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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설립자 이용익에 대한 재평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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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후손 허종씨와 윤덕한(연구소 비상임연구원)씨 사이에 전개된
논란을 전문전재합니다. 더불어 윤덕한씨의 논지는 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편집자 주)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돼야”


[인터뷰] 보성전문 설립자 이용익 선생 외고손자 허종씨



 


  최재원(sisadori) 기자























▲ 이용익 선생 외고손자 허종씨



ⓒ2005 최재원


“지금의 고려대 역사는 지나치게 김성수 선생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다. 고대가 진정으로 교육구국이념과 항일독립운동정신을 모태로 하는 민족대학이라면, 설립자 이용익 선생에 대한 비중있는 평가를 새롭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 이용익 선생의 증손녀 이분옥(83)씨의 아들인 허종(50)씨는 18일 인터뷰에서 단호한 어조로 이와 같은 의견을 표명하였다.

“고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예우 미흡”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한말의 조정 대신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석현(石峴) 이용익 선생(1854-1907)이 1905년 설립했다. 이후 이용익 선생이 독립운동으로 망명길에 올라 직접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천도교 손병희 선생 등을 거치다, 계속되는 재정위기로 1932년 당시 민족자본가 중 한 사람이던 김성수 선생이 인수하여 1946년 지금의 고려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허씨는 “지금 고려대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보성전문의 인수자였던 김성수 선생 일가만 있을 뿐 정작 설립자인 이용익 선생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 고려대 이용익 선생 흉상




허씨는 그 예로 “인촌의 동상은 고려대 본관 앞에 세워져 있고 기념관과 기념도로까지 만들어진 데 반해, 설립자인 이용익 선생의 동상은 대학원 건물 앞에 조그맣게 흉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건물 내부에 가려져 있던 것을 홍일식 전 고대 총장 재직시절 밖으로 꺼내온 것이다”고 얘기했다.

또, “이용익 선생이 세운 또 다른 학교인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이용익 선생을 설립자로서 지금까지 제대로 예우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고 섭섭한 감정을 털어놨다.

“이용익 선생께 건국훈장 내려야”


















▲ 이종호 선생의 건국훈장 독립장




“어떻게 지금까지 이 같은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지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외고조부의 항일투쟁으로 일제 때 가문 전체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대다수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렇듯이 이제껏 생계문제 때문에 외고조부의 역사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며 힘들었던 가족사를 밝혔다.

허씨는 지난해 11월 외조부인 독립운동가 이종호(이용익 선생의 손자, 1885-1932) 선생의 건국훈장 독립장을 42년만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전달받았다. 그는 “군사정부 시절 문화훈장을 추서받은 외고조부인 이용익 선생도 항일운동이 제대로 평가되어 문화훈장이 아닌 건국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용익 선생은 일제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프랑스·러시아 등과 제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구국운동을 펼치셨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사하신 후, 친일파들의 갖은 모함을 받고 ‘친러파’로 낙인찍히셨다. 이후 군사정권 하에서도 반공주의의 그늘 아래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말을 이었다.


















▲ 이종호 선생의 건국공로훈장증



ⓒ2005 최재원



“고대 100년 역사가 진정으로 기념해야 할 것”

“고려대학교에 바라는 점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허씨는 “김성수 선생을 고대 역사의 중심으로 내세운다면 고대는 1932년을 기점으로 해서 73년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친일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김성수 선생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지 않는 한, 민족대학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용익 설립 인정…후손에 감사패 증정 등 검토”




고려대 개교100주년기념사업추진팀 전화 인터뷰






– 이용익 선생 후손이 고대가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지금까지 지나치게 김성수 선생에만 집중하고 이용익 선생에 대해서는 비중을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학교측의 입장은 어떤가.
“학교측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다. 학교에 종사하는 그 누구도 이용익 선생이 고대의 설립자라는 데 대해서 이의를 갖지 않고 있다. 3권으로 편찬될 <고대100년사> 책자에서도 이용익선생과 이종호 선생 등에 대해서 상당부분을 할애해서 자세히 기술할 예정이며, 그 후손들을 100주년 기념식에 특별초청해 감사패를 증정할 것도 내부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 고대의 이용익 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이미 고대 70년사 책자나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나타나 있다.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제껏 인촌로나 인촌동상, 인촌기념관 등 실질적인 부분에서는 인촌 선생 위주로만 고대역사를 강조해 온 데 있다.
“그 점은 아시다시피 현재 고려대 이사장이 김성수 선생의 후손이다. 재단측의 입장이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 최재원 기자




또, “민족고대 100년의 역사는 이용익 선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고대가 진정으로 기념해야 할 것은, 이용익 선생의 교육구국이념과 항일독립운동정신이라고 본다. 그래야 자랑스런 민족 고대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고 말을 이어나갔다.

허씨는 “내가 바라는 것은 이용익 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위상을 제대로 정립해 달라는 것”이라며 “고대의 현 교직원과 학생들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이 없다, 문제는 이용익 선생을 고려대학교 역사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기피하는 재단측에 있다”고 강조했다.

허씨의 문제제기와 관련해 고려대 100주념 기업사업팀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3권으로 편찬될 <고대100년사> 책자에서 이용익 선생과 이종호 선생 등에 대해서 상당부분을 할애해서 자세히 기술할 예정이며, 그 후손들을 100주년 기념식에 특별초청해 감사패를 증정할 것도 내부적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독도·한승조 파문, 친일문제 해결 못한 것이 원인”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허씨는 “이용익 선생과 친일문제 관련 학술서적 저술을 통해서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허씨는 이어서 “친일파가 만악의 근원이다. 친일반역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면서 ‘정의가 지고 불의가 이긴다’ ‘기회주의자가 승리하고 원칙주의자는 패배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국민들에게 깃들게 됐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최근 일본의 독도파문이나 한승조 고대 명예교수의 친일발언 등에 대해서도, “이러한 일들은 결국에는 우리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일본은 친일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를 우습게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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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은 과연 항일 독립투사인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용익 선생




‘친일과 반공’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 못 받아

























▲ 군부대신 시절 이용익 선생 사진





이용익 선생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후손으로 185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출생했다. 고종 황제의 충신으로 탁지부 전환국장, 원수부 전환국장, 중앙은행 부총재, 군부대신 등 조선왕조의 주요 요직을 섭렵했다.

1902년에는 탁지부 대신이 되어 항일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준·민영환·이상재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였다.

1904년 굴욕적인 한일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다가 일본에 납치된 이용익 선생은, 선생의 납치를 위해 일제천황까지 직접 서명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일제에게는 ‘요주의 인물’에 올라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납치에서 풀려난 이용익 선생은 귀국 후, 독립정신과 구국이념 민족교육을 위해 1905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보통학교(현 보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고종황제의 ‘일제 세력의 축출을 위하여 프랑스·러시아 세력과의 제휴를 꾀하라’는 밀령을 받고 프랑스로 가던 중,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에서 구국운동을 벌였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을 얻어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용익 선생 사후, 선생의 정적이자 선생을 모함했던 친일파 상당수가 일본의 조선 강제 합병에 공헌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재물을 받았다.

반면 이용익 선생 가문은 일제에 의해 재산과 직위를 몰수당했다. 그럼에도 이용익 선생의 손자인 이종호 선생은 조부를 이어 보성전문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친일파들로부터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용익 선생은 ‘친일과 반공’으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용익 선생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될 경우 그를 탄압했던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만행이 부각되는 것을 우려, 선생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지난 2002년 고려대학교 조익순 명예교수가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를 출간하면서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선생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 / 최재원 기자




 


<윤덕한씨 반론>




































이용익은 과연 항일 독립투사인가


[주장]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의 재평가 주장에 부쳐



 


  윤덕한(news) 기자




21일자에 실린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 돼야'(최재원 기자) 기사에 대해 도서출판 ‘중심’의 윤덕한 대표가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윤 대표는 이 글에서 이용익 선생에 대한 재평가는 다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윤 대표의 글을 소개하면서 이 글에 대한 새로운 반론도 적극 환영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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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지사 이용익 선생을 욕되게 하지말라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돼야”




















▲ 군부대신 시절의 이용익




21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 돼야’ 내용 가운데 역사 인식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오류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이용익의 후손이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중인 고려대가 정작 학교 설립자인 자신의 외고조부를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충분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해가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용익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이 기사는 이용익을 항일 독립운동가로 치켜세우고 한걸음 더 나아가 “친일파로부터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용익 선생은 친일과 반공으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이용익 선생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될 경우 그를 탄압했던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만행이 부각되는 것을 우려, 선생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1903년은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전이 절정에 달해 양국 사이에 전운이 짙게 감돌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러시아의 앞잡이로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과 이권 획득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 바로 친러파 이용익이었다. 당시 이용익은 황실의 재신을 관리하는 내장원경으로 고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조정의 최고 실세였다.

1903년 4월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와 결탁해 압록강 상류의 삼림 벌채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인물도 다름 아닌 이용익이었다. 이것은 조선 말기 전설적인 이권이었던 운산금광 채굴권에 못지않은 이권이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벌채한 목재의 저장소로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 일대 토지도 일부 러시아에 매각하기로 약속했다.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벌채업과 그 종업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군대를 동원해 용암포를 불법 점령하고 용암포에 포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심지어 그 명칭마저 니콜라스로 고쳐 부르기까지 했다.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과 군 요새화는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 구실 가운데 하나였다.

1895년 3월 이른바 ‘3국간섭’을 주도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저지시킨 이후 러시아가 청국과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며 장기적으로 조선을 병합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바보가 아니면 누구나 눈치 채고 있었다. 이용익은 그때 이래 철저한 친러배일파로서 바로 러시아의 이와 같은 대조선 정책의 현지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함경북도 명천의 무식하고 미천한 보부상 출신 이용익이 이처럼 격에 맞지 않은 출세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전히 그의 빠른 발걸음 덕분이었다.

임오군란 때 대궐을 빠져나와 충주의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됨)는 자신의 친정 조카이자 척족정권의 수령격이던 민영익과 은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청국 군대를 불러들여 대원군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과 장호원 사이의 왕복 4백리 길을 이용익이 빠른 발걸음으로 하루 만에 오가며 그 편지 심부름을 도맡아 한 것이다.

그는 민비가 환궁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해 민비가 죽은 후에도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대신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7년 동안 서울주재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은 1884년 그가 처음 이용익을 만났을 때 이용익은 주인인 민영익의 집 마루를 청소하는 비천한 인물이었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고 있다.

천민 출신 이용익에게 민비는 출세의 은인이자 구세주였다. 그의 친러배일적인 성향은 그를 출세시켜준 민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날 <오마이뉴스> 기사는 이용익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후손이라고 했으나, 이용익 생전에는 전혀 듣지 못한 얘기로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

물론 이용익이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일종의 공수동맹인 한일의정서 조인에 적극 반대하다 일본에 끌려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강제로 두루 돌아보고, 귀국해서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것이나, 을사조약 직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리에 출국해 프랑스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다 끝내 타국에서 숨을 거둔 것은 모두 애국적인 행동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세에 대해 자주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느 친일파 못지 않게 러시아에 굴종하며 러시아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더욱이 그는 무식해서 세계정세에 무지했고, 극단적으로 수구적이었으며, 부패분자로 지탄받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가 친러배일에 앞장선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도 아니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은인인 민비와 왕실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제에 반대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애국지사 대접을 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만고의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완용의 역할은 누가 했을까?









* 윤덕한 기자는 80년 경향신문 해직기자 출신으로 88년 경향신문에 복직, 정치2부장, 북한부장, 기획취재부장 등을 지냈다. 95년 경향신문을 퇴사,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도서출판 ‘중심’을 설립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이완용 평전>, <소설 재벌신문>, 논문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에 대한 국내 언론 보도태도와 그것이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 등이 있다.













2005/03/22 오후 6:40


ⓒ 2005 OhmyNews


 


<허종씨 재반론>




























항일지사 이용익 선생을 욕되게 하지말라


[반론] 윤덕한씨의 ‘이용익은 과연 항일 독립투사인가’에 대해



 


  허종(bell1990) 기자




21일자에 실린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 돼야'(최재원 기자) 기사에 대해 도서출판 ‘중심’의 윤덕한 대표의 반론(‘이용익은 과연 항일 독립투사인가’)기사가 22일자에 실렸습니다. 이에 대해 이용익 선생의 외고손자인 허종씨가 다시 반론을 보내와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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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돼야”


[반론] 이용익은 과연 항일 독립투사인가



먼저 윤덕한씨는 이용익 선생은 무식하고 미천하고 보부상 출신이고 세계정세에 무지하고 극단적으로 수구적이고 부패분자로 지탄받았다는 친일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일부 인간들이 쓰고 있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과 전제하에 엉터리 글을 쓰고 있다. 과연 그럴까?

첫째, 이용익 선생이 무식하다는 점에 대하여:

옛말에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물며 면장도 이렇거늘 선생이 무식하였다면 어떻게 일국의 탁지부 대신, 군부대신, 내장원경, 중앙은행 부총재, 헌병사령관, 육군부장, 경상북도, 강원도 관찰사 등의 그 수많은 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그 당시나 지금이나 국가의 중요 업무는 거의 다 문서로 (물론 한문 위주) 처리, 결재하였습니다. 고종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등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 군부대신 시절의 이용익 선생




한문으로 된 그 수많은 공용 결재 서류들을 해독, 이해를 못하면서 일국의 대신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윤씨가 말하는 유,무식의 기준이 무엇이며 무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추상명사가 아닌가? 당신이 이용익 선생의 지식 테스트를 해보았습니까? 이용익 선생께서 지으신 한시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둘째, 미천한 출신이라는 점에 대하여:

이용익 선생의 부친인 이병효 선생은 함경북도 고산현감을 지내셨고 또 조카인 이윤재 선생은 문과급제하여 함경북도 관찰사 (요즘 도지사급)를 역임하였습니다. 윤씨가 말하는 미천함과 고귀함의 기준을 모르겠으나 유교적인 봉건왕조인 양반계급사회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집안이면 최소한 미천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그리고 이용익 선생이 조선태조 이성계의 형 이원계 (완풍대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 출처가 궁금하다니까 알려주겠습니다.

전주이씨 대종회에 가면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세보라는 8권으로 된 족보책이 있으며, 그 족보책 제4권에 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준 열사도 완풍대군의 후손입니다.

윤씨는 이용익 선생의 외손인 제가 주장하는 바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 자신이 먼저 사실 여부를 확인해볼 노력도 없이 일단 아닌 방향으로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셋째, 보부상(부보상이라는 명칭이 맞다는 견해도 있음) 출신이라는 점에 대하여:

윤씨는 그 당시의 어떤 문헌과 기록에 기초하여 이용익 선생이 보부상 출신이라고 주장합니까? 물론 선생은 보부상이 아니고, 정치가입니다. 그리고 윤씨의 글의 뉘앙스는 보부상은 무식하고 미천하다는 냄새를 풍기는데, 윤씨는 혹시 이렇게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독립협회는 선이고, 보부상이 중심인 황국협회는 악이다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쓰여 있는 역사책을 내던지고 이렇게 달리 생각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그의 행적에 의하여 생전, 사후에 평가되어진다고 저는 봅니다.

독립협회는 친일 매국노 이완용, 친일 변절자 윤치호가 주요 간부로 활동한 단체이며, 독립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도 일제로부터의 독립보다는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고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반면, 황국협회의 길영수 선생은 1904년의 굴욕적인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에 반대하다가 일제로부터 수배당하여 해외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그 당시 일본외교문서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보부상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부양을 위하여 생업에 열중하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우리 땅의 백성이고 민초입니다.

넷째, 세계정세에 무지하다는 점에 대하여:

이용익 선생은 세계열강들이 약소국인 대한제국을 침탈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국제 정세를 이미 간파하고(특히 일제의 대한제국 합병흉계) 국력이 미약한 대한제국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중립국화라고 판단하여 러시아, 일본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중립국 선언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고종황제에게 중립국 선언을 취소하도록 강요하여 약소국의 비애로 그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으나 그 구상과 실천은 그 당시의 현실 상황에서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역시 일본외교문서 제37권 1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중립을 선언한 선생이 어찌 국제 정세에 무지하고 친러파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설령 백번을 양보하여 친러파라고 한다면 러시아를 위한 파벌과 조직이 있어야 하는데(일본을 위한 친일파들은 일진회라는 친일매국노들의 조직이 있었음) 그 조직 이름과 구성원을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섯째, 극단적으로 수구적이라는 데 대하여:

윤씨도 인정하였듯이 암울했던 시대에 일본을 궁극적으로 극복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는 교육구국과 뚜렷한 민족, 국가관을 가진 인재양성에 있다고 예견하여 근대적인 민족교육 전문대학인 고려대학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벌써 100년 전에 설립하신 선생이(그 당시는 아직도 조선시대 유교전통적인 서당, 서원 등이 주요 교육기관 이었음) 극단적으로 수구적이라면 과연 어떤 것이 진보적입니까?

일제시대의 보성전문학교와 지금의 고려대학에서 수많은 항일애국지사와 여러 학문 분야에서 국가의 초석이 될 수많은 인재들을 지금 현재도 배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그 당시 100여년 전 열악한 교통여건 하에서도 국제적인 감각을 가지고 불란서, 러시아, 중국 등을 경유하며 항일구국운동을 펼치신 선생이 진보적일까요, 수구적일까요?

지금도 제가 알기로는 현대 최첨단 과학문명시대인 21세기에도 불란서, 러시아 등의 해외를 나간다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용익 선생이 불란서, 러시아, 중국 등을 경유할 때마다 일제는 그 영향력과 파급효과를 두려워하여 주재국 공관에 훈령을 보내 이용익 선생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 개인자격 방문임을 그 주재국에 알리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외교 문서와 그 당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와 일본본국외무성 사이에 오고 간 전보, 문서 등의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등에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일제는 해외에서의 선생의 항일구국운동을 두려워하여 그 행적을 계속 감시,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혹시 수구와 진보의 개념을 거꾸로 혼동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도 우기신다면 이용익 선생의 어떤 점이 극단적 수구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섯째, 부패분자로 지탄 받은 인물이라는 데에 대하여:

상대방을 비난할 때는 그 비난하는 주체와 비난받는 객체의 정체성과 상호관계와 동기가 중요합니다. 또한 그와 더불어 실체적 진실인지 거짓주장인지도 물론 중요하고요.

우선 이용익 선생을 모함하고 규탄상소를 올렸던 자들의 면면을 들자면 윤택영, 윤덕영, 민영소, 김성근, 성기운, 조동윤, 이용태, 윤웅렬, 정낙용, 이재극 등이 있습니다. 이 자들은 모두 일제가 조선을 강제 합병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후작, 자작, 남작 등의 작위와 재물을 받고(한국인물 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일제시대는 물론 광복 후에도 대를 이어 호위호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또한 일제의 주구 일진회놈들은 이용익 선생 집앞에 상주하다시피하며 거의 매일 난동을 부렸으니 이러한 자들이 누구를 비난하고 규탄합니까? 이런 것이 바로 적반하장입니다.

선생은 일반백성에게는 결코 지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윤효정의 풍운한말비사에 보면 “법부가 이용익에 대해 서류와 장부 등을 압수하여 조사한 결과 그에게 부정이 없었을 뿐더러 자손을 위한 축재조차 없어서 정적조차도 공공무여함을 인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윤씨의 주장대로 이용익 선생이 부패하고 축재를 많이 하였다면 어찌하여 선생이 설립하고 그 손자인 항일 독립운동가 이종호 선생이 교장을 역임한, 고려대학의 전신 보성전문학교가 재정난에 빠져 그 운영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애국자를 매도하는 위험한 짓을 제발 그만하십시오

그리고 윤씨는 이용익의 배일적 성향도 격하시키기 위하여 명성황후(윤씨는 친일잔재청산 한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이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일제식민사관에 젖은 자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민비라는 용어를 계속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문정왕후, 인현왕후라고 부르듯이 똑같이 명성황후가 맞는 호칭입니다. 왜 유독 일제의 침략정책에 방해가 되었던 명성황후만 민비라고 격하해서 부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을 그 한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신은 우리나라이며 약소국인 대한제국의 황후가 시해과정도 참혹하게 일제에 의하여 처참하게 살해당한 데 대하여 이용익 선생, 우리 온 민족같이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안 생깁니까? 같은 민족으로서 분노가 끓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무서운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일제에 반대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애국지사대접을 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그런 당신의 논리라면 안중근, 윤봉길 의사,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등 그 외에도 수 많은 순국선열과 애국독립지사들은 일제에 반대한 한 가지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어야 애국지사 대접을 이성적으로 제대로 받겠군요.

일제식민지배 시대에 수많은 우리 민족과 독립애국선열지사들이 질곡과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일제에 반대한 항일 독립정신 이외에 또 다른 어떤 가치와 이유가 그 당시에 중요한지 묻고 싶군요. 물론 일제에 아부한 친일매국노들은 일제식민지배시대가 오히려 그들의 부와 직위를 상승시키는 절호의 기회였겠지만요.

그리고 이용익 선생은 그 당시 사회기득권층인 탁지부대신(지금의 재경부장관급)의 직위에 있으면서 과감히 기존 개인의 직위와 안위를 포기하며 1904년의 굴욕적 한일의정서 강압체결에 항거, 반대하다가 일본에 1년여 강제 납치 당하셨습니다.

당신은 일국의 대신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국제법도 무시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강제체포,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같은 한민족으로서 분개심과 굴욕감이 안 생깁니까?

당신은 이용익 선생의 업적과 항일정신, 교육구국이념정신을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비중이 적게 기술하고 있으며 모든 면에서 근거도 없이 이용익 선생에 대한 부정적수사와 동기를 앞세우면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집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이용익선생의 아들 이현재 선생과 손자 이종만 선생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애국지사 이동휘, 이동녕, 이갑, 안정근, 안공근 등 여러 선생과 함께 일제의 감시 대상에 올라 추방해 달라는 문서도 있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34 러시아편I, 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또 명망 있는 항일독립운동가이며 교육사업가인 이용익 선생의 손자 이종호 선생은 1962년도에 항일독립운동 공적이 국가로부터 인정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바 있습니다.

이종호 선생의 공적은 웬만한 독립운동사료에는 거의 빠짐없이 나와 있습니다. 정 모르면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학자에게 문의해 보십시오. 모든 역사는 문헌과 사료에 의하여 기록되어집니다.

윤씨에게 충고합니다. 근거문헌도 제시 못하면서 추상적, 주관적인 부정적 용어를 써가면서 국가를 위하여 노심초사 애쓰다 타국에서 서거하신 애국자를 매도하는 위험한 짓을 제발 그만하십시오.

가정을 전제로 이완용과 비교하다니

당신의 마지막 구절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운운하는 것을 읽고 러시아에 안 먹히고 일제에 먹혀서 일제식민지배가 축복이라는 한승조의 망발하고 어쩌면 그렇게 논리와 생각이 똑같습니까?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점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가정을 전제로하여 부국강병과 사회개혁을 위하여 진력하신 이용익 선생을 친일매국노 이완용과 은연 중에 비교하여 헐뜯고 있다는 점입니다. 명예훼손죄는 살아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고인에게도 적용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음은 허종씨가 연구소로 직접 방문하셔서 추가하신 내용입니다.>

윤덕한씨는 어찌하여 일제의 우리 민족과 이용익 선생에 대한 만행은 별로 안중에도 없고, 선생의 반일 성향도 중요하지 않으며 그 동기를 근거도 없이 의도적으로 격하시키고 오로지 당신에게는 선생의 친러적 성향(그것도 친일파들이 왜곡한)만이 그렇게 눈에 거슬리고 중요합니까? 무슨 이유로 선생의 모든 면에 친러파라는 날조된 딱지를 붙여 음해합니까? 이용익선생이 해외에서의 억울한 죽음 이후, 대한제국에서는 이를 애석하게 여기어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추존한 사실과 광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 합병하려고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용익 선생은 일본제국주의라는 외세와 외롭게 싸우고, 정치경제사회교육 등의 개혁을 추구하여 대한제국을 부국강병시키려 시도하고 있을 때, 반면에 일제로부터 온갖 작위와 뇌물을 받은 친일파 대신들, 일제주구 일진회 놈들은 국가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오로지 개인 영달을 위하여 선생의 뒤에서 온갖 모함으로 헐뜯고 배척한 후(이용익 선생의 집안은 을사늑약과 한일합병 전후에 일제탄압을 피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위하여 해외 망명하였음)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일제시대는 물론 광복 후까지도 (윤덕한씨가 열거한) 그런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여 선생에 대한 신분과 업적을 고의로 비하 왜곡하여 그들의 비리와 친일매국행위를 호도하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 근현대사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저도 가정(假定)은 무의미하지만 한 가지 해보겠습니다. 윤덕한씨 같은 사람들이 우리 항일독립애국지사와 선열들의 피눈물 나는 독립운동사와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고 공부를 좀 더 하였더라면 일제시대는 물론 광복이후 오늘날까지도 우리사회에서 친일반역자들이 사회의 주류 상층부를 형성하여 그 부와 지위를 대를 이어 세습하고 항일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사회 하류 소외계층으로 전락하여 배움에서 멀어지고, 가난을 되물림하며 생활고에 신음하는 이런 후진적이고 가치가 전도된 이런 비극적 현실이 그나마 조금은 덜했을텐데…













2005/03/25 오후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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