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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와 임종국, 한 시대 다른 삶
사무국장 방학진 한승조의 ‘식민지 축복’ 발언으로 촉발된 대학 내 친일청산 운동이 고려대를 시작으로 연세대 서울대 이화여대까지 열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대학의 친일문제가 결코 이 네 대학에 국한되지 않는 만큼 다음은 어느 대학이 그 뒤를 이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 달 초 한승조 망언 소식을 듣고 관련 기사를 살펴보던 중 ‘고려대 정외과 졸업’이라는 그의 이력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동시에 떠오른 어떤 인물이 있었다. 그는 1930년 서울에서 출생한 한승조보다 1년 빠른 1929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1952년 한승조와 같은 고대 정외과를 입학해 1956년 졸업했다. 한승조는 이보다 1년 앞선 1955년 졸업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려대가 1951년 9월부터 1953년 8월까지 대구로 피난을 가는 등 혼란 와중이었으므로 그는 한승조와 교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정치외교학’이라는 자신의 전공보다는 시인 이상 연구에 몰두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졸업과 함께 [이상전집]을 펴냈고 1959년에는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던 중 1965년 온 나라를 강타한 한일회담 소식은 그에게 1945년 해방 직후 자신의 고향에서 직접 체험한 어떤 일화를 떠오르게 했다. 해방 당시 17세 소년이던 그는 일본으로 곧 쫓겨나게 될 어느 일본군을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패전의 분루를 삼키며 소년을 무섭게 노려보던 그 군인은 소년에게 다가와 ‘일본의 패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겁에 질린 소년이 대답을 얼버무리자 그 일본군은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에 대한 재평가 논란
민족문제연구소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후손 허종씨와 윤덕한(연구소 비상임연구원)씨 사이에 전개된 논란을 전문전재합니다. 더불어 윤덕한씨의 논지는 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편집자 주)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돼야” [인터뷰] 보성전문 설립자 이용익 선생 외고손자 허종씨 최재원(sisadori) 기자 ▲ 이용익 선생 외고손자 허종씨 ⓒ2005 최재원 “지금의 고려대 역사는 지나치게 김성수 선생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다. 고대가 진정으로 교육구국이념과 항일독립운동정신을 모태로 하는 민족대학이라면, 설립자 이용익 선생에 대한 비중있는 평가를 새롭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 이용익 선생의 증손녀 이분옥(83)씨의 아들인 허종(50)씨는 18일 인터뷰에서 단호한 어조로 이와 같은 의견을 표명하였다.“고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예우 미흡”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한말의 조정 대신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석현(石峴) 이용익 선생(1854-1907)이 1905년 설립했다. 이후 이용익 선생이 독립운동으로 망명길에 올라 직접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천도교 손병희 선생 등을 거치다, 계속되는 재정위기로 1932년 당시 민족자본가 중 한 사람이던 김성수 선생이 인수하여 1946년 지금의 고려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허씨는 “지금 고려대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보성전문의 인수자였던 김성수 선생 일가만 있을 뿐 정작 설립자인 이용익 선생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 고려대 이용익 선생 흉상 허씨는 그 예로 “인촌의 동상은 고려대 본관 앞에 세워져 있고 기념관과 기념도로까지 만들어진 데
일본이 97년 방위백서에 독도를 포함한 까닭
새로운 해양질서와 한일양국의 대응행태에서 비롯 독도뉴스 김점구 기자 ..97년판 방위백서가 발표된지 2달 후인 9월 17일에 일본 자민당, 사민당, 사키가케 여3당은 정책의장 협의회를 열고 1965년에 체결되어 동해의 어업질서로 자리잡힌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한국은 국제적인 금융위기로 IMF 구제금융 신청을 해야 하는 경제위기 상태였고, 11월에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한국의 금융위기와 대선을 앞둔 혼란스런 정세는 새로운 해양법 질서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일본에게 좋은 기회였고 일본은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당시 일본은 배타적경제수역(EEZ) 기점으로 독도를, 우리 정부는 울릉도를 EEZ기점으로 삼았다. 우리 정부의 울릉도 기점 주장은 독도 기점으로 전환된 2006년..<기사 발췌> 일본이 97년판 방위백서에 독도를 포함한 까닭(독도뉴스, 10.09.10)
교장샘, 구입하지 말라고요?
일부 학교, ‘사회적 합의 안 돼’ ‘학생들 혼란’ 등 이유로 구매 거부 김행수 기자 서울 강서구 ㄷ고 ㅈ교사는 한일병탄 100년을 맞아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니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4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구입을 신청하였다. 지금까지 ㅈ교사는 교사가 신청한 도서에 대해서 학교에서 특별히 거부를 하는 사례가 거의 없어서 당연히 도서관에 구입해 두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얼마 뒤 도서관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찾아봐도 친일인명사전을 찾을 수가 없어 확인해 보니 교장선생님이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을 문제 삼아 도서관에 배치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 교장 선생님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따져 물으니 “(친일파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고, 역사적 판단이 서로 달라 아직 분란의 소지가..<기사 발췌> 교장샘, <친일인명사전> 구입하지 말라고요?(오마이뉴스, 10.09.09) 관련기사 공공도서관, 시민호응에도 불구 친일인명사전 외면(민족문제연구소, 10.03.24)베스트셀러 ‘친일인명사전’(내일신문, 10.02.19)
[보도자료]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내려받기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 이후 민족의 자성을 촉구하기 위해 1966년 「친일문학론」을 시작으로 친일문제연구에 일생을 바치신 고 임종국 선생(1929~1989)의 기념사업회가 늦었지만 와 같이 출범합니다. 기념사업회는 주요 사업으로 학예, 언론, 사회 부문에서 역사 정의 실현에 공헌이 지대한 개인과 단체에 대해 수여하는「임종국 문화상」 제정, 「문화훈장」추서 청원 운동, 추모 조형물 건립(천안 사거리 공원 내), 「임종국 평전」발간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때 : 2005년 3월 29일(화) 오후 7시 30분 곳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층 교육장(정동배재빌딩 B동) 오시는 길 : 지하철 시청역 10번 출구 1929 경남 창녕 출생 1952-1956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수학 1959 《문학예술》誌에 시 를 발표, 문단에 등단, 60년대 ‘詞華集’ 동인으로 詩作 활동 1965 한일회담을 계기로 일제침략사와 친일파에 대한 연구 시작 1966 《친일문학론》 《이상전집》 출간 1970 《발가벗고 온 총독》 출간 1974 《한국문학의 사회사》 출간 1978 《醉漢들의 배》 출간 1980 《韓國社會風俗野史》 출간 1981 《정신대 실록》 출간 1982 《일제침략과 親日派》 출간 1984 《밤의 일제침략사》 출간 1985 《일제하의 사상탄압》 출간 1986 《한국문학의 민중사》 출간 1987 《친일논설 選集》 출간 1988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1》 출간 1989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2》 출간 1989 ‘친일파총서’ (전10권) 발간을 계획하고 저술 중 폐기종으로 타계 1992 故 임종국 선생 제6회 심산상 수상」
일제강점기인명록(진주지역) 출판기념회
2005년 4월 1일 진주에서 열린 김경현 著 "일제 강점기 인명록I" 출판기념회와 임헌영 소장 강연회 화보 [곧은소리]<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얽힌 이야기 고정필진 webmaster@idomin.com 필자는 인복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올해 3·1절에 <일제강점기 인명록I-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라는 저서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했는데, 필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인들이 나서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모두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 더구나 지난 1일 진주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먼 길을 찾아와 직접 필자의 작업을 격려해주었으며, 평소 필자가 존경하는 김장하 선생 등 많은 분께서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현재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펴낸 이유도 <친일인명사전>이란 민족적 과업을 완수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되고자 하는데 있었다.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이 책에 수록된 명단이 3387명이나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진주에서 활동했던 관공리와 유력자를 총망라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데 유용할 사초로 쓰이길 바란다. 그런데 한 가지 강조할 점은 이 인명록에 실린 모든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할 수 없지만 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이란 측면에서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한편 이 책을 집필하면서 종종 필자는 프랑스의 민족반역자 처단작업과 비교해보고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는 2차세계대전 때 독일에 점령돼 4년 정도 나치의
홍난파 동상 어찌하오리까
홍난파 동상 어찌하오리까(한국일보, 10.09.08)
일본 속의 백제 땅 오사카 츠루하시
김영조·이윤옥 ▲ 백제문 글씨 밑에는 코리아타운이라 쓰여 있고, 오이소·보이소·사이소란 일본어 펼침막 아래로 오사카 츠루하시 시장을 답사단이 걸어가고 있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높다란 “百濟門(백제문)” 아래는 코리아타운이란 영문자가 선명하고 양옆에는 한글 간판이 이 제법 눈에 띈다. 어딘지 우리네 고향 시장을 닮은 이 거리를 걷다 보면 금세 한국 땅에 서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대문 시장의 먹자골목과도 흡사한 이 시장거리에는 먹음직한 부침개를 비롯한 순대와 족발은 물론이고 김치와 깍두기도 살 수 있고 된장, 고추장도 살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색동저고리는 물론이요, 지금 서울에서 유행하는 가수의 노래 테이프도 실시간으로 살 수 있다. 말 그대로 코리아타운, 한국동네다. 오사카 츠루하시는 우리말로 ‘학다리’ 곧 ‘학교(鶴橋)’이다. 답사단이 오사카 츠루하시 시장에 도착한 것은 8월 10일 화요일로 답사 넷째 날이었다. 오사카에는 땅이름에 다리를 뜻하는 “하시” 또는 “바시”가 들어가는 곳이 많다. 다리 “교(橋)”자가 들어가는 지명으로는 닛폰바시(日本橋), 요도야바시(淀屋橋), 신사이바시(心齊橋), 나가호리바시(長堀橋), 교바시(京橋), 텐마바시(天滿橋), 미도리바시(綠橋)등이 있으며 우리가 찾아간 한인타운 역시 학다리 곧 “츠루하시(鶴橋)”이다. ▲오사카전철노선 붉은 표시부분이 츠루하시역(왼쪽), 츠루하시 전철역 안내판 일본 내에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 이들이 이곳에 살게 된 것을 대략 3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제주지방행정사, 제주발전연구원, 2009≫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행을 크게 3시기로 보고 있는데 1시기 1910년~1924년, 2시기 1925년~1937년, 3시기는 태평양전쟁을 대비해 전시체제가 시작된 1938년~1945년 해방까지가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주도민의
부민관 폭파 의거 주역 조문기 선생 회고록 출판기념회
보도자료 내려받기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노독립운동가의 회고록이 나왔다. 해방을 불과 몇 일 앞둔 1945년 7월 24일 극악한 친일단체인 대의당이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개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단상에 시한폭탄을 설치 폭파시켜 일제와 대의당의 대대적인 민족지사 제거 기도를 사전에 좌절시켰던 조문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진솔하게 정리하였다. 회고록에는 선생의 어린시절부터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친일청산운동에 몸담게 되기까지의 80여 성상의 세월이 녹아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하였다.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웠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철저한 보도관제가 있었음에도 거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고 주모자들을 색출하려 혈안이 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회고록에는 친일파 괴수 송병준 일가와의 악연, 해방 직후 조선은행 금괴 반출을 저지한 일, 단정반대 인민청년군 사건, 이승만 암살 정부 전복 음모 조작사건, 성시백 사건, 민족민주청년동맹사건 등 선생이 관련된 한국현대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이면이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또 친일 청산에 대한 선생의 확고한 신념과 독립운동계에 대한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10대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후 투옥 고문 유랑으로 이어지는 평범치 않은 선생의 고단한 청년시절이나, 독립운동가를 만나 평생을 인고의 세월로 지낸 아내에 대한 애틋한 감정 표현은 읽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일생을
예산군수 박정희 일본군 입대 이해 가능 발언 논란
이재형(angkswjdqh) 기자 ▲ 박종순 예산군수가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대 입대를 두둔하고 나서 논란이 예상된다 ⓒ2005 이재형 “충의사의 훼손된 현판을 박정희 친필 원본으로 원상복원하는 예산군의 원칙을 바꿀 수 없다.” “박정희가 젊은 시절 군인으로서 성공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일본군대에 입대한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박종순 예산군수가 23일 예산군을 항의 방문한 민주노동당 충남도당 등과의 면담에서 박정희체로 현판을 복원하겠다는 의사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 입대마저 두둔하고 나서 논란이 예상된다. 양수철씨가 현판을 철거한 전후로 입원 중이던 박 군수가 충의사 현판과 관련해 공식 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오전 10시 40분 경 이용길(민노당 충남도당 위원장), 임성대(민노당 충남도당 부위원장), 이정학(민족문제연구소 충남도 지부장), 임춘근(전교조충남지부장)씨 등 10여명이 예산군을 방문해 박종순 군수와 면담했다.이용길 위원장은 “양씨가 충의사 현판을 철거한 방법엔 논란이 있으나 예산군에 수차례 교체를 요구했고 받아들이지 않자 민족적 양심으로 철거한 것”이라며 “예산군이 기왕에 철거한 현판을 떼기 무섭게 원상복구 결정을 내린 것은 유감스런 일로 올바르지 못한 결정이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이어 “예산군에서 각계의 여론 수렴과 공청회 및 토론회를 거쳐 신중히 결정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박 군수는 “충의사 현판은 박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쓴 것으로 하나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며 “국가적으로 과거사 규명을 하고 있고 박 대통령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