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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빈 모금] 오키나와 ‘한의비’를 함께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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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빈 모금 참여

같은 모양의 ‘한의비’

경북 영양과 오키나와 요미탄에는 같은 모양의 브론즈로 만든 ‘한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건립됐습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전개된 곳입니다. 지형이 변형될 만큼 폭격을 받았고 일본군의 무모한 작전에 수많은 주민들이 휘말렸습니다. ‘한의비’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소중한 목숨들을 빼앗고 동아시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우리는 ‘한의비’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기록하려 합니다.

밭에서 일하다 강제동원된 강인창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강인창은 1944년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밭일을 하다 강제동원됐습니다. 그는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아카섬에 배치됐으나 미군이 섬을 점령하자 일본군은 산속으로 피난하며 조선인 군부들을 끌고 다녔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인에게 식량도 나누어 주지 않았고, 벼나 고구마를 훔쳐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머니에서 겨가 발견된 조선인 군부 13명을 도둑으로 몰아 총살했습니다. 총살 직전 살아난 조선인 군부 7인은 미군에 투항해 약 1년간 포로 생활 뒤 귀국했지만 오키나와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동료들을 끝내 잊지 못했습니다.

신혼 2개월 만에 강제동원된 서정복

1944년 6월, 경북 달성 출신 서정복은 신혼 2개월 만에 오키나와 본섬 남서쪽 미야코섬으로 강제동원 되었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일본인 상관은 조선인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네 교육이 잘못되었다”며 서정복을 대나무 막대로 때리고 구타했습니다. 다행히 미야코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아 격렬한 전투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1945년 9월 미군의 포로가 되었고 이듬해 3월 미군의 배로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폭행의 후유증으로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심한 요통에 시달렸습니다.

한일시민의 연대가 만들어낸 역사

1997년 ‘일하는 청년의 전국교류회(ZENKO)’에서 강인창은 강제동원 피해를 증언하며 “오키나와에서 떠도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고국으로 모시고 싶다”고 호소했습니다. 같은 해 서정복과 오키나와를 찾아 아카섬 등지의 조선인 처형지를 확인했지만, 유골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에 일본 시민들은 ‘한의비’ 건립을 추진했고 1998년 ‘태평양전쟁, 오키나와전 피징발자 한의비 건립을 추진하는 모임’이 발족됐습니다. 이후 일본 전국에서 1998년 경북 영양군과 2006년 오키나와 오미탄촌에 위령과 기억의 의미를 담은 ‘한의비’가 세워졌습니다.

‘한의 비’ 20주년,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방패였고, 그 방패가 된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무고한 오키나와 사람들과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육신이었다.” 2026년 한의비 건립 20주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은 6월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강제동원 희생자 추도식에 참가해 머나먼 오키나와 땅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고 현지 시민들과 평화의 뜻을 나눕니다. 이 연대의 현장을 기록해 다큐멘터리와 기록집으로 제작할 예정입니다. 미래 세대와 전쟁 반대, 평화의 가치를 공유하는 교육의 장을 여는 길에 여러분의 힘을 보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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