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청] 9월의 독립운동가 현익철 선생 공적 기린다
– 우리고장출신 독립운동가는 하치량 선생 선정 –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현익철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성장과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1912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을 위조하려다 피체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다시 중국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간도 한인동포들의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조직인 한족회에 가입하고, 임시정부가 서간도에 설치한 군정기관인 서로군정서에도 참여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선생은 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현정경·이호원 등과 함께 1920년 서간도 관전현에서 광한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4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1921년 동지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평북 정주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게 하였다. 그러다가 이들이 일경에 체포됨에 따라 그 배후로 밝혀져 다시 피체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으로도 선임된 선생은 우파 3당인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던 중국 장사 남목청에서 3당 통합회의를 진행하던 중,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청년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9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하치량 선생은 경남 사천(泗川) 사람이다.
1942년 일본 대판(大阪) 북야(北野) 제2중학교 유학생으로 정승한(鄭承漢) 등 5명과 함께 항일결사인 백두회(白頭會)를 조직, 활동하였다.
하치량은 경남 하동(河東)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시립 계천실업학교(大阪市立 堺川實業學校)를 거쳐 북야 제2중학교(北野第2中學校)에 재학 중,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심한 멸시와 차별을 경험하면서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1942년 5월 그는 십삼교(十三橋) 근처 제방에서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동교생 정승한·안갑시(安甲時)·박희열(朴喜烈)·김병기(金炳基) 등과 비밀결사 ‘백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북야 제2중학교 3, 4학년 한국인 학생 전원을 회원으로 하고,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협력을 도모하며 한국문화를 개발시켜 앞으로 독립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하치량은 1943년 3월 북야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지만, 그가 조직한 백두회는 계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오다가 일경에 의해 그 전모가 발각되었다. 1944년 2월 그는 고향에서 경북 청도경찰에 의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44년 7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임시취체법 등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이 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요기사
[진주시청] 9월의 독립운동가 현익철 선생 공적 기린다-연합뉴스(06.09.07)
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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