, 임시정부가 서간도에 설치한 군정기관인 서로군정서에도 참여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이와 함께 선생은 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현정경·이호원 등과 함께 1920년 서간도 관전현에서 광한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4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1921년 동지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평북 정주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게 하였다. 그러다가 이들이 일경에 체포됨에 따라 그 배후로 밝혀져 다시 피체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이후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으로도 선임된 선생은 우파 3당인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던 중국 장사 남목청에서 3당 통합회의를 진행하던 중,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청년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